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스파이들은 회복할 수 없이 망가진 것들 때문에 울었다. 일 년도 안 된 지난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울었다. 이 모든 일이 어린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억울하고 가혹해서 울었다. _272p.


삼악산 남쪽 면을 복개해, 산복 도로를 만들며 생겨난 동네 삼악동. 긴 벌레처럼 보인다 하여 삼악동이라는 지명이 아닌, 삼벌레 고개 중간 즈음의 동네. 우물집 순분의 아들 은철과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새댁네 안원의 비밀스럽고도 귀여운 스파이 놀이로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비밀을 알아내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려내 복수를 하는 게 스파이의 임무라는 귀여운 아이들의 놀이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평화로운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듯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파사삭 부서져버린다.


아이가 감당하기에 커다란 사고, 그저 흘려들을 수도 있던 말이었지만 어둠 앞에 선 순간 그 말들이 해일처럼 덮쳐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은철과 원이의 스파이 놀이로 몽글하고 통통 튀는 분위기로 시작한 글은, 점점 어두운 굴로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는 듯한 기분으로 따라가게 된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행을,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통을 오롯이 안고 살아야 하는 시간도 지나가겠지, 그 후의 삶이 궁금해진다.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깊은 상처만 남은 우물집의 잔상이 남는 글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걸. _ 권여선


"잘 들어. 스파이는 말이야."

은철은 풍선껌을 파낸 쪽 귀를 기울였다.

"비밀을 알아내는 사람이야."

"응, 비밀을."

"스파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사람 얘기를 엿들어야 해." _48p.


"귀 발 귀 술?"

"그렇지"

"아, 참 재미있는 말이네요. 귀발귀술. 귀발귀술."

조용히 앉아 있던 은철은 킥킥 웃었다. 하지만 귀발귀술 때문에 웃은 건 아니었다. 은철은 조금 전에 배운, 이름을 반 갈라 두 개로 만드는 일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아빠는 만자 춘자, 엄마는 순자 분자, 형은 금자 철자, 통장 집 식모는 막자 달자, 통장집은 언자 년자, 큰형님은 정자 자자... 은철은 웃겨서 살 수가 없었다. _65p.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으려고....."

이즈음 순분의 머릿속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는 생각은, 두어 달 전에 계원들 앞에서 앉은뱅이가 된 새댁네 시누 얘기를 늘어놓던 일이었다. ... (중략)...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순분은 잊고 있었던 시렁 위의 유리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_212~213p.


"무서운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저놈들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도 멈출 수가 없어요." _269p.


순분은 두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원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생각했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다고 했지. 눌은 놈 덜 된 놈 찔깃한 놈 보들한 놈. 순분은 그게 마치 사내들에 대한 형용 같다고 생각했다. 서슬이 퍼래서 당장 빨갱이 집을 쫓아내자고 설치고 다니는 통장 박가 같은 놈은 어떤 놈일 것이며, 밤마다 불안감에 사로잡혀 새댁네를 어떻게 내보낼 수 없을까 궁리하는 자기 남편 같은 놈은 어떤 놈일까. 같은 놈일까 다른 놈일까. 눌은 놈도 덜 된 놈도, 찔깃한 놈도 보들한 놈도, 어차피 그놈이 그놈 같았다. _272~273p.


#토우의집 #권여선 #소설 #한국소설 #자음과모음 #자모단2기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 지내나요, 내 인생
최갑수 지음 / 보다북스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금은 적당히,

조금은 대충대충.


좀 걸어보는 건 어떨까.

걸으며 손도 잡고 주위도 돌아보고 그러자.


오늘부터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하면서

갖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매일이 똑같은 일상, 답답한 마음이라도 잠시 트이고 싶을 때 여행 관련 책들을 쌓아두고 뒤적이게 된다. 일상, 여행, 삶, 사진, 그리고 인생을 담은 한 권의 책은 때로 여행을 대신하는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코로나 장기화로 거리 두기 단계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평온한 일상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몇 개월을 보내고 있는 요즘, 그저 몸도 마음도 건강만 하면 괜찮지 않겠냐며 이 모든 시간들이 지나고 다시 여행이 일상이 되는, 간절함이 아닌 그저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바라게 된다. 여행을 계획하던 설레임, 출발 전 공항으로 향하던 새벽 설레던 발걸음과 살짝 들뜬 마음을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에세이. 일상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여행하고픈 기분이 들 때, 취향의 책 한 권과 오롯한 시간을 보내시길, 추천하고 싶은 겨울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건

'잘해 보자', '열심히 해 보자'이런 게 아니라


조금만 너그러워지자.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_ 15p.


솔직하게 인정하자. 현실은 언제나 당신이 기대하는 것보다는 엉망이고, 당신이 아무리 극진하게 살아도 당신의 생은 여전히 고달프고, 게다가 나아질 기미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떠나간 사랑이 돌아올 확률은 아파트 당첨 확률보다는 낮다는 사실. _47p.


생은 점점 적막해져 가고

가고 싶은 곳도 점점 줄어들고

여기는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낯선 별이다. _52p.


2월에는 스스로에게 약간은 관대해지고 싶어요.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잖아요. _ 88p.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여행했던 그 길들을

다시 지나갈 수 있을까.


그날의 아득했던 구름과

빗방울이 내려앉던 바다와

햇빛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의 창가

그리고 우리 이마 위에서 빛나던 무수한 별자리들.


우리가 기억하는 찬란한 그 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간은 반드시 1초에 1초씩, 1시간에 1시간씩,

하루에 하루씩 앞으로 나아가지만

아, 우리가 지나왔던 음악 같은 장면들.


모든 기억은 행복한 쪽으로 흘러간다.


우리 생의 한 줌을

우리가 지나왔던 길과 시간 위에 조금씩 뿌려놓고 있는 것.

여행은 혹은 삶은. _173p.


붙들 수 없는 것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내일도 아마 비슷한 하루가 될 것이고.


잘 지내나요, 내 인생. _209p.


남은 세월, 어떻게 먹고 사나 하는 걱정에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오직 먹고사는 문제로’만’ 가슴이 답답하고

밤새 잠이 오지 않는다.

단지 살기 위해 음악을 들어야 하는 날들도 있다.


내가 아침마다 꽃기린 화분에 물을 주는 이유가

못 견디게 힘겹고 외롭고 슬퍼서라는 사실을

당신이 눈치채지 못한다면 좋겠다.


공항이 그리운 밤이다._219p.


우리 인생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 인생은 허무한 것이고, 그 허무의 날들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사랑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 살아가는 일은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본질은 낭비인데, 그 낭비의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고, 여행은 곧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닐까. _234p.


#잘지내나요내인생 #최갑수 #에세이 #여행에세이 #보다북스 #도서협찬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슷한 살림살이, 또래 연령의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던 골목. ~야 놀자~. 한마디면 우르르 몰려나와 놀이터로 학교 운동장으로 뛰어다녔고, 조금 멀리는 개천으로 몰려가 놀기도 했던 시절. 계*사 영업사원 아저씨가 돌아다니며 책을 팔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집에서 어떤 전집을 샀다더라~라는 소문이 들리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들였던 시절.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먹고, 책 구입하는 데는 어느 집보다 빨랐던 집이었다. 아이가 넷이니 누가 읽어도 읽을 테고, 생각해 보면 늘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면 책을 읽고, 카세트테이프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전래동화를 들으며 놀았던 그 시절..


70년대 생이라면 폭풍공감할 문장들이 참으로 많... ^^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에게 안녕을 묻는듯했던 포근하고 다정하며, 그 시절을 지켜준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책이다. 눈이 오면 읽어야지, 하며 구입해두고 1년을 묵혔다가 읽은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시절의 시간들이 몽글몽글 떠올라 시절을 함께 성장하며 읽는 기분이 들었던 문장이 많았다. 과거의 나를, 잊고 싶었던 시간을 지나온 나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다독여주는 것 같았던 소복한 문장들. 조금씩 아껴 읽다가, 발췌해둔 문장들을 한 번씩 더 읽다가, 노트에 옮기며 다시 천천히 읽으며 책장을 덮었던 한지혜 작가님의 산문. 눈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책이 될 것 같다.


더한 눈이 쌓여도, 더 먼 길을 걷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랬다. 그날 함박 함박 떨어지던 눈이 내 귓가에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 (중략)... 어렸을 때는 눈이 내리면 마냥 신나고 즐겁더니 나이를 먹으면서는 마음이 애틋해진다. 그게 "괜찮다"소리를 듣고 난 이후부터 생긴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소리와 함께 내 서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비로소 들으면서, 내 삶도 한결 깊어졌다. 춥고 흐린 날, 그게 창밖의 날씨든 내가 처한 인생이든 마음을 낮추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다 괜찮아질 수 있다. _60~61p.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_셰익스피어 <리어왕>

내 얼굴은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 정체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내가 스스로 서야 한다는 모범답안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가끔은 나보다 타인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강요하고 통제하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쏟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_152~153p.


미워했든 사랑했든 어릴 적 나는 가족이 완전한 결합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조금 생각이 다르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그러니까 나 스스로 하나의 가족을 생성하면서 나는 아주 당연한 소규모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가족이 사실은 매우 특이하고 불안정한 결합체의 단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투적인 문장 그대로 결혼이란 가족과 가족 간의 만남이었지만, 그렇게 만나서 모두가 가족이 되지는 않는다. 공유된 기억과 서사가 없는 가족도 가족일 수 있을까. 반문하다 보면 공유한 기억과 서사의 함량이 가장 딸리는 건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둘의 아이, 세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족이 아닐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쳇바퀴 도는 질문에 봉착하고 만다. _190p.


마음은 중앙으로 향하고, 욕망은 상단에서 춤을 추다 곤두박질치면 위로는 늘 내가 돌아보지 않던 자리에서 찾아온다. _227p.


#참괜찮은눈이온다 #한지혜 #에세이 #산문집 #교유서가 #동아펜 #Q3 #동아Q3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함께읽어요 #나만알고싶은책 하지만 #모두에게권하고싶은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너 하고 싶은 대로만 사니."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내 마음대로 살아봤으면 좋겠네."

"누가 살지 말래?"

나는 엄마를 쳐다봤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 데도 못 가는 건 결국 식구들 때문이었다. _36p.


보통의 삶이란 무엇일까? 꿈대로 희망 대로 살아가는 삶은 행복할까? 가족 구성원의 안녕한 오늘이 현실을 살아내기 바쁘다 보니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걸까? 아니면 '다 그렇게 살아가잖아.'라는 마음인 걸까? 장래희망이나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알아챈 동생 덕분에 뒤늦게 공부를 했지만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고 매일 시 한편씩을 필사하며 하얀 종이를 놓고 앉아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한 생활도 여동생과 조카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게 되면서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잠시도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는 삶을 지키기 위해 만나던 이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녀가 없으면 가족 구성원을 지탱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혼자만의 희생으로 지켜질 수 있는 가족이 있던가? 어쩌면 너무 많은 생각에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내가 나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마음과 상황이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더 애틋하고 응원하게 되었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삶은 고단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쓰는 일은 삶과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여물고 단단해져야 하는데, 아니 사는 일이 소설 쓰는 것을 닮아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고 견고해야 할 것인데, 일상도 소설도 늘 미진하기만 한 나는 그 시절처럼 매일 시집을 펼쳐 든다. 다시는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_김이설


아침에서 저녁으로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듯이, 너무 당연해 이유를 붙일 까닭 없이, 그 사람과 나는 만나왔다. _11p.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못 찾는 것도 아니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른 척 무시하고 안 보이는 척 외면해왔던 것이다. _62p.


글을 쓰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동생의 말이 맞았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글도 깊어지기를 희망했지만, 그건 나 혼자 가늠하기 힘든 일이었다. _72p.


네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저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터널은 결국 끝이 있고, 그 끝은 환하다고 말할 때마다 동생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전, 내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대출까지 책임져준 동생에게 빚을 갚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동생이 학자금 대출을 대신 갚지 않았어도 아이들을 위해 살 수 있었을까. 애틋하고 딱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느 날에는 미쳐버릴 만큼 짜증이 났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똑같은 일의 반복에 진저리가 쳐졌다. _78p.


그 사람과 나는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그걸 가늠하고 헤아리는 건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 의미를 다하는 상태였다. 사랑하기까지의 시간과 사랑한다는 고백까지의 시간이 제일 황홀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 그다음의 순서는 사랑을 즐기고 사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헤어지는 것뿐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_88~89p.


가족은 공동 희생 구조였다.

"당신 꿈은? 당신 인생은? 그렇게 희생하면 나중에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요?"

"안 알아줘도 상관없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야."

"그 책임을 왜 당신이 져야 하는데요."

"나는 이미, 진작에....."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_113p.


매일 한 편씩 필사를 하고, 줄곧 시집만 읽어댄다고 실력이 늘 리 없었다. 계속 써왔어야 했는데. 쓰지 않으면 늘지 않는 것이 글인데, 알면서도 마음처럼 못 했다. 늦은 줄 알고 출발했지만 너무 늦었다는 자책에 시달렸다.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데. 공부를 할 때, 결혼을 할 때, 아이를 낳고,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새로 만나는 것 모두가 그 시기에 걸맞은 때에 행하는 것이 보편의 삶인데. 내가 보편의 삶을 살지 못해서 나에게는 늦거나 이른 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적인 벽에 맞닿으면 자꾸 잘못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걸 깨닫는 것조차 너무 늦어버려서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자꾸 어쩌지 못했다. _120~121p.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지 못한 꽃, 아직 발화하지 못한 꽃, 아직 제대로 맺히지 못한 꽃, 내가 꽃이라면 한 번은 피워내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정말 식구들에게 발목이 잡혀 땅에 묻히기 전에.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칠 곳이, 숨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식구들과 거리감을 둘 공간이 필요했다. _151~152p.


#우리의정류장과필사의밤 #김이설 #작가정신 #한국소설 #소설추천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문장필사 #필사 #라미만년필 #라미룩스마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져 가는 풍경들
이용한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가, 너와집, 돌 너와집, 흙집, 화로, 아궁이와 부뚜막, 굴뚝

김치광, 물레방아, 디딜방아, 맷돌, 장독대, 고무신, 바가지, 등잔, 키, 뒷간

초막, 농사꾼, 무명과 명주, 한지, 쌀엿, 한과, 홍주, 메주, 손곶감, 전통옹기, 숯가마, 대장간, 뻘배잡이

오지마을, 인제 장터, 시골길, 줄나룻배, 섶다리, 서낭당, 쥐불놀이와 달집태우기, 풍어제


책의 서문을 읽고 목차를 읽으며 내가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단어들을 꼽아보았다. 지금은 사라졌거나 대부분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의 흔적을 저자는 사진에 담고 이야기하고 있다. 옛 물건들을 떠올리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추억들, 냄새, 시간들이 떠오르곤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우리 곁에 있어 줄 수 있을까? 지금은 사라진 것도 많고, 현재 그 명맥을 이어가는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1 옛집 풍경

2 그 밖의 풍경들

3 명맥을 잇는 사람들

4 마을 문화


페이지를 넘기며 사진과 저자의 이야기로 읽는 사라져가고 있는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글이기도 했지만,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풍경들이 시간의 무덤에 묻히기 전에 기억의 창고에 저장해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저자 김용한이 15년 동안 발로 찾아낸 옛 풍경의 기억과 기록은 부모님과 아이들과 책 속의 사진들을 보며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은 추억,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우리 세대는 어떤 풍경들을 담고, 이야기하게 될까?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것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내가 지켜 갈 것도 아니면서 누군가가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 또한 얼마나 허망한 희망인가.


사실 이 세계는 무수한 사라짐 속에 구축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엄연히 존재했던 그것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내가 목도한 숱한 풍경이 시간의 무덤에 묻히기 전에 이렇게 기억의 창고에 하나씩 저장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늘 그랬듯 우리는 시간 앞에서 슬퍼할 겨를이 없다. _서문


#사라져가는풍경들 #이용한 #에세이 #상상출판 #도서협찬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