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라진·샤베르 대령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천재 조각가 사라진과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던 샤베르 대령의 미스터리하고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발자크는 비극 작가, 소설가, 출판사, 활자 제조소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쓰라린 실패를 맛본 후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 대충 1830년 전후 일 텐데 이때 원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앞으로 <인간극>으로 명명될 큰 범주에 포함될 모든 작품에 당대 프랑스 사회 전체를 녹여내려 한 것. 누가 되었던 <인간극>을 다 읽으면 프랑스 역사의 가장 격동의 시기였던 대혁명을 시작으로 제2 제정에 이르게 되는 1789~1848의 시대를 간접적으로 살아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진정한 예술은 실망과 고난의 과정에서 탄생하는 모양이다. 사업 실패로 가장 어려웠을 때 나왔던 <사라진/샤베르 대령> 같은 작품들이 비로소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인간극>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발자크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루겠다라는 그의 야심찬 선언이 실현되었을까.

 

이 책의 첫 작품은 <사라진>이다. ‘사라진18세기 초 프랑스 동부 출신의 조각가다. ‘사라진이란 인물의 전형을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치안 판사였던 아버지 밑에 태어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과 조각에 몰두하다 집안 망신이라며 두들겨 맞기까지 했던 미켈란젤로.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듯 결국 그의 능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실력을 쌓고 로마로 가서 명성을 떨치고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사라진의 경우도 검사의 아들, 장래 직업에 대한 부모와의 갈등, 정신적 스승의 만남, 스승을 뛰어넘기 위한 각고의 노력, 이후 로마 유학을 거쳐 천재 조각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사라진의 운명은 고전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로마로 유학 가면서부터 삐걱거린다. 우연히 방문한 오페라 극장에서 프리마 돈나인 잠비넬라를 본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가장 이상적인 여인 조각상의 모델이란 것을 발견한다. 그는 단번에 사랑에 빠졌고 충격적인 진실을 목도할 때까지 맹목적 사랑은 계속된다. 신념에 사로잡히면 의심의 끈을 놓아버리게 되어 진실을 볼 수 없다.

 

이러한 <사라진>의 이야기는 작품 속 화자가 애인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녀는 랑티 집안에서 주최한 연회에서 봤던 그림 속의 미소년, 개츠비 같은 당시 파리 사교계에 갑자기 등장한 비밀 같은 랑티 가문, 그리고 그곳에 가끔 출몰하는 유령 같은 노인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전혀 별개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하나의 입체적인 서사로 직조되는지는 작품의 마지막 장을 넘겨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시작과 끝,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등 동전의 양면 같은 극과 극의 성질은 절대 분리될 수 없으며 공존한다.

 

두 번째 작품인 <샤베르 대령>은 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모하게 된 1796년 이탈리아 원정부터 황제가 되어 19세기 초 감행한 동유럽 정벌까지 함께했던 샤베르라는 이름을 가진 대령의 이야기다.

 

고아였던 그는 오직 담력 하나만을 물려받았고,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우면서 인정받아 대령까지 된 인물이다.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그의 운명은 1807년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싸웠던 아일라우 전투에 참전하면서 극적으로 바뀐다. 러시아 군대를 기병으로 격파하고 귀환 도중 잠복에 걸려 머리에 크게 다치는데, 샤베르는 죽은 것으로 오인되어 시체 구덩이에 묻혔다. 정신을 차린 대령은 구덩이를 어렵게 빠져나와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고, 오랜 시간 회복 후 귀환의 길에 오른다. 그의 여정은 10년간 지중해를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해후한 오뒷세이스의 그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페넬로페는 오뒷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으나, 샤베르 대령의 부인은 이미 페로 백작의 아내가 되어있었다.

 

샤베르 대령은 귀환의 여정 중 겪었던 고초에서 교훈을 배웠다.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큅클로스가 던진 바위에 맞아 좌초될 수 있다. 그렇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부인에게 접근했으나 부정당한다. 전쟁 중 머리에 입었던 상처도 샤베르의 관상을 변형시켰기에 더욱 자신이 샤베르라고 증명하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몰린다. 그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려줄 아테나 여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인, 재산, 명예 등 삼 종 세트 모두 한꺼번에 잃은 대령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법에 호소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찾은 곳이 소송 대리인 데르빌의 사무실이고 이곳에서 <샤베르 대령>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변해있다. 제정시대에 파리를 떠났던 샤베르는 왕정복고 시대에 돌아왔다. 명예, 도덕 등의 훌륭한 가치는 사라지고 부와 출세가 미덕인 시대가 되어버렸다. “조국은 프랑스고, 세상 사람이 가족이요, 의지할 이라고는 하느님뿐이라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군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리 많아 보이질 않는다. 과연 샤베르 대령은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떤 중요한 선택들을 하게될까.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고 다시 왕정복고 된 19세기 초 샤베르 대령과 사라진은 숨겨졌던 각자의 이상을 좇아 고군분투하며 그 끝에 다다른다. 주인공들이 대면한 진실의 순간은 당시 프랑스 및 유럽의 시대상, 생활상, 말투, 옷차림, 미장센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삶이란 얼마나 부조리하고 역설적이며 환멸적인가에 관한 인간 본성의 탐구는 다양한 경험과 치열한 관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굴곡을 가진 미켈란젤로와 오뒷세우스의 서사가 새롭게 변주된 것은 또 다른 재미로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인가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돈, 권력 등의 달콤함에 중독될수록 우리의 이성은 마비된다. 진실은 심연으로 침잠하고 빙산의 일각 같은 겉모습만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이 제거되었으나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풍운아가 공백을 채웠고, 그가 몰락하자 다시 새로운 왕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1819년 즈음의 파리가 그러했다. 


왕이 다시 돌아왔으나 시대는 변했다. 귀족은 몰락했고 소위 땅 파먹고 사는 시대는 저물었다. 농업과 육체적 노동으로 돈을 버는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상업과 금융, 법률 지식으로 무장한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를 주도한다. 산업혁명과 해외 식민지 개발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온 유럽의 인간들이 이러한 새로운 기회를 찾아 역동적인 파리로 몰렸고 파리는 거대한 욕망의 바다가 된다. 


보케르라는 50대의 여성은 센강 좌안의 라탱지구에서 하숙을 친다. 라탱지구는 중세부터 대학이 위치한 대학가로 젊은 사람이 하숙집에 많을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나이와 배경을 가진 일 곱 사람이 4층 구조의 건물의 각 방에서 산다. 보케르 부인은 고급 하숙집이라 생각하지만,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하숙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구두쇠 노인, 비밀이 많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 노처녀, 전직 재면업자, 법대생, 미망인, 부모에게 버림받은 처녀 등 하나 같이 음울하고 음침하며 비밀을 숨긴 듯 긴장해 있고 침울해 보인다. 각자 깊은 사연을 가지 사람들은 달리기 위해 생각을 멈추는 경주마처럼 개인의 욕망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이야기는 지방에서 올라온 법대생 라스티냐크가 파리의 화려함에 도취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온갖 욕망이 넘쳐흐르는 곳에 이제 막 사회 발을 내디딘 청년이 당도했으니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지방의 가난한 소 귀족 출신이었던 라스티냐크는 싸구려 하숙집에서 사는 현실과 화려한 도시 생활에의 동경 사이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낀다. 그는 이내 ‘출세는 곧 미덕이다’라는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짠다. 


당시 파리에서 출세의 등용문은 사교 파티였다. 이곳에 온갖 유력자들이 모여 구시대 귀족의 취미를 재현했다. 자신들을 핍박했던 귀족을 몰아내자 이제 자신들이 기득권이 되어 귀족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은가. 아무튼, 남녀 할 것 없이 젊은 애인을 두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요 자랑이었다. 라스티냐크는 자신의 최대 결점인 가난을 젊음이라는 유일한 장점으로 커버하고자 했다. 사교계에 드나드는 유력 여성의 애인만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는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 파리에 사는 친척 누님을 발견한다. 멘토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시기, 질투, 배신으로 점철된 사교계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개인 교습을 시켜준다. 훈련을 마친 후 그토록 그리던 새로운 세계의 관문을 통과한다.


그렇다면 대체 작품의 제목인 ‘고리오 영감’은 언제 나오는 것일까. 제목에 암시된 것처럼 그가 주인공이기나 한 것일까. 사교계에 진입한 라스티냐크는 한 여성에게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고리오 되시겠다. 고리오는 라스티냐크와 같은 층에서 하숙하는 노인인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딸은 백작 부인인데 그녀의 아버지인 고리오는 왜 싸구려 하숙집에서 주인장 눈치를 보며 궁색하게 사는 것일까. 


라스티냐크는 이 궁금증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마냥 화려하게만 보였던 파리의 민낯을 발견한다. 또한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배운다. 대부분 인물이 겉모습에 현혹되어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이렇게 본다면 작품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고 많은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라스티냐크로 작품 제목은 ‘라스티냐크’가 돼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고리오 딸이 작품 초반 지나가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봐요.”이라며 한마디 하는데, 응당 전체 서사의 주제가 될만한 문장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리오 영감이 전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9세기 최고의 작가로 알려진 발자크는 1834년에 이 작품을 썼다. 당시는 소위 낭만주의 시대로 문학, 예술 분야는 기계적으로 낭만/역사/공상적인 것에서 소재를 찾아 창작했던 시대였다. 발자크는 그런 전형성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대신 당대의 현실에 관심을 두고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포커싱을 맞춘다.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일상에 초점을 맞추자 엄청난 역동성이 꿈틀거렸다. 그는 새로운 자신만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주의 문학이 본격 시작 되었고 그 초기 작품이《고리오 영감》이다. 발자크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기존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생각을 시도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한번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발자크는 더 나아가 당대 사회 전체를 자신의 거대한 작품 속에 녹여낼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는데 《인간극》이었다. 아쉽게도 이른 죽음은 프로젝트의 중단을 가져왔지만, 그가 남긴 90여 편의 작품은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즉슨 시간이 무수히 흘러도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일 텐데, 작품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통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고전이라 하는 것일까. 진실은 숨고 거짓이 난무하는 맹목적 욕구를 추구하는 현시점에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봐요 -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성의 부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우메 카브레는 모든 예술은 인간 영혼의 깊은 불만족으로부터 비롯된다.”라고 했다. 모세, 부처, 예수, 사마천, 보에티우스, 단테, 보카치오, 베르디 등 이들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시련과 역경의 시간을 조적하여 그곳에 단단한 기초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박차고 고난의 바다를 뚫고 올라 자신의 삶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어쩌면 내면의 어딘가에 영원히 잠들어 끝내는 자각하지 못했을 잠재력과 가능성은 이렇게 힘든 시절을 관통해야만 발현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벅은 세인트버나드와 셰퍼드의 피가 반반 섞인 덩치가 산만 한 개인데 시애틀의 어느 곳 철창에 갇혀있다. 붉은 스웨터를 입은 사내는 곤봉을 들고 그를 노려본다. 사내가 철창문을 열자 벅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목을 향해 뛰었다. 이후 곤죽이 되어 땅에 널브러진 벅은 인생 처음으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무기를 든 사내에게 덤비면 안 된다는 곤봉의 법칙을 배운다. 이제 벅은 살기 위해 음식을 훔쳐야 하고, 죽지 않기 위해 절대 싸움에서 쓰러지지 않아야 하며, 극한의 북극 눈벌판에서 어떻게 밤을 보내야 하는지 배워야만 한다. 인간의 법이 아닌 곤봉과 송곳니의 법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로 입문한 것이다.

 

벅은 원래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어느 판사 집에서 왕처럼 편하게 살았다. 남부의 따뜻한 기후와 더없이 친절한 가족, 모나지 않은 반려동물들. 벅의 삶에 걱정은 사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가린 포르투나이 여신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렸고 벅의 삶은 단박에 심연으로 추락한다. 문제는 빌어먹을 황금이었다.

 

20세기가 들어설 무렵, 불과 반세기 전 펜실베이니아에서 검은 황금이 발견되었다면, 북부 클론다이크에서는 진짜 황금이 발견된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곳에 몰렸고 그들에게 편지를 전해 줄 썰매 개의 수요가 증가한다. 북미에서 덩치 크고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이 많은 개라면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집안 정원사 보조의 꾐에 넘어가 낯선 사내에게 팔린 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오게 된 경위다. 앞으로 벅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북극의 클론다이크로 끌려가 우편 썰매를 끌어야 한다. 불과 지붕으로 대표되던 문명적인 삶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오직 곤봉과 송곳니가 지배하는 야만적인 세계에 덩그러니 내팽개쳐진다.

 

다른 개들과 다른 벅의 탁월한 점을 한 가지 꼽자면 관찰능력이다. 따뜻한 남부에서 페르시아 왕자처럼 살다가 북극으로 온 수많은 개가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다. 벅은 달랐다. 곤봉과 송곳니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배우고 교훈을 얻는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까지 옮기니 이렇게 기특한 개가 또 있을까. 흡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기존 대장이었던 스피츠와의 건곤일척의 대결에서 승리한 벅은 권력 유지를 위해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남부 시절의 유순하고 인정 많은 벅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리더가 돼야 했고, 그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을 실천했을 뿐이다. 때문에 벅은 새로운 주인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썰매를 끄는 동료 개들로부터 합법적 리더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누구도 벅을 남부 출신의 개라 믿지 않는다. 그는 마치 태초부터 자연에서 살았던 것 같은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한편, 운명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았고 겨우 정상에 올라 이제 기 좀 펴보나 했던 벅의 운명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벅이 끄는 우편 썰매는 캐나다 정부에 의해 운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관료제는 효율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갈수록 황금을 찾아오는 이는 늘어나고 이와 함께 개들은 혹독한 노동으로 초주검이 된다. 정부는 얼마든지 젊고 싱싱한 개들로 교체할 여력이 있었으며 기존 개들은 말 그대로 개값으로 팔아치웠고 벅도 희생양이 된다. 벅은 또다시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 이번에는 정부가 아닌 황금을 찾아 떠나는 남부 출신의 뜨내기가 바로 그들이다. 과연 그들이 처음 접하는 북극이라는 엄혹한 환경에서 벅과 같은 적응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에 따라 벅의 운명도 결정 날 것이다. 아직은 인간으로 상징되는 곤봉과 야만으로 상징되는 송곳니의 법칙에 순응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벅은 계속 성장했다. 내외부에서 들려오는 야성의 부름을 어느 순간 듣게 되었고 흥미를 느낀다. 그가 지금껏 해 온 것처럼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꾸준히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했던 법칙도 깨부술 수 있을까. 벅은 북극에 적응하기 위해 기존 남부에서의 생활방식을 버림으로써 기존 세계를 깨뜨렸다. 그리고 곤봉과 송곳니의 법칙을 받아들였다. 이제 이 법칙이 깨져야만 한다. 살아있는 것들의 역사에서 창조의 순간은 늘 기존의 관습과 새로운 생각의 충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벅의 행동으로 미루어 그는 늘 창조자가 되고 싶어 했다. 과연 그는 법칙을 깨고 야성의 부름에 응할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1903, 스물일곱 살에 이 작품을 썼다.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 뭐라도 해보겠다고 통조림 공장, 굴 양식장,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을 한 학기 등록했다는 것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늘 삶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작품에 나오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 참가한다. 춥고 혹독한 환경에서 그는 황금만을 보지 않았다. 그곳의 대자연에 매료되었고 모험을 즐겼다. 작중 주인공 벅처럼 잭은 새로운 환경에서 끊임없이 관찰하고 배우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골드러시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을 썼고 명성을 얻었다. 자신 내부에 소리를 들었고 결국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작품에서 북극에 적응하는 벅의 모습보다 기존 법칙을 깨기 위한 고군분투가 인상적이다. 창조는 늘 시련과 역경을 거름 삼아 성장한다. 꼭 절망에 이르러야 깨달음을 얻는다. 돌이켜보면 그런 것 같다.

 



벅은 신문을 읽지도 않았고 악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데츠키 행진곡 창비세계문학 5
요제프 로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확히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잊어버렸다. 츠바이크 였는지 아니면 베르디 혹은 앙리 뒤낭이 계기였을 수도 있다. 기억이 희미한 것은 이 책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전쟁소설인 줄 알았는데웬걸새파랗게 젊은 그것도 지독히도 우유부단하고 눈치 없고 고지식한 장교가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친다. 그 중심에는 늘 유부녀가 자리한다. 이 친구는 고통과 시련을 겪고 깨달음 비스무리한 것을 얻는 듯하다가도 그때뿐이고 다시 과거를 반복한다. 주인공이라면 좀 역경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그 과정이 너무 지지부진하다. 변하기는 했던가.

 

이 책을 읽다가 구석에 처박아 놓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눈에 띄면 다시 읽다가 후회하고의 반복을 거치다 결국 정신 수양하는 마음으로 엉덩이를 의자에 고정하고 끝까지 집중해서 읽었다. 좀 더 읽어가면 분명 흥미로운 사건들이 발생하리라는 기대하고. 결국, 기대했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은 초반 솔페리노 전투 몇 줄, 그리고 수미쌍관 구성을 의도했는지 마지막에 제1차 세계대전 중 전투 몇 줄이 전부였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작품은 19세기 중반 오스트라아-헝가리 제국을 살았던 트로타 가문 3대에 관한 이야기다. 사건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발생했던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발생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주변 프랑스, 스페인, 프로이센 등과 달리 여전히 통일하지 못하고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오스트리아의 점령을 받았다. 이에 이탈리아 북부 유일한 입헌체제를 갖춘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시작된다. 이들은 프랑스를 끌어들여 자신들을 괴롭히던 오스트리아를 깨부쉈으니 바로 솔페리노 전장에서였다. 19세기 가장 처참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오죽했으면 그곳을 우연히 지나던 제네바 출신의 청년 앙리 뒤낭이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구호 활동을 벌일 정도였다. 그는 나중에 이 전투를 회상하며 국제적 구호단체인 적십자를 창설한다..

 

당시 이탈리아 민족은 베르디의 음악으로 하나 되어 분기탱천했고, 1848년에 밀라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에게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오스트리아는 라데츠키의 성공적인 이탈리아 원정을 기념하는 의미로 <라데츠키 행진곡>을 만들었다. 이 역동적인 곡이 연주될 때마다 이탈리아 국민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꼬. 한 제국의 자랑은 다른 민족에게는 지옥으로 작용했다. 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게 천지차이다.

 

이런 피튀는 솔페리노의 전장에서 일개 보병 소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를 극적으로 구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솔페리노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으며 귀족의 작위까지 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트로타 가문이 새롭게 신흥귀족으로 편입된다. 이후 그의 아들 프란츠 트로타는 군인이 아닌 모라비아 지역 작은 마을의 군수가 된다. 보통 아비의 직업을 아들이 따르지만, 솔페리노의 영웅은 국가가 자신의 행동을 왜곡 보도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 전역했고 아들은 절대 군인으로 만들지 않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아비가 제국에 실망해 등을 돌렸다면 아들 프란츠는 황제를 대리해 군수로서 마을을 잘 다스린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인다. 그래도 하나를 굳이 찾아보자면 그의 아들 카를 트로타 정도 되겠다. 군수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이 다른 직업을 갖기 원했고 출세를 위해 군인만 한 것이 없었다. 아들 카를 트로타는 일곱 살부터 기숙학교에 들어가 소년사관학교를 거쳐 소위가 되는, 전체 서사를 끌어가는 인물이다.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그의 주변에는 늘 죽음이 어른거린다. 우유부단한 성격이 한몫한 듯하다.

 

이 인간은 생각은 엄청나게 하지만 정작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부류다. 덕분에 카를 트로타의 내면 묘사는 질리도록 볼 수 있다. 여러 죽음을 겪으며 트로타 또한 내면의 상처를 입고 서서히 파괴된다. 그의 모습은 마치 더는 손쓸 수 없이 몰락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다를 바 없다. 그의 할아버지는 황제 대신 총을 맞으면서 쓰러져가는 제국을 구했다. 그의 손자인 트로타는 누구도 구해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트로타는 두 번의 죽음 경험 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제국 동쪽 국경으로 간다. 귀족이라면 응당 기병을 해야 했으나 총병대대 소위로 부임한다.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정신 수양을 하려는 계획이었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오지에서 어떻게 젊은 혈기를 막을 수 있을까. 트로타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여성도 역시 유부녀, 게다가 부대 근처에 카지노가 들어오며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제 무슨 일이 안 일어나면 이상하겠지. 이렇게 서사는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삼대에 걸쳐 펼쳐지는 트로타 가문 3대의 이야기는 솔페리노 전투 이후 겉보기와는 달리 완전히 힘을 상실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은유다. 제국이란 문화에는 배타적이라도 민족에는 포용적이기 마련인데, 당시에도 여전히 저변에 유대인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특히 명예를 둘러싼 결투를 보면서 리들리 스콧 영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20세기 직전까지 제국이라 불리던 곳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장교들의 명예 규범에 따르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느끼면 상대방에게 결투 신청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비겁한 자로 낙인찍혀 버리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의 파문 정도의 파급력 정도 될까. 단순한 결투가 아니라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합법적 살인인 것이다.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는 하늘을 나는 기계까지 나올 판인데 아직 과거에 얽매여 있던 사회 분위기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결국 몰락으로 몰고 간다. 600년 이상 지속된 전통의 무게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자멸해버린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은 오스트리아가 이룩한 영광을 위한 마지막 찬가이자 스스로 몰락을 예고한 조가였다. 이처럼 트로타 가문의 영예도 빛날 수록 심연은 더욱 어두워졌다. 우유부단했던 주인공은 몰락의 순간에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행복하게 자유롭살기 위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보들의 결탁 - 40주년 기념판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연암서가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운과 불운의 역학관계를 바꿀 수 있을까. 서로마 멸망 직후 활동했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의 눈을 가린 여신은 바퀴를 돌리는데 그 위에 인간의 운명이 놓여있다. 바퀴가 돌면서 인간의 운명은 변화를 거듭한다. 누가 되었든 눈이 보이지 않는 운명의 여신 앞에서는 평등해진다. 행운과 불운이 수시로 위치를 바꾸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고단하고 한편으론 흥미롭고 역동적인 것일까.

 

1960년 초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에 사는 우리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는 중세사상의 기반을 닦은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 나오는 운명의 바퀴라는 핵심 개념을 믿는다. 왕의 신임을 얻어 집정관이라는 고위직까지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역죄에 연루되어 한때의 영광을 뒤로한 채 쓸쓸히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한 보에티우스에 감정이입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그네이셔스는 중세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던 수재였으나 그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다. 그는 점차 바퀴의 아래쪽으로 향하며 화려할 것만 같았던 삶은 심연으로 추락한다. 강의는 끊기고 그나마 구했던 도서관 일자리도 얼마 못 가 잘린다. 한 마디로 되는게 없는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로 이어지며 이제는 돈이 신이 되어버린 세계를 통탄해하며 자신의 세계로 침잠한다. 속세와 등을 지고 절제, 은둔, 금욕을 실천했던 수도사들처럼 자신의 방을 수도원 삼아 몇 년째 칩거하며 투고하지도 못할 무용한 글만 적는다. 이 망할 세상을 어떻게든 바꿔야 하는데 생각만 하면서움직임이 적어지면서 몸은 불어나고 유문은 제 기능을 상실하면서 수시로 배에 가스가 차고 원치 않는 가스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는 여지없이 죽음을 기다리며 좁은 감옥에서 인생에 대한 통찰을 기록해 나갔던 중세철학자와 다름없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바퀴를 끊임없이 돌려댔고 이그네이셔스의 운명도 차차 변화를 맞이한다. 그를 은둔의 수도원에서 끌어내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어머니 라일리 여사의 차 사고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이 발생했고 집이 저당 잡힐 상황으로 몰린다. 행동하지 않으면 이 작품의 주인공일 리가 없지 않은가. 비록 라일리 여사의 성화에 못 이겨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는 하지만 그때부터 뉴올리언스에 좌충우돌, 동충서돌, 종횡무진의 사건이 연달아 터진다. 1960년대의 미국 남부, 흑백 간 인종갈등과 혐오, 반전 시위 등이 절정을 이뤘던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이그네이셔스는 자신 못지않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얽히고설킨다. 누구 하나 흠결 없는 인간이 없다. 부랑자로 몰려 현대판 노예가 될 위기에 처한 흑인, 제대로 된 범죄자 하나 못 잡는 어리버리 순경, 자신만의 쇼를 꿈꾸나 술에 물을 타 손님 등 처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여성, 자선사업가로 위장한 마담, 그 마담과 공모한 청소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회사 직원, 게이, 이그네이셔스와 애증의 관계인 이상주의 연인 등이 그들이다. 저마다 운명의 여신이 돌리는 바퀴에 의해 삶의 바닥으로 내쳐진 인물들이 한 곳에 모였으니 무슨 사건이 안 일어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흥미로운 점은 그토록 고집불통에 이상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주인공이 자신의 수도원이 파괴될 수 있다는 위기를 느끼자 적극적으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사회비판을 담은 글이 침대 밑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지 않고 실천으로 옮겨진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의 흑인 인권을 위한 대규모 데모를 주도하며 권력자에 저항하기도 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게이로 구성된 정당을 만들어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세상을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과연 이그네이셔의 이런 도전은 성공하여 운명의 바퀴 정상에 설 수 있을까는 두고 볼 일이다.

 

소위 루저로 불리는 주·조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그네이셔스의 생각대로라면 평생 루저의 인생으로 끝나지 않고 반전의 기회를 잡아 지긋지긋한 침체의 궤도를 벗어나 변화를 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지만 인생은 참 살아볼 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소위 원히트원더로 끝난 바보들의 결탁의 저자 존 케네디 툴의 삶은 주인공 이그네이셔스와는 달랐다는 것이 놀랍다. 이그네이셔스는 석사 출신이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판다는 가족 및 주변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더라도 당당하다.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사회를 비판할지언정 삶을 비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툴은 32세의 꽃다운 나이에 자살했다. 투고실패, 어머니와 불화 등 우울증이 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급했던 운명의 바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남긴 원고를 한 유명한 작가에게 보여줬고, 영영 어둠 속에 묻혀버릴 뻔한 원고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걸작으로 등극한다. 툴이 죽고 11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다시 운명의 바퀴 최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영광을 즐길 그가 이미 세상에는 없다는 것.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작가의 삶과 주인공의 여정을 보면서 행운과 불행을 다시 생각해본다. 좌절할 만큼 괴롭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열심히 여신이 바퀴를 돌리고 있다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 그리고 영광의 시기를 구가하고 있다면 나락을 대비하면 되는 것이다. 절망 끝에는 적어도 깨달음이라도 얻지 않겠는가 말이다. 정말 부조리하고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이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