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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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며 어쩐지 토머스 하디의 『테스』가 떠올랐다. 아마도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았던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주인공 채리티는 버림받았음에도 꿋꿋이 일어나 자기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가리켜 성장소설로도 일컫는 것 같다. 여성이 쓴 여성 서사의 글이며 성장소설로 읽히는 이 작품은 『순수의 시대』의 작가 이디스 워튼이 1917년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즈음에 쓴 소설이다. 이상하게 제일 나중에 출간된 소설을 먼저 읽었다. 『여름』 이전에 쓴 『이선 프롬』을 가장 나중에 읽게 될 것 같다. 『여름』은 1911년에 출간된 『이선 프롬』과는 자매 소설이라고 불릴 만큼 여러모로 닮아 있는 소설이라 하니 함께 읽어야 할 소설임에 틀림없다. 



이 소설이 쓰여진 1917년도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막바지인 상황으로 여러모로 힘든 시대였을 것이다. 이디스 워튼은 이러한 상황을 뉴잉글랜드의 한 시골을 배경으로 그 속에 갇힌 여성의 힘든 상황을 나타내었다. 어떻게 하지 못할 상황에서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았던 여성으로서 다만 채리티의 선택폭이 좁은 시대였음이 답답할 뿐이었다. 





채리티는 '산'에서 태어났으며 노스도머의 변호사 로열 씨 에게서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마을의 사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채리티는 이곳 노스도머가 답답해 미칠 것 같다.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그러한 까닭에 도시에서 온 루시어스 하니를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건축을 공부하는 하니가 도서관에 찾아와 색인카드를 물었을때 대답할 수 없었던 채리티의 상황이 이 소설의 큰 축이 된다. 도시로 나가 자유롭게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도시에서 온 하니를 동경하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채리티는 로열 씨가 산에서 태어난 그녀를 데려와 키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로열 부인이 죽은 뒤 로열 씨는 술을 마신후 채리티에게 청혼을 하였다. 늙은 로열 씨의 청혼이 싫었던 채리티는 마을에 온 하니를 좋아하여 그와 함께 마차를 빌려 돌아다니곤 했다. 하니가 마을의 건축물을 조사한다는 핑계하에 말이다. 채리티는 언덕에 올라 자주 풀밭에 드러누웠다. 나부끼는 바람을 느끼고 풀밭에 뺨을 비볐을 때 느끼는 행복감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채리티가 산에서 태어났음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로열 씨는 채리티가 하니와 어울리는 것을 질투했다. 하니가 왜 채리티에게 청혼을 하지 않는지 화를 내었고 하니는 어쩐지 청혼을 미루는 모습을 보였다. 로열 씨가 화를 냈을 때에야 나중에 청혼할 것이라는 미적지근한 말을 뱉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하니는 채리티에게 두 달 후에 미루던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올 거라며 말하고 떠난다. 단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하니에게는 애너벌 볼치라는 약혼녀가 있었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채리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아이를 떼는 방법 그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채리티의 어머니가 자신을 가진후 산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하지만 이미 '산'에서 내려와 변호사의 집에서 안락한 삶을 살았던 채리티가 산에서 살 수 있을까. 도시 사람들이 비인간적으로 침대도 없이, 먹을 것도 부족하며 가족들이 한 곳에 모여 살고 있는 지저분한 장소에서 살 수 있을까.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는 살아계실까. 어머니의 집에서 태어날 아이를 데리고 살 수 있을까. 이건 채리티가 산으로 들어가려고 마음 먹었을때부터 우려하던 것이었다. 그 때의 채리티는 아이를 뗄 돈도 없었고,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받았던 돈들은 무엇인가를 사는데 다 써버렸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결국 채리티는 로열 씨가 주는 안온함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로열 씨를 가리켜 안전한 보호장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채리티와 로열 씨의 관계가 변화되는 시점이었다. 로열 씨는 채리티를 존중하였고, 로열 씨를 무시했던 채리티는 그에게서 안도감을 느꼈다. 또한 자기를 두고 떠난 하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기의 사랑과는 다른 의미로 다른 사람과 약혼한 그를 담담하게 인정했다고 봐야 했다. 소설의 처음에 도시로 나갈 꿈에 젖어 있는 채리티에서 한층 성숙해진 눈빛을 하고 있는 마지막 부분에서처럼. 아픈 사랑을 딛고 일어선 성장한 채리티를 만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 시대에 쓰여진 소설 중 가장 성적인 표현이 많은 작품이라고 했다. 지금과는 시대가 달라 그럴테지만 하니와 채리티가 오두막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은 비밀의 연인들처럼 아스라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격정적인 장면이었다니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자못 우스울 뿐이다. 이제 쌍둥이 작품이라고 하는 『이선 프롬』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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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디테일 - 위대한 변화를 만드는 사소한 행동 설계
BJ 포그 지음, 김미정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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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둔 후 매일의 습관이 뒤틀려 거의 시간단위별로 알람을 설정했다. 예를 들면 오전 7시 기상, 오전 8시 영어단어, 오전 9시 독서 및 블로그 활동, 오전 11시 골디 듣기, 오후 3시 30분 산책, 오후 6시 배캠 듣기 등. 지금까지 제대로 하고 있느냐면 거의 실천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산책은 매일 빼놓지 않고 실천하고 있어서 나 자신조차도 자랑스럽다. 습관처럼 그 시간이면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트레킹화를 신고 집밖으로 나가는데 햇볕과 파란 하늘, 맑은 공기,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걷기 때문에 우울증도 없을 뿐더러 무척 건강해졌다. 다만 7시 기상은 8시로 연기되었고, 영어단어 공부도 매일 하다가 추석이 지난뒤 흐름이 흐트러져 못하고 있다. 조만간에 다시 시작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읽고서 말이다. 




스탠포드대학교 행동설계연구소장이자 습관 설계 전문가인 저자 BJ 포그의 『습관의 디테일』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사소한 행동 하나로 습관을 형성해 삶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예를들면 설탕 중독인 여성 주니는 바쁜 일정으로 차분하게 식사를 하기 보다는 캐러멜 마키아토나 버블검 아이스크림과 쿠키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문제는 그녀의 어머니 또한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거다. 스스로 의지력이 약해서 설탕을 끊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슬픔을 제대로 슬퍼하지 못해도 그걸 당분으로 채우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니는 슬픔이 밀려올 때마다 일기를 쓰거나 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아주 사소한 행동부터 시작하였다. 이처럼 사소한 행동 하나가 습관을 형성하고 슬픔에서 빠져나왔을 뿐 아니라 설탕 중독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습관을 들이기까지 쉽지 않는 과정을 겪는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포기하려할때도 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방법은 포그행동모형(Fogg behavior model)이다. 즉 행동(B)이 발생하려면 동기(M)와 능력(A)과 자극(P)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기가 높을수록 행동할 가능성이 높으며 행동을 반복할수록 더 쉬워지는 건 당연하다. 




치과에 갈 때마다 후회하는 게 있다. 좀더 나이가 어렸을때부터 치아 관리를 할 걸. 하는 자책이다. 저자도 다르지 않았는지 치실질을 제대로 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 치과에서 누워 후회했었다는 거다. 그래서 결정한게 매일 치아 '하나만' 치실질 하기로 했다. 행동의 단순함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작은 습관을 들였고 그 결과 매일 두 번씩 치실을 쓰게 되었다. 지금은 치실 사용이 몸에 배여 습관이 되었다고 했다. 나 또한 치과에 갈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치간칫솔을 사용을 권했다. 치과에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을 때는 잘 사용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사용하지 않아 또 치과 병원에서 치간칫솔의 필요성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게 칫솔용품에 치간칫솔을 두는 거였다. 그렇게 하니 칫솔질을 할 때마다 치간칫솔질을 빼먹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어떠냐면 하루 세 번 정도, 음식을 먹을 때마다 치간칫솔을 사용한다. 



뇌에 습관을 각인시키기 위해 작은 습관 레시피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습관을 달성했을 때 승리의 축하를 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축하의 습관 형성은 변화의 강한 촉매제가 되는 건 당연하다. 더불어 자신감 또한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습관 형성을 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자나 저자의 누나, 그리고 행동 설계 연구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바꾸고 싶었던 것에서 새로운 습관의 변화를 일으켰다.




다이어트. 남성들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추구하는 단어다. '뱃살과의 전쟁'은 외모도 중요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도 중요하다. 저자가 제시한 수쿠마루의 다이어트 습관은 성공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다이어트는 숙제 중의 가장 강력한 숙제다. 물론 성공하기가 무척 어려운 문제라는 거다. 얼마나 강력한 의지가 있느냐에 다를 것 같다. 그래서 이 책 속의 인물 수쿠마루의 성공은 놀랍다. 수쿠마루는 팔굽혀펴기로 작은 습관을 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소한 행동만 계속했다. '이를 닦은 후 팔굽혀펴기를 2회 하기'와 '5초간 플랭크 동작하기'를 시도했다. 작은 습관이 자리 잡으면서 체중을 9킬로그램을 뺄 수 있었고 허리둘레도 5인치나 줄였다. 플랭크 동작이 무엇인지 궁금해 검색을 하였더니 요가를 오래한 나에게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계획하신 분들 플랭크 동작부터 실천해 보심이 어떨지! 이처럼 작은 습관을 실천하면 습관은 성장하고 증식한다. 



행동 설계는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설계하는 행동 하나하나, 우리가 이룬 변화 하나하나가 연못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잔물결을 일으킨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 사회를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습관은 중요하다. (300페이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아주 공감할 케이스가 있다. 많은 아이들이 자기 방을 치우지 않고 부엌의 물건을 사용하였을때 정리하는 습관이 없다. 마이크와 칼라에게는 스물한 살의 아들 크리스가 있다. 열여덟 살에 대학을 중퇴한후 재정적, 정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노력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방 치우기 등 기본적인 일에 무관심했다. 청소나 설거지를 시키려고 하면 네네 할뿐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마이크는 재택 근무라 비싼 돈을 들여 커피 메이커를 구입했고 필터가 항상 깨끗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려고 보면 크리스가 커피를 마신 후 커피 찌꺼기를 치우지 않아 필터에 남아 있었다. 보다못한 마이크는 사소한 행동 하나를 요구했다. 커피메이커를 사용후 필터를 싱크대에 놓아둘 것이었다. 기분이 좋은 마이크는 크리스에게 고맙다고 칭찬하였고 그 뒤로도 필터는 싱크대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필터가 깨끗이 씻어 메이커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소한 습관이 위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강조했다. 부부간의 사이가 좋아진 것은 물론 형이 안하니 자기도 안하겠다던 남동생의 변화도 이끌어낸 것은 물론이다. 가족관계의 변화까지 이끌었다. 



변화를 바라고 있는가. 습관을 바꾸고 싶은가? 그럼 BJ 포그의 『습관의 디테일』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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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정판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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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을 때는 몰랐던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알베르 카뮈의 스승이라는 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최근에야 인식했다. 예전에는 읽었으되 그걸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떠나서 장 그르니에는 미학자이며 에세이스트다. 이 책은 그의 삶의 성찰 그리고 그 깊은 철학적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작품 『섬 LES ILES』을 읽고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거니와 영원한 흥취와 동시에 덧없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고 말하였다. 더불어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펼쳐 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해 내 방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던 그날 저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라고도 표현하였다. 알베르 카뮈가 받았을 그 감동을 느낄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찬사가 첫머리에 쓰여 있어 이 책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다.




이 책에서 장 그르니에의 깊은 철학적 사유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주제로 삼은 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空, 고양이, 이웃집 남자 그리고 많은 것들을 섬에 비유했다는 점일 것이다. 섬이 어떤 곳인가. 배를 타고 가야만 하고, 육지에서 바라본 섬은 그저 상상의 섬이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곳이다. 그 섬들을 그리워하는 그르니에의 깊은 사유에 다가가고자 했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그의 사유에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의 사유를 좀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장 그르니에가 살았던 시기에 중국과 인도는 미지의 섬이었던 것 같다. 그가 말하길, 인도는 '상상의 나라'로 간주할 때 비로소 그 실체와 가까워질 수 있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에게 인도는 낯설지 않았으며 가보고 싶은 섬이었지 않았을까. 총 여덟 편의 에세이에서 「고양이 물루」는 40페이지의 꽤 많은 이야기가 담긴 글이었다. 고양이 물루에 대한 깊은 애정이 표현되어 있는데 동물을 키워본 사람들 특유의 감정이 배어있었다. 침묵의 동물이자 도약하는 동물인 고양이의 잠을 위해 가족들이 살금살금 걷는 모양을 상상해본다. 고양이를 관찰하며 느낀 것들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나타내었다. 




그가 말하길,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들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53페이지) 라고도 했다. 집에서 동물을 키우는 친구들이 그 이야기를 할 때 무척 지루하다고 여겼었다. 지금은 어떤가. 고양이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고양이가 했던 행동들을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르니에가 멀리 떠나야 했을때 고양이를 키워줄 사람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해 수의사의 손을 빌려야 했던 것까지 그가 느꼈을 많은 고통들에 나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니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21페이지)



카뮈를 공부하던 번역자 김화영이 액상 프로방스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단숨에 번역하여 민음사에 찾아갔었다고 했다. 출판하려고 했으나 한국에서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 민음사 대표는 출판하기를 꺼려했었고, 우여곡절끝에 1980년 출판되어 지금까지 왔다. 이 책을 사십 년 만에 다시 번역하여 그르니에 선집 첫번째 권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공의 매혹」에서 비어있음을 강조했다. 세계의 비어있음을 깨닫고 시간을 초월하는 곳에 놓인 무언가와 접촉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사라져 버린 날들」에서도 작가는 생일에 스스로에게 바캉스(vacance)를 가진다고 했다. 휴가(vacances)가 아닌 진공의 시간, 즉 시간을 중단시켜 공백의 상태 혹은 정적 상태에서 자기에게 전해오는 음파의 파동을 믿듯 인도하는 소리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고 했다. 우리가 요가를 할 때 명상의 시간을 갖는데 명상은 다름 아닌 무의 상태이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상태, 생각을 버리는 시간이 명상이다. 이러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슬픔이나 고통의 시간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그러한 시간을 갖는 것을 즐겼고 또한 그 정적인 상태를 가질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92페이지) 



삶은 여행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두 번 살 수는 없는 법. 한번 뿐인 인생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어떠한 것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다시 살아볼 수 없으므로 애틋하고 나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충고 혹은 권유를 아끼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가 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듯 인간의 삶을 미지의 섬을 탐험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언급한 섬들이 우리와는 아주 먼 곳에 있으며 들어보지 못한 상상의 섬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섬은 태양, 바다, 꽃들이 있는 곳이다. 인간의 삶도 태양, 바다, 꽃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도 같은 것임을 말하는 것만 같다. 마지막 에세이 제목인 「보로메 섬들」처럼. 다섯 개의 섬들 중 세 곳만 갈 수 있는 그 미지의 섬과도 같은 우리의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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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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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의 가제본을 읽었을때는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나 그의 생각들을 다 드러내지 않아 답답한 면이 컸다. 그의 글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했음을, 말을 아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종종 이러한 불편한 관계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와의 갈등을 이기고 비로소 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이 컸다고 볼 수 있는데 어쩐지 미진한 면이 없잖았다. 책을 다시 읽으니 비로소 알겠다. 그가 그간 꾹꾹 눌어왔을 감정들을 나름의 방식대로 토해낸 것임을. 우리 또한 사적인 감정들을 다 내비치지는 않지 않는가. 감춰두고 싶은 것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젠가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일본의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 사건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하루키는 아버지가 그 기간에 복무하였던 것을 큰 마음의 짐으로 생각하였던 듯하다.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시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세 번의 참전으로 같은 시기에 있었던 난징 대학살 사건에 참여했을 거라는 기억에 일부러 관련 서류를 찾아보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비로소 찾아 보았고, 같은 부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그의 안도감이 조금쯤은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와의 생각이 달라 오랜 시간을 보지 않고 살았던 하루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글을 남기기로 했다. 아주 개인적인 일들을 이야기해야 하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나니 그가 왜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들을 줄곧 썼는지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하루키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는 절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어려운 시절이라 어느 절에 동자승으로 보내져 그 집의 양자가 되기로 하였지만 그곳에 적응을 못하였던지 다시 교토로 돌아왔다. 불교 학습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에 다니다가 전쟁이 터져 참전을 세 번 하였다. 돌아와서는 교토 대학 문학부에 들어가 나중에 교사 생활을 하였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아버지가 참전하게 된 상황을 그렸다. 그리고 초병들을 군인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포로인 중국 병사를 죽이게 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직접 가담했는지, 지켜보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고백을 들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 이 이야기를 듣고 작가는 충격이 컸었던 것 같다. 진로때문에 아버지와 소원해졌고 굳이 관련서류를 찾아보지 않았던 것 또한 역사적 진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점이 컸을 것 같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야 할테지만 쉽게 글이 써지지 않았다고 했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러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고양이를 박스에 넣어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해변으로 달려가 고양이를 버리고 집에 돌아왔더니 그 고양이가 그들보다 더빨리 집으로 돌아와있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었다. 비교적 가까운 장소라 바람같이 달려왔을 고양이를 생각하니 애틋한 면이 없잖았다. 그에 대한 일화는 우리 시부모님에게도 일어난 일이 있다. 새끼를 하도 많이 나아 성가셔진 들고양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30분을 가 먼 곳에 버리고 왔더니 한 달만에 다시 집에 찾아와 할 수 없이 밥을 주었다는 말씀이셨다. 노란색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는 우리가 그 집을 방문했을때 얼굴을 비추지 않다가 한밤중이면 담 사이를 걸어다니곤 했다. 이처럼 고양이에 관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작가는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듯하다. 



그 자신 또한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이 그의 마음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 그마나 어린 시절의 고양이를 떠올려서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십 년쯤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면 어릴적의 다정한 기억들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을테니.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93~95 페이지)



꽤 짧은 글이다. 아버지에 관한 개인적인 일들이므로 굳이 다른 책과 엮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타이완의 일러스트레이터 가오 옌의 일러스트와 함께 얇지만 묵직한 책 한권이 되었다. 많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쓴 글이었다. 번역자 김난주는 이 글에서 머뭇거림을 보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가 많이 머뭇거렸음을, 말을 아꼈다는 것을 느꼈다. 머뭇거림에서 깊게 배어있는 묵직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글이다. 다 담아내지 못해 애써 갈무리한 글이다. 



더불어 가오 옌의 일러스트는 하루키가 가졌을 그 모든 마음들을 어루만져주는 듯 하다.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위안(慰安)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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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순간 두려움을 느낀다. 겁이 많다. 만약 생을 초월한 누군가가 그러한 두려움을 먹고 산다면 어떨까.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다가 공포에 휩싸이고 말 것 같다. 의사가 진료하는 환자들의 특이한 케이스를 말하는 르포 형식의 글인줄만 알았다. 소설을 다 읽고서도 이것이 르포인지 소설인지 헷갈릴 정도로 몰입하여 읽었던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은 정신병원에 삼십 여년을 갇혀 산 조와 이제 막 신입 정신과 의사로 발령이 난 젊은 남자 파커다. 그의 학력과 실력이라면 더 좋은 병원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약혼녀의 공부에 맞춰 유명하지 않는 정신과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그러다 침대에 묶여 나오는 남자 간호조무사를 맞닥뜨리게 되고 그가 환자의 병실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병원에서는 '그 환자' 라며 의료진들에게 골칫거리로 불리는 환자였다. 그는 무슨 이유 때문에 이 병원에서 이토록 오래 입원해 있는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몰래 그 환자의 이력을 찾았다. 



여섯 살의 나이에 벽에서 누군가 나와 그를 괴롭힌다는 말에 처음 입원하여 검사를 받았다. 그 나이때에 일어남직한 악몽을 꾼거라 여겨 퇴원을 하였다가 재입원해 지금까지 있는 경우였다. 그와 함께 있었던 환자들이나 의료진들은 공포에 차 병원을 뛰쳐나왔으며 그를 진료한 의사는 하나같이 자살을 하거나 미쳤다는 게 문제였다. 



유일하게 이 병원에서 오래 근무했던 간호사 네시 조차도 그의 입원실에 들어갔다가 바로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 내렸다. 네시는 조에게 약을 전달하는 임무를 오래도록 해 왔었다. 그런 그녀까지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공포 혹은 두려움을 먹고 산다는 미지의 존재가 있다면, 있는 게 확실하다면 너무도 두렵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표현해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테지만 곧 굴복하고 말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저 소설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진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조가 그 병원에 오래도록 있었던 이유, 파커가 조에게 휘말려 그를 내보내려 했던 것까지 소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공포의 근원에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 편하지 않았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화면으로 보는 <그 환자>는 공포 그 자체일 것 같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그 상상하던 장면을 실제로 마주한다는 것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낼 것 같다. 더군다나 이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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