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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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섯 살의 엠마 슈타인은 아빠의 사랑을 갈구한다. 엄마 아빠 침대로 숨어들지만 그럴때마다 아빠의 짜증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엠마의 벽장속 요정 아르투어가 아니었다면 소녀는 무척 슬펐으리라. 그녀를 달래주는 아르투어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정신과 의사가 된 엠마 슈타인은 정신병 강제치료법에 대한 학회 참석후 호텔방에서 이발사로 불리는 연쇄살인범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성폭행범은 엠마의 머리를 밀었고 그후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발사는 금발 머리의 여성의 머리를 밀고 살해하였던 것. 연쇄살인범이 자기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엠마는 집 안에서만 기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배달부의 방문을 받았고 그로부터 이웃집의 소포를 받아줄 수 없느냐며 부탁을 해와 거절하기 곤란했던 엠마는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하나의 소포가 엠마를 다시 악몽으로 몰아넣었다. 범죄심리분석가로 일하는 남편은 늘 출장중이고, 호텔에서 성폭행을 당한 후 어릴적 악몽 즉 아르투어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던 경찰 때문에 자기가 악몽을 꾼건지 상상에 불과했던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릴적 트라우마는 완전히 치료하기는 힘든 일인 것 같다. 28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음에도 충격적인 일 때문에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소포를 받은 후 개가 쓰러지고, 남편이 출장길에 다시 찾아왔을 때 소포가 사라지는 등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리고 누군가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소설 『웨딩드레스』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고, 자꾸 악몽을 꾸게 하는 것, 혹은 망상을 하는 것이 누군가의 의도하에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실제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그녀가 망상을 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을 의심했다.

 

모든 추리소설이 그렇듯 결말은 아주 놀랍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많은 사건이 피해자의 가까운 사람에게서 일어나지 않는가. 일단 제 일의 용의선상에 올려두어야 할 사람이 남편 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가 범죄심리 분석가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남편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물론 결말 부분에 가서 엠마의 의심을 받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결말 부분을 읽고 났더니 좀 씁쓸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소위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어떨 때는 가족도 믿지 못하지 않나. 꿍꿍이를 가지고 가족이 되어 누군가를 살해하려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소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믿었던 사람을 더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아닐까. 다른 소설에서처럼 엠마가 살해범 혹은 성폭행범을 찾아가는 게 아닌 경찰에 의해 밝혀냈다는 거다. 나는 여타의 소설처럼 좀더 능동적인 여성 주인공이길 바랐다. 이렇게 엠마를 나약하게 그리다니 다음에는 좀더 능동적인 여성을 그려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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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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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가 될때는 그냥 받아들였으나 삼십 대에서 사십 대가 되었을 때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사십 대 후반 오십을 바라볼 때의 마음이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 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십 대에 이르렀을 때 이 나이를 즐기기로 했다. 가장 좋은 나이가 아닌가. 실제로 가장 즐거운 나이 이기도 하다. 삶을 즐기며 살기로 작정하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나이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세계를 여행하는 게이 작가 아서 레스의 여정을 함께했다. 나이를 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다는 것,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여정이었다. 여행에 있어 가장 좋은 점은 혼자라는 것에서 느껴지는 과거의 기억들이다.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오늘을 살 수 있게 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곧 쉰 살을 맞이하는 아서 레스는 천재 작가라 불릴만한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천재 작가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랄까. 천재 작가를 떠올리면 함께 떠올릴만한 누군가에게 내세울 만한 작품이 많이 없다는 거다. 9년간 함께 지냈던 프레디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며 청첩장을 보내오자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어 핑계를 대며 오랫동안 거절했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세계 문학 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에서 어느 작가의 인터뷰라던가, 자신의 작품이 문학상 후보에 올라 토리노를 거쳐 베를린에서의 강의, 모로코 횡단 여행, 그리고 인도와 일본 교토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소설 속 아서 레스는 쉰 살의 게이 작가다. 늘 연상의 남자를 좋아했던 아서가 천재 시인이라 불렸던 로버트와 지냈던 이야기들, 그랬던 그가 로버트의 나이가 되자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프레드 펠류와의 몇 년을 함께 지냈다. 프레드와 처음 만났던 때, 다시 만났던 때, 과거의 어떤 기억들은 종종 흐려지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을 잊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오래도록 간직하기 마련이다.

 

아서의 쉰 살 생일은 모로코 횡단 여행시 맞이할 터였다. 젊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나이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쉰 살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을 그였다. 나이에 대한 두려움, 노인들에 대한 두려움,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소설의 화자가 누굴까. 1인칭 시점으로 아서 레스를 바라보는 사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아서 레스를 말하는 사람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아서 레스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 시선에 아서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거의 쉰 살이 되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이제야 겨우 젋게 사는 방법을 안 것 같은 기분인데. (187페이지)

 

 

사람을 거울로 쓰겠다는 이 끝없는 욕구, 그 거울에 비친 아서 레스를 봐야겠다는 욕구는 왜 있는 걸까? 그는 물론 슬퍼하고 있다 - 연인을, 커리어를, 소설을 젊음을 잃은 것에 대해. 그럼 그만 거울을 덮고 가슴팍의 천을 찢어발기고 그냥 애도하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걸까? (225페이지)

 

 

누구도 나이를 피해갈 수는 없다. 막상 쉰 살이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임에도 맞이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다. 연상의 남자 친구와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연하의 남자 친구와 지낼 때 비로소 느끼게 된다. 스물 몇 살 시절 마흔을 넘긴 연인이 말했던 것들을 말하고 있는 걸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익숙하지 못했던 패턴의 이야기이며, 우리가 적응해야 할 패턴의 소설이다. 동성애를 다룬 소설을 읽으면서도 불편하지 않았던 건 여러 문학 작품에서 혹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많이 익숙해졌다는 뜻일테다. 연인을 잃은 한 남자의 사랑의 기억들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며, 쉰 살을 맞이하며 느끼는 삶의 여러 감정들, 이를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 소설이었다. 애써 감추려 해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늘 똬리를 틀고 있는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사람을 거울로 쓰겠다는 이 끝없는 욕구, 그 거울에 비친 아서 레스를 봐야겠다는 욕구는 왜 있는 걸까? 그는 물론 슬퍼하고 있다 - 연인을, 커리어를, 소설을 젊음을 잃은 것에 대해. 그럼 그만 거울을 덮고 가슴팍의 천을 찢어발기고 그냥 애도하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걸까? (22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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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2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2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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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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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것이 독인 동시에 약이다. 모든 동물과 식물에서 독이 있다. 적당량을 쓰면 약이 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섰을 때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 하다. 알고 쓰면 약이 되고 모르고 쓰면 독이 되는 이치와 맞닿아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소설을 만났다. 내게는 처음인 최수철 작가의 소설이었다. 일단 제목부터 『독의 꽃』 이다. 독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해야 하나. 독으로 피어난 꽃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을 읽는 동안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과 음료를 맞게 섭취하고 있는지, 바르고 있는 모든 성분이 조화로운지 의심이 들게 하며 잠시라도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생과 사를 오가는 주인공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여행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탈진 상태에서 잠을 잤고 냉장고에 있던 곰팡이가 피어 있던 음식을 먹은 후 생긴 결과였다. 육류나 어패류에서 발생한다는 보툴리누스 균과 프토마인 균 때문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혼몽한 상태에서 깨어나보니 삼인실의 병실에서 창가에 누워있는 한 남자가 내뱉는 말이 들렸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가 하는 말이 들렸다.

 

 

'내 가슴에 독이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나의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고 짐짓 독기를 담아 위협한다. 벗이 한숨을 쉬며 대꾸한다.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와 나마저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자라 모래알이 될 터인데, 허무하고 허무한데,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 (13페이지)

 

 

 

 

소설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 같다. 작가가 말벌에 쏘인 후 아나필락시스 쇼크를 떠올렸다고 한다. 한번 말벌에 쏘이면 별침의 독에 대한 항체가 만들어지는데 다시 벌에 쏘이면 몸속에 있던 항체가 즉각적으로 반영하여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다고 한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응급실로 옮겨 졌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당직 의사가 곧바로 병원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저자는 10여 년 전부터 독에 대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지만 이 사건이 촉발된 게 아닌가 싶다.

 

태어날 때 부터 몸에 독을 지니고 태어나 독을 다스리던 한 남자. 독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은 충분히 독에 노출되어 있다. 독을 알기에 적당량을 사용하면 약이 되는 것과 정도를 달리했을 때 일어나는 일들 또한 꿰고 있지만 욕망에 눈이 먼 순간 그 적당량을 지키기란 어려운 법이다. 독을 몸에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를 기르는 어머니와 아버지, 혹은 삼촌마저 독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독에 관련된 이야기 답게 주인공 조몽구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독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독을 너무 많이 사용해 중독 되었거나 독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해칠 줄도 알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저버리기 위해 옻이 들어간 음식을 먹어 아내의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아버지를 보며 결국 독으로 죽어간 모습 또한 독을 사용하는 자들의 결말을 보는 듯 했다.  

 

 

 

독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독을 이용할 줄 안다고 여겼으나 결국 광기와 폭력 혹은 위선에 사로잡혀 있었다. 치명적인 독의 광기에 빠져 있는 사람은 조몽구와 그의 아버지, 삼촌인 조수호였다. 독을 품고 태어난 조몽구는 늘 두통을 달고 살았다. 그런 몽구를 지키려는 어머니가 죽자 삼촌인 조수호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며 보다 더 깊은 독의 세계를 탐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은 프롤로그를 빼고 총 세 장의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조몽구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성년 시절로 나뉘어 진행된다. 조몽구가 병실에서 중얼거렸던 말들과 함께 객관적인 서술이 이어져 독을 가지고 태어난 남자의 삶을 전반적으로 훑어 볼 수 있다.

 

독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그 양을 달리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해할 수도 있다. 책 속에서도 나타났지만 '비밀스러운 힘'이라 일컬었을 정도다. 그 사람의 심신을 달래줄 수도, 독에 노출시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그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모든 살이 있는 것은 독의 꽃이야.  (520페이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는 문장이다. 이 세상의 모든 독을 섭렵해 독을 다스리는 자들과 독에 맞서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은 가. 수많은 독을 앞에 두고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도 달라진다. 우리 삶의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며 독을 사용할지 약을 사용할지 우리 선택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독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 알고 있는 자들에 대한 부러움이 앞섰다면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그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모든 살이 있는 것은 독의 꽃이야. (520페이지)

‘내 가슴에 독이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나의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고 짐짓 독기를 담아 위협한다. 벗이 한숨을 쉬며 대꾸한다.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와 나마저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자라 모래알이 될 터인데, 허무하고 허무한데,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 (1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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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2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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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자기의 기억과 경험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소설을 읽으며 가끔씩 놀라곤 하는데, 작가들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소설로 혹은 에세이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감추고 싶은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아도 결국 드러내고 마는 게 글쓰기인가 싶다.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을 창조하는 작업을 거칠 것이다. 성격의 유형, 주인공이 경험한 사실들을 적어 그 사람이 되어 내용을 이끌어 갈텐데, 이 또한 주변에서 만났던 사람들, 혹은 책 속에서 보았던 인물들 중에서 어느 누군가를 상상하며 쓰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기억속 상처와 감정을 마주해야 하는 거다. 그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탄생되며 비로소 그 시간과도 '안녕' 할 수 있지 않을까.

 

주로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과 감정들을 담은 글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었다. 이 작품 역시 자전적 이야기다. 작가의 열두 살 때의 기억, 즉 1952년의 6월의 어느 일요일로 돌아간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길래 작가는 40년 전의 기억과 마주하기로 했을까. 아주 친한 사람들한테만 말해왔던 것을 이제 하나의 책으로 나타내기로 했을까.  

 

 

 

말다툼 끝에 어머니를 끌고 지하실로 가 낫을 들고 죽이겠다고 했던 아버지. 살려달라는 소리를 했던 어머니. 그 장면을 보았을 작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숨어 있어도 부모가 말다툼하는 소리는 귀에 속속 들어오기 마련이다. 충격적인 상황은 오래도록 작가의 기억속에 각인되었다.

 

작가가 속한 Y의 아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닌 반면 작가는 중산층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사립학교의 생활들을 말하는 데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밤늦게 학교 아이들과 함께 교사가 집에 데려다 주었을때 속옷을 입고 나온 어머니에 대한 부끄러움. 열두 살이 아이가 느꼈을 부끄러움이 내게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그때 작가는 다른 친구들이 더 많은 걸 보게 될까봐 얼른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와버렸다고 했었다.

 

스스로 사립학교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것조차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했으니, 작가가 느꼈을 부끄러움의 시기가 1952년 6월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117페이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137페이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의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걸 드러내서 좋지 않는 점도 분명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가둬두었던 그날의 기억들을 꺼내며 자신이 느꼈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과 마주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금기처럼 여겼던 사실도 글쓰기라는 것 때문에 비로소 털어놀 수 있다는 것 또한 글쓰기의 이점이 아닐까 싶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117페이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13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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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9-05-1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참 아름다워요

Breeze 2019-05-22 17: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메모수첩님^^
 
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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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작가님 하면 현직 판사라는 신분으로 법정 추리소설을 써온 작가다. 내가 읽었던 작가의 소설은 두 권쯤 되는 것 같은데, 최근에 읽었던 <합리적 의심>을 읽고 판사라는 신분으로서의 죄와 일반인으로서의 죄를 바라보는 입장이 첨예하게 다르다는 걸 느꼈었다. 분명히 죄를 지었다고 확신하였으나 증거가 충분치 않을 때 판사들 또한 많은 고뇌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 나타나는 건 한 사건일 뿐이었다. 그래서 작가의 판사 시절 사건을 책으로 엮는다는 소식에 반가움이 앞섰다. 그렇다. 이 책은 판사 시절, 유명했던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는 논픽션이었다. 소설보다 오히려 더 흥미롭게 읽혀진다.

 

물론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모티프로 소설화 되는 건 아주 단편적이라는 걸 다시한번 깨달았다. 책 속에서 다룬 수많은 사건들을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울분을 토하고, 분명히 살인자가 맞는 것 같은데 증거불충분으로 혹은 사건을 깊게 생각하지 못해 충분히 조사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법인 일명 '태완이법'이 시행되었다.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이나 '삼례 나라슈퍼 사건' 처럼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살인 사건이 그대로 묻히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의 가족의 울분을 샀었는데 다행이다 싶다. 몇 년 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시그널> 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형사로서 미제 사건을 수사한다. 공소시효가 지나기 전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인물들이었다.

 

그때 들려온 소식이 바로 '태완이법'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경찰서에서 미제사건을 수사하는 부서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수많은 사건들의 살인범을 잡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사라진 변호사 사건도 그렇고, 대구 어린이 황산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사건 들이 돈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돈에 관해서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여도 누군가를 죽일 수 밖에 없는가. 내연남이나 내연녀가 있든, 금전적으로 힘든 상태이든, 모두들 돈 때문에 살인을 교사하고 직접 죽이기까지 했다. 또한 증거불충분으로 용의자가 무죄로 풀려나기도 했다. 살인을 행함에 있어 감정 보다도 오히려 돈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번에 책 속에서 자세히 알았던 게 듀스 전 멤버 김성재 사건이었다. 나는 여태 약물중독으로 죽은 가수라고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살인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함께 있었던 사람이 여러 명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있었던 사람이 여자친구라고 했다. 무죄로 선고되었고, 아직까지도 누가 죽였는지 밝혀지지 않아 안타깝다는 설명이었다.

 

판사의 눈으로 본 범죄 사건의 현실을 다룬 글이라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었지만, 법정 추리소설을 쓴 작가의 글이어서 그런지 소설처럼 재미있었고, 사건에 빠져들게 만든다.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으로도 이런 판사의 시각으로 보았던 사건 이야기가 계속 나왔으면 싶다.

 

책 속에는 사건 이야기 외에 작가가 좋아했던 책이나 작가들에 대한 에세이가 실려 있어 그 즐거움을 더한다. 그가 판사임에도 추리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가가 좋아했다는 소설 중 읽지 않은 게 있어 검색해보고 메모했다. 나중에 시간되면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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