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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27p/
"그래도 내가 아들을 넷이나 낳아서 이렇게 아들이 지어준 뜨신 밥 먹고, 아들이 봐 준 뜨끈한 아랫목에서 자는 거다. 아들이 못해도 넷은 있어야 되는 법이야." 뜨신 밥을 짓고, 뜨끈한 아랫목에 요를 펴는 사람은 할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이자 김지영 씨의 어머니인 오미숙 씨였지만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32p/
"은영 아빠가 나 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둘이 고생하는 거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혼자 이 집안 떠메고 있는 것처럼 앓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러라고 한 사람도 없고, 솔직히, 그러고 있지도 않잖아.
64~65p/
옷차림이나 근무 태도를 핑계로, 알바비를 담보로 접근해 오는 업주들, 돈을 내면서 상품과 함께 어린 여자를 희롱할 권리도 샀다고 착각하는 손님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
71~72p/
"멀리 생각해.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선생님만 한 게 어떤 건데?"
"일찍 끝나지, 방학 있지. 휴직하기 쉽지.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그만한 직장 없다."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좋은 직장 맞네.
그럼 누구한테나 좋은 직장이지 왜 여자한테 좋아? 애는 여자 혼자 낳아? 엄마. 아들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막내도 교대 보낼거야?".....<중략>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애를 낳을지 안 낳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일에 대비하느라 지금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아야 해?"
74p/
가족과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어머니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는 외삼촌들과 거의 왕래하지 않는다. 충분히 각오하고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희생에 대한 후회와 원망은 깊고 길었고, 결국 그 응어리가 가족 관계를 망쳤다.
100~101p/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110p/
김지영 씨는 아침마다 팀원들 자리에 취향 맞춰 커피를 한 잔씩 타서 올려놓았고, 식당에 가면 자리마다 냅킨을 깔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했고, 식사를 배달시킬 때면 수첩을 들고 다니며 메뉴를 정리해서 전화 주문하고, 다 먹고 나면 가장 먼저 나서서 빈 그릇들을 정리했다.
112p/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김지영 씨의 일이 아니라서 그래요. 그동안 신입 사원을 받을 때마다 느낀 건데, 여자 막내들은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귀찮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더라고, 남자들은 안 그래요. 아무리 막내고 신입 사원이라도 시키지 않는 한 할 생각도 안 해. 근데 왜 여자들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132p/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김지영 씨는 혼인신고를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p149p/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작가의 말/
자꾸만 김지영 씨가 진짜 어디선가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의 여자 친구들, 선후배들, 그리고 저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쓰는 내내 김지영씨가 너무 답답하고 안쓰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랐고, 그럿게 살았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늘 신중하고 정직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김지영 씨에게 정당한 보상과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여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책은,
너무나 잘 넘어가는듯 하지만, 읽으면서 점점 마음 한켠이 답답해온다.
내가 살아왔던 시절과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가 비슷해서 그런지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먹먹하게 내려앉는다. 지영씨 부모님의 모습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봤고, 지영씨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이 보기도 했다.
성장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이 김지영 씨를 통해 데쟈뷰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 한 켠으론 부당하다고 생각됐고 왜 여자인 나만, 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밖으로 소리내어 말 할 용기는 없었던 시대였다. 김지영 씨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정대현 씨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양육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은 지금도 많은 김지영 씨들이 겪고 있는 일이 아닐까? 혼자 낳는 아이가 아니고 혼자 키우는 아이가 아닌데, 자신의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100%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지 않았을까? 억울함과 분함, 입밖으로 내어 말을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걸 안 김지영 씨는 점점 목소리를 잃어가고, 김지영 씨가 첫 아이를 출산하고 1년 쯔음 시작된 이상 증상들은 과연 완치 될 수 있을까? 완치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도 씁쓸한 감을 지울 수 없었지만... <82년생 김지영> 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 해봤으면 하는 책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남자분들이 많이 정말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