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와 극좌

극우는 내부의 폭력을 외부로 전가시키려는 경향인 듯 하고, 극좌는 갈등의 경계를 미분하려는 경향이라고 봐도 될 듯 하다.

극우의 극단적 형태는 전면전(total war)이고, 극좌의 극단적 형태는 자기 해체(Self-distruction)이다.

극우는 궁극적으로 '공멸'을 부르고 극좌는 궁극적으로 '자멸'을 부른다.

이런 식으로 보면 1,2차 세계 대전과 전후 냉전은 모두 극우적 과정이었다. 일본의 극좌 학생운동은 분파주의를 거듭하다가  아사마 산장에서 자멸적인 최후를 마친다. 극우는 외부를 적 혹은 희생양 삼아 하나로 뭉치지만, 극좌는 가능한 갈등의 경계를 모두 활성화시켜서 스스로를 해체해 버린다. 한 때 유행하던 해체주의도 아마 그런 경향의 연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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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살인의추억> <말죽거리잔혹사> <실미도> <태극기휘날리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등 최근의 대다수 한국 영화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듯 하다. 나는 이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명시적으로는 '허우적거림'을, 암시적으로는 '탈출'을 내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판타지(올드보이), 큰 역사(태휘, 실미도), 작은 역사(살인의추억, 말죽거리잔혹사, 효자동이발사), 일상(여자는남자의미래다) 등의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공통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대체로 모든 인물들은 허우적거린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지 잘 모르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기껏해야 범인(혹은 자기들을 허우적거리게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인지 알고자 할 뿐이다. 나쁘게 말하면 남의 탓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어느 한 순간도 자기 자신과 만나는 환희(혹은 소크라테스를 빌어서 "자신과 일치하는 것" homolegein autos heauto)에는 이르지 못한다. 방황과 좌절이란 측면에서 그들의 영화는 사춘기적이다. 그들이 자주 다루는 것은 '폭력'과 '섹스'다. 사춘기에는 누구나 폭력과 섹스에 집착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 경향이 가장 심하다. 거의 유아적이다. 끊임없이 남의 탓 만 하면서 자기 인식에 실패한다. 어쩌면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장이 멈춘 것이다. 그는 우울한 피터팬이다. 그는 실험영화의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좀 색다른 것 같다. 물론 그의 영화에도 자기 인식의 환희 따위는 없지만 그것을 향해 겁없이 돌진하는 용기는 더 큰 것 같다. 그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봄(Spring/Seeing)은 유기적 순환계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기 인식에 이른 '눈뜸'의 봄(Seeing)으로의 업그레이드를 암시하는 듯 하다. '봄'의 이중성은 (김우창의 책제목을 빌어서) "풍경"(사계,순환,전체,자연,순리,윤회 따위)으로부터 "마음"이 독립되는 순간을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어른스럽다.

대개 이들 감독들이 '모래시계 세대'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한국은 민주화되었고 이 세대는 민주화의 주역이지만 아직 그들은 자기 스스로의 주인에는 이르지 못했거나 이르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한국이란 나라는 지금도 일본과 함께 미국의 위성국가(satellite state)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어린애 다루듯이 한다. 그러나 언제가는 곧 경을 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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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5-18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가는 곧 경을 칠 거다..... 무섭고도 시원하네요.

간달프 2004-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을 친다" .... 뜻과 달리 말이 참 경쾌하지요? ^^
 

"Betroffen" 이 단어는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이 '보통국가'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한다. 베트로벤하다는 것은 죄책감, 수치감 또는 당혹감을 함축한다. "

        p.33.  이안 부르마,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한겨레신문사, 2000)

그들은(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인에게는 천황숭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타리마에고토'(당연하다)라는 말과 '시젠'(자연스럽다)라는 말은 그들이 애용하는 단어들이다.

        p.311. 이안 부르마, 같은 책.

 "큰 불이 나서 땅 위에 쓰러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 몸위를 덥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불은 꺼졌으나 그 사람은 이미 재가 되어 있고 자신은 그 재의 보호 덕에 살아 있었다." 이 (카토 노리히코의) 알레고리에는 일본인 생존자인 '나'와 '나'를 구하고 죽은 일본군 병사가 있을 뿐이다. 불은 일본이 지른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발화'한 듯이 그려져 있으며, 이 불의 1차적 피해자인 아시아의 희생자는 빠져있다.

         p.348. 이안 부르마, 같은 책.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처럼 그들도 물질주의와 복지가 남긴 정신적 진공상태를 우려한다.) [...] (일본에서) 어쩌면 정신적 진공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것은 교육받는 과정에서 주입된 종교를 역사에 의해 박탈당한 세대인지도 모른다.

          p.31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한 민족은 그 정부 형태에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진다.

          칼 야스퍼스

우리는 이제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책임을 군부와 경찰 또는 관료들에게 미루는 한,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하게 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민족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이다.

          일본 영화감독 이타미 만사주의 1946년 기고문 중에서 p.316

왜냐하면 '보통' 사회, 과거의 유령이 찾아와 괴롭히지 않는 사회에는 역사를 '정상화'함으로써 또는 십자가와 마늘을 휘두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한 사회가 충분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져서 희생자나 범죄자의 관점이 아니라 비판자의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될 때, 그 때에만 유령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영면하게 될 것이다.

           p.302 -30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일본의 문제를 거꾸로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은 특히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감 없이는 과거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발전시킬 수 없다. 먼저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심성은 거기에 따를 것이다. 개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정권교체는 개헌만큼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부만이 그 뿌리가 여전히 전시체제에 물들어 있는 전후 질서와 단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무릅을 꿇는 것은 서독에서 민주주의가 확립된 후였지 그 전이 아니었다.

           p.32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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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민주적인가 -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고찰, 폴리테이아 총서 2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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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탄핵사태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 이런 사태가 가능했을까? 일부 국회의원들이 사악하고 반민주적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일까?

이 책은 (한국의 정치제도의 일부인) 선거제의 민주성에 대해 묻는다. 본래 17 - 18세기에 세습군주제를 끝장내고 민주제를 도입할 당시까지 선거제는 귀족적 제도의 일부로 여겨졌으나 선거의 (인민에 대한) 대의적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민주적 제도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대의'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미국의 제헌의회에서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이를 보여준다. 전자는 선거를 '탁월한' 사람을 뽑는 일로 여겼지만 후자는 인민과 '유사한' 사람을 뽑는 일로 여겼다. 연방주의자가 1787년 승리했고 선거는 '탁월성의 원칙'에 부합하는 제도("의회 정치")로 정착했다. 선거제는 주기적으로 모든 선거권자에게 통치자를 선출하고 투표로 심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이지만, 보통사람과 다른(탁월한) 사람들을 통치자로 뽑는다는 점에서 귀족적인, 이중적인(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이중성은 선거제가 스스로 민주적이기 힘들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도 다른 측면에서 나름의 정치적 통합기능을 갖고 있다. 이 이중성 덕에 보통사람들은 선거제가 민주적이라고 여기고 귀족주의적 특질을 원하는 사람들은 선거제를 귀족적이라고 여김으로서 제도의 지속적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통합의 기능을 갖는다.

처음 정립된 민주체제인 의회정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 이중성은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내용을 달리 하면서도 지속되었다. 우리는 섣불리 어떤 제도는 '민주적이다'라고 판정하지만 그 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무시한 채 내린 판정은 공허하다. 따라서 제도 자체만을 가지고 민주주의 여부를 논하는 형식적 접근은 민주주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저자는 그보다는 변화를 제도 내부로 흡수할 수 있는 체제를 더 중시한다. 어차리 형식적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불가피하게 이중적이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서 민주주의임을 참칭하는 제도가 그것이 놓여있는 사회와 얽히면서 변화하는 역동성에 주목해야 한다. 역동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곧바로 유명무실화하고 이중성의 한 측면인 귀족주의적 성격으로 고착화된다. 우리가 지난 탄핵사태에서 경험한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귀족주의적 성격으로 고착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고, 의회 바깥의 다양한 사회적 역동성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상실해왔던 민주적 성격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의원의) 대의와 (인민의) 표현 사이의 역동적 긴장 속에서 우리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이다.  

인내를 요하는 책읽기였지만 책을 덥고 나니, 난장판이 된 지난 의회에서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던 국회의원의 모습이 초래한 혼란함을 이 책이 상당 부분 덜어내 준 듯 하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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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 2007-06-14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
 
근대 일본 크로노스 총서 6
이안 부루마 지음, 최은봉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근대사의 드라마는 불현듯 일본 아니메 <신세기에반게리온>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전공투세대인 안노 히데야키가 일본 근대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영화에 투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체로 그 구도는 이렇다.

1) 가공할 외적의 침입
2) 외적 닮기를 통해 외적에 대항하기
3) 외적 닮기 혹은 외적 능가하기의 기획이 초래하는 예상 밖의 결과(파국)

특히 이 영화에서 'LCL상태'에 관한 부분은 모든 개체를 단일한 생명체로 융합시키려 했던 황도주의의 객관적 상관물처럼 보인다. 철학계에서 현상학과 선불교를 끌어들여 주객일치를 추구했던 '니시다 키타로'나 천황이 패전을 선언하자 초개같이 자기 목숨을 버린 일본의 민초들(대만인, 오키나와인, 조선인들도 있었다)은, 아니메 속에서 'LCL상태'로의 융합상태로 넌지시 언급되는 듯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의 종결은 '오타쿠'는 커녕 희망과 연대성의 개인/시민에 대한 아주 건전한 상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사는 위의 패턴을 지금도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는 듯 하다. 왜 그럴까? 왜 일본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힘차게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이안 부루마의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이다.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1)일본 내부로부터 볼 때, 자생적으로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지 못한 채 '외부의 충격에 기대어' 미봉적으로 일본 개조와 통합을 추구했다는 데 있다. 천황제는 위엄은 있으나 책임이 모호했고 민중들은 현실감을 상실한 채 극좌와 극우를 무모하게 오갔다. 흑선을 타고 온 페리의 침입으로 일본이 개조되었듯이 전후에는 바탄기를 타고온 맥아더에 의해 일본이 개조되었다. (2)점령자 미국의 대일 정책도 문제였다. 전후 이상적인 뉴딜주의자들은 국가주도의 계획경제를 선호하여 전쟁책임과 무관하지 않은 일본 관료들에게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권력을 쥐어줬고 반공적 보수주의자들은 이른바 '역코스'를 통해 일본을 미국의 태평양 항공모함으로 재무장시키고 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했다. 미국의 전후 정책을 지지했던 좌파는 미국에 실망했고 중국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졌다. 이 모든 것이 일본에 자생적이고 튼튼한 시민사회가 성장할 입지를 축소시켰고 정당정치는 파벌정치로 전락했다. 이 허약한 토대 위에서 이사하라 신타로같은 돌연변이가 또 재생한다. 이것은 다시 30년대 일본의 코스의 재래다. 일본인들도 다시 흑선에 재래해야 일본이 바뀔 것이라며 답답해 한다. 저자는 No!. 일본인들이 다시 흑선에 기댄다면 비참한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이제는 일본인들 스스로 나설 때다.

번역상태에 대해 말하자. 한마디로 개판이다. "본질적인 원리를 위한 중국의 학문, 실제적 적용을 위한 서양의 학문이라는 유명한 격언"(p.25)이란 장황한 구절은 "중체서용"이라고 하면 된다. "그 부를 축적한 약아빠진 상인계급"(p.27)이란 '죠닌계급'을 말할 것이다. 기본조사도 안된 번역임을 증명한다. "토착론자"(p.28)는 '국학자'로 해야 적절하다. (란카쿠에 상응하게 쿠니카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징집된 국군은 생각을 만든다는"(p.58)은 '국민징병이란 생각은'으로 고쳐야 한다. 오역이고 오문이다. "니시다 기카로"(p.79)는 '니시다 기타로'로 "칼리갈리박사의 캐비닛"(p.70)은 '칼리갈리박사의 밀실'로 고쳐야 한다. "인성에 반하는 범죄"(p.146)는 '인류(혹은 인륜)에 반하는 범죄'로, "숨길 수 없는 착오(an honest mistake)"(p.161)는 '완전한 실수'로 고쳐야 한다. "극현실주의"(p.71)란 용어는 없다. '극사실주의'는 있지만... 이외에도 오문과 비문, 오역, 부적절한 고유명사의 퍼레이드다. 존 다우어는 이 책을 '문체가 좋다'고 평하지만 역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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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근대일본'을 읽었다.
    from 새로운 출발 2009-04-12 18:29 
    지난주부터 이안 부루마가 지은 '근대일본'(을유문화사)을 읽었다. 일본역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책이 낮이 익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자인 저자의 통찰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책은 1853년 페리제독의 개항에부부터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아시아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근대문명을 수용했던 일본의 성장과 좌절의 역사인 셈이다. 일본은 서양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힘을 최대한 배워서 강국이 되고자 했고, 그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