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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김애란 작가의 2002년 등단 이후 17년 동안 기록해 온 이야기들은 삶을 조금 더 내밀하게 들여다 보기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이야기한다. 온전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인 산문집은 딸, 학생, 소설가, 아내, 인간으로의 삶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장소, 사람들, 한때 불리고 기억했지만 지워졌다고 생각한 이름들을 읽어나가며 나의 삶에도 눈부신 순간들이, 사람이, 장소가, 사건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잊기 좋은 이름>을 읽다 말고 7년 전 읽었던 <두근두근 내 인생>을 다시 찾아보았다. 내가 이 소설을 이렇게 읽었던가? 새삼 새록한 글을 뒤로하고 다시 읽기 시작한 김애란의 산문집은 여느 에세이와 달리 더디게 읽어지는 글이었다. 페이지 넘기는 게 더뎠던 건 글을 읽으며 나 또한 경험했을 시간과 시절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그랬을까? 산문집을 읽었지만, 조금 긴 문장의 시를 읽은 듯한 느낌이다.
그녀의 작품들을 읽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다 실패한 시간과 드물게 만난 눈부신 순간이 담긴,
그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여기 적습니다. /김애란
86~89p.
나는 부사를 지운다. 부사는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버려지는 단어다. 부사가 있으면 문장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말의 진실함과 긴장이 약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훌륭한 문장가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부사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 (중략)... 부사는 무능하다. 부사는 명사나 동사처럼 제 이름에 받침이 없다. 그래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허공에 큰 선을 그린 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거’라고 시치미를 뗀다. 부사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참’, ‘퍽’, ‘아주’ 최선을 다하지만 답답하고 어쩔 수 없는 느낌. 말이 말을 바라보는 느낌. 부사는 마음을 닮은 품사다.
124p.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
238~239p.
평소 문서에 줄을 많이 긋는다. 전에는 색연필이나 형광펜을 이용했는데 지금은 거의 연필만 쓴다. 어떤 문장 아래 선을 그으면 그 문장과 스킨십하는 기분이 든다. ... (중략)... 어디에 줄 칠 것인가 하는 판단은 순전히 주관적인 독서 경험과 호흡에 따라 이뤄진다. 그리고 그렇게 줄 긋는 행위 자체가 때론 카누의 노처럼 독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과 리듬을 만든다. 책을 읽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추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르는 정보라. 아는 얘기라. 아는 얘긴데, 작가가 그 낯익은 서사의 껍질을 칼로 스윽 벤 뒤 끔찍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 보여줘서. 그렇지만 완전히 다 보여주지는 않아서. 필요한 문장이라, 갖고 싶어서. 웃음이 터져. 미간에 생각이 고여. 그저 아름다워서. 그러다 나중엔 나조차 거기 왜 줄을 쳤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
252~253p.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 (중략)... 우리가 우리이기 전에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말들, 그리하여 나와 똑같은 무게를 지닌 타자를 상상토록 돕는 말들을 생각했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 아니라 나와 너로 만나는, 그리하여 한 번 더 철저히 ‘개인’이 되는, 그 개인의 고유한 내면을 깊이 경험해보도록 돕는 문학의 언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