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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평점 :

이렇게까지 더울 수 있을까 싶은 폭염이 연일 되는 며칠이다. 여름엔 역시 스릴러지. 평소 즐기는 장르는 아니지만 이즈음 출간되는 책들 중 스토리가 탄탄하고 재미있는 책들을 꽤 만날 수 있어 주목하는 편이다. 출간 전 38개국 계약을 한 소설이라니, 게다가 신인작가!! C.J 튜더의 <초크맨> 은 시작부터 시체가 등장한다.
한 소녀의 머리가 황갈색 낙엽 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아몬드 모양의 눈은 차양처럼 우거진 단풍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뭇가지 사이를 머뭇머뭇 뚫고 숲속 땅바닥 위로 금가루를 뿌리는 햇살을 쳐다보는 건 아니었다. 검은 색으로 반짝이는 딱정벌레들이 동공 위에서 종종걸음 쳐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어둠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 근처에서는 핏기 없는 한쪽 손이 도움을 청하려는 듯, 그도 아니면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으려는 듯 낙엽의 장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도움도 위안도 찾을 수 없었다. 시신의 나머지 부분은 손이 닿지 않는 숲속의 다른 은밀한 곳에 여기저기 숨겨져 있었다. /프롤로그
시체가 등장했고 사체의 다른 부분 다 찾았지만 머리는 끝내 찾지 못했다. 사체가 있는 장소를 가리켰던 초크로 그려진 낙서. 범인의 별명이 초크맨으로 남았던 사건은 1986년 작은 마을의 신나는 축제로부터 시작된다. 열두 살 에디는 호포, 미키, 개브, 니키 패거리들과 어울려 지역축제를 즐기러 간다. 어른들 없이 그들끼리 신나게 축제를 즐 길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댄싱걸(눈에 띄는 미녀)이 눈앞에서 끔찍한 사고로 얼굴은 피범벅이 되고 다리는 거의 두 동강이 났다. 방학이 끝나면 부임하게 될 핼로런(백색인간)을 도와 응급처치를 했고 놀랍게도 댄싱 걸은 목숨을 구했다. 댄싱휠의 한 축이 부러지며 떨어져 날아간 사고에서 크게 다친 건 댄싱 걸 한 명이었다.
호포에게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공유할 수 없는 게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에게도 비밀이 있다. 어른들보다 더 많을 때도 있다. 우리 패거리에서 나는 꺼벙이 역할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조금 고지식했다. 나는 잡동사니를 수집할 만한 성격의 아이였다. ...(중략)....나는 수집한 잡동사니들을 애지중지했다. 꽁꽁 숨겨서 안전하게 보관했다. 뭔가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아이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데, 나는 그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았고 오직 나만이 뭘 새로 넣거나 뺄 수 있었다. /p49~50
특이한 주인공, 분필로 그린 섬뜩한 그림 그리고 소름 끼치는 살인. 우리는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 초크맨 모양의 조그만 흔적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씁쓸해한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은 윤색됐고 진실은 점점 모호해졌다. 역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p89
아마도 그들이 분필로 낙서를 할 즈음부터 였을까? 분필낙서로 사람그림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암호를 만들어 낙서를 시작하기 시작한 아이들,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만들던날 미키의 형 패거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아이들이 도망치면서 에디가 그의 형을 다치게 하고 이에 앙심을 품은 아이들이 에디를 불러내 괴롭히는걸 핼로런이 구해주게 된다.
죽음은 우리 같은 어린아이나 우리 주변이 아니라 다른 데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죽음은 추상적이고 먼 일이었다. 나는 아마 션 쿠퍼의 장례식을 통해 서늘하고 시큼한 입김 바로 그 너머에 사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가장 놀라운 전략이다. 그의 차갑고 어두컴컴한 소매 속에는 전략이 많이 숨겨져 있다. /p164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어떤 사람이 끔찍한 짓을 한 번 저질렀다고 해서 그가 지금까지 쌓은 선한 업적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선행으로도 벌충이 되지 않을 만큼 나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핼로런 씨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가 어떤 식으로 댄싱 걸의 목숨을 구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빠와 나까지 구했는지. /p211
우리는 스스로 해답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정답이다. 그게 인간의 천성이다. 우리는 원하는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문만 한다. 그런데 문제가 뭔가 하면 진실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그냥 진실인 습성이 있다. 우리는 그걸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p242
자신을 괴롭히던 미키의 형이 물에 빠져죽고, 호포가 키우던 개가 독극물을 먹고 죽었다. 아버지가 목사인 니키는 늘 몸에 멍이 가실날이 없다. 자신이 저지른대로 되돌려 받게 될거라는 이야기를 했던 핼로런은 사고로 부터 구했던 댄싱걸(일라이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런 그녀가 살해되었다. 범인은 누구일까?
어른이 된다는 건 환상이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 어른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냥 키가 커지고 털이 많아질 뿐이다. 나는 나에게 운전면허가 주어졌고 술집에서 술을 마셔도 잡혀가지 않는다는 데 지금도 가끔 놀랄 때가 있다. 어른이라는 허울을 걷으면, 한 해, 두 해가 태연하게 흘러가는 동안 켜켜이 쌓인 경험을 헤치면 까진 무릎으로 코를 흘리며 엄마, 아빠를 찾는....그리고 친구를 찾는 어린애가 숨어 있다. /p260
스릴러를 읽으면 자연스레 사건을 중심으로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를 시작하게 된다. 핼로런? 목사? 아니면 제 3의 인물? 사건 현장에 남아있던 분필로 그린 그림들. 범인은 사건 현장을 알리고자 함이었을까? 범죄를 저지른 자의 표시였을까?
12살 에디 패거리들은 살인사건으 발생한 시점을 계기로 그들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니키는 아빠의 사고로 엄마를 따라 마을을 떠나게 되고, 미키는 죽은 형을 대신해 친구들 무리에서 벗어나 형의 친구들과 어울린다. 개브와 호포 셋이 남았지만 미묘하게 어긋남을 느끼고 그렇게 30년의 시간이 흘러 42살의 어른이 되었다. 영어교사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던 에디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는 그의 일상을 흔들기 시작한다. 초크맨의 표식이 담긴 편지와 분필 사건이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1984년과 2016년을 오가며 에디의 기억으로 진행되는 글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특히나 마지막 몇 페이지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한다. 기대되는 작가의 글! 기억해둬야겠다. 장르소설을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참 재미있게 읽었고 적어두고 싶었던 문장들도 눈에 띄어 멈출수 없었던 <초크맨>. 시원한 카페에 앉아 읽다 보면 서늘해지는 책 몇 권으로 북캉스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절대 예단하지 마." 예전에 아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상하고 단정 짓지 말고."
....(중략)....
아빠의 목소리가 좀 더 진지해졌다. "사람들은 항상 속임수를 쓴다. 에디, 거짓말도 하고,
그래서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거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중략)....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예단을 하는 이유는 그게 좀 더 쉽고 게으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p374~375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