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 타운 - 양쯔 강에서 보낸 2년
피터 헤슬러 지음, 강수정 옮김 / 눌와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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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접었을 때 나는 마치 달콤씁스름한 영화를 한 편 본 기분이었다. 책은 쓰촨 양쯔강의 고요한 반짝임과 함께, (그가 앞으로 가르칠) 사범대 학생들의 시끌벅적한 대장정 기념 횡단대회이 서로 대비를 이루며 시작한다. 그가 2년간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친 푸링이란 도시는 그런 도시였다. 거대한 강의 두 지류가 1만년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만나 흘러가는 와중에 마오의 삼선정책으로 탄생한 급경사에, 탄분이 날리는 북적이는 시골 산업도시. 과거(전통?)를 잊기엔 아직 덜 앞서나간 어쩡정한 사람들의 마음들. 순박하지만 시대가 할퀴고간 상처 위에 자기들도 모르게 마음의 장막을 쌓아놓고 있는 사람들. 그곳에 28살의 피터 헤슬러(일명 호웨이)와 22살의 아담이 중미우호단(평화봉사단^^)의 이름으로 그들과 만난다.

헤슬러는 그들에게 헤슬러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호웨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 푸린 사람이 되었다가 헤슬러가 되었다가, 그도 저도 아닌 제3자가 되기도 하면서 그들과 만나고 얽힌다. 작가가 다양한 정체성들을 거느리고 어느 한쪽의 선입견에 몰입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그들'과 함께 자기 자신도 읽어보는 시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학교 간부들과의 술자리가 놀람과 기괴함에서 지루함으로 변하고 서양 귀신의 시간맞춘 조깅에 농사꾼들이 무심해졌을 때 쯤, 어느새 자신이 쓰촨 푸링 풍경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전히 으스스함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수천년의 역사와 자연을 집어삼킬 쌴사댐과 이에 놀랍도록 무관심한 수몰예상지역 사람들, 과거의 엄격함과 현재의 불확실함의 기인한 조합 속에서 집단적 사고의 수갑을 풀지못해 결국 자살로 이어지는 여인들. 그런 으스스함을 이기게 돕는 것은 유머감각이다. 그가 가르치던 아이들은 그의 수업을 통해 무엇보다도 유머감각을 배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의 아이들이 돈키호테를 각색해 상연하는 곳에서 그 유모어는 위대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푸링에 드리운 형체없는 편집증들이 이 가상의 연극 속에서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린다. 이 부분이야말로 이 책의 보물이다. 올 가을 이 책을 놓친다면 당신은 명백히 불운하다. 번역은 최상급이고 유머와 사랑이 뒤섞인 원문은 이미 추종을 불허할만큼 신난다.

P.S.
그곳에서 헤슬러가 만난 쓰촨사람들은 놀랍도록 한국사람들을 닮았다. 매운 음식을 잘먹고, 가족애와 애국심은 두터운데 그 중간에 들어갈 공동체와 독립적인 개인의 자리는 희미하면서도, 놀랄만큼 경쟁적이면서 놀랄만큼 비합리적이다. 첫인사는 항시 식사와 돈벌이에 대한 것이다. 유태인을 숭배하면서도 히틀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도 한국인을 빼닮았다. 다단계 판매조직이 감시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쉽게 자리잡고, 무엇보다도 '관시'(관계, 인맥)를 중시한다. '민주주의'가 나라 이름 속에 들어있건만 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천안문(사건)은 광주처럼 보통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다. 일전에 소설가 장정일이 중국에서 한류열풍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한국 대중문화의 시대착오성 때문일 것이라는 일갈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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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2disc) - 할인행사
허진호 감독, 유지태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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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류지태)의 직업은 소리를 담는 녹음기사입니다. 소리야말로 시간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시간의 진행이 없으면 소리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주인공은 그런 소리를 채집해서 보관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고보니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한석규)의 직업과도 성격이 비슷하지요. 사진을 찍는다는 것과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모두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영상과 소리를 떼어내어 영원히 보관하는 일이지요.

주인공이 작가의 욕망의 투사체라는 낯익은 도식을 들이댄다면 그 인물들은 각각 사진과 녹음을 수단으로 시간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씨름하는 사람들이 될 겁니다. 한석규는 '시간 속의 생명'과, 류지태는 '시간 속의 사랑'과 씨름을 합니다. 그들은 시간이란 운명 앞에서 사랑과 생명의 연약함 혹은 유한함을 몸소 경험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든 죽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변합니다. 게다가 병주고 약주는 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별과 사랑의 상처도 어느새 무뎌져 갑니다.

영화엔 다양한 유행가가 편곡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전체적 정조와 아주 잘 어울리더군요. 음... 우리는 왜 유행가를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유행가란 것이 지닌 대동소이한 정서가 '달래기'이기 때문일 겁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덧없게 합니다. 삶도 사랑도 시간의 힘 앞에서는 덧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행가를 통해 삶의 덧없음을 달래고 견뎌내어 살아남고자 하는 겁니다. 극중의 할머니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는 덧없이 흩어져 사라지는 삶의 운명을 노래로 엮어 부름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해괴한 것은 유행가야말로 덧없는 것들 중에 정말로 덧없는 것이란 점입니다. 우리는 덧없는 것을 통해 덧없음을 견뎌내야 하는 겁니다. 이는 주인공들이 사진과 녹음을 통해 시간의 횡포를 견뎌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진도, 녹음도,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모사물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할머니가 사랑을 잃고 아파하는 주인공(류지태)의 입에 넣어준 알사탕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알사탕은 위약효과(placebo effect)가 있습니다. 시간의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견디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이렇게 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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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이 영화를 봐야겠어요. 김윤아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 가 요즘 너무 좋아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지던 차에 님의 리뷰까지 보게 되었지요. 혼돈의 봄을 달래주는 유행가의 노랫말을 곱씹으며 오늘도 어떤 알사탕 하나를 입에 물까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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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 비극과 고대 그리스 정치 - 김상봉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민주정과 뗄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영웅서사시의 인륜적 보편성과 서정시의 개인적 주체성이 통합된 것이 그리스 비극이다. 폴리스 공동체가 직면한 공동체의 이상과 개인적 자유 사이의 충돌을 환기시키며, 그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형상화한다. 그리스 비극을 통해 그리스 자유시민은 정치를 경험한다.

시, 정치, 군사가 하나였던 시대의 예술인데, 이점은 카타르시스효과의 부정적 일면을 경험한 (그래서 소외효과를 발명한) 현대 독일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모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예술과 정치는 분리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정치가 협상모델이나 계량적 분석 단위로 다뤄지는 것이 과연 얼마나 옳은 것일까? 나는 어느 쪽에도 선뜻 손을 올려줄 수가 없을 것 같다.

2) 그리스 비극 이론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에 대한 해석 - 니체 對 김상봉 - 니체는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자기동일성 속의 영웅적 자기확인을 위한 것으로 개인화했다면, 김상봉은 개인적 주체를 너머 보편적 주체로 업그레이드(확장)되기 위한 요소로 파악한다. 니체는 고통의 보편화가 빌어먹을 기독교의 유산으로, 그가 살던 시대의 만연된 병증인 데카당스의 원인균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김상봉은 고통을 보편적으로 인식함은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개인이 타자의 고통에 공감함과 세계에 참여함를 부추키는 에너자이저라고 여긴다.

3) 철학에 대한 다른 비유 - 플라톤식의 빛을 향해 올라가는 철학 對 김상봉의 어둠을 탐색하며 내려가는 철학 - 진리란 어둠을 모두 씻어낸 유일한 빛이 아니다. 진리란 슬픔(어둠) 속에서 서로 만날 때 가능한 것이다. 진리를 원한다면 이 만남을 온전히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슬픔의 해석학). 전체적으로 김상봉이 보는 서양철학의 한계는 자기 혐오와 자기 극복, 그리고 자기 만족 사이에서 맴도는 폐쇄성이다.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처방을 내려도 호전은 기대할 수 있겠으나 원인 치료는 되지 않는다. 김상봉이 보기에 '자기'를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타자의 고통과 슬픔'이다. 타자의 혹은 인류의 고통과 슬픔 앞에서, '자기'에 눌려 고통받던 자기자신이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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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 논픽션총서 1
안인희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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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안에서 띄엄띄엄 읽어서 기억이 흐릿하지만 대체로 책의 내용은 독일 낭만주의가 바그너를 거쳐 히틀러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이치 낭만주의가 '낭만적 아이러니'라는 지적 긴장을 읽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바그너에 와서 그런 긴장은 사라져 버리고 예술과 현실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는데, 히틀러는 그런 바그너적 경향을 아예 현실로 구현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바그너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주로 니체의 것을 빌어 설명한다. 니체는 바그너가 ('문화에 적대적인 질병'인)도이치 민족주의로 타락한 것, 데카당스에 대한 병적인 매혹에 빠진 것, 고전적 음악의 양식을 파괴하고 음악을 단지 무대효과의 부수단위로 전락시키고 내용적 빈곤을 거대함으로 땜질한 것 등을 비난했다. 이 모든 요소는 독일인들이 사유를 중지하고 무대효과에 중독되며, 공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나쁜 습관을 불러일으켰다고 본다.

이런 나쁜 습관을 고스란히 재현해낸 자가 바로 히틀러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히틀러는 정치를 예술로 변질시킨 자란 것이다. 국제 정치를 거대한 연극판(체스판)으로 보고 정복(생존)과 복종(몰락)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했다. 매킨더경의 지정학적 이론과 이 이분법이 스파크를 일으켜 세계의 심장부인 '중앙아시아 정복론'에 빠져들었고 실행했다. 여기서 나는 부시가 애독한다는 로버트 카플란의 책이 떠올랐다. 번역서도 있으니 구해보시라. 서로 빼다 박았다. 여하튼 히틀러라는 독일인의 시대 경험은 아리스토텔레스식 카타르시스 기법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고 그것이 오늘날 독일 연극 전통의 하나인 (브레히트의) 소외효과이론 탄생의 배경이 된다.

이 책은 다양한 각도에서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클래식 매니아도 좋고, 신화 애호가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또 독일 근현대 문화사에 대한 서설로도 쓸만하다. 아차, 그리고 2차대전의 원인을 히틀러로 단정하는 것에 이견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다.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에서는 히틀러는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 말이 옳다면 안인희씨의 주장은 좀 덜 설득적일 것이다. 김상봉씨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는 널리 퍼진 니체의 그리스 비극 해석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 있다. 함께 참고하며 보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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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사상과 역사
존 에렌버그 지음, 김유남 외 옮김 / 아르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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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시민사회(론)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주로 현장 조사식이나 리포트식의 저작이 대다수인데 이 책은 2500년간 서구 정치의 역사 속에서 시민사회 이론을 역사적, 정치적, 이론적으로 분석한다. 크게 시민사회 이론을 1)고전적 공화주의 이론, 2)근대적 국민국가의 대두 과정에서 파생된 시민사회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3)정부(국가) 부문에 대해 자율적인 중간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론 등으로 나눠서 고찰한다.

그리고 저자는 현재 미국에서 유행하는 (자발성과 봉사, 지역자치에 포커스를 맞추는) 신토크빌주의적 시민사회론에 대해 부정적이다. 미국 사회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자발적으로 촌락공동체를 형성하던 수준의 사회에서 오래 전에 벗어났으며 현재 미국 시민사회를 좀먹는 문제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인데 신토크빌주의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자가 비판하는 타겟은 협소한 반국가주의적 관점에 매몰된 (미국의) 시민사회론이다.

매우 훌륭한 책이다. 정보도 많지만 동시에 일목요연하고 핵심을 찌른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책인데 번역은 거의 재앙에 가깝다. 이 책은 필히 원서를 구해서 보시라. 그리고 아르케는 필히 다른 역자를 섭외해서 완전히 다시 새로 책을 내시라. 부끄럽지도 않으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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