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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이상한 하루였다. 분면 내게 일어난 일이지만 그 경험이 실제 하지 않았다. 속은 것도 같고 뭔가에 홀린 것도 같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한두운 생각을 좀 했다.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 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으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_108p.
지난 10월부터 들쑥날쑥한 컨디션과 이어지는 이 사 준비로 책 읽기도, 일상생활도 살짝 떠있는 기분으로 지내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떤 책을 읽어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고, 끊이지 않은 준비와 매일 이어가야 하는 일상들로 지쳐가고 있을 즈음,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고 궁금해진 작가 정용준의 신간 『선릉 산책』을 읽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허물어가는 섬세한 감정적 파동의 기록" 이라는 평을 받으며 젊은 작가상,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선릉 산책', 문지문학상 수상작 '사라지는 것들' , 2021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미스터 심플'등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7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하고 있는 『선릉 산책』.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 때론 인물들의 힘겨운 마음에 감정이입이 되어 며칠을 헤어 나올 수 없기도 했지만, 그래서 좋았다면 때로 옮겨 적어두고 싶은 문장과 마음을 만나기도 했고 상처받고 아픈 이들을 보며 그저 묵묵히 살아내는 그래서 격려하고 싶고 읽는 나도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를 생각하게 되는 글이었다. 산책하듯, 천천히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한 해를 준비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랑 상의도 안 해놓고. 마음대로 할 말만 하고.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시선이 오른쪽 뺨에 느껴졌다.
너희들은 언제 나랑 뭘 상의한 적 있었니? 그리고 내가 그걸 말한대도 너희들은 내 말 안 들어줄 거잖아. 상황을 바꿔줄 능력도 없고.
그렇지만.
원망하는 게 아니야. 사실이 그렇잖아. 너희들이 나한테 그 말 자주 했었지. 능력도 없으면서 걱정만 한다고. 그 말이 그렇게 짜증이 난다고. 니들 말이 맞다. 짜증나. 그러니까 그만해. 그리고 지금 죽겠다는 게 아니야. 더는 살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겠다는 거지. 그냥 힘 빼고 살아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관두려고. _33~34p.
두려워하는 건 반드시 찾아와. (···)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길래 언젠가 그것이 찾아오리란 생각에서 이토록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일단 애썼다. 방어적으로 살았다. 사건 하나, 갈등 하나가 뭔가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걱정하고 대비하며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어떤 일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일이 일어나지 않게 버티는 힘으로 무너지는 거였다. 안에서 밖으로 점점 갈라지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초라한 집 한 채. 그래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삶. _59p.
여기에 묶인 소설들은 모두 산책을 좋아하고 풀기 어려운 생각에 빠져 있다. 답은 없고 해답은 더 없는 오늘과 내일을 해결도 해소도 못하고 살고 있다. 한때는 그것이 슬픔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나는 안다. 슬픔. 맞는데, 그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맞는데, 뜻은 아닌 것 같다. 오후의 빛과 바람 속에서 보기 좋게 건조되어가는 물건과 그 물건을 닮은 사람을 많이 생각했던 몇 년. 세상은 엉망이고 진창이며 눈 씻고 찾아봐도 좋은 소식과 전망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소설로 쓰듯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일하고 누군가는 청소하고 누군가는 사람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트랙처럼 둥글게 산책하는 날들. 아무 변화도 없지만 그 사이 시간은 흐르고 종종 기분도 마음도 나아지는 밝은 밤들. _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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