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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4월
평점 :

수영은 방 안의 어둠을 바라봤다. 거울처럼 자신을 또렷이 비추는 어둠. 부끄럽고 참담했다. 후회조차 할 수 없었다. 상실감을 감당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종현에게 한 짓은 결국 도망이었다. 애정 없이 다가갔으므로 상수에게 한 짓도 결국 유혹이었다. 사랑했지만 사랑을 믿지는 않았다.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만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종현이나 상수에게서 구하려고 했을 뿐 자신에게서 구하려고도, 차라리 깨끗이 체념해 버리지도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종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수, 그리고 그 자신이란 명백히 안수영, 자기 자신이었다. 부서지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자신이 망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망쳤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망칠 수 있는 것을 모두, 스스로 망쳐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와 자유로, 유혹하고 유혹당할 수 있는 그 힘과 권리로. _328~329p.
드라마 방영이 시작되고 나서야 이 책이 궁금해졌다. 원작 소설은 어떤 내용일까? 얼핏 책의 내용과 드라마 초반의 흐름이 비슷하다는 이야기에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 정주행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읽기 시작했는데...
수영, 종현, 상수, 미경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은 사랑인 듯 사랑이 아닌 듯, 사랑이라면? 하지만 또 사랑이 아니라면?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미경과 사귀고 있으며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수의 마음엔 수영이 있고, 종현을 사랑하지만 현실에 지쳐가고 있던 수영은 상수와 미경의 모습을 보며 상수를 괜히 찔러보게 되고, 미경과 종현은 엇갈린 상수와 수영 사이에 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개도 빠른 편이고, 글의 흐름이 어렵지 않아 페이지가 잘 넘어가며 사랑과 연애, 한 조직 내에서 엇갈린 네 남녀의 심리 변화와 전개는 이 정도 읽었으면 드라마는 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제로도 드라마는 엔딩 부분만 궁금해서 찾아봤다. 책의 엔딩에 이르르면 앞 페이지로 넘어가 뒤적이게 되는 문장들이 몇몇 있는데... 정말이지...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만 원한 건 아니었다." 딱인 한 줄 요약.
연애란 순전히 길들이기의 문제, 누구를 만나든 결국에는 언제 어떻게 왜 내주고 받을지 서로 약속하고 그것에 적응해 나가는, 험난하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대상이 가장 중요했다. 굶주린 사자는커녕 미어캣도 못 되는 상수 같은 남자는 애당초 제외해야 했다. _74p.
상수는 진심을 다해 미경과 만났다. 수영에게 입은 상처를 아물리고 수영과 하고 싶던 모든 것을 미경과 해 나갔다. 아주 즐거웠다. 단지 감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수영에게는 정중하자니 거들먹거리는 것 같고 친밀하자니 찝쩍거리는 것 같았다. 솔직하자니 고지식해지는 것 같고 쾌활하자니 실없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_105p.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다음에는 좋은 여자. 어른들이 누누이 얘기하고 부모님이 불경처럼 외며 등골 휘게 깔아 준 철로가, 궤도가 진즉부터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_108p.
행복에는 늘 거짓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기 마련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거짓은 조명일지도 몰랐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밝고 좁은 조명. _148p.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것은 분명 사랑 때문이지만, 사랑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기울어 있었다. 아마 사랑일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더 깊게 생각하는 것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모두 사치였다.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 _159~160p.
"결혼을 한다는 건 말이야, 그 향긋한 똥밭에 알몸으로 뒹굴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게 생긴다는 뜻이야. 제 아비, 어미는 몰라봐도 제 마누라, 자식새끼는 몰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거네. 힘든 일이지. 결혼이 그래서 어려운 걸세."_174p.
사랑하는 사람이 휘청거릴 때 어떻게 부축해 줘야 하는지 몰랐다. 함께 있고 싶었고, 있어 줘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번번이 호텔 방으로 도망쳤다. 약하게도, 어리석게도. _225p.
"터널 속에 갇힌 것 같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나가야 한다고 혼자 걷고 계속 걸었는데, 걷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앞도 뒤도 다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아.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힘들다는 느낌마저 안 들어. 끝인데, 끝이 안 나는 끝에 나 혼자만 감금당해 있는 것 같아." _2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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