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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평점 :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이 올까?
외면할 수도, 포용할 수도 없는 살인자로부터 온 편지
책장엔 아직도 10년쯤 전 구입해둔 개정판 이전의 <편지>가 꽂혀있다. 책의 내용도 알지 못한 채, 작가명만 보고 책을 모으던 시절에 구입해둔 책이라 언젠가 읽겠지 하고 방치해뒀는데, 올해 개정판으로 출간된 책으로 읽게 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 꽤 오래전 출간된 책이고 그도 글을 쓰며 스스로가 답을 찾아가며 쓴 작품이라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던 츠요시는 동생 나오키의 대입을 앞두고 큰돈이 필요하게 된다. 이삿짐센터, 가구 운송 등을 하며 몸이 망가지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온 세상이 불경기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풍족해 보였다. 그런 여유 가운데 조금이라도 자신과 동생에게 나누어지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하다고 남의 것을 훔치는 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삿짐센터 일을 하며 맨 먼저 떠오른 오가타 할머니, 함께 살던 자식들은 분가하고 함께 살던 개도 죽고 없는 고요한 집이 그의 표적이 되었다. 잠시만 돈을 빌렸다 갚을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강도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 된 츠요시. 자신을 위해 형이 살인범이 되고 이야기는 살인범인 형을 가족으로 둔 나오키가 살아가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매달 나오키 앞으로 도착하는 벚꽃 도장이 찍힌 편지. 답장을 하지 않아도, 이사를 가도 도착하는 편지는 나오키가 삶의 안정이나 행복을 움켜쥐려고 하는 순간 그의 발목을 잡는다. 다니던 학교에서도, 밴드 활동의 데뷔를 앞두고도, 사랑하는 여인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까지...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다.
츠요시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오키와 츠요시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나오키의 진학 여부를 진지하게 서로 이야기했더라면 최악의 선택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오키의 형을 알기 이전, 나오키 한 사람만으로 좋았던 평가가 범죄자인 형이 있다는 게 밝혀지고 순식간에 달라지는 걸 보며 안타깝기도 했지만 만약 '나였다면?'이라는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인성이 착하다고 해도 타인에 의해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진 않는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가족들의 삶이 범인이 감옥 안에서 형기를 채우며 죗값을 치르며 속죄한다고 괜찮아지는 것일까? 또, 범죄자의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받는 차별은 정당한 것인가? 우리는 자신과 나의 테두리에 있는 가족과 사람들에겐 한없이 너그럽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냉혹하다. 타인의 일엔 너그러우면서 그 일이 나의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해도 너그러울 수 있을까? <편지>를 읽으며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했을 질문들을, 읽는 독자들도 답을 찾기 위해 하게 될 것이다.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62p.
다케시마, 거짓말을 하기는 싫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숨기는 게 나을 때도 자주 있단다.
87p.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형이 저를 키웠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육체노동뿐이었습니다. 형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일을 했습니다. 형의 몸이 망가진 것이나 걷기 힘들 정도로 허리가 아픈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형은 이미 육체노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은 어떻게 해서든 저를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이었고, 형의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대학에 가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형은 그걸 고민했습니다. 사건 당시 형의 머릿속은 그 생각으로 가득 찼을 겁니다. 저는 지금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좀 더 일찍 진학을 포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형과 의논을 했어야 합니다. 형이 그런 짓을 하게 만든 원인은 제게 있습니다. 형만 고생시킨 제 잘못입니다. 앞으로 저는 형과 함께 죄를 갚아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정상 참작해주시기 바랍니다."
183p.
드디어 악몽에서 해방된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음악과 만나면서 닫혀 있던 모든 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었다.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과 자신을 가로막는 싸늘한 벽이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그 벽을 넘어서려 해봐야 더욱더 차가워질 뿐이다.
200p.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람들이 응원은 해도 자기 손을 내밀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나오키가 잘 살기를 바라긴 하지만 관계를 맺고 싶진 않은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좋을 텐데. 이게 그들의 진심일 것이다.
236p.
착한 사람도 누구에게나 늘 착하게 대할 수는 없는 법이야. 이걸 얻으려면 저걸 얻을 수 없지.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단다. 뭔가를 선택하는 대신 다른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는 거야, 인생이란.
362p.
"바로 그걸세. 사람에게는 관계라는 게 있네. 사랑이나 우정 같은 것 말일세. 누구도 그런 걸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살인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걸세. 그런 의미로 보면 자살 또한 나쁜 거지.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야.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기를 원한다 해도 주위 사람들까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는 할 수 없지. 자네 형은 말하자면, 자살을 한 셈이야. 사회적인 죽음을 선택한 거지.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남겨진 자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이 벌을 받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닐세. 자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자네 형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란 말일세."
448p.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 그런 건 상상에 불과해. 인간이란 차별과 편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물이지."
476p.
형, 나오키는 마음속으로 형을 불렀다.
형, 우린 왜 태어난 걸까.
형,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이 올까? 우리가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둘이서 어머니에게 밤을 까 드리던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