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하나님
주원규 지음 / 새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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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가 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율주제일교회의 담임목사라는 직책 하나 뿐이다. 담임 목사로 있던 미국에서 추문을 일으키고 파문을 당한 이력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율주 시로 오게 되었다. 율주제일교회의 실세이기도 한 김인철 장로의 부름이 있었다. 국회의원이자 율주시를 개발로 이끈 인물, 율주제일교회 또한 예전과 다르게 화려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초대 목사님이 목회를 할때는 낮은 강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우러러 볼 정도로 높은 강대상과 화려한 목사 집무실로 바뀌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텨야 했다. 하지만 율주시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곳에서 오래된 역사를 지키고 있는 한 소녀를 만났다. 철거 중인 구역사 건물로 빠져 나오게 된 그. 마치 그의 앞날을 보여주는 듯 했다.

 

오래 전에 청년부로 교회에서 성가대도 했었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의 한 단면을 바라보는 이 소설은 불편한 감정이 따랐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겪는 증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겠다. 소설 속 주인공 정민규 목사를 바라보는 감정 또한 목사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달까. 목사도 인간이기에 종종 추문에 휩싸이기도 한다. 내가 다녔던 어느 교회에서도 목사님이 한 전도사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웠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굉장히 존경하는 목사님이었는데 그도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소설 속 정민규 또한 추문을 겪은 후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담임 목사 자리가 마지막 직업일 수도 있겠고, 재기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기로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정민규는 꼭 그런 방법으로 김인철 장로를 폭로해야 했나, 였다. 몇년 전 책으로 나왔다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도가니」 가 개봉되었을 당시 커다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였는데, 원작 소설과 함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소설을 읽으며  「도가니」의 내용이 생각났다.

 

교회에서 지체장애인 시설을 지원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비귀환이 따로 없었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라는 생각은 소설  「도가니」 에서처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교회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정신지체 장애인 시설인 신애원을 통하는 구름다리. 그 구름다리가 잠금장치로 막힌 것은 교회가 신애원을 바라보는 마음 장치가 아니었을까.

 

 

 

 

권력과 돈에 눈이 먼 정치인이 장애인 시설 아이들에게 폭력을 일삼고 성폭행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에게 향응을 제공받은 입장이라 그를 기소하지도 못하고,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는게 말이나 되느냐 말이다. 그렇다고 그 많은 자료를 뒤로 하고서 스스로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는 것은 자멸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민규의 믿음, 한영호 장로의 믿음을 말하기 위해 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정민규의 논문 주제로도 쓰였던 아브라함의 믿음, 즉 인신 제사의 개념을 넘어서는 초극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간의 신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 이며, 신을 믿는 것 또한 하나의 이상(理想)일 수 있는지 비틀린 믿음을 마주 했다.

 

사건이 해결되는 것과 동시에 또다시 다른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식이었다. 해피엔드식의 결말을 기대했으나 소설이 끝나고서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종교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진정 신은 있는 것인지,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인지. 문득 유발 하라리의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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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eeze 2017-10-27 17:06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상반된 감정이 생기더군요. 감사합니다. ^^
 
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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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잊고 산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보이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우리는 숨막혀 하며 그 시간들을 떠올리려고 한다. 그 시간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시절에도 희망이 있었을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 때에도 삶이 있었으니 지금처럼 오늘 하루를 위해 살았을 것 같기도 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난다는 건 소설 속 역사를 떠올리는 일이다.  

 

소설 속 배경은 1945년 패망 직전의 만주 땅이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와 그를 암살하려는 중국인 요리사 첸, 그리고 그 두사람 사이에 조선인 여성 길순의 이야기가 각자의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자경단원인 요리사 첸은 관동군 사령관 모리를 암살하고자 황궁에 숨어든다. 그를 잡아온 헌병대에게서 그가 요리사라는 말을 들은 모리는 그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불가능한 요리를 주문한다. 기름과 어떠한 양념도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조리도구도 한정되어 있어야 하며 제한된 시간은 단 1분이다. 불가능한 요리를 완료해 사령관 모리의 혀를 만족시킨 첸은 그날 부터 장교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한다.  

 

소설 속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모리)는 실제 인물이라고 한다. 전쟁을 싫어했다고도 하는데 요리애호가 이자 예술비평가로 전쟁이 시작되기 전 시와 문학을 강의했던 인물이다. 그가 바라는 건 고향 구마모토의 풍경과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다. '먹는다는 것은 내게 잠시나마 전쟁과 직위를 잊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121페이지) 라고 말하는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다. 그가 자주가는 곳은 그들이 용궁이라고도 부르는 극락사다. 그곳의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며 향수를 달랜다. 그에게 있어 요리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구마모토의 천수각,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왕첸. 그는 천재 요리사다. 모리를 죽이겠다고 장교 식당에 들어가서도 그의 혀를 자신의 요리로 길들이게 하는 남자다. 그는 아버지의 요리법을 배웠다. 요리의 재료를 사용하는 방법, 요리에 가장 중요한 칼과 도마를 대하는 자세를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요리를 하지 않겠다는 그를 아버지가 죽으며 남겨둔 도마가 요리로 이끌었다. 아버지의 도마는 그에게 요리를 하는 매개였다. 모든 요리에 임하며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독을 써 사령관 모리를 죽일 수 있음에도 지금이 아니라고 시간을 늦추는 일이다. 자신의 요리를 그의 혀에 길들이는 일. 그를 죽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도마에 놓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생명이야. 칼은 그들의 생명을 끊는 도구가 아니라 그들을 굴복시키는 도구야. 칼을 다룰 때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재료들은 접시에 오르는 순간까지 말썽을 부리잖아. 칼은 등을 보여서도 안 돼. 칼날로 재료를 지그시 눌러가면서 놈들의 눈을 제압해. 숨통을 단박에 끊어놓을 듯 위협하면서 동시에 재료 고유의 빛깔과 싱싱함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 (98페이지)

 

 

 

나는 인간이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닌 고통의 맛을, 사랑했다.... 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 따위가 아닌, 혀를 뚫고 혀를 째며 점막에 와닿는 그 찢어지는 아픔을! 그건 혀로 느껴지는 맛이 아니라 온몸으로, 몸으로, 몸, 몸으로 느껴지는 맛이다. (317페이지)

 

이 둘 사이에 조선 여인 길순이 있다. 남방으로 가겠다고 했다가 위안부의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길순은 사내들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훔쳐본 오빠의 대의(나라를 구하겠다는)도, 첸의 대의도 믿지 않았다. 오빠의 대의를 위해 메모지를 남기지만, 자신이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힘든건 사내들이었다. 대의를 위해 어머니 베베와 자신을 두고 갔어도, 모리의 품에서 혀가 잘린 남자의 요리를 맛보면서도 그녀는 끝없이 갈구한다. 삶과 죽음의 눈 앞에서 고향 청진을 떠올린다. 돌아가야 할 그 곳. 돌아가지 못하는 청진의 고향집 부엌을. 

 

모리와 첸, 길순에게 삶과 죽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암살하려던 자도 그를 독살시키겠다는 것보다는 그의 혀를 자신의 요리로 길들이려고 하고,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그의 요리를 맛보며, 그의 혀를 잘라서도 혀로 맛보지 못하는 궁극의 요리를 맛보고자 한다. 죽어가는 이에게 극락사의 부엌에서 마치 어머니처럼 안고 있는 여자. 사내들을 미워했지만 결국 사내들을 품어 안았던 것인가. 그들에게 칼은 현재의 상황이고, 혀는 현재의 상황을 잊고자 하는 꿈꾸는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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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영화 한 편 씹어먹어 봤니? - 학력도 스펙도 나이도 필요없는 신왕국의 코어소리영어
신왕국 지음 / 다산4.0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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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외국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영어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때 많이 외웠던 단어도 이제 잘 생각나지 않은 때, 다시 단어 공부부터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간단한 단어만 알고 있어도 대화하는데는 무리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을 따름이다.

 

팝송으로 영어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좋아하는 팝송의 가사를 따라 적으며 외우다보니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는. 그래선지 라디오에서도 팝송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 책은 영화로 영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했다는 내용이다. 

 

영화를 볼 때 쉬운 단어는 귀에 들어오지만, 빠르게 말하는 문장 속에서 제대로 된 단어가 들리지 못하는 때가 많다. 저자는 처음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시작하여 영화 한 편을 온전히 보면서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다. 자막없이 영화를 보고, 영화속 대사를 따라하다보면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국어를 배울 때 듣기가 먼저 시행되어 나중에 저절로 따라하게 되는 것처럼, 영어는 듣기가 먼저 훈련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영화를 보며 대사를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따라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좋아하는 영화 속 대사를 동시에 따라하기를 강조했다. 더불어 높낮이가 없는 한글에 비해 높낮이가 확실하게 있는 영어 단어의 강세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화로 영어 공부를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수많은 영화중에서 어떤 영화를 고를것인가다. 질리지 않아야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라야 즐겁게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 수없이 반복해 보아야 하고 대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난이도가 어렵지 않고 비교적 단순한 문장들로 구성된 에니메이션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학용 동영상 플레이어가 가능한 것으로 들어야 한다. 반복이 필수이므로 자동반복기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지고 있는 건 프로 복서 자격증 하나뿐이었던 그가 영화 씹어 먹기를 통해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완벽하게 마스터한 이야기는 분명 놀랄만한 일이다. 더불어 그의 공부 방법을 읽고 있노라니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반복해 보며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라니. 물론 저자처럼 오로지 영어 공부에만 집중해야 하고, 영어에 미쳐 있듯 공부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영화 한편 씹어 먹기에 도전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어떤 영화로 시작해볼까, 벌써부터 머릿속을 헤집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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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다.

읽었거나 가지고 있는 책도 있지만,

이처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컬렉션 한정판이 나오면 갖고 싶을 수밖에.

 

다른 책을 찾다가,

갑자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컬렉션에 꽂혔다.

놓치면 후회할텐데.

책장에 쌓여만 가는 책더미에 종이책 구입하는 걸 줄이자고 다짐해놓고

언제 다짐을 했냐 싶게 또다시 리커버 한정판을 클릭할까 망설이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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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3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3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3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7-10-23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버전 페스트는 님 가지고 계신 거 봤는데요. 다 어디에 꽂아두실려고 ㅋㅋㅋ

Breeze 2017-10-23 12:44   좋아요 0 | URL
페스트도 있고,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도 있고. ㅠ.ㅠ
 
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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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미술 작품들의 진위 여부와 함께 중요한 것이 과연 그 작품의 화가가 진짜인가 아닌가 일 것이다. 오래전 과거에는 소설을 쓴 작가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편법이 남자의 이름으로 책을 펴내거나 그림을 그렸다. 인정받은 후에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미니어처리스트』의 제시 버튼의 신작에서는 이러한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를 한다. 뮤즈가 여성을 지칭하는 통념을 비웃듯, 한 여성 예술가에게 그림을 그리는데 중요한 뮤즈가 남자라는 것을 밝혔다.  

 

소설은 1967년의 런던과 1936년도의 에스파냐가 시대적 배경이다. 우선 1967년의 오델은 흑인으로서 영국의 식민지 트리니나드 출신으로 스켈턴 미술관의 타이피스트이며 내면의 이야기를 글로써 나타낸다. 1936년도의 올리브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지녔지만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미술 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부모와 함께 에스파냐로 이주한 여성이다. 자신의 일에 진취적인  오델과 자유로운  생각을 가졌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그림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때문에 고민이 많은 올리브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며 소설을 이끌어 간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한 폭의 그림은 <루피나와 사자>다. 신화를 모티프로 한 그림으로 한 소녀가 멀리가 잘린 소녀의 머리를 들고 있고, 그 곁에 금빛 사자가 앉아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이며, 어떻게 그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 하나의 조각을 맞춰가며 소설을 읽게 된다. 1967년의 오델과 1936년의 올리브는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주체성 있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동시에 누군가의 이름에 숨어 자신을 나타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이들이다.

 

 

1936년의 올리브에게는 테레사가 있었고, 1967년의 오델에게는 마저리 퀵이라는 인물이 있다. 테레사는 이삭의 그림을 올려놓아야 할 이젤에 올리브의 그림을 가져다 놓았고, 마저리 퀵은 오델의 소설을 <런던 리뷰>에 보내 단편이 실리게 만들었다. 즉 내세우지 못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나게 했던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은 주인공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올리브의 아버지는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하찮게 취급한다. 화가는 남자여야 한다는 것.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삭 로블레스의 이름이 쓰여진 올리브의 그림을 보고는 그림을 더 그려달라고까지 했다.

 

올리브는 이삭을 사랑하게 되므로써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삭이 그림을 그리게 된 원천이었고, 자신만의 열쇠였다. 비록 이삭의 이름이지만, 자신의 그림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이삭으로 인해 미술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시점이었다. 반면 오델은 스켈턴 미술관으로 찾아온 로리와 그가 가져온 그림이 어떻게 해서 로리의 어머니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게 되는 과정에서 그림 전시를 반대하는 퀵의 병을 알게 된다. 퀵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퀵이 올리브일까? 아니면 테레사일까? 로리는 왜 어머니의 이야기를 피하는 것일까. 어머니의 유품임에도 왜 팔려는 것일까. 그림의 진위를 밝히고 싶다. 그 역할을 퀵이 해주었으면 싶다.

 

 

 

그림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퀵은 왜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을 주저했을까. <루피나와 사자>, <밀밭의 여자들>이라는 그림 모두 이삭 로블레스의 그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을 숨기고 싶었을까. 누구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일까. 예술을 사랑하는 이로서 기회를 주고 싶었던 그녀는 그럼에도 진실을 묻혀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그린 여성에 대한 작품이다. 다양한 여성들을 내세워 하나의 작품을 이끌어가는 면이 독특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어려웠던 시대, 그녀의 작품을 알리려로 애썼던 여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과거의 한 시대를 바라본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림을 알렸던 여성이 있었기에 여성 예술가에 대한 위상도 높아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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