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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ㅣ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어떻게 너 하고 싶은 대로만 사니."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내 마음대로 살아봤으면 좋겠네."
"누가 살지 말래?"
나는 엄마를 쳐다봤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 데도 못 가는 건 결국 식구들 때문이었다. _36p.
보통의 삶이란 무엇일까? 꿈대로 희망 대로 살아가는 삶은 행복할까? 가족 구성원의 안녕한 오늘이 현실을 살아내기 바쁘다 보니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걸까? 아니면 '다 그렇게 살아가잖아.'라는 마음인 걸까? 장래희망이나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알아챈 동생 덕분에 뒤늦게 공부를 했지만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고 매일 시 한편씩을 필사하며 하얀 종이를 놓고 앉아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한 생활도 여동생과 조카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게 되면서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잠시도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는 삶을 지키기 위해 만나던 이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녀가 없으면 가족 구성원을 지탱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혼자만의 희생으로 지켜질 수 있는 가족이 있던가? 어쩌면 너무 많은 생각에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내가 나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마음과 상황이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더 애틋하고 응원하게 되었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삶은 고단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쓰는 일은 삶과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여물고 단단해져야 하는데, 아니 사는 일이 소설 쓰는 것을 닮아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고 견고해야 할 것인데, 일상도 소설도 늘 미진하기만 한 나는 그 시절처럼 매일 시집을 펼쳐 든다. 다시는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_김이설
아침에서 저녁으로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듯이, 너무 당연해 이유를 붙일 까닭 없이, 그 사람과 나는 만나왔다. _11p.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못 찾는 것도 아니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른 척 무시하고 안 보이는 척 외면해왔던 것이다. _62p.
글을 쓰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동생의 말이 맞았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글도 깊어지기를 희망했지만, 그건 나 혼자 가늠하기 힘든 일이었다. _72p.
네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저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터널은 결국 끝이 있고, 그 끝은 환하다고 말할 때마다 동생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전, 내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대출까지 책임져준 동생에게 빚을 갚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동생이 학자금 대출을 대신 갚지 않았어도 아이들을 위해 살 수 있었을까. 애틋하고 딱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느 날에는 미쳐버릴 만큼 짜증이 났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똑같은 일의 반복에 진저리가 쳐졌다. _78p.
그 사람과 나는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그걸 가늠하고 헤아리는 건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 의미를 다하는 상태였다. 사랑하기까지의 시간과 사랑한다는 고백까지의 시간이 제일 황홀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 그다음의 순서는 사랑을 즐기고 사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헤어지는 것뿐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_88~89p.
가족은 공동 희생 구조였다.
"당신 꿈은? 당신 인생은? 그렇게 희생하면 나중에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요?"
"안 알아줘도 상관없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야."
"그 책임을 왜 당신이 져야 하는데요."
"나는 이미, 진작에....."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_113p.
매일 한 편씩 필사를 하고, 줄곧 시집만 읽어댄다고 실력이 늘 리 없었다. 계속 써왔어야 했는데. 쓰지 않으면 늘지 않는 것이 글인데, 알면서도 마음처럼 못 했다. 늦은 줄 알고 출발했지만 너무 늦었다는 자책에 시달렸다.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데. 공부를 할 때, 결혼을 할 때, 아이를 낳고,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새로 만나는 것 모두가 그 시기에 걸맞은 때에 행하는 것이 보편의 삶인데. 내가 보편의 삶을 살지 못해서 나에게는 늦거나 이른 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적인 벽에 맞닿으면 자꾸 잘못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걸 깨닫는 것조차 너무 늦어버려서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자꾸 어쩌지 못했다. _120~121p.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지 못한 꽃, 아직 발화하지 못한 꽃, 아직 제대로 맺히지 못한 꽃, 내가 꽃이라면 한 번은 피워내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정말 식구들에게 발목이 잡혀 땅에 묻히기 전에.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칠 곳이, 숨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식구들과 거리감을 둘 공간이 필요했다. _151~1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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