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007p/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 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누구나 어쩌지 못하는 순간, 자신만의 탈출구가 있을 것이다. 누구와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상황, 꺼내 이야기 한들 달라질 것도 없고 그렇다고 삭히자니 내 맘이 내 맘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였을것이다. 무작정 책을 파고 들던 시기가... 그냥 닥치는 대로 읽었고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다. 한 번에 여러권의 책을 읽기도 했고, 때론 한 권의 책을 여러번 읽기도 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 흘러와 책을 손에 놓지 않게 되었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깊은 사유를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기 까지는 아직도 먼 듯하다. sns를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책, 몰랐을 작가.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많은 순간들을 자신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008p/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046p/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058p/
열 번 잘하다가도 어느 순간 남처럼 등 돌리는 남자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이틀째 널려 있는 빨래를 걷는데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남편, 결혼 전에 아빠를 볼 때면 좀 궁금했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어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 남자다움으로 미화된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 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모르고 편하게 살다가 죽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한평생 고생만 하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다.
책을 읽는 동안 딸인 꽃수레와의 이야기에 킥킥대고 웃기도 했고, 엄마와의 추억을 생각하는 글엔 울컥하기도 했다. 다른 책과 달리 읽었던 문장을 곱씹어 읽고 문장을 손으로 옮겨적기도 수차례, 갈무리했던 문장들을 여기저기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여자로 살아가며 그녀처럼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 왔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되어서 였던것 같다. 책을 읽으며 '아!!!' 느낌표 몇 개쯤은 그냥 막 찍고 싶은 인생의 책을 만나게 되는데, 한동안 이 책이 그런 책이 될 듯하다.
101p/
늙음, 그 존재의 무너짐을 삶의 과제로 의연히 받아들이고 싶다.
내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든 내가 늙어 자식에게 의탁하든, 비참하고 비루한 생이 지겨워 눈물 바람 할 테고 태어난 걸 후회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살 만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겠지. 육아가 힘들 때 아이들이 족쇄 같이 괜히 낳았다고 원망했던 것처럼 더러는 괜히 죄없는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를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데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은 행복이 아니었다.
118p/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한다.
여자, 아내, 엄마, 며느리, 딸... 어쩌면 이 중 내가 살아보지 못할 삶도 있을 것이고, 살면서도 충분하게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서른을 넘어 마흔을 넘긴 지금, 누군가의 아내도, 엄마도 아닌 나는, 그래서 지금의 나이가 혼란스러운지 모르겠다. 혼자임이 조금씩 두려워지는 나이? 괜찮다고 애써 이야기 하지만 정작 괜찮지 않은 그런 시기. 하지만 어떤 삶을 선택하더라도 장.단점이 있다는걸 알기에 내 '선택'에 의해 사는 삶에 대해선 의연하게 책임질 줄 아는 자세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141p/
사는 동안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150p/
왠지 요즘 나의 속도가 못마땅하다. 책 읽는 속도, 밥 먹는 속도, 실망하는 속도, 커피 마시는 속도, 문자에 답하는 속도, 글을 쓰는 속도, 눈물 나는 속도, 책을 사는 속도, 신경질 내는 속도, 그리움에 물드는 속도, 죄다 너무 빠르거나 느린 속도만 있다. 언젠가 속도에 대한 미약한 자각 이후 한 조각 구름 떠가듯 살려 했는데 그랬더니 게을러진다. 중간이 없는 인간인가, 나는.
부끄럽지만 나는 내가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에 허천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는 줄 알았다. 사는 게 서툴렀다. 내 마음 얼마나 얼뜨고 거칠었나. 들볶았고 들볶였다. 물에 녹지 안는 미숫가루처럼 둥둥 떠다니는 감정의 건더기가 사래처럼 목에 걸린다. 삶의 속도 개선. 결에 따라 섬세하게 살피고 헤아려서 어떤 일은 느린 가락으로 어떤 건 빠른 템포로 살아야 한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그녀가 글을 조금 더 많이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 번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을 테지만, 읽다보면 나만의 내공도 쌓이겠지. 언제고 가라앉는날, 볕 좋은날, 한 권의 책을 들고 나들이 한다면, 이 책을 들고 데이트해야겠다.
166p/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바늘 하나로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눈송이 하나라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러니 이 헛됨을 누리면서 견딜 수 있는 한 번의 기쁨, 한 번의 감촉,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필요하다.
260p/
살면 살아진다.
살려면,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