논문의 힘 - 공부의 시작과 끝, 논문 쓰기의 모든 것
김기란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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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와 나의 동생은 같은 배에서 나와 한 배에서 자랐지만,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외향적이지만 동생은 집돌이이며, 나는 골수 문돌이 정치학도이지만 그는 수학적 역량이 출중한 공학도이다. 그런데 선동에 능한 나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지, 그 전자공학도가 갑작스레 복수전공으로 정치외교학과를 신청했다고 했다. 나와 밥상머리에서 주고 받은 토론이나 문제의식이 꽤나 신기하고 재밌었다고 했다. 동생은 나보다 강성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물었다. 선톡을 하는 경우가 잘 없는 데, 뜬금없이 선거제도가 왜이리 복잡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학 석사과정을 밟으면서도 그 질문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적지않아 당황을 했더랬다. "음 글쎄..세상이 발전해서 제도도 같이 자랐나?" 터무니없는 대답을 했다. 동생은 나를 정외과 알파고라고 불렀었는데, 알파고 resign....


좀 기다리니 자기가 알아서 답을 내렸다. "아 그거네, 하도 독재 해쳐먹으니까 그거 못하게 할라고 반칙 막을라고 제도가 복잡해지는 거네. 꼼수를 못부리게 더 촘촘히 정교하게." 직관이자 통찰이자 현답이었다. 짜식. 군생활 잘하고 있으려나...형보다 먼저간 내 아우여... 날 놀리지 말거라..


책을 읽다 불현듯 이 일화가 떠올랐다. 논문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표절을 막기위해, 연구의 엄격한 윤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절차와 규칙이 엄격하고 복잡해진 것이다. 엄격한 형식논리를 지켜야만 한 마디를 보탤 수 있다. 선행연구들의 도움을 받아 분과학문 나름의 체계에 맞춰 그 논리 구조를 지켜야지만 믿을 수 있는 '지식생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발전과 더불어 학문의 공적의미를 비롯해 볼 때 번거롭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논문은 화려한 문장력이나 세상을 뒤흔들 천재적 발상을 담는 글이 아니다. 논문을 쓴다는 것은 하고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신뢰성 있는 방식으로 하는 과정을 뜻한다. 적어도 논문에서는 형식이 내용에 앞선다. 이것저것 재보고 뜯어보고 앞뒤를 가리면서, 엄격한 형식이 담보하는 윤리성 위에서 논리와 체계와 트렌드를 모두 갖춰야만 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인 셈이다. 


대학원에 복학했다. 엊그제 지도교수를 배정받아 다음학기면 학위논문 프로포절을 준비해야한다. 학위과정은 여전히 장인에게 기술을 배우는 도제식 시스템이기 때문에, 설계론이나 방법론은 체계적인 학습과정이 있다기 보다는 따로 찾아 물어물어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샀다. 그래도 내가 논문 쓸 쯤 나와서 다행이다. 까마득 했는 데, 그래도 그 규칙에 대해 갈피를 잡은 것 같다. 


-2018.03.2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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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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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발굴단


         본 코너에서는 제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을 기록합니다.

왜 선정했는지 뭐가 좋았는지에 관한 제 의견이나 코멘트를 따로 덧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기록에만 집중합니다. 제가 추려낸 부분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호의를 받을 마음이 없었을 뿐이다. 경험이 가르친바, 호의는 믿을 만한 게 아니었다. 유효기간은 베푸는 쪽이 그걸 거두기 전까지고, 하루짜리 호의도 부지기수였다. 고마워하며 사양하는 게 서로 낯이 서는 길이었다. p.43


승환은 궁금했다. 냉정과 공황, 어느 쪽이 연기였을까. 후자라면 영제는 치과의사가 아니라 배우가 됐어야 했다. 만에 하나 공황이 실제 상황이라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주먹으로 자기 딸을 사랑하는 성격이라고. p.191


아버지는 그에게, 강도를 만나면 지갑을 던지고 튀라고 가르쳤다. 봉변을 모면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p.193




"어려서부터 다짐한게 있어. 나는 내 아이한테 우리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고" p.242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트레스는 겁쟁이의 변명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 터지게 싸워 거꾸러뜨려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침이라도 뱉어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는 법'이었다. pp. 242-243


"한 집안의 희망이 된다는 것,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대학에 다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세요?" p.323


어머니는 아들이 엘리트가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의 선택은 그의 선택이었고, 그의 실패는 어머니의 실패였다. 어머니는 그가 야구를 그만둔 이듬해에 느닷없이 돌아가셨다. p.323


절대로 애비처럼 안 산다며? 살아보니 넌 별 수 있든? p.330






내겐 신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자유가 있네. 내가 기다리는 건 구원이 아니라 운명이 나를 놓아주는 때야. 삶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 p.471


최현수라는 저 거한의 세상은 어째 이리도 좁은 것일까. 영혼은 수수밭 우물에, 삶은 철창에, 주검은 마티즈 운전석만큼 옹색한 관에 갇혀 있었다.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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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에 벽시계가 생겼다. 누군가에겐 저것이 시작이겠지. 째깍째깍. 문득, 내가 쳤던 모든 발버둥들이 사실 어른 흉내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일었다. 나는 줄곧 어른답기를 원했으나, 막상 닥쳐오는 시간의 추궁에 몸서리 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되기가 두렵다.


너는 그동안 무얼 했니?”

근의 공식, 아니 당신을 증명하시오

 

스무 살의 독립은 기특한 것이지만, 스물 예닐곱의 앞가림은 당연한 것이야. 아르바이트는 직장이 될 수 없고, 그곳의 월급은 새로운 용돈에 불과해. 용돈벌이 알바생과 월급쟁이 직장인의 차이는 수열의 극한을 고쳐 씌운다 해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것이지. 아무렴. 

 





2.

 

한 번 더 모험을 걸어 볼 용사, 어디 없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코인이 부족합니다. 게임오버. 나가

 


단돈 100원으로 끝판왕을 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동네 고수 형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땐 코인 이어달리기

용돈을 다 털어봅시다비트코인처럼 동전 오락실도 역시 존버가 답입니다.

"존버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아~ 미운 사람~"

 

그런데 웬걸? 시간이라는 코인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호주머니에 감각이 없고, 분주한 손가락의 헛손질은 마지막을 암시하고,

어느 샌가 내 뒤에 손도장을 찍은 다른 동전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오락실의 법칙.

 




3.

 

방정식에 답이 없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 해가 무수히 많아서 정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능, 아예 해가 없습니다.



우리 열차 부정, 부정 역입니다. 다음 역은 불능, 불능역입니다

 

그것은 줄어드는 가능성과 불어나는 책임과의 관계를 시간에 관한 함수로 나타낸 것입니다. 자의식 과잉은 사실 자존감의 결핍이듯, 갈 길이 많아 갈피를 잡지 못하던 스무 살은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남은 것을 주워 먹습니다.


가자 노량진으로! 오라 신림동으로!”


 



 

4.

 

새가 되려다 파충류조차 되지 못한 시조새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어른이 되려다 어린 아이로 남아버린 푸석한 화석은 여기 있습니다.

어른 연기를 열심히 했던 어린 아이가 여기 있습니다.

 

어른이라기엔 대책이 없었고 아이라기엔 연식이 오래된 중고였지만,

또 다시 어른이라는 배역을 받았습니다. 이젠 발 연기는 싫습니다.

다시 한 번 존버의 기합을 불어넣고 싶습니다.

북극곰에게 미안해. 딱 한 번만 더 타올라주렴.

꼭 푸른 불꽃이 아니어도 좋아. 불꽃만 일어다오.

 


-2018.03.10 @PrismMaker


p.s 한 동안 포스팅이 뜸했습니다. 대학원에 복학해서 그렇습니다.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고 논문과 아르바이트와 씨름했습니다.

종종 스케쥴과 체력껏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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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의 주인공은 학사모가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우리 어머니였다). 


 

1992년 5월의 스물하고 두 번째 날아니 옹알이를 하다 말귀라는 게 생겨먹은 이후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의 입에서 일가기 싫다는 말이 나오는 걸 들었다못난 불초자는 뒤늦게 두 가지를 깨달았는데하나는 여인의 살아온 반세기 동안 단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던 말이라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그 시대의 여자 벌이'로 모질게 가정을 꾸려오면서 매일 매일 똑같이 가기 싫었을 여러 일터를 숨 한번 안 돌리고 지나쳐왔다는 거다아홉 시와 여섯 시의 바깥에서만 그녀를 봐왔던 나는 정말이지 이 여자가 '철의 여인인줄만 알았던 게다그러던 어머니가 나름대로 밥벌이의 지겨움을 최초로 토해냈으니나는 눈보라를 처음 맞은 열대지방 원주민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2013년 2연거푸 대학 입시에 미끄러진 어떤 모질이는 바짝 벌어들인 돈으로 부산행을 준비했다불안한 눈매를 감추지 못했던 중년의 경기도 여인은 나의 하행을 탐탁지 않아 했다모친만큼 모질었던 나는 내 벌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라며자기를 위해 쓰고 살라며 겹 띠동갑의 인생 선배에게 주제넘은 훈수를 두었고벌어둔 300만 원을 챙겨 그냥 부산에 내려가 버렸다나는 진심으로 그 여인에게 자기 욕망에 충실한자신의 삶을 되찾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내 뒷바라지에 인생을 더 희생하질 않길 바랐기에참으로 무정한 놈은 일방적으로 반년 동안 연락을 끊어버렸더란다

 


그놈결국에는 이것저것 하면서 오기 반 성질 반으로 최저생활 언저리의 돈을 꾸려 버텼고친구 하나 없던 이 땅에 제법이지 괜찮은 뿌리를 갖게 되었다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걸까그 뿌리를 믿고 어쩌면 내 힘으로 하는 마지막일지 모를 공부에 뜻이 섰기에 대학원에 들어갔고늘어난 학비를 대고자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여느 때처럼삶의 일부처럼 해왔던 일인데스물여섯이나 먹어버린 그 녀석 입에서 불현듯 "일가기 싫다"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입에 잘 안 붙이고 살던 말인데, '거참 모전자전 일세나는 너털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2015년에는 그녀의 둘째가 대학에 갔다두 번째 분신도 어미를 닮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제 돈 제가 벌어제 앞길 제가 가렸다상아탑의 돈이 굳는 덕에 벌이는 적지만 등산도 다니고 카페도 가는 버릇이 들었고종종 외식도 할 줄 알게 되었다그녀가 꽤 괜찮은 표창을 여럿 받고 졸업한 맏아들을 여전히 밥풀떼기나 흘리는 칠칠맞은 어린애로밖에 보지 못했던 것처럼나 또한 서른 즈음부터 슈퍼우먼처럼 여자 혼자 벌어 모든 것을 겨우겨우 기꺼이 떠안아 버텨내던 그 시절의 그녀만 기억했던 것이다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진 입에서 일가기 싫다는 말이 최초로 나왔더랬다그제야 나는 그녀에게서 언젠가부터 늘어버린 주름과 먹지 않는 화장의 들뜸과 잔 고장 많은반세기를 버텨낸 신체를 발견했더랬다명절에 두 번방학에 두 번 어머니를 찾는 게으르게 바쁜 아들은 갈 때마다 늙어있는 어머니의 인생에 깊은 연민을 느꼈다.

 


2017년 2월 24일 자로 나는 졸업을 했다한때 슈퍼우먼과 그녀의 두 번째 분신은 큰 걸음으로 내 자취방에 찾아왔다낯 뜨거운 말을 서로 잘하지 못하는 탓에여자는 자신의 고된 삶을 보상해주지 못한기대치에 못 미쳤던 큰 아들의 입학을 제때 축하해주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한이라고 했다그래서 별 볼일 없는 졸업식이라도 기어이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나는 결국 치우기를 포기한 냉장고를 들키고야 말았고방 청소에 일가견 있는 전문가 두 사람의 능숙한 손길과 부지런한 잔소리에 내 방은 금세 묵은때를 벗겨냈다.

 


공부했으면 참 잘했을 머리를 가진 나의 어머니는 일곱이나 딸린 동생들의 인생으로 인해어쩌다 연좌제의 늪에 빠져 대학의 문턱도 밟지 못했다어머니와의 왕래가 줄어갈수록 나의 자유는 높아만 갔지만직접 자식의 대학생활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고 또 늘 궁금해했다당신께서 참 좋아하는 해리포터 속 펜시브로 읽혔으면 하고 바라면서나는 이 글을 적는다공부를 하다 사랑을 했으며이별을 하며 글을 읽었고 아니 글에 읽혔으며생각을 적다 마음을 쏟았고밤을 기다리다 낮에서야 잠이 들곤 했으며허겁지겁 가파른 언덕의 대학을 오르내렸고유쾌한 웃음으로 여러 벗을 사귄 만큼 날 선 논리로 아울러 풍족한 적을 두었노라그게 간추린 내 대학 생활이라고깨끗해진 방에서귀에 잔뜩 얹은 한소리가 고마워서뒤늦게 이 글을 바친다



-2017년 2월 23일 @PrismMaker


※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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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운전치고 제법 능숙했다. 바람같이 달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인생의 예외란 항상 자신은 아닐거라 자신하는 사람을 빗겨간다. 우연은 행운을 담보하지 않지만, 불운은 늘 필연을 달고 온다. 항상 질주하던 우리는 달리지 않는 자동차를 인정하지 않았다. 차의 시동이 꺼졌다. 


계절비가 내린다. 세상은 아직 한 편의 수묵화다. 그러나 빗방울이 먹을 씻기면, 곧 봄이 올 것이고 꽃잎은 나름의 방식으로 부풀 것이다. 마른 햇살이 여기저기서 부스러질 것이며, 작은 도랑이 넘실거릴 것이다. 그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봄의 기운을 응원한다. 우리네 삶도 덩달아 수채화였으면 좋겠다. 2월의 마지막 날, 부산의 끄트머리에서.


-2018.02.2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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