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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 ㅣ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평점 :

아내가 없는 집은 마음이 편하다. 물론 아내가 거북하다거나 싫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애정은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 더욱 깊어졌으면 깊어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었지만 평소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사실이었다. 호랑이 꼬리 못지않은 아내의 꼬리는 집 구석구석을 기어 다니고 있고, 게다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 밟을지 모른다. /p15
한 집안의 가장이며 평범한 회사의 영업사원인 미야케는 사실 알아주는 킬러로 코드네임은 풍뎅이.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그 무엇도 아닌 아내다. 살인 의뢰를 처리하고 밤늦은 귀가를 하는 날이면 부스럭거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어육 소세지'로 허기를 달래곤 한다. 그가 가장 원하는 건 업계의 은퇴! 청부살인 중개업자인 의사는 그가 일을 그만두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부채를 핑계로 풍뎅이를 계속 잡아두고 싶어 한다.
노란색과 검은색 무늬가 있는 벌이 풍뎅이 옆을 지나 나무의 무성한 이파리 속으로 사라진다. 집으로 귀환한 참인가. 죽고 죽이는 순간은 몇 번이나 경험했다. 커다란 구경의 총이며 칼을 든 상대를 앞에 두고 맨손으로 격투를 벌인 적도 이루 셀 수 없다. 인간의 몸은 익숙해서인지, 공포나 긴장감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일조차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벌의 움직임 하나에도 긴장한다. 풍뎅이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공포로 얼어붙게 만든 건 참 오랜만이야, 하고 벌에게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긴장하게 만드는 건 너와 내 아내뿐이야,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p86~87
"홀드를 잡고 있다 보면 늘 가족 생각이 나요."
"어떤 의미에서요?"
"우리는 자주 이웃 사람들에게 사이좋은 가족이라는 말을 듣는데요. 아, 물론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 보면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그 사이좋은 가족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아아!"
"특별히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요. 아내도 그렇고 딸도 소중하니까요. 다만, 이따금 손아귀 힘이 떨어지고 더 이상 매달릴 수 없게 되어서, 차라리 쿵 하고 떨어지는 편이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은 때가 있는 거죠." /p127
맞벌이를 하는 아내의 심기를 거르지 않기 위해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말의 의미를 헤아리고 심사숙고하고 아내의 패턴을 연구하기도 한다. 풍뎅이의 아내에 대한 독백을 읽고 있자면 공처가도 이런 공처가가 또 있을까? 그런데 또 유능한 킬러라고 하니 뜬금없이 오래전 영화화했던 킬러들의 수다 '신현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고3인 가쓰미는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절묘하게 아버지의 편들어주기도 한다.
'법을 지키지 않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 온 당신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용서될 리가 없다. 언제 붕괴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공포심이 있고, 그래서 아내를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는 존재로 설정해 둠으로써 스스로를 경계하고 경고를 던지는 게 아닐까.' 풍뎅이는 스스로 반론한다. '아니, 집사람이 정말 무서울 뿐이야!' /p148
나노무라가 팔을 휘두르는 순간, 나는 죽는다. 죽는 건 상관없지만 아내나 가쓰미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건 괴롭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온다. 다음에 다 같이 레스토랑에 가자고 했었는데, 그 '다음'이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이다. 그때 문득 '넌 지금까지 몇 명에게 그런 고통을 맛보게 했느냐'고 혼쭐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몸 전체가 묵직해진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짓을 생각하니 살아남으려 애쓰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이기적인 것 같았다. /p223
볼더링을 하며 마음이 통하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마쓰다도 풍뎅이의 일반인 같지 않았던 면을 보고 야반도주처럼 이사를 가버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또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나노무라는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같은 업계의 청부살인업자였다. 가정에서만 온전히 자신일 수 있었던 풍뎅이. 아내를 만나 가쓰미를 낳고 가장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았지만 자신이 그동안 살해해온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가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가족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점점 더 이 업계에서 은퇴하고만 싶어진다. 살인 의뢰를 수락하면서도 은퇴 의사를 확고히 밝히는 풍뎅이와 그런 그를 잡기 위한 의사의 줄다리기는 풍뎅이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극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네 아버님은 말이야, 정말 이것저것 많이 힘들게 했단다." 어머니는 다이키를 품에 안으며 아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불단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힘들게 했다고? 그 반대가 아니고? 내 생각과는 관계없이 어머니는 옛날이야기들을, 아버지가 어떤 어이없는 실수를 했었는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말이야." 어느 정도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내가 끼어들었다. 부탁하마 변호인, 하고 등 뒤에서 아버지가 고개 숙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사명감이 들었다. "아버지도 늘 엄마를 신경 썼어. 그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어."
"그 사람이? 나한테 신경을 썼다고? 언제?"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이없어해서 오히려 내가 더 어이가 없었다.
"언제라니, 늘 그랬지."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적 없어. 네 아버지는 늘 마음 편하게, 태평하게 살았거든." /p366~367
풍뎅이가 죽고 10년이 지나 가쓰미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고, 어머니는 한동안 힘들어 했지만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어느날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온 청년이 전해준 아버지의 진찰권으로 알게된 병원과 만나게 된 의사. 오랫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방'에서 정리하며 찾은 열쇠 하나로 의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후반부에 이르는 몇 십페이지는 그가 마지막까지 가족들을 위해 준비해둔 과정들이 정말 업계 최고의 킬러로 인정하게끔 한다. 풍뎅이와 아내가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마지막 장을 읽으며 그가 아내를 무서워했던 게 아니라 그의 가족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마음 한편 이 너무나 짠 해졌다. 근래 읽은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중 최고로 손꼽고 싶은 글!! 올여름휴가 단 한 권의 소설이라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