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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숨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7월
평점 :

어느 날 보육원에 찾아왔던 영국 여자의 가정으로 입양된 임선경. 양어머니의 딸 제인이 죽으며 남긴 무용복과 발레슈즈를 신고 스텝을 밟으며 '제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녀의 삶. 무용수로써 완벽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던 그녀의 가정은 언제 깨질지도 모를 유리 같은 아슬함을 담고 있다.
날마다 발에 피가 나도록 춤을 춰야 했다.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사실은 임선경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날이 올까 봐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몸은 빠르게 자라났다. 마치 뜨거운 태양이 지지 않는 숨 막히는 그 나라의 나무들처럼. 더 이상 제인의 발레슈즈가 맞지 않게 되었을 때조차 나는 억지로 발을 욱여넣고 발에 피가 나도 이를 악물고 춤을 추었다. /p23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듯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어린 레나조차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레나는 내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면 나를 보러 방문 앞을 서성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완강하게 침묵했다.....(중략).... 레나는 더 이상 나의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방문 앞을 서성거리는 레나의 그림자 같은 건 없었다.
/p30~31
진과 결혼하여 레나를 낳았지만 입주 가정부인 크리스티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자신의 경력과 무용수로서의 삶에만 매달린다.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매달려도 돌아봐주지 않았고 훌쩍 자라 16살이 된 레나는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는다. 엄마인 제인보다 크리스티나에게 더 강한 애착을 느끼고, 크리스티나의 야성적인 기질이 자신의 딸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제인은 레나로부터 크리스티나를 떼어놓기로 굳게 마음먹는데, 레나는 자신에게 이야기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크리스티나를 간절하게 찾는다.
"마담, 당신 같은 여자는 죽어도 모를 거야. 가슴속에 슬픔이 차오르도록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 마음에 대해서 말이야. 당신이란 여자는 늙어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할 거야. 지금 당장 누군가를 끌어안지 못하고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이 깊은 슬픔을 말이야. 죽어도 좋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p43
이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이끌린 적은 없었다. 그들이 춤을 추고 있는 숲으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떨어져 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 나를 키워준 여자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만 했다. 제인으로 보이기 위해 나의 감정을 숨기고 나의 욕망을 감춰왔다. 아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뭔가를 원하게 될까 봐 앞만 보고 다녔다. 이제 내가 제인이 아니었던 시간은 기억조차 희미했다. /p96~97
"나는 네가 왜 우릴 찾아왔는지 알아. 너는 늘 완벽에 가깝게 춤을 추고 있었지만 누군가 뜬 주물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지. 나는 이상하게도 너의 숨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어. 너는 숨을 쉬고 싶었을 거야. 너를 결박하고 있는 주물 같은 몸을 깨고 나와 너만의 춤을 추고 싶었을 거야." /p141
레나와 남편인 진과의 관계, 그리고 딸이지만 모성애라기보다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 정도만 느껴지는 레나에 대한 제인의 감정은 그녀가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입양되어오며 '나'라는 주체는 어딘가에 잃어버린 양부모님의 딸이었던 '제인'의 껍데기로 살아가기 위해 악착같은 삶을 살다가 마리선생님과 맥스를 만나며 내면의 눈을 뜨게 되고 춤을 진정으로 느끼고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으로 인해 마리와 맥스를 파멸로 몰아가기도 했다. 제인, 맥스, 마리 이렇게 셋 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춤을 안무가인 텐에게 제의 받고 떠오른 그녀의 과거는 현재의 그녀를 혼란으로 몰고가며 절대 그 춤을 추어서 안된다고 울부짖는다. 그 시절의 자신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과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 글로 읽으면서도 춤이 매력적이고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문장들은 문장들이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과 제인이 갈등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텐의 옆얼굴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순간 나는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텐의 이중적이고 딱딱해 보이는 얼굴은 나를 닮아 있었다. 약함을 감추기 위해 위장한 얼굴인 것이다. 어쩐지 목구멍으로 담즙 같은 쓸쓸함이 밀려나왔다. 몸이 휑하니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p148
그의 눈은 멈춰 있었다.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고, 흥분하지 않았고 분노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고 갈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멈춰버렸다.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절규도 비명도 고통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다. /p212
싱가포르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무용수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제인, 그녀의 딸 레나, 그리고 가정부인 크리스티나를 축으로 한 갈등을 그리고 있고 다른 한편 그녀가 떠올리고 싶지 않아 심연에 묻어둔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안무가 텐의 등장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제인과 과거의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고,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조금씩 열려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뒷이야기들을 상상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글이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꽤 얇은 책이라 생각했는데 읽는 동안 글에 몰입도가 너무 뛰어나서 부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꽤 되지만 주축이 되는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글의 전개도 꽤 스피디하게 느껴져서 마음먹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읽을 수 있다. 양부모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아 죽은딸의 대역인 '제인'으로 살면서 성장한 제인은, '춤'이 자신이지만 자신의 내면을 그로 다 표출할 수 없기도 했다. 제인이 가정도 자신의 아이도 뒤로하고 춤에 매달렸던건 춤으로 인해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마리와 맥스와의 만남으로 춤에 대한 그녀의 숨통이 트였다면,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갔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