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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은 우울증에 대한 전방위적 조망, 더불어 '우울사회'로 지칭되는 이 시대 기운의 해법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는 책이다. 17세기 로버트 버튼이 멜랑콜리에 대한 천 년간의 사상을『멜랑콜리의 해부』(국내 미번역)로 정리한 것만큼이나 현대적으로 훌륭히 계승한 책인 것 같다. 저자 자신이 우울증 환자이기도 하지만, 학술적 연구 수집만이 아닌 서아프리카 주술 치료 의식 '은두프'를 받으러 세네갈까지 갈만큼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우울증 치료들을 찾아 직접 체험하며 전한다. 또한 인종별, 나라별, 계층별, 성별, 의약별, 생활 사건, 역사적, 정치적 등 세세한 접근점도 놓치지 않는다.

 

BC 5세기 전 "우울증은 뇌의 질환으로 경구용 치료제를 써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정확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치료 접근에 지지부진했었다는 게 기가 막히고, 현재의 사회적 이론들과 심리치료 방식들이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따르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어도 그 양상은 정신생물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나뉘어 치열히 논쟁 중이라는 것은 우울증의 증상만큼이나 괴리스럽다. 이런 상황을 보자니 인간 이성의 한계인가, 까지 의심될 정도다

 

우울증을 바라본 역사를 보면 그것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온 것일까? 전혀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중세시대 도덕적 박해와 처벌 -> 르네상스 시대의 우울증 미화(일종의 천재병) -> 이성주의 시대(인간의 나약함) -> 18세기 후반 신교 금욕주의(사회의 타락, 귀족병)/낭만주의(직관의 힘) -> 19세기 염세주의/본격적인 뇌 질환으로서의 접근

 

시대에 따라 우울증을 보는 관점이 판이했고, 여전히 우리는 우울증 환자를 기피하거나 불편해하는 거리감을 가지며, 우울증은 자기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의지적 문제라는 편견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앤드류 솔로몬은 동양권에서 특히 이런 편견이 심하다고 한다).

 

우울증을 병으로 인식한 현대는 세로토닌 같은 뇌신경전달물질 등과 우울증의 관련성을 찾아내 각종 치료제를 개발해 내놓고 있다. 이제 그러한 약들을 인류를 위해 잘 활용하고 있을까, 그또한 그렇지가 않다.

 

p497 현재 미국에는 빈곤층의 우울증을 발견하거나 치료하는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이 부재하기 때문에 빈곤층 가운데 지속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형편이다. 저소득층 의료보험 프로그램인 메디케이드 대상자의 경우 광범위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본인이 나서서 권리 주장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p499 진보적 정치가들은 빈곤층의 불행을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반면, 우파 정치인들은 그것을 게으름의 결과로 여겨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사실 대다수의 빈곤층에게 그것은 고용의 기회나 일하고자 하는 동기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신장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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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1년 출간되었는데 위에 제시된 미국시점과 지금 한국 사회 우울증 취약계층의 상황이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진 건 모르고, 일자리 창출이나 생활보조비 찔끔 주는 걸로 대책이라 말한다. 불안과 우울이 세대를 거치며 폭력양상화 되고 비관자살, 사망사고가 급격해지고 있는데도 보도 자제를 미봉책으로 삼고 있으니....

 

 

<한낮의 우울>은 우울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과 분야 견문, 사회적 통찰에는 좋은 책이지만 상담치료 같은 효과를 바라는 독자에게는 썩 부합하진 않는다. 극단적인 우울 상태에 있는 독자라면 700 페이지 분량을 읽어내려가다가 더 우울해질 수도 있다;

시급한 우울 처방이 필요한 사람에겐 디어도어 루빈 <절망이 아닌 선택>을 권한다. 아래에 본문을 살짝 소개해본다.

앤드류 솔로몬이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우울증 환자들을 만나러 갔을 때 받아든 고래수프처럼 당신에게도 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ㅡAgalma

 

 

 


 

 

<절망이 아닌 선택> 내용 中

 

 

/자기 파괴를 막아주는 도움/ 

 

어떤 사람이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봐야 한다. 그가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거의 모든 경우에 이 대상은 자신을 스스로 이상화한 관념에 미치지 못하는 양상들을 종합한 집성체(集成體)이기가 쉽다. 세상에 대한 분노라던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미안함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어 분풀이를 하고 싶은 욕구나, 부활에 대한 착각 같은 부수적인 소득을 염두에 둔 다를 동기들과는 상관없이, 거의 언제나 그러하다. 이 얘기는 나중에 ‘도움’과 연관지어 다시 하겠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를 증오하는 정서적인 좌절감에 시달리는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왜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하는 데 대한 당혹감 그리고 자존심의 외곽에 가해지는 모욕감이 인생을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5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수중에 300만 달러가 남은 사람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까닭은 그의 자부심 외곽을 이루었던 경영상의 천재성이나 만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입은 손실은 창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취해야 할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조처를 설명하겠다. 희생자의 성격이나 이른바 ‘장점’에 관해서 얘기해주려는 유혹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심해야만 한다. 왜 그런지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얘기하겠다. 그러니까 우선 이렇게 해야 한다.

 

1.어떤 ‘부수적인 소득’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희생자가 이해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2.엉뚱한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얘기해줘야 한다. 그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자신을 말이다. 폭군적인 지배자이자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나로부터, 나를 보호할 자는 오직 바보뿐이다.

3.사람에게는 자아가 여럿이며, 한 자아가 무너지더라도 다른 하나는 살아남지만, 그것은 육체를 죽이지 않았을 때의 얘기임을 납득시켜야 한다.

4.견디기 힘든 정서적 고통은 논리적인 이유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통제가 가능하고, 제거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실질적인 유예(猶豫)희망을 제공해야 한다.

5.우리는 당장 그를 ‘인간화’하고, 인간이란 정말로 무엇인지 현실을 깨우쳐주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단점과, 한계성 따위의) 인간적인 속성들에 관해서 얘기했지만, 이렇듯 강렬한 절망의 반응에 임했을 때는 우리들의 간섭이 각별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이러한 조처는 자기 수용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증오를 크게 희석시키는 자비의 힘을 위한 효과적인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자기 이상화라는 형태의 간접적인 자기증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영광으로부터 더욱 몰락하는 부수적인 위험을 막아주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에게, 특히 아주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 왜 우리들은 ‘좋은’ 성품을 강조하기를 조심하고, 우선 다섯 단계의 조처부터 충분히 실시해야 하는가? 그 까닭은, 가장 심한 좌절감을 느낄 때, 우리들은 자신에 대한 증오와 가장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래서 우리들의 증오가 정당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철저히 인간적인 단점을 강조함으로써 증오를 정당화하고, 그들이 당연히 그런 인물이 되었어야 한다고 믿게끔 자신을 착각으로 몰아넣었던 이상형과 비교하면서, 실제의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느냐 하는 차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타인들로부터 듣게 되는 얘기의 내용을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냐는 식의 얘기를 들으면, 좌절한 기분에서는 우리들이 그런 자질이 얼마나 모자라는지를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결과만 가져온다. 나아가서 우리들은 그런 자질들을, 우리들로서는 성취할 능력이 없는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순종을 여전히 요구하는 무서운 감독관으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성품'들은 채찍을 휘두르는 폭군적인 감독관이 되고, 거기에서의 탈출은 마비시키는 절망감이나 죽음 자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한낮의 우울>
P201 "연민이 아니라 수고가 치료법이다. 수고는 뿌리 깊은 슬픔의 유일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 샬로트 브론테
P203 "어떤 병에 대한 처방이 여러 가지라면 그 병은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것이다." - 안톤 체호프

<한낮의 우울>
P242 "내가 목발을 짚고 있었다면 가족들이 춤추러 가자고 하지 않겠죠." 가족들이 기분 전환을 시켜 주겠다고 자꾸 나가자고 졸라서 못 견디겠다는 한 여성의 말이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고통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밀로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보이지 않는 깁스를 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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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선이 산으로 끌어올려지고 있고 한 남자가 마주 바라보고 있는 <피츠카랄도> 포스터는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컷이다. 피카소 <게르니카>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처럼 뇌리에 박히는 이미지, 이런 이미지는 예술가가 아니면 만들 수가 없다. 제임스 카메론이 그 유명한 선박사고를 가져와 <타이타닉>(1997) 같은 영화를 만들고 이후 3D 버전으로까지 재현에 용을 썼어도 결국 남은 건 무엇인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그 유명한 포즈? 노래방 뮤직비디오 영상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셀린 디옹의 팝송?

 

 

 

 

 

<피츠카랄도> 포스터 자체가 대변하듯이 베르너 헤이조크의 영화를 접할 때면 나는 '경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예술이 이 현실 너머의 그 무엇을 포착하고 보여주려는 의도이자 예술가 자신과 인간의 내재된 원초성을 끌어내고야 만다는 점에서, 베르너 헤이조크 감독은 예술가로서 혹은 모험가로서 ㅡ위치적 입지가 아닌 목적지향에서ㅡ성공했다. 그것도 영화로. 무수한 변수들을 감안해야하는 영화가 예술의 완성을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피츠카랄도>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피츠카랄도는 대단한 오페라광인데 파산 상태임에도 아마존 강의 외딴 도시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카루소를 공연하길 꿈꾼다. 포주이자 애인인 메리의 지원으로 배를 산 피츠카랄도는 고무농장 활로를 개척하려 한다. 사업의 진척을 6개월 안에 정부에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항로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피츠카랄도는 밀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최단노선을 계획했지만 그걸 실행할 인력도, 돈도, 능력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고작 축음기로 카루소를 밀림 속으로 들려주는 것이다. 그때 외부인을 배척하기로 유명한 정글 인디언 부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배가 밀림을 통과하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족의 구원자가 하얀 신의 모습으로 온다는 신탁을 믿고 있었고, 피츠카랄도의 배는 그들의 세계를 바꿔줄 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산을 넘으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던 피츠카랄도는 인디언 부족이 죽음의 협곡으로 신을 시험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했다. 사업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피츠카랄도는 배를 다시 팔아 남은 돈으로 카루소 공연을 선상에서 펼치기로 한다. 피츠카랄도는 변함없는 빈털털이로 자연과 오페라의 하모니를 만끽하며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베르너 헤이조크 스스로의 광기, 피츠카랄도의 탐미에 대한 광기, 인간의 식민지 개척이라는 탐욕의 광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신적 광기, 즉 내·외적으로 총체적인 인간의 광기를 보여주는 오페라다. 하루살이는 처음 보는 불빛에 어떻게 뛰어들 수 있는 걸까. 생의 충동에너지, 본능.  

 

 

 

 

베르너 헤이조크가 자신의 이상인 이 영화 제작을 위해 4년간 수많은 이들을 착취했듯이(인명 피해도 났다), 피츠카랄도도 자신의 예술애호를 위해 메리(여자)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착취하던 것은 얼마나 필연적인가. 베르너 헤이조크가 우리에게 관람석을 마련했듯이 피츠카랄도가 돼지를 위해 붉은 의자를 비워둔 오버랩은 또 어떤가. 그 속을 파헤쳐 볼수록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음에도 우리에게 끝까지 전해지는 이것은 무엇인가.

 

비장함과 유머를 다 갖춘 영화, 그것은 오페라의 성질이기도 하다. 오페라가 없었다면 현실에서 배가 산을 넘지도, 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이 빈틈없음. 예술의 자리.

 

 

 

 

 

 

헌데 이 나라에선 가 트라우마와 부정성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돌이킬 수 없는. 건물이나 다리, 환풍구와 달리 ​라는 사물이 인간 무의식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죽음과 배가 괜히 엮여져 있는 게 아니다. 카론의 배.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현실만으로는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다. 최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그 개개의 참혹들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무한히 떠돌고 있음을 방증해 보여주고 있다.  

이 나라의 광기를 치유해 줄 예술이 오기를 나는, 무척 기다린다. 수 천년이 지나도 그것은 늘 현재로 당도할 것이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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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

이 소설의 실제모델 유나바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불행한 상황들을 강요한 다음 불행한 느낌을 제거하는 약들을 주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실상 항우울제는 환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상황들을 견뎌 낼 수 있도록 내면의 상태를 조절하는 수단이다."

 

 

자신을 조정하고 조절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유령처럼 출현하는 존재이지 않을까. 상을 타고 업적을 보여주면서 또는 사건을 일으키고 자살을 하면서 잠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러한.

우리는 좀더 긍정, 좀더 부정의 추를 오락가락하며 시소를 타고 있을 뿐이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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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웃겨 죽이려는 책이잖아. 촘스키의 언어학적 나무의 이분법을 쳐부수는 리좀 발화 너무 매력적. ˝나무라면 진절머리 난다˝니, 프로이트 장군이라니...ㅋㅋㅋ...이 책은 어려움과 유익함보다 재미와 혁신면에서 더 점수를 줘야하는데, 왜 아무도 그런 말은 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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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2-21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띠외디푸스에서는 이런 말도 했죠.

꿈에 작대기가 보이면 그냥 남근이라고 말해. 안 그러면 따귀를 맞을 테니깐...

AgalmA 2014-12-21 18:34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에서도 앙띠 외디푸스 언급하며 프로이트와 클라인의 불쌍한 한스와 리처드 얘기를 해요.
프로이트의 문학 분석, 농담이나 uncanny 같은 심리성, 꿈의 4가지 체계에 대한 견해는 주목해야 될 부분이 있지만, 누구나 체계를 한번 만들면 환원주의가 돼버리기 쉽죠. 사람들은 그런 선례를 또 너무 쉽게 따라가고 말이죠. 그 부분에 대해선 스스로 분석하기 보다 남의 분석에 편승하는 게으름의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가타리와 들뢰즈는 여기서 그걸 신나게 깨부수니 저또한 신나네요ㅎ 물론 그들이라고 헛점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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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독해법은 늘 그렇듯이 홍상수 감독의 시간 놀이 룰을 보는 것이다. 첫인사를 나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선과 모리는 몇 컷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제법 속내를 아는 사이로 나온다. 감독은 친절하게도 모리의 입을 빌려 이 시간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은 우리의 몸이나 탁자처럼 실제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든 추상적인 틀(과거-현재-미래)일 뿐이니 꼭 거기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그런데 인간인 우리가 이 착각의 놀이에서 살아있는 동안 빠져나온 예는 종교적 해탈밖에 없었다. 그것은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그 본질적 일의성 때문에 현실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대신 인간은 꿈의 영역을 유사대용품으로 향유한다. 알다시피 고대에서부터 인간은 이야기와 극에 사족을 못쓰는 종족이다. 우리는 늘 자발적인 배우이자 멈추지 않는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가 될 수 없었던 딱한/딱 한? 존재가 있었는데, 강아지 '꾸미(꿈)'이었다. 극중 인간의 연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워하고 불편해하는 꾸미의 모습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수 세기를 같이 겪어오고도 강아지들은 인간들의 이 짓이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것 같다. 꾸미길, 꿈이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시간 놀이니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상수 감독은 이 시간 놀이에 모두 초대한다. 자꾸만 입장이 바뀌는(바꾸려는), 그래서 늘 상황이 우스꽝스러워지는(진지한), 그들(인간)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러한 영화적 시간 놀이는 홍상수 감독의 나비꿈이자 행복이기도 할 것이다.  '행복'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모리가 꽃을 한없이 들여다보게 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고 그저 담대히 맞게 된다고 했듯이 말이다. 홍상수 감독은 시간에 공간(앞, 뒤, 옆, 위, 아래)을 만들어 계속해서 주사위를 던진다. 이러다 한번쯤 행복이 나오려나? 주사위처럼 예측할 수 없는 꿈과 장면들을 계속 뒤섞고 싶은 이유다. 개(꿈)를 찾는데 선수라는 모리는 이 영화의 시간 배열 속에서는 꾸미 외엔 아무것도 제대로 찾지 못한다. 홍상수 감독의 위치는 동의자일까, 지휘자일까. 그리고 관람하는 우리는? 

 

 

 

 

 

 

모리-권 // 모리-영선 관계를 보자. 모리는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나지 못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둘은 같은 시간대의 공간에 함께 있지 못하므로 어떤 감정 교류도 할 수 없다. 권은 모리의 뒤늦은 편지만 다른 시간대에서 계속해서 읽고 있을 뿐이고, 모리는 권의 집 앞에 붙여둔 자신의 메모만 또다른 시간대에서 반복해서 발견한다. 권이 없는 시공간에 우연히 영선이 있음으로 해서 모리와 영선은 둘만의 시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급기야 영선은 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제 모리가 떠나면 영선이 일본으로 찾아갈 판이다. 홍상수 감독의 시간 놀이 룰에서 보면, 지금 권이 어떤 사연(병) 때문에 모리와 만날 수 없듯 미래의 영선도 모리와 어떤 사연으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모리는 영선과 사귀게 되길 의도치 않았다. 오히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남희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시공간은 적절히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쌓일 시간의 꼬임이 필요했으나 우리의 기대와 매달림과 상관없이 주사위는 계속 던져진다. 다음엔 또 누구란 말인가?

 

 

 

 

어떤가. 이 꼬리물기들을 보는 심정이?  '(절대적/운명적) 사랑' 이란 얼마나 협소하고 우연한 결과인가. '과거-현재-미래'라는 틀을 만들 듯이 '특별한 그/그녀'란 의미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함정에 함께 빠지지 않으면 서로 소통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간이든 상대든 사물이든 모든 틀들을 뒤바꾼다.

이 시점에서 이 대화를 되짚어보자.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일본인들을 깨끗하고 예의 발라서 좋다고 하지만, 모리는 그 점들이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바꿔 말하고 싶다. 깨끗한 일직선의 시간(그들)은 우릴 매료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겐 시간의 꼬임, 누구와도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시간의 돌발과 계속 긴장시키는 시간의 연결고리들, 찾고 보고 싶게 만드는 시간의 향료(기억)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모리-권의 해피엔딩과 모리-영선의 관계의 시작점이 왜 함께 배치되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과연 그것은 끝인가, 시작인가 또는 꿈인가, 실제인가. 모리는 꼬임의 관계가 아닌 강아지 꾸미(꿈)는 발견할 수 있지만 꼬임의 관계인 사람 권(현실)은 찾을 수가 없다. 모리는 인과적 시간의 꼬임이 없는 잠(꿈) 속으로까지 접근하지만 모리와 우리는 재차 목줄이 매인 현실의 시작점으로 끌려나온다. 이 영화 또한 홍상수 감독의 나비꿈이잖은가? 관객 또한 영화적 시간의 꼬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가 끝나면 어쩔 줄 모르고 덩그러니 앉아있다 서둘러 제 현실의 노선으로 다시 돌아오잖은가. 배우인 우리에게 원리는 중요하지 않다. 더, 더 많은 이야기를 달라고, 그 시간 속에 기꺼이 빠져 살겠다고.

그렇게 다음 영화가  계속 시작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演技, 延期, 緣起한다.

 

 

ps) 

- 이 영화에서 '꾸미' 다음으로 인상적인 장면은 모리와 권이 계동초등학교앞 도로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이다.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그게 모리의 꿈이 아닌가 하는 점보다, 영화 속 정황이 우연인지 연출인지 더 궁금했을 것이다. 모리와 권이 언덕 너머로 내려갈 쯤 오토바이를 탄 남녀 한쌍이 그들 방향으로 달려가고, 그들이 사라질 쯤 맞은편 도로에서 아이를 앞에 태운 남녀가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온다. 스포가 될 듯 해서 더 깊게는 말할 수 없겠으나 대사와 그 정황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장면이기도 하다.

- 육하원칙으로도 이 영화를 분석해보고 싶기도 한데, 언젠가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또 할 말이 생길 것 같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vs <자유의 언덕>에서의 해원의 꿈과 모리의 꿈 설정으로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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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5-03-2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連記` 이 단어는 왜 빼셨나요? 이 영화도 두개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요..홍상수,,이제는 별로 마음이 콩닥콩닥하지 않는 존재가 됐죠,,이 영화,,너무 어렵더라고요,,ㅋ 혹시 홍상수 영화중에 좋아하는 영화가 어떻게 돼는지 살작쿵 묻고 싶네요,,저는 여전히 `생활의 발견`이지만요~ 그 냉소가 좋았아요,,그 인간관계에서의 쿨함요~

AgalmA 2015-03-26 15:47   좋아요 0 | URL
지금처럼 네오님이 추가해주시면 되죠 :) 아, 제겐 ˝오, 수정˝을 처음 봤을 때의 설렘 잊혀지지 않네요. 홍상수 감독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이기도 하고요. 생활의 발견, 하하하, 낮과 밤, 옥희의 영화, 옴니버스 단편(제목이 갑자기 생각이...)을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쿨함도 너무 빈발하면 식상해져서^^;
로메르 작품을 본격적으로 보고 비교도 해보고 싶은데...하여간 영화들은 모두 토끼처럼 잘 달아나고 있습니다

네오 2015-03-2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첩첩산중요,,음,,,,오, 수정요, 참 어떻게 말해야할지,, 이동진이 그랬죠 홍상수랑 같은 언어를 써서 감사하다고요,, 오 수정만큼 오해된 영화도 없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이게 그런게 있는것 같아요 성에따라 각자 생각하는게 안드로메다와 지구사이같았어요 우선 남성들이 좋아할만 소재인데 여성들은 여기서 무엇을 발견했을까라고 그 의심을 확장하면 잘 모르겠더라고요~

AgalmA 2015-03-26 16: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첩첩산중^^
과찬할 목적은 아니고요. 구로자와 아키라 ˝라쇼몽˝처럼 ˝오, 수정˝은 우리나라 영화에서 (아마도 처음 아닐까 싶은데?) 작법으로 다가간 회전시점 영화죠. 홍상수는 그걸 꾸준히 영화에 적용시키고 있고요. 생활의 발견에서 아예 회전문까지 나오잖아요ㅎㅎ 홍상수 영화에서 왜 그토록 꿈이 많이 등장할까요. 그건 작법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죠. 긴 분석은 언젠가 말할 날 있겠죠.
여하간 홍상수 영화에서 보통의 관객들은 찌질함, 남녀관계, 폭로성 그런 것만 읽고 치워버리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읽어야 될 것들은 그의 독특한 작법성이죠. 그런 인물들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그 작법 때문에 인물들이 묘해지는 거니까요. 내가 그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많은 상황 속에서 내가 만들어지듯이요.

네오 2015-03-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라쇼몽,,회전시점과 회전문이라, 음,,정말그전에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생각이 안나네요~그런데요 그 찌질한거 여성의 입을 통해서 너무 많이 들었어요, 홍상수는 발전하는데 그들의 생각은 멈춰있더라고요, 저한테는 제임스 조이스처럼 느껴지는데도요, 그 시간 주관적으로 전자렌지에 넣은 피자에 녹는치즈처럼 서서히 스며드는거요, 그는 문학가로 치면 포스트모던스트인데도 그런건 다 생략하고 너무 연애만 한다고하니,

AgalmA 2015-03-27 00:16   좋아요 0 | URL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할 때 정말 그럴까, 다르게 생각해볼 때 진짜 내 생각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다른 이면을 보려고 할 때 문학적 감수성이 나타날 테고요. 그걸 풀어나가는 장치로 철학, 문학, 영화, 사진, 미술, 음악 등의 다양한 표출이 이뤄지는 거겠죠. 가치를 보려고 하면 돌 하나, 구름 한 점도 뮤즈이자 신으로 보이는 법.
다들 너무나 쉽게 보려고만 하거나, 어렵다고 외면하려고만 하니 무가치라 말하는 것이 산처럼 쌓여 갑니다...(본심은 아니거나 생각이 짧거나)삶 조차 무가치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북다이제스터 2015-12-18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겠습니다.^^

AgalmA 2015-12-18 19:36   좋아요 0 | URL
홍상수 영화를 이제껏 보지 않으셨다는 게 더 신기합니다. 요즘은 거의 단관 상영이 많아서 그렇다쳐도 초창기 <생활의 발견>, <오 수정>은 큰 이슈이기도 했는데^^....
이제 즐거운 탐험 되시겠네요^^

북다이제스터 2015-12-18 19:4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자칭 영화광인데...ㅎㅎ
앞으로 홍상수 신세계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