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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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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인용들을 보며, 이건 영락없이 모리스 블랑쇼인데...했더니 역시나 레비나스가 쓴 모리스 블랑쇼 비평집도 있었다. 왜 그런지 두 사람의 문장을(특히 블랑쇼의 소설들과) 나란히 읽어보면 당신도 대번에 알게 된다. 모리스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하여간 나도 우치다 타츠루씨가 블랑쇼 연구하다 레비나스에게 빠진 것과 똑같이 되려나.......하며 읽어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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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난 소감은…… 기꺼이 다 읽은 기분이 아니라 다 잃은 기분이다. 허허허....

이 책을 읽/잃기 전에 데카르트의 성찰과 후설의 현상학을 읽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레비나스가 그들의 어떤 점과 맥락을 같이하며 어떤 것을 넘어서려 했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그 외 많은 경험도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은데, 왜 레비나스의 철학은 어른의 철학이라 말했는지 3장에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여하간 텍스트로서는 우치다씨가 잘 짚어주긴 했지만 후설은 부분 인용으로 부족한 감이 있다. 나 자신이 그들을 통해 인지하고 지각했던 걸 뒤흔들어 줄 지진을 느껴야 아마 당신은 레비나스가 뭘 말하려 했는지 더 와닿을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자신이 뭘 잃는지도 모르고, 뭔가 얻어도 간절하지 않아 금방 잊게 된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이 책에 접근하는 독자는 온갖 모호한 아포리즘들과 '우치다 타츠루씨는 레비나스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군.' '아니, 하루키씨 에세이도 있네!' 정도 외에는 별로 남는 게 없을 거다. 그렇더라도 거의 다 잃고 다시 시작하는 나보다 덜 쓸쓸할 수는 있겠다....

우려는 했지만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1장 타자와 주체

 

 

p37  자신이 랍비이기도 한 마르크-알랭 우아크냉은 '마할로케트(쟁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중략…)'어떤 사람들의 말, 그것과는 다른 사람들의 말, 그것이 살아 있는 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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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철학자들의 말과 사상은 앞선 사상에 대한 부정과 혁파를 논한다. 그리고 다음 철학자가 또다시 그렇게 한다. 우치다씨가 레비나스를 우선적으로 격찬한 건 그가 앞선 철학자들을 최대 존중하고 칭찬하면서 그 너머로 넘어가려는 매우 겸손한 자세에 있다. 이러한 자세는 랍비 학자다운 면모이기도 하면서 레비나스의 '전언철회'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 스스로 긍정/부정 그 모두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철학은 그토록 탈무드적이며 모호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명석한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나의 말과 다른 사람의 말, 대화의 작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랍비 같은 스승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p77  전체성을 지향하는 '자기'에는 '외부'가 없다. 아니, '자기'는 아예 구조적으로 '외부'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성 지향이란 '이해를 초월한 것'을 명명하고, '스스로의 용량을 초월한 것'을 적정한 사이즈로 잘라 줄이는, 맥락 없이 산란한 것을 하나의 '신화같은 이야기' 안에 정리하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당찮은 지적능력의 별명이기 때문이다.

 

p78  이러한 '자기'적인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무한을 지향하는 나'가 구성된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독창에 관련된 주체개념이다. 전체성을 지향하는 주체의 모델이 오디세우스라면, 무한을 향하는 주체의 모델은 아브라함이다.

 

p81  세계라는 틀 속에서 다른 사람은 거의 무와 같다(TI.p.173)

 

p84 '타자'는  '타자성'인 속성을 미리 구비한 자로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 자'로서 '향유'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 자'로서 '향유'되는 것에 대한 절대적 저항을 만나, 내가 '향유'를 망설인 그때에 '타인 자'는 '타자'가 되는 것이다.

 '타자'의 생성과 아브라함적인 '나'의 생성은 동시적으로 생기한다. '절대적으로 타인 자'인 '타자'는 아브라함을 기습하여, 그의 '세계'에 이해를 초월한 '외부'가 존재함을 고지한다. 이 경험을 아브라함은 어떠한 기지旣知에도 환원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경험'으로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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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의 비유 중 하나일텐데, 나는 오디세우스면서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적인 '나'는 '타인 자'를 '향유'하고, 아브라함적인 '나'는 주의 말씀처럼 '타인 자'를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으로 무언가를 획득했다거나 하나로 결론 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고작 경험했을 뿐이다.

 

 

p87 유일한 신에게 이르는 도정에는 신 없는 역참이 있다.(DL, p.203.)

 

  이 '신 없는 역참'을 지니는 자의 고독과 결단이 주체성을 기초지운다. 이때 주라고 하는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아브라함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 불가능한 유책성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일어선다. 이렇게 해서 자립한 자를 레비나스는 '주체' 혹은 '성인adulte'이라 부르게 된다.

 

     질서 없는 세계, 즉 선이 승리할 수 없는 세계에서의 희생자의 위치를 수난이라 부른다. 이 수난이라 부른다. 이 수난이 어떤 형태로든, 구주救主로서 현현하는 것을 거부하며, 지상적 부정의 책임을 일신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을 요구하는 신을 개시開示하는 것이다.(DL, p.203.)

 

 

'성숙한 인간', 그것이 아브라함적 주체의 별명이다.

 

 

     부재한 신에 여전히 믿음을 둘 수 있는 인간을 성숙한 인간이라 부른다. 그것은 스스로의 약함을 헤아일 줄 아는 자를 말한다.(DL, p.205.)

 

 

'신 없는 세계에서 여전히 선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구주가 현현해서 현실의 인간적 부정을 바로잡아준다고 믿는 자나, 역사의 심판력이 언젠가 모든 것을 정돈해준다고 믿는 자, 그들은 전체성을 믿는다. 그런 합당치 않은 경신이나 절대적 이성에의 귀의는 결코 주체성을 기초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행위를 '신/역사가 명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그런 무-책임으로부터는 어떠한 유책적 주체성도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주체성은 이해를 초월한 주의 말씀을 오직 혼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오직 혼자의 책임으로 해석하고, 살았다는 '대체불능의 유책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초지어진다. 이 주체성은 신이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었기 때문에 획득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무근거를 견뎌냄으로써, 그가 신과 가까이했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과의 접근 안에서 절망적인 고독을 맛봄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2장 비-관조적 현상학

 

 

p100 현상학은 회의론보다 더욱 깊고 강하게 이성의 깨어남을 의심함으로써, 회의론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다.

   소박한 실재론은 '우리는 확실한 실재를 앞에 두고 있다'고 하는 무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회의론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 중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전부정 안에 머무른다. 그 양면을 기각하고자 하는 현상학은 "확실한 것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하는 우리의 불능은 어떠한 양태를 취하는가"라는 물음 안에서 돌파구를 찾아낸다.

   이성은 분명히 속는다. 이성을 속이는 작용은 '이성 그 자체 안에서, 이성의 이성적 발걸음에 저촉되는 일 없이, 이성이 모르는 곳에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명석성 그 자체에 거슬러, 이성의 자연발생적이고 무반성적인 운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성을 작용시키는 일이 필요해지는 것이다.'(DDQV,p.41.)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우리는 ……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경험적 가능사의 집적으로써 체계를 구축한다. 그것에 대해 회의론은 '우리는 …… 할 수가 없다'고 하는 불능의 어법을 펴서 그 체계를 쳐부수고자 한다. 현상학은 그 모두를 물리치고, '우리는 ……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스스로의 이성이 지닌 불능의 모습에 대해 이것을 '기술 할 수 있다'는 것을 철학의 초석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p102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그들 가치판단의 어느 것인가에 가담한다든지, 판단에 즉해서 살고 있다.' 레비나스의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시선은 '그 대상에 의해 막혀 있'(EL,p.76)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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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까지 정말 신나게 읽어내려갔는데, 3장에서 갑자기 김샜다. 앞서 우치다씨가 레비나스가 후설과 하이데거를 양축으로 해서 발전해 나갔다고 했으니 3장에서는 이제 하이데거!...그러나 나를 기다리는 건 보바르와 이리가라이가 페미니즘으로 레비나스 공격하는 이야기; ... 별로 이런 걸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 제목에 '사랑'까지 있는데 나는 왜 '사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걸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물론 그 사태에서 진정한 여성 언어란? 시사점을 던져 준 건 유익했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타자와 사자死者:라캉에 의한 레비나스』, 『시간론』레비나스 3부작을 계획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만 번역된 것 같은데 나머지 책들도 궁금하다.

『시간론』에선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본격 비교해 줄 거 같아 기대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너무 안 읽혀서 말이다.ㅜ...개론서는 더 재미없고. 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나름 인기있지 않았나 싶은데, 어서 나머지 출판을/~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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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바슐라르가 그 질료들로 영화를 분석했다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공기' 질료와 밀접한 예술가다.

그의 첫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1963)과 마찬가지로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도 상승과 하강의 구도로 오프닝을 연다. 이러한 구도는 <솔라리스>(1972)나 <희생>(1986)도 예외는 아니다.

이카루스 신화처럼 인간의 운명은 반드시 추락을 향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이름과도 같은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통해 '신성에의 귀의'를 운명에 대한 타개책으로 본 듯하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열기구를 떠오르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불타며 바스러지는 장작의 표피처럼 프레스코화도 세월의 풍파로 균열 가득하지만 그 뜻은 불의 열기처럼 위로 한없이 향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프레스코화가 온통 타들어가는 장면인 이유다. 그리고 맨 마지막 등장하는....(중대한 스포이므로 생략)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육체를 떠난 완성.

타르코프스키가 본 인간이란 존재는 육체를 벗어날 수 없는 수평적 존재, 물이다. 고여서 서로 뭉쳐 있으며 흘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 사라져도 다시 비가 되어 피할 수 없이 지상으로 내리 꽂히는 존재. 그러므로 그의 영화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늘 물과 함께다. 물 없이는 영화도 없다. 농담이 아니다.

타르코프스키가 서방으로 망명하고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러시아의 풍경들을 보며, 그의 심정에 또한 공감했다. 러시아 풍경에서 빠지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과 광활한 허허벌판 말이다. 그가 망명하기 직전 <노스탤지아>(1983)를 완성하게 된 건 뭐라 말해야 할 지...

 

 

이교도 축제 시퀀스를 보고 에밀 쿠스트리차  <집시의 시간>(1989)이 그 영향을 상당히 받았단 인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견해)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물 위를 날아가는 불 - <집시의 시간>에서 도로를 날아가던 스카프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제의장면 또한 <집시의 시간>에서 제의장면과 오버랩되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마술적 리얼리즘 장면이기도 하다.

종교를 있는 그대로의 하나로만 본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교가 아닌 종교가 없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아들이 있는 러시아 종교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타타르족 수장의 말처럼.

신을 찾고 구하는 건 우리의 본능이지만, 폐쇄적 종교관은 인간의 의식 한계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반의 어린시절>에서 주인공 소년역을 훌륭히 소화했던 니콜라이 부릴야예프의 연기를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마땅치 않아 했던 심정을 이해할 만 했다. 이 영화에서 15세기 사람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부릴야예프는 존재감 자체부터 너무나 근대적이고 반항적이다. 그의 연기는 15세기 사람의 인성으로도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메소드 연기도 아닌 니콜라이 부릴라예프 그 자체로 보인다. 라이언 고슬링이랑은 또 왤케 판박이로 닮았는지;; 니콜라이 부릴라예프는 <전쟁과 평화>시대 사람 같다. 이상하게 어떤 인물은 딱 어떤 시대와 연결돼 보인다. 물론 이 또한 이 시대 내 편견이겠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신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감독으로서의 그가 너무 많이 보인다. 마지막의 이콘 장면과 ○ 장면은 반박을 불사하겠다는 인위적 몽타주.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구도적 작업에 같은 예술가로서 심적 투영도 있었겠지만, 왜 그렇게 神에 매달려야 하는지를 그는 보여주려 한 것일까, 증명하려 한 것일까. '나'라고 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을 가리키는 말이다(타르코프스키는 이또한 놓치지 않고 <거울>(1975)라는 작품도 찍었다). 우리들이 하느님의 모상(模像)에 따라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바깥에서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미 나 자신이 神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가는 그의 예술로 神을 보여준다.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최후의 심판>을 재현할 수 없어 절망 속에 물감을 벽에다 던져버리고 마구 휘저었던 표시에, 백치 여인이 그 자국을 만지고 냄새 맡으며 울던 장면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여전히 예수상과 부처상 앞에서 인간은 통곡하며 엎드려 절한다. 우리는 15세기 사람과 다르지 않고 더 과거로 가도 마찬가지다.

사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종교적 예술세계에 그토록 경도되어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자신도 이미 같은 바탕의 예술세계이므로. 그러나 어쩌랴, 인간은 늘 이전 예술에서 벨 에포크를 느끼는 것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상징'은 없었다. '상징'으로 보고 싶게끔 만드는 '비유'는 많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인간 자체가 이미 거대한 상징 아닌가.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아버지처럼 시인이자 예술가여서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충실히 묘사하고 영감에 따라 비유했다. 그것이 종소리처럼 울려 퍼져서 모든 인간에게 가닿아 삼위일체가 되길 원했다.

 

 

ㅡAgalma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1410년

(이 영화의 마지막에 집요하게 보여주던 이콘)

 

 

 

야스오의 강제 기아 수용소

 

 

어서 써. 써보란 말이야. 평범한 용지 위에 보통 잉크로:

그들에겐 식량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모두가 굶어 죽었다고.

모두라구?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데?

이곳은 거대한 초원이잖아. 한 사람당

얼마나 많은 풀잎과 잔디를 먹어 치웠을까?

어디 이렇게 써봐: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역사는 유골들을 어떻게든 제로(0)의 상태로 결산하려 애쓰고 있다.

천 명에다 한 명이 더 죽어도, 여전히 천 명이라고 말한다.

그 한 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상상으로 임신한 태아, 텅 빈 요람,

한번도 펼쳐진 적 없는 철자법 교본,

저 혼자 웃다가, 소리 지르다가, 팽창하는 공기,

공허의 늪을 향해 내달리는 계단,

가지런히 정렬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미지의 공간.

 

 

우리는 육체가 되어버린 초원 위에 서 있다.

초원은 마치 매수당한 증인처럼 침묵을 고수한다.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선명한 푸른 빛깔로.

숲 저편에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꿀꺽꿀꺽 들이킬 수 있는 수액이 뚝뚝 떨어진다.

눈이 멀지만 않는다면

일상의 풍경들은 매일매일 어김없이 배급되리라.

저 산 너머 영양 만점 도톰한 날개를 가진 새의 그림자가 비친다.

새들은 텅 빈 주둥이를 크게 벌린 채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다.

낫처럼 생긴 초승달이 밤하늘에 슬며시 나타나

꿈속에 등장한 호밀빵을 쓱싹쓱싹 베어낸다.

이콘에 등장하는 성인(聖人)의 검은 두 팔은

텅 빈 잔을 손에 든 채 허공을 휘젓고 있다.

가시 돋친 철조망의 날카로운 꼬챙이 위에는

인간의 육신이 꼬치 요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들은 대지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전쟁이 어떻게 그들의 심장을 꿰뚫었는지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를.

자, 어디 한번 써보시지. 이곳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지.

그래, 알았어.

 

 

 

- 비스와바 쉽보르스카, 『소금』(1962)

  (국내 『끝과 시작』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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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2-18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종일 좋은 글이 많군요. 류불레프 오프닝 씬을 잊지 못합니다. 첫 장면 보았을 때,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가 궁금하더군요. 좋은 영화는 항상 카메라 뒤의 풍경이 궁금해지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탄 탱고를 보았을 때도, 토리노의 말을 보았을 때도 정작 궁금한 것은 카메라 뒤에서 좆빠지게 고생하고 있을 풍경이었거든요. 허허.. 잘 읽었습니다.

AgalmA 2014-12-18 16:05   좋아요 0 | URL
첫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 오프닝 장면 때 카메라맨이 추락사망하는 사고가 있어서 루블료프 때는 더 만반의 대비를 하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더 강도높은 공중씬;.....저도 그런 장면 나오면 카메라 뒤를 정말 존경합니다. 바딤 유소프, 체르니야예프,오브치니코프 등의 동료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죠.
그런 의미에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촬영감독 유하루 아츠다씨는 촬영감독을 그만 두었다는 일화도 뭉클하죠.
 

모리스 블랑쇼를 해석하는 레비나스라니..이런 멋진 조합이! 무한한 사라짐과 거기 있음에 대한 연대이자 흐름....(물론 내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그러나 푸코가 마그리트를, 들뢰즈가 베이컨을 멋지게 분석했던 것처럼 이러한 지목에는 이미 지목을 통한 환대와 연대가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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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감독, 야노스 데르지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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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가 이토록 인상적인 영화는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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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껏 본 영화 중 러닝타임이 가장 긴 영화는 360분짜리 라브 디아즈 <플로렌티나 후발도>였는데, 벨라 타르 <사탄 탱고>가 486분으로 그 기록을 경신시켜 주었다. 두 영화 다 전주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나도 동감이다.

 

 

▒ <Satan's Tango> 오프닝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든 오프닝 장면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벨라 타르 <토리노의 말>(2011)에서처럼 척박한 자연과 그에 지친 인간과 또한 다를 바 없는 가축을 보여주는 긴 롱테이크 장면인데 아, 벨라 타르 세계로의 입장을 예고 받는다.

 

http://youtu.be/_Aud2Shtd5k?list=PLdH67EdQkcCSPyjb6XxcUJ7woP-y33-Vg

 

음울한 한겨울 낮과 괴괴한 건물, 진흙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관객을 대번에 침울하게 만든다. 순간 벽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 싶더니 젖소들이 하나둘 걸어 나온다. 마치 꽃처럼 피어나는 듯, 비너스의 탄생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곳은 도살장이다! 젖소들은 나오자마자 교미를 하려거나 카메라를 향해 돌발적으로 걸어오거나 마치 지시를 받은 배우들 마냥 개성적이고 생동적이다. 제 죽음을 짐작도 못하면서 대책없이 제멋대로인 인간과 얼마나 똑같은가! 진흙창을 몰려다니며 쫓겨가는 듯한 젖소들의 모습은 되는대로 살다가 자의반 타의반 쫓겨나다시피 하는 마을 사람들과 유사함을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통감한다. 도축장을 느릿느릿 걸어나오는 젖소들은 농민들과 흡사하고, 도축장을 뛰쳐나와 텅빈 광장을 어슬렁거리던 말들은 이리미아스 같은 급진 개혁파들과 닮았다. 모두 탈출구가 없는 건 마찬가지. 그 외 돼지, 개, 고양이, 부엉이 나오던 시퀀스들 모두 너무나 훌륭했다. 이 장면들은 직접 봐야 한다. 설명으로는 그 놀라움을 50%도 전달할 수가 없다.

 

 

▒ 벨라 타르의 '로우 앵글'

내가 벨라 타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구로사와 아키라의 '다다미 쇼트'처럼 벨라타르식 카메라 앵글이다. 벨라 타르의 영화적 자세, 세계관을 극명하게 느끼게 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대부분 벨라 타르의 긴 롱 테이크를 주로 말하는데, 내가 좀 더 주목하는 건 로우 앵글에 있다. 그의 카메라 이동은 원경이 아닌 근경에서는 내려다보는(부감) 구도가 없다. 근접 촬영이다 보니 더욱 그럴테지만 인물들이 작당을 할 땐 카메라가 그 옆에서 같이 모의를 하는 동료나 되는 듯이, 인물들이 움직이면 카메라는 앉아서 지켜보는 아이나 묵묵히 뒤따르는 가축들처럼 항상 낮춰 있다. 카메라웍은, 내가 보여주마! 하는 과시적 자세보다 우리가 그들이다!라는 연대의식처럼 보인다. 특히나 척박한 시골 환경에 대한 표현은 외부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정서를 잘 담고 있는데 혼자만의 작업이 아닌 영화에서 이러한 정조를 잘 표현하고 있어 감탄스럽다.

현시대 이런 자세의 인상적인 감독들은 장률, 지아장커 정도가 떠오른다.

 

 

▒ 벨라 타르 <Satan's Tango>를 보며 오버랩이 많이 되던 거미줄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인한 구원자를 바라는 인간의 나약함과 본능적인 죄악 사이에서 얽히고설키는 인간 삶이라는 기조(基調)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들 - 밑바닥 인간군상들이 가득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의 마치 선지자처럼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사기꾼이거나 무능력하긴 마찬가지인 점에서 오버랩

 

타르코프스키 <희생> - 환상적 구원 모티브, 절망에 빠진 인물들의 희극성, 영화 정서 등에서 오버랩

 

페르난도 솔라나스 <탱고,가르델의 망명>, <남쪽> - 유사한 시대상황 속에서 몰락하는 인간을 담는 점이 비슷한데, 안타까운 점은 <사탄탱고> 음악을 솔라나스 영화 정도만 썼어도 벨라 타르의 영화가 더 빛났을 거란 생각이...

 

니체의 '위버멘쉬' - 서양 영화들을 보면 늘 느끼게 되는 정서인데, 어째서 늘 그들은 우월한 지도자가 그들을 이끌어주길 바라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神'을 원하는 심리는 욕망의 거울에 다름아니다. 건강, 副, 행복, 성취, 인류애 기타 등등 어떤 문제든 거기 가져다 놓고 빈다. 신을 찾기보다 자신을 바로 세우라. 신의 역할은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내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지렛대 정도면 적당하다. 그게 안되니 신에 매달리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구의 종교들은 공동 정신병 같다. 신을 위시하여 모여서 하는 짓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불신과 분열과 파괴와 피를 뿌리고 있는지.... 인간의 어떠한 공동체든지 이 뿌리깊은 썩은 행태를 복사하고 있다.

 

※벨라 타르 유작<토리노의 말>(2011)은 니체가 미치기 직전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그 일화에서 따온 제목이다. 여주인공 이름 또한 직접적으로 '니체'다. 실제로 부녀가 사는 외딴 오두막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 음악에 대한 유감

역시나 [토리노의 말]에서처럼 음악은 한숨이.... 아, 음악 땜에 10점 만점을 줄 수는 없겠다; 뚝뚝 끊기는 것과 미디 음악 스타일은 정말 들을 때마다 휴....

그럼에도 이 영화의 아우라는 내 뇌리에 칼자국처럼 남았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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