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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그녀의 얼굴을 본 적도 없으며,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손이 따스한지를 알고 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 만들어진 나쓰나기 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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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세상에 기대어 살아가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치히로는 6세부터 15세까지의 기억을 소멸하고자 돈을 모아 레테를 구입한다. 그런데 뭔가 잘못된 걸까? 30분이면 제거되어야 할 기억이 1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설명서를 읽지 않고 복용한 게 잘못이었을까... 그가 복용한 것은 청춘시절 사용자에게 제공하도록 프로그레밍 나노로봇 '그린그린'. 아마도 카운슬러가 "청춘 시절에 좋은 추억이 없어서 모두 잊고 싶다."는 요청의 앞부분만 듣고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주문과 다른 물건이 도착한 사실을 클리닉에 전달하자 보름 후 두 개의 '레테'를 받게 되는데 하나는 소년 시절의 기억을 지우고, 또 하나는 '나쓰나기 도카'라는 가공의 인물에 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 그런데.....존재할리 없는 소꿉친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가공의 소꿉친구, 가공의 청춘 치히로와 도카의 기억은, 현재는 어떻게 흘러갈까? 도카를 볼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 추억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도카에게 끌리는 치히로, 뭔가 비밀이 있는 듯한 도카의 반응이 의심스럽기만 한데... 시작된 순간 끝나는 사랑, 시작되기 직전에 끝나는 사랑... 이들은 어떻게 될까?
기억을 개조할 수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도 '가공의 기억'으로 만들거나 지울수 있다는 설정.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점점 빨라진다. 과거의 일부분을 바꿀 수 있다니? 청춘 시절의 기억, 특정 시기의 기억 제거, 삭제한 기억을 되살리거나, 가공의 자녀를 만들고, 가공의 결혼생활을 만들 수도 있다.
일본에선 출간되자마자 이틀 만에 4쇄를 돌파했다니, 그 유명세가 왜 인지를 알 수 있었던 독특하지만 의미 있고 재미있었던 <너의 이야기> 이 글을 읽으며 나도 이런 추억 하나쯤은....하고 생각해봤던 것 같다. 상상속의 글인지 현실인지, 살짝 몽롱해진다. ‘나’ 한사람만을 위한 작은 거짓말,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거짓말이 아닐까.
11p.
"의억이란 말이다, 의수나 의안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결락된 부분을 보충하는 거야."라고 아버지는 딱 한 번 내게 말했다. "네가 어른이 돼서 자신에게 부족한 게 어떤 건지 알게 되면, 그땐 네가 알아서 의억을 사면 돼."
62p.
실재하는 인간이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허무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인간이 실재하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똑같이 허무하다. 실재하지 않는 인간이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허무다.
사랑이란 실재하는 인간끼리 하는 것이다.
218p.
"....도카?"
나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고,
".....누구시죠?"
여자는 내 이름을 잊었다.
"끝난 거야?"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반은." 도카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코드판은 A면이 끝나면 뒤집어서 B면으로 바꿔줘야 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B면으로 바뀐다.
233p.
솔직히 말하자면, 내겐 가족이 필요했다. 친구가 필요했다. 연인이 필요했다.
그 모든 것을 다 겸비한 존재를, 나는 몽상했다. 필연적으로 '그'는 소꿉친구가 되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고, 친구처럼 즐겁고, 연인처럼 사랑스러운,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과 일치하는, 굳이 말하자면 궁극의 남자였다.
만약 그때 '그'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런 가정을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시뮬레이션했다. 과거의 기억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서 거기에 '그'의 존재를 집어넣고, 추억 속에서 울고 있는 나란 인간 하나하나를 구워해나갔다.
297p.
드디어, 찾아냈다.
나와 같은 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나와 같은 공허에 고통받던 사람.
나와 같은 환상에 홀려왔던 사람.
내가 일곱 살 때 만났어야 할 사람.
아마가미 치히로, 그는 나에게, 궁극의 남자였다.
354p.
도카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전부, 진짜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이 이야기는 거짓이었기에 진짜보다 훨씬 다정한 거야."
"....그렇구나."
"거짓말이니까 다정한 거구나."
370p.
운명의 상대는 존재한다. 그것은 당신의 연인이 될 상대일지도 모르고, 친구가 될 상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만나야 할 상대'가 한 사람에게 한 명씩 할당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상대를 만나지 못하고 불안전한 인간관계를 묵묵히 받아들인 상태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