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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특별판)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뭐라고?"
"장르를 잘못 택했단 말야.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 달리는 소년 만화여야 했다고. 그랬으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그 꼴로 다치지도 않았을 거고."
"만화가 아니야."
"그렇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한번 그려 봤지."
강선이 스케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교복을 입은 은영이 5등신 정도 되는 비율로, 치마는 좀 짧아진 채 그려져 있었다. 5등신이 기분 나쁜지 멋대로 치마를 잘라먹은 게 기분 나쁜지 얼떨떨했다. 그 그림 속 은영의 한 손에는 무지개 깔대기 칼이,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은영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강선이 의자에 걸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정말로 깔대기 칼과 비비탄 총을 꺼냈다. 낡고 흠집이 있는 게 분명 강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인 것 같았다.
"도구를 쓰라고, 멍청아."
"아."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
"하."
"코믹 섹시 발랄? 아무래도 섹시는 무리겠지만."
...(중략)...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영은 사실 강선의 설정인 셈이었다. _192~193p.
딱히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도 많았고, 쌓아둔 책이 많아서 미루고 미루던 책이었다. '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겠지?'라는 마음이 더 컸는데 우연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방영 시작을 앞둔 <보건교사 안은영> 예고편을 보고 만 것이다. 정유미, 남주혁 주연의 드라마라니! 일단 원작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온라인 서점을 뒤적, 어머나!!! 일러스트레이터 람한의 작업은 너무나 찰떡!
보건교사 안은영,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젤리 형태로 보이는 그것과 싸운다. 안은영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겐 이런 안은영이 이상해 보일 수밖에... 처음에 착하게 사는 만큼 자신에게도 뭔가 보상이 있어야 하는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의 능력에 보상하겠다는 이들은 대게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소설이나 현실에서나 이런 능력을 알아보는건 언제나 나쁜쪽이 먼저 인듯!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무지개 깔대기 칼을 들고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이야기들은 이미 주연 배우들이 이미지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며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 수록된 10편의 이야기중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금방 빠져들 것이다. 유쾌, 발랄, 감동, 살짝 로맨틱. 호로록 빠져드는 「보건교사 안은영」. 시즌 2 기대하면 안될까요?
이 학교에는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 출근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안은영은 유감스럽게도 평범한 보건교사가 아니었다. 은영의 핸드백 속에는 항상 비비탄 총과 무지개색 늘어나는 깔대기형 장난감 칼이 들어 있다. 어째서 멀쩡한 30대 여성이 이런 걸 매일 가지고 다녀야 하나 속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은 멀쩡하지 않아서겠지. 안은영. 친구들에게는 늘 '아는 형'이라고 놀림받는 소탈한 성격의 사립 M고 보건교사, 그녀에겐 이른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_18~19p.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 _123p.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_1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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