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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평점 :

#도서협찬 #기억의빛
#마이클온다치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때는 잘 믿기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 시기에 내 생활이 망가졌었는지 아니면 활기에 찼는지 분간이 잘 안 간다. 나는 가족의 습관에서 비롯된 규칙과 제한에서 벗어났는데, 나중엔 자유를 너무 빨리 소진한 게 아닌가 싶어 주저할 정도였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당시 일에 대해, 낯선 사람들 품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경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는 우리 부모님, 레이철 누나와 나, 나방, 그리고 나중에 우리와 함께한 다른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신화의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일과도 같다._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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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는 이름표가 없는 파편들이 너무나 많다. 조 부모님 침실에서 나는 어머니가 학창 시절 격식을 갖추고 찍은 사진들을 보았지만 그곳에 아버지 사진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고 화이트 페인트를 뒤졌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버지 시대의 정치적 지도가 광대하고 국제적이라는 사실이었고, 아버지가 우리 가까 이에 있는지 아니면 머나먼 곳들로 영원히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수많은 곳에서 살고 어디에서든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_248p.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 너새니얼과 레이철의 부모는 남매를 후견인이라는 인물에게 맡긴 채 싱가포르로 가버린다. 전쟁 중 이런저런 임무를 수행한 나방(후견인)이 범죄자가 아닐까 의심하던 남매는 그들이 사는 집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함께 어울리면서 낯선 사람들과의 생활은 이들 남매가 아이의 삶에서 어른의 삶으로의 시간을 압축해버린듯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와 싱가포르에 간 줄 알았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낯설기만 한데... 남매들이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생존 여부 등... 성인이 되어 어머니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너새니얼의 여정은 전쟁시대 어쩌면 희생자이고, 영웅이었을 사람이 삶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시절의 자락들이 아니었을까?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후 성장한 아이가 사실과 기억으로 상상하는 조금은 묵직한 첩보 미스터리 즈음이려나..
역대 부커 수상작 중 최고작에 주는 황금 부커상을 수상한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거장 마이클 온다치의 새 소설. 「기억의 빛」은 아름다운 문장과 겹겹이 쌓여가는 이야기들이 입체적으로 형태를 갖추어가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페이지가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제목의 의미가 점점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느낌! (읽어봐야 알 수 있는데~) 꽤 긴 시간 천천히 읽었던 글이지만 적어두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마지막페이지를 덮으면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 페이지를 넘기게 될 것이다. 추천, 또 추천..
나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버스 2층에 앉아 텅 빈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도시의 어느 지역들은 작은 유령처럼 무기력하게 홀로 걷는 아이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전쟁의 유령이 떠돌던 시절이었다. 회색 건물들은 밤에도 불을 밝히지 않았고, 유리가 박살 난 빈 창문들에는 여전히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도시는 아직 아픔에 잠겨 있었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인간들이 규칙 없이 지내도록 놔두었다. 모든 일은 이미 벌어졌다. 그렇지 않은가._52p.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가족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누나와 나는 날조된 서류들이 덧붙여진 개들만큼이나 익명성 뒤에 숨겨진 존재였던 것 같다. 개들처럼 울타리를 벗어났고, 규칙과 질서가 줄어든 세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정확히 무엇이 되었던 걸까? 청소년들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잘 모를 때면 사람들이 으레 예상하듯 억압되지 않고 도리어 불법의 영역으로 넘어가곤 한다. 그리하여 쉽 사리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고 지각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_142p.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라다 보면 사람들을 하루 단위로, 혹은 아예 더 안전하게 시간 단위로 대하게 된다. 사람들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얘기 다. 어차피 혼자니까. 그래서 나는 과거에 의존하고 그것을 다시 해석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행동을 기억하는 방식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균형을 잡으며 수면에 떠서 보냈기 때문이다. . _232p.
우리는 간신히 유지되는 이야기들로 우리 삶을 정돈한다.
혼란스러운 곳에서 길을 잃은 듯이, 눈에 보이지 않고 말이 되지 못한 것들 - 레이철 또는 렌도, 나, 즉, 스티치도-을 모두 한데 모아 꿰맨다. 전쟁 때 지뢰가 묻힌 해변에서 자라 났던 갯완두들처럼 불완전하게, 무시당하며,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_3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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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