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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평점 :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간혹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대로 가을이 지나가면 겨울이 찾아온다는 뜻이니까. 희미하게 남아 있던 열기마저 사라지고 나면 하얗고 차가운 눈송이가 흩날린다는 뜻이니까. 세상은 순백으로 물들 것이다. 얼어붙을 것이고, 종내에는 모두 녹아 사라지겠지. 사계를 겪고 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새로이 흘러들 것이고... 봄이 올 것이다. _146p.
타인의 일기를 읽는 느낌이랄까?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담담한 문체와 문장을 맴돌다 보면, 오래전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던 나를 만나기도 했다. 긴 시간 추억이 많았던 친구도, 오랜 인연들이 순간의 소원해짐을 수없이 경험하면서 이내 새로운 관계에 대해 체념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렇게 지나온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이루고 있다고, 저자는 조용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8편의 단편.
박선우의 글은 타인에게 감정이 생기고 친밀해지지만 이내 멀어지는 관계. 글의 화자가 그 흔적을 생각하며 떠올리는 과정은 섬세하면서도 결이 곱다. 망설임, 주저함, 질투, 패배감, 충동, 무모함 등 다양한 감정이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인물들의 관계를 통과해 나갈 때마다 그들의 고양된 감정이, 때론 좌절이, 그리고 이내 찾아든 평온을 응원하게 된다. 잔잔하지만 순간 쏟아지는 감정의 물결들이 꼭 날씨의 변화와 닮은 기분이랄까? 맑은 날보다, 잔뜩 흐린 날, 비 내리는 창가, 또는 폭우가 쏟아지는 한여름의 장마에 읽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 글이다. <우리는 같은 곳에서> 아련한 책표지와 그 안에 담긴 8편의 짧은 단편 소설들은 소설이라기 보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꾹꾹 눌러 담아 쓴 마음을 읽는 기분이었다. 반짝이는 문장들이, 감정들이 참 좋았던 글,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다려지게 될 것 같다.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_11p.
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영지는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느슨해지다가 한순간에 툭 끊어져 버리고 말겠지, 별것 아닌 일을 계기로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_61p.
부모나 형제 사이도 아닌데....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같이 살면서 서로를 조금씩 미워하게 될까 봐요. _67p.
소낙비가 성난 기세로 퍼붓다시피 했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고 한 줄로 걸어가던 아이들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카페 점원이 문가로 나가 배수로의 상태를 살폈다. 바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은 유리 벽 곳곳으로 날아와 맺혔다. 수십 개의 물방울에는 아주 조그마한 너와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 안에 함께 있었고, 빛이 머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채로 반짝거렸다. _93p.
우두커니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우산 끝에 맺힌 빗방울에 시선이 머물렀다. 물방울은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가장 크고 분명해졌을 때 미련 없이 그랬다. _98p.
행복한 장면을 목도하고 나면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해지는 계절이었다. 그 계절이 떠날 듯 떠나지 않고 긴 폐곡선을 그리며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나날. 이를테면 봄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가을이 아니라 가을 다음에 가을, 다시 가을, 가을만이 도래하는 식이었다. _1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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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