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조   
 
 
홍기빈
 
 
 
이 ‘인간적 가치’라는 것은 실로 수만 개의 쟁점과 논쟁이 걸려 있는 지뢰밭 같은 주제이다. 소크라테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웅녀 할머니에서 테레사 수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어쩌면 그 문제의 답을 찾아 헤맨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것은 필자의 알량한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연재의 취지를 어기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논의의 초점은 분명 진보 진영이 뚜렷한 독자적 정체성과 방향을 가지고 정치·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이념’이다. 그런데 자칫 길을 ‘삼천포’로 잡았다가는 복잡한 철학 논쟁이나 윤리·도덕의 가치판단 문제로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는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경험과의 연결이라는 맥락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연재의 초입인 이번 호와 다음 호까지의 연재에서는 어느 정도 추상적·이론적 논의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진보 이념의 경계선을 더듬어 본다는 일은 현재 이정표도 길도 확실하지 않은 허허벌판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종의 ‘사유의 모험’인 셈이다. 따라서 어떤 방향과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일정한 확인을 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출발점에 말뚝을 박고 대략의 방향을 잡고 시작해야 도중에 길을 잃고 같은 곳을 빙빙도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함께 가는 독자 분들도 호흡을 맞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 :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

양희은의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이라 우겼더니 / 사랑이 떠나더라 / 사랑이란 그런 게지 / 마음에만 숨은 게지”란 구절이 있다. 혹시 그 ‘인간적 가치’라는 놈도 그런 게 아닐까. 각자의 마음 속에 있을 때는 적어도 자신에겐 그토록 분명하고 확실한 게 없어 보이는데, 일단 말로든 행동으로든 밖으로 끄집어 내어 다른 사람에게 들이밀게 되면 그 즉시 이상한 것으로 바뀌어버리는 물건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덧없이 조변석개하는 상태로 그 ‘인간적 가치’란 것을 놓아두면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나 원칙의 기초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구성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간적 안정성’이니까.

따라서 그 각자의 ‘마음에만 숨은’ 인간적 가치라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진, 선, 미’와 같은 어떤 객관적 개념이나 존재로 대상화시켜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윤리, 도덕, 법률이 생겨나며, 진리의 체계인 ‘도그마’가 생겨나고,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의 ‘균형, 균제, 조화’ 등과 같은 미의 객관적 기준이 생겨난다.

각자 마음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가치로 여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객관적 기준에 합치하는 것은 ‘인간적 가치’요, 그러지 못한 것은 ‘금수’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회로부터 내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가치’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도출한다. 같은 방식으로 ‘사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의 해답도 자연히 나오게 된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러한 삶을 살도록 최대한 강제하는 것이 사회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를 이렇게 ‘객관적 체계’로 고정하는 것엔 여러 문제점이 따르지만, 가장 주요한 것 중 하나는 그렇게 고정된 ‘객관적 가치의 체계’라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억압적인 틀로 전화해버리며, 지배계급의 이익과 연결되는 경우 - 이는 거의 예외없이 벌어져온 일이다 - 기존 체제를 수호하는 이데올로기로 타락해버린다는 것이다. 대서양 끝의 가톨릭 교회에서 태평양 끝의 조선 성리학까지 구대륙의 역사에서는 그러한 사태의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근대 이후로 이렇게 ‘인간적 가치’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객관적 체계’를 만들어 내는 일은 숱한 도전을 받아왔다.

루터, 데카르트, 샤프츠베리를 거쳐 형성되는 근대 시민사회의 정신적 기초는 사실상 이 같은 ‘제도화된 객관적 가치의 강제’라는 전통 사회의 틀을 거부하는 것에 있다. 이 거부는 진리, 윤리, 아름다움을 개개인의 내면에 내재한 이성, 오성, 감성의 확신에 두었던 것으로 어찌 보면 다시 ‘인간적 가치’를 ‘마음에만 숨은’ 것으로 되돌린 셈이다.

그래서 칸트 등은 이 같은 전환이 주관주의의 불확실성과 변덕으로 다시 후퇴하는 것을 막고 최소한의 보편성의 법칙을 부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해야만 개인 내면의 자유와 사회 전체의 안정성이 동시에 보호되는 근대 시민사회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칸트의 시도는 현실적으로는 물론 이론적으로도 그 성공 여부가 상당히 불안한 것이었다. 그가 보편성의 단초로서 부여잡고자 했던 이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이미 쇼펜하우어로부터 나오면서 19세기 말 이후의 세상은 주관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지배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칸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간 ‘공리주의’의 방향이다. 사람에게 어느 만큼의 ‘쾌락’이나 ‘효용’을 낳는가, 즉 ‘주관적인 만족을 가져다 주는가’를 인간 사회의 절대지고의 가치로 모시고, 상이하고 무수한 그 가치들을 이 기준에 따라 일괄적으로 재평가한다는 사고방식이다.

니체도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자신 스스로의 중심성과 ‘객관성’을 주장하는 모든 가치 체계에 대한 주관주의적 냉소와 허무주의에 기초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인간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어떤 가치 체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은 오로지 그의 ‘쾌락’과 ‘효용’에 기여하는 한에서 또 정확히 그만큼 이런저런 가치를 믿기도 하고 따르기도 한다.
앞에서 ‘인간적 가치의 객관적 체계’라는 것이 결국 억압적인 것으로 변해버리기 쉽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젠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주관적 ‘효용’과 ‘쾌락’의 원칙에 근거해 인간사회를 만들어 나간다면 우리는 모든 전통적 형이상학 체계의 억압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각자의 마음 속에 내재한 주관적인 ‘인간적 가치’를 흠뻑 실현하면서 살게 되는 것일까.

철학자로서 보자면 벤담은 칸트와 같은 거인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의 시장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의 기초는 칸트의 고결한 정신보다는 벤담의 속물적 원리에 훨씬 더 크게 힘입은 바 있다. 심지어 민족 국가의 주권조차 금융 시장의 할인율로 ‘재평가’해버리는 이 21세기의 ‘지구적 규모의 시장 사회’야말로 그러한 공리주의적 ‘유토피아’에 가까운 모습이리라. 실제로 제도권의 철학자들, 정치학자들, 경제학자들은 떼거리로 몰려나와 이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가 곧 전 인류를 자유롭고 풍요한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 줄 것이며, 이에 ‘역사는 해피엔딩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팡파르를 울린다.


공리주의의 지구적 유토피아?

여기서 묻자. 여기 사는 우리는 지금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시애틀의 시위대가, 칸쿤에서 할복한 어느 농민이, 몸에 불을 지른 어느 노동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화폐적 효용’으로 평가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간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그 ‘화폐적 효용’의 논리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는 고발이 아닌가. 이 함성은 관변 지식인들이 장담하듯 시간이 지나고 지구화가 진전되면서 잦아들기는커녕 지난 10년간 가속적으로 커져오고 있지 않은가. 이에 맞선 현 세계의 자본과 권력은 ‘화폐적 효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고 강변하며 그 ‘공리주의’의 지구적 유토피아를 오늘도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이 ‘인간적 가치’라는 문제와 관련, ‘객관주의’의 횡포와 ‘주관주의’의 횡포를 한번씩 나란히 겪은 셈이다. 하지만 ‘인간적 가치’의 실현은 요원하고 인류의 문명은 오늘도 그와 빗나간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불안이 팽배하고 있다. 5백 년 전 서양인들이 가톨릭 교회라는 ‘객관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몸부림의 출발점은 ‘인간적 가치’를 전면에 세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었다. 이 지구적 시장이라는 ‘주관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21세기 인류의 몸부림이 또 다시 ‘인간적 가치’를 앞세우고 터져나오는 것도 그래서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새로운 21세기의 르네상스는 어떤 틀로 이 ‘인간적 가치’를 담아내야 할 것인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번의 실험은 이미 큰 대가를 치른 바가 있지 않은가.


변증법적 전통 : 인간적 가치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다

이제 서양 사상에서 인간적 가치를 ‘관념’하는 세 번째 전통인 변증법을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무척 많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의 주관적 내면과 객관 세계는 서로 서로를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이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세상은 우리의 주관적 내면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은 제쳐놓더라도 최소한 인간 세상은 인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눈앞의 ‘객관’ 세계의 이런저런 것들도 옛날 언젠가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낸 것일 터이며, 그 선조들이 그런 것들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낼 때에는 무슨 ‘생각’을 갖고서 그렇게 했을 터이다. 미술품이 화가 마음속의 이미지를 펼쳐낸 것인 것처럼, 이 ‘객관’ 세계라는 것도 결국 그 선조들의 ‘주관’ 세계가 밖으로 실현된 것에 불과한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주관’이라는 것도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겪으면서 머리가 트이고 생각이 생겨난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객관 세계’의 경험이 아니라면, 새로운 창조를 낳을 상상력과 영감이 나올 원천이 없다. 즉, 인간 세상의 주관과 객관은 세상을 관찰하고 또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정신적 능력 그리고 그에 따라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실천 활동을 ‘매개’로 하여 그야말로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적 가치라는 것도 꼭 ‘객관적 체계’로 머물러 있거나 ‘주관의 마음 속에 숨어’ 있거나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객관적 가치체계’는 변화하는 인간 세상과 그것에 끊임없이 직면해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현실에 아랑곳 않는 고정된 도그마로서 군림하면서 억압적인 것으로 변해 간다.

‘인간적 가치’에 대한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는 그것들을 ‘마음에만 숨은’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현실을 향상시키는 힘을 완전히 거세해버리며, 결국 ‘화폐적 효용’의 전횡을 어쩔 수 없는 것, 심지어 바람직한 것으로 맞아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적 가치’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다른 길이 가능하다. 어제의 선조들이 ‘인간적 가치’라고 만들어 객관세계에 심어놓은 것들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일단 나의 ‘주관’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상상력과 사유를 통해 각자의 변화된 환경과 상황에 맞도록 스스로의 가치로 변형·발전시키는 일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하여 새로이 변형된 가치들이 그 개개인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기만 하라는 법도 없다. 어제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우리가 합의하고 공유하는 가치들에 따라 세상 현실을 새로이 바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된다. 그것을 새로이 바꾸어 가는 것은 또 그들의 몫이며, 이렇게 하여 ‘인간적 가치’의 내용은 그야말로 ‘변증법적’으로 운동·변화한다.

요컨대, 만고불변의 객관적 가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으며, ‘인간적 가치’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신비한 것도 신성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현실 세계를 더 이상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활동을 보조하는 ‘설계도’에 불과한 것이다. 또 그것이 ‘설계도’인 이상 개개인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현실에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점도 멀리는 신약 성서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꼬(Giambattist Vico)와 마르크스가 남긴 커다란 공헌은 한 걸음 나아가 그러한 창조와 실천의 주체가 ‘집단적 인간’이며, 그것도 ‘인류’ 등의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면서 몸에 흙을 묻히는 우리 아랫집에 사는 구체적 이웃들을 지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관점이 흔히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의 기반으로 연결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억압적 가치를 들이대며 봉건적 질서를 강요하는 전통적 지배 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대안적인 인간적 가치를 사회 전체에 실현하려는 일체의 노력에 대해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를 앞세워 냉소를 퍼붓고 ‘시장 독재’를 강요하려 했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맞서야 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은 ‘사람들이 함께 뭉쳐 집단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자’는 관점에 기반을 두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전략으로서의 ‘인간적 가치’ : 헤게모니와 지적·도덕적 개혁

이 ‘인간적 가치’의 문제에 담겨있는 정치적인 함의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그람시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구체적인 현실의 정치전략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그저 ‘사상’ 수준의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 계급과 농민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르네상스 이래 몇백 년간 지체되어 온 이탈리아 사회의 ‘지적·도덕적 개혁’을 그들이 이루어내어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사회 전체에 제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보았다.

즉,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 당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아니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는 전략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평등하고 윤리적인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인간적 가치의 창조와 그것을 풍부히 실현하는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것은 실로 마키아벨리 이래 몇백 년에 걸친 이탈리아인들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나타난 부르주아 국가는 그렇게 근본적인 가치의 혁명을 통한 지적·도덕적 개혁은 커녕 타협과 협잡에 의해 유지되는 ‘수동적 혁명’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새로운 ‘헤게모니’ 집단으로서 우뚝 서는 것은 그렇게 부르주아들이 배반해버린 ‘민족적·민중적’ 규모의 지적·도덕적 개혁을 떠맡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람시의 정치철학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바깥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대 말 이후이다. 당시의 그람시 붐에 깔려 있던 문제 의식은 ‘혁명으로 노농 권력 쟁취’라는 교조에 묶여 있던 ‘구좌파’와 절연하고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된 서구 국가에 맞는 변혁 전략을 짜야 한다는 선진국 좌파들의 고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의미도 자꾸 ‘담론적 실천을 통한 시민사회에서의 정당성 확보’라는 수준으로 협소하게 이해되어 온 감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헤게모니의 획득이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깊이에서 정치·경제·사회 제도는 물론 예술, 문학, 종교, 교육 전반에 걸친 새로운 ‘인간적 가치’의 창출을 뜻하는 것이었다. 감옥 속에서 결핵균에 척추뼈가 썩어들어가던 공산주의 혁명가가 이탈리아 문학사 연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은 그래서이다.


가치의 창조: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요약하자면, 진보진영의 기치 아래 ‘집단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만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풀린 것인가?

지난번에 필자는 ‘진보의 이념’이란 곧 ‘인간적 가치’의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동시에 그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찾아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놓고서 ‘함께 뭉쳐서 만들어 나가자’라고 대답한 셈인가. 터놓고 말해서, ‘진보 진영 깃발 아래 함께 모여 이리저리 뭉쳐다니다 보면 다 무언가 내용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소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 연재의 당초 의도는 1990년대에 걸쳐 진보진영의 깃발과 울타리라는 것 자체가 모호해지면서 ‘집단적 실천’도 답보상태에 빠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고리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진보 이념의 지평’을 더듬어 보는 노력이 별도로 병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 아니었던가.

진보 이념의 구체적 내용은 집단적 차원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교호 작용을 통해 채워 나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출발점에서 이 같은 논리로 답을 회피해서는 아니 되며,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지점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것이다. ‘무에서의 창조’란 없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란 앞에서 본 변증법의 지혜가 가르치듯, ‘현존하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소렐은 『폭력론』에서 ‘미리 계획된 모든 정치강령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총파업과 각종 파괴행위를 벌이는 것만이 좌파 운동이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현실에 실험되었던 결과는, 아나코 생디칼리즘 운동이 야기한 무수한 희생과 파시즘의 출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현존하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란 모험을 어떤 방향과 계획으로 해나갈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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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연재의 변

우리, 쉴 만큼 쉬었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천학비재하기 짝이 없는 필자가 이번 호부터 월간 『말』의 연재를 맡게 되었고, 그 주제는 세상에나(!), ‘새로운 진보 이념의 지평을 찾아서’라는 엄청난 것이어서 첫회부터 쥐구멍이 그립다. 그런 주제에 왜 시작하기로 했을까. 물론 『말』지 편집장의 고도의 최면술(?)도 주효했지만, ‘더 쉬었다가는 우리들 팔다리, 머리, 허리 다 굳는다. 누구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세상은 인간이 바꾸며, 인간은 행동으로 바꾼다. 그 행동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이며 동일한 과정의 세 국면에 불과하다. 만약 그 세 가지가 떨어지게 되면 생각도 제대로 된 생각이 아니요, 행동도 제 정신 가진 행동이 아니요, 세상의 변혁도 사이비 변혁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만 썩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들의 삶 또한 권태와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10년 쉬었으면 충분하다. 이제 우리들이 1990년대 상황에서 엉겁결에 내걸었던 ‘진보’라는 말의 내용을 채우고, 그와 동시에 집단적인 실천과 고민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자고 깨우러 다니는 소리는 꼭 아름답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신경 거슬리게 꽥꽥거려서 ‘저 놈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만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야말로 효과만점이다. 필자가 앞으로 쓸 글이 ‘무식한 놈이 헛소리를 하는구나. 진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는 경멸 어린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 나서서 몸으로 때울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러면 이 연재가 앞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방법과 방향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진보’라는 말의 뜻부터 살펴보겠다.

진보. 영어로는 progress.
앞으로(pro) 나아간다(gress)는 말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 ‘앞으로’는 어느 방향인가. 혹시 ‘역사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발전한다’는 ‘유물사관’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말인가. 그렇다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그 내용에 있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이란 뜻이며 단지 완곡 어법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수구우익의 ‘빨갱이들의 위장 전술’이라는 비방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진보’라는 용어는 서양의 전통


사실 이 진보라는 관념은 서양 문명의 독특한 ‘직선적 역사관’에서 파생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어째서 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냐’는 현실의 모순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직선적 역사관을 꺼내든다. 인간의 역사는 창조-타락-구원의 역사적 과정을 밟아 ‘진보’하는 것이 ‘발전법칙’이란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 이 세상에 부조리와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종국에 가서는 신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서양 사상에 계속 따라붙게 되는, ‘역사는 신의 섭리(Providence)가 실현되는 진보의 역사이다’는 관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기에도 이 ‘직선적 역사관’이라는 사고방식은 계속된다. 단지 신의 섭리라는 구닥다리 용어가 ‘이성의 실현’이라고 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 칸트는 ‘이성의 보편적 실현’으로 나아가는 것이 세계사의 발전 법칙이라고 분명히 선포하며, 다른 면에서는 칸트의 적수였던 헤겔도 이 점에 있어서는 한술 더 떠 아예 세계사를 샅샅이 뒤져 어떻게 이성이 발전해 왔는지까지 늘어놓는다. 그 결과 그리스와 게르만의 세계는 페르시아와 중국에 비해서 훨씬 더 ‘진보’된 사회라는 판단기준까지 나오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서 그 ‘이성의 실현’이라는 것이 다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물질적 옷으로 바꾸어 입기는 했지만, 이 직선적 역사관 및 진보의 관념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 고스란히 내려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이 ‘진보’라는 말에는 아주 기묘한 전제들과 사고방식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역사는 어떤 초월적인 섭리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진보’라는 사회정치철학의 정당성도 거기서 나온다. 그 발전 방향에 맞추어 부응하는 것만이 인간과 사회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러한 서양적 전통의 진보주의는 비상한 힘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엄청난 양의 논리와 자료를 퍼부어 대면서 ‘이렇게 가는 게 신과 역사의 뜻’이라는데 감히 뭐라 할 것인가.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 행복과 생명을 희생한 수많은 이들의 존재가 증명한다.

그런데 이 논리는 ‘믿지 않은 자들’의 손에 걸리면 숱한 맹점을 노출하게 된다.
첫째, ‘보수주의자’들의 경우이다. 역사가 그렇게 신의 뜻을 향해 일직선으로 간다고 치자. 그렇다면 현존하는 사회질서 또한 그러한 ‘신의 섭리’가 만들어낸 것이니, 거기에도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어째서 그 ‘입만 놀리는 진보주의자’들의 논리와 주장에만 신의 뜻이 있다는 것인가. 기성체제의 합리성을 더 살리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이 나타나서 목청을 세우게 되면, 진보주의는 이제 ‘신의 섭리의 선지자’라는 절대적 위치를 상실하고, 보수주의의 상대적 개념으로 왜소하게 되고 만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있다. 그 ‘역사발전 법칙’이란 것 자체가 현실에 영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나 버린다면?

비장했던 진보의 외침은 순식간에 우스꽝스런 코미디가 되어버린다. 공산주의의 현실과 몰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 1990년대 이후 이제 과연 그 ‘법칙으로서의 진보’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보수주의자들은 드디어 파리떼처럼 일제히 날아올라 ‘현존하는 세상은 역사의 완성이다. 더 이상의 진보란 없다’고 왱왱거리기 시작한다.

유물사관도 믿지 않으면서 진보주의를 신봉하고 있다면,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어디로 진보하자는 것인가?”


‘progress’가 아닌 ‘進步’


그런데 우리가 이 직선적인 역사관이라는 서양인들의 독특한 풍습에 기대어 진보를 정의해야 한다는 무슨 법이 있는가? ‘유럽 안의 비유럽’인 사르디니아 섬에서 나온 촌놈 안토니오 그람시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 역사발전 법칙이라는 유령 대신 그는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에 기대어 진보의 길을 찾아나간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과 삶을 회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생각하려는 의지는 무슨 시간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게 발견되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1910년대에 쓴 어느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자코뱅, 토마스 뮌처, 스파르타쿠스 등을 동일한 시간 지평에 함께 놓고 논하고 있다.

칼 폴라니도 동일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많은 것들은 시장 자본주의와 동전의 양면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분사회에서 우리에게 직업이란 거의 세습으로 주어졌으므로, 시장 자본주의의 ‘계약적 고용관계’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것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노동시장의 출현은 동시에 가혹한 착취, 고용의 불안정, 대량 실업 같은 끔찍한 재난을 낳기도 했다.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재난을 ‘자유를 위한 대가’로 감수하라고 강요한다. 한편 나치 등의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반대로 자유를 포기하고 중세 때나 마찬가지의 국가통제의 노동조직으로 되돌아가자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직업선택의 자유와 안정된 노동조건이라는 것은 모두 옷과 밥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이 아닌가. 옷을 취하면 밥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왜 둘 다 취할 수 없단 말인가. 직업선택인 자유를 움켜쥐고서 우리 노동조건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폴라니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무슨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 따위가 아니다. 그러한 새로운 실험을 위해서 사람들이 끌어안고 같이 용감하게 미래로 ‘발걸음을 떼어 놓는’ 사회를 말한다.

필자는 그래서 그러한 의미를 잘 드러내는 ‘진보(進步)’라는 한자어를 훨씬 좋아한다. 이 progress가 아닌 ‘進步’는 보수주의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 보수를 그야말로 ‘지양’(Aufhebung : 포함하면서 초월한다는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 체제의 가치 있는 것들이 수구세력의 잇속으로 인해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을 막고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결합하여 발전시키는 진정한 ‘보수’는 오로지 진보세력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생 고되게 일해온 힘없는 노인들을 굶주리도록 방치하는 이 사회의 지배세력이 무슨 낯짝으로 ‘유교적 전통’을 떠든단 말인가. 분단과 반공으로 배를 불린 자들이 어떻게 ‘민족’과 ‘자유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가. ‘유교적 전통’ ‘민족’ ‘자유 민주주의’에 소중히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이제 오롯이 진보세력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보’는 ‘보수’와 동렬에 놓고 고르는 취향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하는 자라면 마땅히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당위가 된다. 이제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된 가치’라는 새로운 바탕 위에서, 진보는 다시 우리의 지상명령이 된다. 진보에 거스르는 자들은 더 이상 ‘보수주의’라는 그럴 듯한 이름 뒤로 숨지 못할 것이다. 진보의 반대말은 이제 ‘보수’가 아닌 ‘퇴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란 휴머니즘인가


이렇게 ‘역사의 발전 법칙’ 대신 ‘인간적 가치의 확보’라는 화두를 내걸었으니 이제 ‘진보’라는 이념의 위기는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도대체 그 인간적 가치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바로 이어지게 되며,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진보란 그저 막연한 휴머니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막연한 휴머니즘’ 정도로는 안 될까? 진보진영을 자처하는 일군의 ‘논객’들의 주장처럼, 그저 진보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 정도로 해두어도 불합리한 현실을 ‘비판’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안 됐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 ‘논리적 비판’ 수준으로는 진보진영이 정치세력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갈파한 대로, ‘비판’이라는 것은 단지 ‘현실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적 모순을 낳게 된 현실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 현실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진보 진영이 그런 의미에서의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논객’ 집단이 아닌 현실 정치세력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진보진영의 이념과 내용이 정치세력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어떤 가치와 어떤 이념으로 어떤 현실 변혁의 청사진과 계획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답을 줄 정도의 구체적이고 적극적(positive)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모호한 ‘상식’ 수준의 내용으로 어떻게 정치 세력화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연 ‘현실의 근본적 변혁’이 그것으로 가능할까? 여기에는 ‘대안적 인간적 가치에 기반한 대안적 사회의 상’이라는 포괄적이고도 체계적인 내용이 필수적이다. 즉 ‘상식’은커녕 ‘상식을 비판할 수 있는 가치와 세계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 논객들의 ‘상식’은 사실 그들이 속하는 계층의 특이한 사고방식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 내용도 서양 비판적 지식사회의 최신 유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가 지적했듯이, 1968년 혁명 이후 서구 지식사회에서 나온 담론들 중 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자유주의 좌파’정도에 불과한, 그야말로 기성 질서 내에서의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던가.


소수 지식인들의 ‘댄디즘’을 넘어서


결국 진보이념이 소수 지식인들의 댄디즘을 넘어 대중 정치운동의 이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 ‘인간적 가치의 구체적 내용’이라니. 보통 심오하고 커다란 질문이 아니라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예수님, 부처님 같은 성인들이 아니고서는 감히 건드려 볼 엄두도 안 난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지나치게 추상적인 인간학이나 윤리학으로 빠져드는 것을 피하고 사회 변혁의 이념과 방법이라는 현실적 맥락을 놓지 않으면서 이 질문에 접근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음에 이어서 살펴볼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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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5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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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기업이 지배하는 과두지배국가
- 촘스키 강연을 듣고 -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장상환

내가 현재 교환교수로 나와 있는 매사추세츠대학에서 지난 2월 24일(화요일)에 MIT 언어학과 노엄 촘스키 교수 초청 강연이 있었다. 촘스키 교수는 현재 75세인데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3시부터 5시까지는 PERI(Political Economy Research Institute)의 고든 홀에서 제한된 청중 약 100명을 대상으로 "워싱턴 컨센서스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촘스키는 미국은 소수의 엘리트가 공적 기구를 지배하고 있는 과두지배국가라고 비판했다. 대학의 역할은 관리인을 양성하는 것으로 전락했고, 기업의 역할은 선전(propaganda)을 통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주요 공직 후보 또한 기업과 매스 미디어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훈련되고 만들어진다(designed)고 말했다.

그는 17세기 영국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지주계급인 기사와 신흥자산가층인 신사들이 노동자의 정치적 요구를 반대하고 농민과 서민을 직접 지배했는데 현재의 미국도 이와 유사하다고 했다. 이들은 사유재산권을 옹호하는데 이것은 헌법 정신과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적 봉건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산업 민주주의에 모두 위배되며, 이러한 회사 대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촘스키는 과거에는 급진적인 언론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 거대 언론은 기업을 위한 선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업과 매스 미디어는 민중들이 민주주의가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믿도록 하면서 실은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신념을 지배하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홍보와 고객관리(public relations)를 통해 사람들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직장에서는 기술을 배우도록 하도록 유도하고, 직장 바깥에서는 소비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기업과 매스 미디어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조합과 정부를 증오하도록 유도한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사실은 학교 교육과 보건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직인데도 미국 사람들은 이러한 유도에 말려들어 정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강력한 정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는 약한 정부가 되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케인즈의 말을 인용해 자유시장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경제의 침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민주주의와 대립되며 정부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가장 비합리적인 예로서 촘스키는 미국의 사회보장의 기축 가운데 하나인 보건의료제도를 들었다. 기업들은 보편적 의료보장은 비효율적이라고 선전하고 이에 따라 국민의 18%만 의료보호 개선을 위한 증세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런데 실은 사보험 중심의 의료보건제도를 관리하는 비용으로만 3천억달러나 들어간다는 것이다. 노인의료보장을 위한 비용이 6천 억달러인 것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많은 비용이 쓸데없는데 들어간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약값은 미국이 캐나다 등에 비해서 다섯 배가 비싸니 얼마나 불합리한 제도이냐는 것이다. 이렇게 약값을 높게 하기 위해 제약회사들은 늘씬한 모델을 동 원하여 성분약(generic drug, 특허가 끝난 약을 같은 성분으로 제조한 약, 카피약 이라고도 함)은 오리지널 약에 비해 약효가 떨어진다고 선전해대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광고비용이 전체 매출액의 30%로 연구개발비는 5%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여 엄청나다고 한다.

촘스키는 회사들은 국제적으로는 자유무역과 무역관련 지적 재산권(Trade Related Intellectual Properties, TRIPs)을 적극 옹호하여 기업 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비판 했다. 그런데 이러한 협상을 추진하는 국제기구들의 경비의 40%가 초국적 대기업에서 나오니 결과는 보나마나라는 것이다. 그는 그린스펀이 최근 말한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나머지 다수는 불안정해지고 좀 놀라게 되어야 경제가 건강하게 돌아간다고 한 발언을 비난했다.

촘스키는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세계은행의 일부 전문가의 분석도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임금 인하와 고용 불안정을 초래한다는데 동의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미국에서는 지난 25년간 하위 40%의 소득은 7%나 줄어들었는데 상위 0.1%의 소득은 6배가 늘어났다는 통계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결과라고 했 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직한 경제학자의 분석을 인용하여 자유무역은 경제 성장에 해롭고 보호무역이 오히려 경제성장에 기여한다고 했다. 기술 혁신도 정부의 구매 등에 힘입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촘스키에게 "최근 랄프 네이더가 출마 의향을 밝혔는데 네이더는 자신이 부시를 잘 공격함으로서 부시의 낙선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민주당 지도자들은 네이더의 출마가 부시의 당선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네이더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중요한 이슈를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그런 면에서 그는 괜찮은 사람(nice guy)이지만 현재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선거제도 하에서는 출마보다는 민중들의 조직화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촘스키는 기본적으로 네이더가 진지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고, 결국 그의 출마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또 다른 질문자가 민주주의에 대해 인터넷이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질문했는데 이에 대해 촘스키는 컴퓨터가 자세한 진단을 바탕으로 좋은 논의와 좋은 제안을 가능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온라인은 중요한 정보의 생산을 하지는 못하고 정보의 유통에만 역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프라인에서의 정보 생산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 매스 미디어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미국은 인터넷망이 잘 구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망이 잘 갖춰져 있는 한국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넷은 젊은 세대로 하여금 진지한 탐구보다는 흥미에만 빠지도록 해 어리석은 정신상태로 유도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저녁 7시부터는 "이라크를 넘어서"를 주제로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학부 학생들이 많이 참가하여 700명 넘게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이었음에도 상당수 사람들은 입장하지 못했다.

촘스키는 여기에서 "이라크를 넘어서"라는 주제를 넘어서 제3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 대외정책의 파괴적 역할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제3세계에도 적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근거로 미국 대외정책을 비판했다.

군사적으로 지배되는 나라에 시장 원리를 강요한 것이 제3세계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시정부가 2002년 9월에 선언한 국가안보전략을 "공개적인 세계 지배 선언"이라고 비판하고 키싱거 식 현실주의를 나찌즘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실은 미국 외교정책에서 오래된 것인데 부시정부가 이를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뿐이라고 했다.

테러리스트를 숨기는 국가를 공격한다는 부시 정부가 내세운 원칙을 두고 그는 과거에 미국은 테러리스트들과 범죄자들의 공연한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그 하나의 실례로서 그는 하이티에서 학살을 자행한 엠마누엘 콘스탄트를 미국정부는 인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촘스키는 이집트정부가 인도를 요구한 시크 오마르 압둘 라만를 송환하지 않았던 예를 들었다.

그런데 그 시크 라만은 나중에 세계무역센터 폭파의 주범으로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중동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준다는 부시 정부가 내세우는 비젼에 대해서 촘스키는 부시 정부의 진정한 동기는 자원 확보와 기업이익 추구일 뿐이라고 냉소했다. 대안이 무엇이냐는 청중의 질문에 대해서 촘스키는 민중의 조직화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전체적으로 이번 강연에서 촘스키는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미국 정부가 소수 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며 외국을 무리하게 침략하고 있다고 비판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이것은 역시 미국 노동자, 민중들의 몫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 민중들의 의식은 기업이 주도하는 선전에 침식되어 대부분 개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부를 미워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는 이런 딜렘마 속에서 미국 시민들의 신화를 깨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미국 민중이든 제3세계 민중이든 "답답한 사람이 샘을 파야" 하는 것이다.

[광장] 200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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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6-23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 평소에 정말 존경하는 분인데. 간달프님 서재에서 좋은 글을 봐서 반갑네요. 퍼갈께요.
 

요리스 이벤스의 '강'과 '바람'
- <강의 노래>, <센느가 파리를 만나다>, <미스트랄>

요리스 이벤스의 위 세 편의 영화를 보고 그의 일평생의 중심 주제가 '강'과 '바람'이라는 점을 주지받자 불현듯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의 충격적인 마지막 엔딩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Caspar David Freidrich

카스파 디비트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라는 그림에는 한 사람이 해변에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까지 펼쳐진 저 괴물같은 바다를 보면서 서 있다. 이 괴물도 생각을 할까? 이 괴물을 경험하면 다른 모든 사상이 다 해체되지 않을까? 니체가 바로 이와 같은 바닷가의 수도사다. 그는 괴물을 바라보면서 규정되지 않는 사상은 일단 사라지게 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기 위한 시도를 준비한다. 왜 확고한 이성의 제국을 떠나서 미지의 열린 바다로 가야만 하는지 언젠가 칸트가 물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머물라고 충고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순수오성의 나라를 단지 두루 살펴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 측량도 했으며, 또한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에게 그에 맞는 적당한 자리를 정해주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폭풍우 치는 넓은 대양으로 둘러싸인 섬이다. [...] 이 대양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으며, 종종 녹고 있는 빙하가 대륙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코 끝낼 수 없는 모험을 하려는, 하지만 이러한 모험심을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선원들이 결국에는 이 대양에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가 결국에는 실망하게 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3,267)

하지만 니체는 바닷가로 떠났다. 니체의 사상과 함께 가면 목적지가 없다. 그 어떤 성과나 결론도 없다. 오직 끝나지 않은 사고의 모험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종종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모험적 영혼은 노래를 불러야만 하지 않을까? (루디거자프란스키, 117)

[...]

칸트는 이 섬에 머물면서 폭풍우 치는 대양에서 저 악명 높은 물 자체 Ding an sich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쇼펜하우어는 과감하게 더 나아가서 이 대양을 의지라고 명명한다. 니체에게 절대적 현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며, 괴테의 말을 빌자면 영원의 바다, 다양한 활동, 작열하는 삶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이해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떤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총체적 개념이다. 인식될 수 없는 것들의 대양이라는 칸트의 비유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디오니소스의 철학자 니체는 나중에 자신의 책 <즐거운 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드디어 우리의 배가 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식하는 자들의 모든 시도가 다시 허용된다. 바다,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 이렇게 '열린 바다'는 예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3,574) (루디거자프란스키, 118)

요리스 이벤스의 '바람'(혹은 미스트랄)은 칸트나 니체의 '거친 바다'와 비슷하다. 그리고 요리스 이벤스가 <미스트랄>에서 재치있게 언급하듯이 사람들은 바람에 저항하기도 하고 바람과 놀기도 한다. 사람들은 방풍림이나 방풍벽을 쌓아서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고 마을과 도시, 문명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바람 속에서 놀고 연기하기도 한다. 요리스 이벤스에게 강이 코스모스의 세계라면 바람은 카오스의 세계다. '강'은 문명과 연관된다. "센느가 파리를" 만나고, <강의 노래>에서는 문명적 정의를 위해 세계 노동자들의 대동단결을 통해 자본가의 독점을 깨부수자고 부추킨다. 강의 세계는 부덕과 부조리, 비참이 존재하지만 인간 이성에 의한 혁명과 재생이 가능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다. 프롤레타리아의 신성한 노동의지와 사회주의 국가의 도래로 그것이 가능케 되는 세계로 그려진다. 반면에 바람의 세계는 그 바깥, 아니 '내재된 바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니체의 <두 개의 방> 이론을 연상시킨다.

"니체는 예술의 '두 개의 방' 이론을 주장한다. 높은 문화는 "사람들의 뇌 속에 말하자면 두 개의 방을 만든다. 하나는 학문을 느끼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이 아닌 것을 느끼기 위한 방이다. 이 방들은 서로 붙어 있으며, 혼란이 없고, 서로 분명하게 나뉘어지고, 서로 연결 가능하다. 건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 곳에는 동력이 있으며, 다른 곳에는 제어기가 있다. 환상과 편파성과 열정은 열을 발산하는 것들이다. 열이 과다하면 불길하고도 위험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막는 것은 학문, 인식의 학문이다." (2,209) (루디거 자프란스키, 305~306)

에른스트 베르트람은 그의 책 <니체-한 신화의 시도>에서 니체를 빌어 '문화'와 '문명'(혹은 독일적 문화와 프랑스적 문명)을 구분하는데 문명은 삶의 유지이며 삶을 안심시키는 것이라면, 문화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본다. "문화는 음악의 디오니소스적이고 비극적인 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문명은, 이것도 물론 필수적인 것이지만 밝고 긍정적인 우리가 살 수 있는 분야에 머문다. 문명은 합리적이지만 문화는 합리성을 초월해서 음악적이고 신비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여전히 영웅적이다."(루디거 자프란스키, 499) [...] "편히 사는 데에는 문명이면 충분한데, 도대체 왜 문화가 필요한 것일까? [...]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일에서 내가 격었던가 - 모든 것이 순조로우면, 그러면 역시 모든 것이 다 끝이 난다." (베르트람, 353) (루디거 자프란스키, 501)

    * 루디거 자프란스키, <니체 -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오윤희 역 (문예출판사,2004)

    *  European Foundation Joris Ivens - http://www.ivens.nl/

    * 미스트랄(Mistral)이란? - 프랑스의 론강을 따라 리옹만으로 부는 강한 북풍. 하강류(下降流)와 좁은 골짜기로 휘몰리는 분류효과(噴流效果)로 거세지며, 스콜성의 한랭건조한 바람이어서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준다. 론강의 삼각지대인 프로방스지방에서 불어오는 북서풍과 뒤랑스계곡에서 불어오는 북동풍이 합류하는 주변이 가장 강하다. 일반적으로 저기압이 티레니아해 또는 제노바만에 위치하고 고기압이 아조레스에서 중부 프랑스로 진출할 때에 분다. 미스트랄은 한번 불기 시작하면 수일간 계속되는데, 특히 마르세유에서는 연간 거의 100일 동안이나 이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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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글쓰기(혹은 여타의 창작행위)를 통해 자기, 본질, 진리, 전체에 이를 것이란 망상에 빠지기 쉽다. 이 망상은 글쓰기에 근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장점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근엄한 것이 더 이상 쿨하지 않은 요즘에는 그것도 별로 인 듯 하다.

글쓰기에 대한 망상을 이젠 거꾸로 돌려보자. 글쓰기(혹은 여타 창작행위)는 환원 혹은 졸이는(boiling-down)하는 것이 아니라 부피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내가 쓴 것이 나다. 10자를 쓰면 나는 10자고, 100권을 쓰면 나는 100권이다. 10자를 쓰나 100권을 쓰나 알맹이가 없으면 내가 아니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그만 책은 그걸 강변한다. ^^  

이를 삶에 대한 망상으로 번지게 해보자. 우리는 마치 어떤 외재적 삶의 공식 혹은 심연의 삶의 원칙이 미리부터 우리를 지배한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이 착각으로 인해 초래된 삶으로부터의 자기 소외에 절망한다. 세상을 탓한다. 삶을 죽이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이 비정한 현대 사회를! 그러나 조금만 틀어보면 자신의 착각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착각으로 두 가지 죄악을 범한다. (1) 우선 자기 삶의 음악과 춤을 죽였다.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을 썰렁하게 만들고 주변사람들도 썰렁하게 만들었다. (2) 그리고 춤추려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객관적 돌뿌리'를 선사한다. 객관적 돌뿌리는 바로 춤을 포기한 그 자신이다. 다른 삶의 암세포가 되는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殺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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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6-3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착각 잘 알면서도 절대 걷어내지 못하더군요,

간달프 2004-07-03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착각... 감옥이자 궁전이거들랑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