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합본 한정판)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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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이니치(在日)’란 식민지 시대에 이주한 조선계 일본인들과 그들의 후손을 일컫는 말이다. 재일조선인에 관한 많은 작품에서 일본의 외국인 차별에 대하여 알았다.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 했다. 이 소설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다. 더불어 선자라는 한 여자의 삶을 통해 격변하는 세계사에서 가족으로 얽힌 과거의 역사를 말한다.


 

부산 영도에서 선자는 하숙집을 하는 엄마를 도왔다. 하숙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일본 남학생들이 괴롭힐 때 구해주었던 한수를 만났다. 그의 아이를 밴 후 그와 혼인을 생각했으나 그는 일본에 아내와 딸 셋을 두었다. 아이와 선자를 거두겠다고 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몇 달 후 하숙집에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다. 평양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기 위해 온 백이삭 목사였다. 평생 아픈 몸으로 살아 언제 죽을지 몰랐던 이삭은 선자의 사정을 듣고 아이에게 자기의 성을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선자가 한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백이삭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며 사랑하는 아들 노아와 모자수를 낳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백요셉과 경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엔 선자의 아들과 손자들이 자이니치로 살지 않았을 거다. 우리 삶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가족의 끈끈함은 한국의 고유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요셉이 오사카로 이삭을 불러들이고, 가장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선자와 경희가 김치 장사를 한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이유도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선자가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 나가 김치 사세요하고 외치던 장면.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와 조용히 말했다가 점점 더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이삭의 죽음 이후를 걱정했으며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돈을 마련하려고 했다. 선자는 강인했고, 미래를 준비할 줄 알았다.

 


드라마에서 한수를 처음 보았을 때 무조건 나쁜 남자라고만 생각했다. 소설을 읽었더니 그가 선자를 사랑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아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것도. 노아에게 공부를 하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라고 했다. 한수는 사업가로서 국제정세를 발 빠르게 읽고 피해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아는 진취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무조건 미워할 수만 없었던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아주 꼼꼼하게 듣는다고 말했는데도, 하나님은 2년 동안 노아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아가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비밀이 있었다.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노아의 꿈은 이카이노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280페이지)

 


일본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내 사랑, 너는 여기서 항상 외국인일 거고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어. 알겠어? 자이니치는 어디로든 떠날 수 없지. (725페이지)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는 파친코를 운영한다. 파친코는 조선인이 주로 운영했으며 많은 돈을 벌지만, 야쿠자로 인식됐다. 와세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던 노아조차 파친코에서 일본인으로 근무했던 점은 아이러니다. 아무도 모르게, 일본인으로 살고자 했던 노아는 조선인으로 산다는 게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한수의 아들이란 게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작가의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2024년에 드라마 시즌2가 공개될 예정이다. 공개 시점에 맞춰 합본한정판이 출간되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무척 생생해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었다. 외국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나라에서 조선인은 이방인으로 떠도는 삶을 살았다. 아픈 역사가 가진 고통의 한 부분이 아닐까.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는 한국의 디아스포라를 기억해야 한다. 드라마 파친코시즌 2를 기다리고 있다면 먼저 소설을 만나보자.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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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의 후회 수집
미키 브래머 지음, 김영옥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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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죽는 방법은 결국 아름답게 사는 것 뿐이야. (427페이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고통스럽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도 슬픔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특히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후회가 크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후회 때문에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는 클로버의 마음에 동감했다. 후회만 남아 있는 어떤 죽음 앞에서 나는 오늘을 잘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후회를 덜 하는 삶이라는 걸 깨닫는다.

 





클로버는 임종 도우미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을 위해 후회하는 삶이 없도록 마지막을 지켜주는 일이다. 죽음을 지켜본 후 그들이 했던 말들을 적는다. 후회, 조언, 고백이라는 노트다. 빼곡하게 적은 노트를 열어보며 오래된 90년대 영화를 즐겨보는 클로버는 여든여섯 살의 이웃 리오 할아버지 외에는 친구 하나 없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어쩌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떠난 빈자리를 견디기 싫어서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죽는다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죽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오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30페이지)

 


이 작품을 읽기 전 다양한 분야에서 드러나는 사후 세계에 관한 책을 읽었다. 사후 세계에 관한 책은 죽은 이후의 여행자를 위한 책이었던 반면 클로버의 이야기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느끼는 마음을 담았다. 더불어 죽음을 지켜보는 클로버의 과거와 현재의 감정들을 교감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후회를 안고 죽는 이유는 다들 자기들이 불로장생할 것처럼 살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그 순간이 오기 직전까지도 죽음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아요. (90페이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이기에 마치 생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한다. 발췌 문장에서처럼 불로장생할 것처럼. 얼마나 무모한지 모른다. 누군가는 말한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고. 그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클로버는 데스 카페에 갔다가 서배스천을 만나며 삶의 변화가 생긴다. 죽음에 관한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가족들 틈에서 죽음을 앞둔 서배스천의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친구가 없던 클로버에게 또래 이웃이 슬며시 다가와 그녀의 일상을 흔든다. 가장 큰 건 서배스천의 할머니 클로디아와의 만남이 아닐까 한다. 사랑일까 하는 감정에 휘말렸다가 주춤하는 그를 발견하고 한발 물러서는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누군가 다가오는 걸 겁냈던 거였다.

 




클로디아의 후회는 젊은 날의 사랑이었다. 사진작가였던 클로디아는 결혼하기 전까지만 일하기로 했고 프랑스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죽음을 앞둔 후에야 그를 평생 사랑해왔음을, 그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며 행복할 것 같은데도 오래전에 하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나는 법일까. 휴고 보버트를 잊지 못해 삶의 마지막에 가서야 후회하는 걸 보며 나의 마지막은 어떨까, 어떤 후회의 말을 할까.

 


클로버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배울 수 있었다. 후회가 덜하는 삶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무모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아름답게 죽는 방법은 아름답게 사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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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까지 인류가 상상한 온갖 저세상 이야기
켄 제닝스 지음, 고현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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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은 밤이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오늘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게 두렵다. 죽음 이후의 것을 알지 못한다. 죽음 이후에 내가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 생각해본 적 또한 없다. 그저 무의 세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만약 사후 세계가 진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 사후 세계의 상상의 산물이 여기 있다.


 

신화와 종교, , 영화, 텔레비전, 음악과 연극, 기타 다양한 사후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신화 속 고대 이집트 사후 세계의 장점은 물건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이집트의 귀족들은 전차에서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과 함께 묻혔을뿐더러 우샤브티라는 작은 인형을 일꾼으로 써먹을 수 있었다. 사후 세계를 위해 인형을 준비하고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다는 건 그들이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 바르도는 조지 손더스의 소설 바르도의 링컨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도는 티베트어로 죽음과 재생의 경계 상태를 뜻한다. 장례식이 끝난 묘지, 서성거리는 영혼들의 세계.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번 글에서 제대로 파악하게 된 것 같다.


 

신화나 종교 등에서 내세우는 천국과 지옥의 경계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이슬람의 사후 세계에서는 세 가지 질문을 건네는 천사가 있다. ‘당신의 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이와 같이 질문했을 때 정답을 말하면 무덤을 넓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데 반해 그 반대의 경우는 망자의 흉곽을 찌그러뜨리고 아흔아홉 마리의 뱀을 무덤으로 기어들어오게 하여 사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정답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혹시 길을 잘못 들어 이슬람으로 가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여러분에게만 정답을 살짝 알려주겠다. 정답은 각각 알라, 이슬람, 무함마드다.


 

카리브해의 연안 국가들의 노예들 상당수는 자살을 통해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예들은 랑 기니로 가지 못하고 아이티의 황량한 들판에서 영혼을 잃고 방황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며 노예들을 단속했다. 현재 서양의 대중문화를 장악하고 있는 좀비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119페이지) 할로윈이나 드라마 <워킹 데드>에 등장하는 좀비들이 사탕수수 농장 노예였다니, 마음이 아플 뿐이다. 이처럼 저자는 각 신화와 종교에 깃든 상상력의 사후 세계를 펼친다. 사후 세계의 여행길에서 어떤 상황을 맞닥뜨릴 것인가. 궁금하긴 하다. 물론 과거의 기억 따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밀턴의 실락원은 성경을 사탄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쩔지 생각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지옥을 떠올릴 때면 유황이 들끓는 불과 그 속에 빠진 사자들이다. 단테의 신곡또한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작품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 영원할 것 같은 현세의 삶은 너무 짧고, 영혼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믿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안온한 삶을 사후에서도 바랐다는 점. 죽음이 가진 삶의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가장 호화로운 사치품의 유혹을 받지만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일까? 천국에도 지옥에서와 같은 테이블, 같은 손님, 같은 접시, 심지어 같은 긴 숟가락이 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아무도 배고프지 않다. 그들은 서로에게 먹여주기 때문이다. (428페이지)


 

이솝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천국과 지옥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과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과의 차이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힘든 건 나에게서 오는 번민이 아니라 타인이 주는 지옥과도 일맥상통한다. 타인과의 세계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두렵게 한다. 죽음 이후도 마찬가지다. 살아있을 때 타인을 배려하고 도움을 주었다면 죽음 이후에도 천국에서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거다. 결국 죽음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삶의 지침이다. 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들은 결국 삶의 지침서를 읽는 것과도 같다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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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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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스콧 피츠제럴드를 생각하면, 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 속 주인공이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 1920년대의 한가운데 예술가들이 모여있던 한 장소로 가서 신기한 경험을 하는 내용이었다. 영화에서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가 술을 마시며 파티를 즐기던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좋아하여 번역가로도 활동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엮은 책으로 술에 기대어 악화일로의 길을 걷던 와중에 쓴 소설과 에세이가 실려 있다. 마지막에야 드러났던 생의 진면목이 아름다움의 형태로 드러났다. 암울한 시대 절망을 딛고 새로운 광명을 찾으려고 애썼던,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1920년대에 피츠제럴드는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어 유럽 여행 중이었다. 성공에 힘입어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여행은 알코올 의존증과 신경쇠약을 불러왔다.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삶은 여러 작품의 인물과 배경으로 나타났는데, 작품 속에서 우리는 삶의 한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이국의 여행자에서 젊은 부부는 유럽 여행 중이다.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중에서 가깝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행 장소에서 마주치는 부부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켈리 부부가 행복할 때는 행복한 모습으로, 건강이 나빠져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는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그 부부와 친해지고 싶지 않다고 여긴다. 자신들과 거울처럼 닮았음을, 그 모습이 자신들의 모습임을 깨닫는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삶을 들여다본다. 자기의 삶을 작품 속에 투영시켜 더 나은 삶을 도모하고자 함일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한순간에 어그러진다. 바람을 피운 남편은 건강을 위해 멀리 요양을 떠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남겠다고 한 아내를 향한 마음은 절망의 다른 모습이다. 작품의 진가는 오랜 시간이 지나 드러나기도 한다. 크레이지 선데이처럼.


 

무라카미 하루키가 고등학교 때 읽고 깊이 감탄했었던 작품 바람 속의 가족을 보자.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생을 망친 의사가 거대한 토네이도를 만나 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약국을 운영 중이던 의사는 동생의 아들이 머리에 총알이 박혀 목숨이 위태로워도 손이 떨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포탄 소리가 기관총 소리 같은 탁탁거리는 소리로 들렸던 토네이도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집이 사라진 풍경을 생각해보라. 절망밖에 없는 상황에서 의사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조카의 머리에서 총알을 빼준다. 아빠를 잃은 어린 소녀를 생각하는 것 또한 새로운 변화다. 아마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으리라. 희망을 찾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며 아빠를 잃은 소녀를 딸처럼 생각하며 변화를 꿈꾼다.


 

그의 삶은 새로운 식림(植林)을 필요로 했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토양이 그 숲의 성장을 다시 한번 지탱할 수 있기를 그는 바랐다. 그의 토양은 최고의 토양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귀 기울이고 관찰하는 대신 과시하는 약점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211페이지, 어느 작가의 오후중에서)

 


아내는 요양 중이고, 빚이 쌓였으며 딸을 돌보아야 하는 작가는 글을 쓰지 못해 고민이다. 산책을 나서 본다. 새로운 풍경을 보면 글을 써지지 않을까, 바깥 공기를 쐬면 괜찮지 않을까.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한다는 건 남다를 것 같다. 더군다나 20년 전에 번역했던 작품을 다시 엮는 작업은 어떻게 보면 큰 즐거움이지 않을까.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고 다듬어 새로운 작품으로 내놓은 작업 말이다.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피츠제럴드의 후기 작품집이다. 물론 사십 대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작가의 마지막 즈음에 쓴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망가진 3부작을 비롯해 다섯 편의 에세이는 작가의 상황을 좀 더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열정과 활력이 너무 이른 시기부터 끊임없이 졸졸 새기 시작한 그 틈이 어디인지 알아내야 했다. (332페이지, 취급주의중에서)


 

인생이 낭만적인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너무 이른 시기에 거둔 성공의 대가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이를 통해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돈이라는 주요 목표가 당연시되고 흔들리는 명성이 그 매력을 잃었을 때, 나는 영원한 해변의 카니발을 찾아 꽤 오랜 세월을 허비했다(솔직히 나는 그 세월을 후회할 수 없다). (354페이지, 젊은 날의 성공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츠제럴드를 좋아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영미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역과 해설, 후기가 수록되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피츠제럴드의 자전적인 경험이 응축된 후기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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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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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신작 알림이 뜨자 반가움이 먼저 들었다. 언젠가 신작이 나왔나 하여 인터넷 서점에 정세랑이라는 이름을 검색해본 적도 있다. 애타게 기다렸던 작가가 설자은 시리즈로 돌아왔다. 열 권쯤 출간되면 더 좋을 역사 추리물이다. 더군다나 남장 여자라니, 로맨스 소설 같지 않은가.

 


소설의 배경이 신문왕이 통치하던 통일신라시대다. ‘전쟁이 끝난 통일신라는, 한껏 융성을 향해서 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먼 시대를 거울삼아보는 일은 언제고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는 작가의 말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소설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자은 시리즈는 삼국유사 시리즈 다음 버전 같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설자은은 미은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당나라 유학이 예정되었던 오라비 설자은이 죽자 그를 대신에 유학길에 올랐다. 자은과 외모가 비슷하고 머리도 비슷하게 좋다는 이유였다. 셋째였다가 첫째가 된 호은의 이상한 판단 때문이었다.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 드디어 금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배에서 누반박사가 되려고 했으나 나라가 망해버린 백제 출신의 목인곤을 만났다.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추리 형식의 소설이다.

 


배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과 손바닥에 붉은 글씨가 새겨진 업화 사건, 길쌈 대회의 부서진 베틀, 월지에서 매잡이의 죽음 등 설자은의 식객이 된 목인곤과 함께 활약한다. 속을 알 수 없는 설호은, 산학이 뛰어나 집안 살림을 이끄는 설도은, 죽은 설자은의 연인이었던 산아, 위압적인 몸으로 나의 흰 매가 돼라고 말하는 왕까지 등장인물의 면면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에게 펼쳐질 미래다.

 


일찌감치 자은이 여성이란 걸 알아차린 인곤은 자은을 위해 어깨를 넓게 보일 물건을 만들어 주고 곁에서 자은을 돕는다. 설자은과 한때 연인이었을 거로 보이는 산아의 부탁으로 압화 사건을 해결하고, 자은의 부탁을 산아가 들어준다. 그런 자은이 탐탁찮은 산아의 지아비 진오룡의 견제와 질투 섞인 눈빛은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소설에서 과거의 역사를 알게 된다. 물론 설자은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설자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의 생활과 생각은 과거의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자료 조사와 더불어 작가의 상상력으로 빛나는 캐릭터가 탄생되었다. 여성의 몸으로 남성들 세계에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낼 독보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자은에게 일어날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갈 인곤과의 티키타카 케미도 기대해볼 만하다.


 

더군다나 다음 시리즈부터는 왕의 매가 된 설자은의 활약이 시작될 터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목인곤과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갈 텐데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여성의 몸으로 남자 행세를 하는 설자은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미스테리 소설이 주는 즐거움은 사건의 해결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주인공의 재치가 빛나는 순간이다. 여성을 숨기고 남성으로 살아야 하는 자은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며, 말없이 옆에서 챙겨주고 배려하는 목인곤의 존재가 이 소설을 더 빛낸다. 역사 속 이야기들과 지명 하나가 하나의 사건, 이야기로 나타나 흥미롭다. 다음 시리즈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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