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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박정언 지음 / 달 / 2018년 12월
평점 :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의 쓸모를 찾아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만,
그 시절 그 순간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너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
페이지를 펼쳐 글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걸 이번에 또 절감하게 됐다. 사실 책표지가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읽을 순서를 뒤로 미루고 미루다 명절 연휴 끝자락에 읽기 시작했다. 첫 글인 '잃어버린 대화'를 읽으며 '아! 이 책을 왜 지금 읽은 거지?' 하며 페이지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도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제는 오랜 친구를 만나도 급히 안부를 묻고 커다란 변화들을 브리핑해야 한다. 일상의 언어들, 일을 위한 말들, 꼭 처리해야만 하는 말들만으로도 쉬이 목이 아파오는 탓이다.
아주 천천히, 시간이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말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시간들이란. 비록 무의미하고 쓸모없을지라도 우리 머릿속을 맴도는 작은 물고기들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들이란, 얼마나 소중했는지. /p014~015 #잃어버린대화
행위는 지속될 때 빛을 발한다. 이 명제는 ‘보통의 존재’들뿐 아니라, 보통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오로지 지속될 때만이, 행위는 그 자신도 모르게 모습을 바꾸어가며 진화한다. 그러니 그 어떤 작은 가능성이라도 기대한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한다. 계속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매일매일 한 음 한 음을 쌓을 것이고, 글을 쓰고 싶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일기나마 계속 써나갈 것이다.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나가는 것처럼. /p029. #그냥일어나서일을하러간다
신간을 읽으면서도 책에 대한 정보 없이 바로 읽는걸 즐기는 편이다. 글을 읽음에 있어 선입견이 없이 읽기 위함이었는데, 이렇게 책 읽기를 하면 글을 읽으며 체감하게 되는 글의 감도가 조금더 짙게 느껴진달까? 평일의 라디오 PD, 평일의 산책자라고 자신을 이야기하는 박정언의 에세이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삶의 소리와 모습들을 포착하면 이런 글이 될까? 한 사람의 삶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다는걸, 그것도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하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의 필력에 빠져들게 된다.
상황은 언제나 나빠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는 분명 영광스러웠던 것 같은데, 미래는 그저 암담하게만 느껴집니다. 1년 뒤, 5년 뒤가 아니라 당장 내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명치끝이 답답해질 때가 있죠. 하나의 난관을 겨우 넘었는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다른 난관이 등장하곤 합니다. ...(중략)... 지금의 상황에서 제가 꿈꿔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어쩌면 ‘고작’ 이런 것. 하지만 전 이 정도로도 괜찮습니다. 오늘도 비관으로 낙관하며, 그저 하루를 무사히 버텨낼 뿐입니다. /p115~117 #비관으로낙관하기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방문할 수 있는 곳들도 있다. 공간 자체가 사라지거나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은 장소는 내가 사랑하던 모습 그대로이니, 지칠 때면 언제든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변하거나 달라질 걱정 없는 10년 전, 5년 전의 그 장소로. 사랑하는 길을 걷다 사랑하던 카페에 들어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 돌아온다. 어쩌면 장소에 대한 사랑은 마음이 만들어낸 최후의 방어선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마지막으로 우리 곁에 남는 것은 오로지 공간, 장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주는 위로에는 말없이 가만히 마음을 쓸어내려주는 것 같은 조용한 다정함이 있다.
오래되고 사려 깊은 이상적인 친구처럼 말이다. /p148 #장소에대한사랑
이런 잘 쓰인 글을 읽을 때면 반가운 한편 질투가 나기도 한다. 어쩌면 이렇게도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하며 빠져들게 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삶과 사람을,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에세이를 즐겨 읽는 건, 단순히 내 감정 같은 글을 찾아 읽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꾸며진듯하거나 화려한 문체는 반감이 들어 읽으면서도 거부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나 읽고 또 읽고 싶은 글이라니, 닮고 싶은 글이라니.... 정갈하고 서글프지만 따스함이 느껴지는 글이다. 때론 페이지 전체를 몇 번이고 읽고, 손으로 짚어가며 갈무리 한 문장들이 많아서 읽고 나서도 몇 번이고 읽기를 되풀이했다.
이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선은 어디에 그어져있을까. 경계선이 있다 해도 아마 몹시 흐릿해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든 자칫하면 밟을 수 있는, 흐리고 또 흔한 선. 삶이 우리를 살짝이라도 떠밀면 속절없이 넘어가게 되는. 요즘 길을 걷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본다. 그렇게 선을 밟고 선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은 어떤 세상인 걸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자꾸 고민하게 된다. /p166 #143번버스의여자
어떤 말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걸 기억조차 못할 즈음이 되면 갑자기 불쑥 떠오르곤 한다. 주로 잠들기 전 베갯머리에서다. 아, 내가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구나. 무의식의 바다 아래로 묻어놓았던 말들이 갑자기 둥실 떠오를 때면 당황하게 된다. 언제 들은 말인지도 희미하지만 그 말을 듣던 순간의 모든 풍경이, 선명하게 재생되는 순간이 있다. 평소엔 아주 덤덤한데도 그런 기습 공격 앞에선 휘청거리고 만다. /p255 #니가세상에서사라졌으면좋겠어
너무나 좋았던 책의 서평은 언제나 힘들다. 읽은 만큼, 좋았던 만큼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하는 생각에 또 반성 아닌 반성을 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마무리는 이석원 작가의 추천사로 마무리할까 한다. 아마도 이보다 더 이 책을 잘 이야기 할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싶으니 말이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좋겠다.)
삶의 환등기처럼 그 활자로 포착해낸 순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 있다. 덩달아 나의 삶의 한 시기마저 끝난 기분이랄까. 나는 이분이 부디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이석원 추천사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