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길을 向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



  Ⅰ. 序言


  ‘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明瞭하게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敎師와 學生, 나아가 모든 人間關係에서 우리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형성한다. 일찍이 孔子는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1)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스승을 삼아 늘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에게 경험과 지혜를 배우고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의 순수한 열정과     도전정신에 자극 받는다. 스승과 제자 간의 지적 긴장은 서로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가르치    면서 확실히 알게 되고, 배우면서 새로운 지혜를 얻는다.2)


  ‘敎學相長’을 吟味하는 김영 교수의 말처럼 ‘서로의 발전’을 이루는 관계를 형성할 때 진정한 師弟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서로의 발전’을 이룬다함은 교사와 학생, 즉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의 指向點을 두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 指向點은 무엇인가? 󰡔大學󰡕을 보면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애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3)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현대적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학생들의 잠재능력을 계발하고, 민중들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고, 고도의 지적 ․ 도덕적 수준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다”4)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指向點을 向하는 교사와 학생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즉, ‘가르침과 배움의 道’는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本稿에서 논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의미를 옛 聖賢들의 지혜에서 찾아보고 이를 현대적 의미에서 되새겨 보는 것은 교육의 위기에 直面한 현 우리사회에 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1) 󰡔論語󰡕 述而,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번역문은 김영 편저, 󰡔논어를 읽는 즐거움󰡕(인하대출판부, 1998). 이하 논어의 번역은 이 책에서 취함.
  • 2) 김영, 󰡔인터넷 세대를 위한 한문강의󰡕, 한울, 2005, p.86.  
  • 3) 󰡔大學󰡕,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 4) 김영, 上揭書,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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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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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지금 이 시간은 무척 피곤하다. 아니 점점 피곤해왔고, 이제는 조금의 여력이 남아 있을 것같지 않은 지금이다. 왜 그렇냐고? 물으신다면, 내 사생활의 일부, 일부이면서도 어쩌면 대부분의 전체를 대표하는, 그 일부를 조금 공개해 보자.

  내가 일하는 곳은, 우리나라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이라는 공간이다. 그 '대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주5일제를 실시해왔고, 빨간 날이면 다 노니, 오늘이 월요일이어서, 난 엊그제와 어제, 양일은 쉬임없이, 쉬었다. 이틀을 그렇게 쉬다보면, 생활패턴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는 일요일을 맞는 오후에 극에 달해, 다음날 월요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또다른 급격함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월요일에도 존재했다.

  월요일부터는, 즉 오늘부터는 내가 국방의 의무를 아직 다 마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예비군 훈련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그렇다. 오늘 나는 예비군 훈련을 받고 왔다. 그러니,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고, 평소보다 더 빠른 아침이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생활패턴의 더욱 급격한 변화를 주기 위하여 일요일을 꼬박 샌 것이다. 그것은 조력자가 있어, 월드컵을 관전하다보니, 날 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날을 꼴딱 새고, 예비군 훈련, 그 하는 것 없는 훈련에도 힘이 들고, 또한 6월의 이른 여름 땡볕에 마구 쪼이어 나는 지금 녹초와도 같다. 아니 녹초이다. 그런데 내가 아직 이 녹초를 풀어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또한 월드컵 때문이다. 일본과 호주의 관심가는 경기가 지금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얼 하는가? 옆에는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지금 나는, 오늘 내가 읽은 시집 한 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 지금 이때에 시집인가?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오늘 내내 땡볕에 쪼이면서도 그 허술한 예비군 훈련 사이사이, 이 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이가 길었고 많았다. 그 사이사이 나는 가지고 간 이 시집을 단숨에 읽어 내었던 것이다.

  단숨에 읽힌다는 것은, 쉽다는 말보다는 본질적으로 어떤 매력, 감동, 재미가 있었다는 뜻이어야 한다. 쉽다는 의미는 그와 함께 따라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쉬워도 재미없는 것은 단숨에 읽힐 수 있어도 결코 그렇게 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팽겨치기, 바로 그것에 쉽다는 말은 더욱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이 녹초와도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이 시집을 말하려고 한다. 함민복. <<햄버거에 관한 명상>>이란 시집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나는 이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를 읽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집은 <<햄버거에 관한 명상>> 이전에 나온 것이다. 1996년에 나온 것이니, 내가 대학에 오기 전, 내가 고1 이었을 시절에 나왔다. 이 책이 나올 때, 시인은 강화에 있었다. 나도 그때는 강화에 있었다. 같은 공간적 근접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나의 경계에 꽃이 피는 지는 몰랐으니, 이것도 좀더 관심가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이 시집은 첫 시는 <선천성 그리움>이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의 제1부 또한 '선천성 그리움'이다. 그것은 그만큼 이 시가 갖는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시집을 사 보라는 의미에서 맛보기로 이 한 편 올려보자.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선천성 그리움>

  이 시는 7개의 행이 아닌, 7개의 연으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한 행으로 된 한 연, 즉 한 줄의 시구들이 갖는, 아니 거기에 시인이 부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줄 한 줄을 더많은 여유, 혹은 되새김을 가지고 읽으라는 시인의 권고, 혹은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 독자는 그 시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세를 가져보자. 결코 그것은 수동적 읽기가 아닐 것이다.

  사람을 그리워 하는 것은 특정 사람에 대한 사람이나 모든 이들에 대한, 만인에 대한 사랑이나, 매 한가지 즉,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아는 행위는 그 사랑에 대한 자동적 결과이자, 행위이다. 그 행위는 하지만, 일치될 수 없는,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사랑을 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서로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사랑이 모든 것이 동일하여, 더 나아질 어떤 것도, 사랑의 극대화도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 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은, '선청성 그리움'을 갖게된다. '선천성 그리움' 아 이것은 사랑을 사랑답게 한다.

  이 시집의 큰 줄기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그리움'과 동의어다. 슬픔도 있고, 아픔도, 외로움도, 고독도 있다. 그렇지만 종국에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이 명징하게 새겨놓는 추억, 추억에 대한 아픔 이면의 행복도 있다.

  '사랑'이라고 하는 거대한 폭의 부피는 무엇들로 채워질 수 있을까? 그 큰 부분이 '어머니'다.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이 무척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이 시집을 아름답게 한다. 거기에 아버지도 포함된다. 시인 자신에 대한 사랑도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냉소적이고 자조적이라 하더라도, 냉소적 자조적 낙망이 아니라, 그것은 희망을 위한 냉소이며 자조이다.

  정말 정신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빨리, 하려고 했던 말을 내뱉어내고 끝내야 겠다. 이 시집에는 뛰어난 언어의 표현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소 상투적이지 않나 할 정도로, 표현과 비유와 시적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이 시집은 다른 시인들의 것들에 비해 빼어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 시집이 그러한 부족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것은, 시인의 깨달음, 통찰력, 그리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시적 전략들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시가 얼마나 많이 어머니를 얘기했던가?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했던가? 자신의 고뇌와 격정을 노래했던가? 하지만, 여기에는 그 많은 어머니, 사랑, 고뇌와 슬픔을 함민복만의 깨달음으로 아하! 무릎을 치며 읽게 만드는 명석함이 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 경계에 피는 것은 '사랑'이다. 그것이 곧 이 시집에서 내가 얻은 결론이다. 가시가 있는 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는 꽃이 피어도, 색이 흐릿한 꽃이 피어도, 내 경계, 내 삶의 경계에는 꽃, 꽃 한 송이 피어난다는 사실, 나는 그런 꽃, 사랑이 피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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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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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미뤄두었던 서평쓰기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이 책이 나온 직후 읽어두었다가 서평은 미루고 미루고 이져야 쓰게 된다.

  왜 이제야 쓰는가? 나 자신의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보다는 이 흥미로운 기획, 곧 우리 문학사의 거대한 봉오리들을 라이벌이라는 대립적 구도로 읽어내는 이 획기적 기획에 다소간의 회의라고나 할까? 혹은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 책의 집필진들은 수유연구실의 인연들이 아닌가? 그들이 고전문학계에서 아직은 주류가 아니고, 하나의 아류이고, 아직은 젊은, 즉 정통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그들의 시기가 오지 않은 학자들이기 때문에, 나는 이 흥미로운 기획이 단지 흥미차원 이상에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이 설정해 놓은 각각의 라이벌구도에 나는 약간의 메모를 해 놓았다. 그것은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편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단은 우리 문학의 정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입장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다분히 대중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간 우리 고전문학자들이 놓쳐온 부분을 보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전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부분말이다. 이런 부분에서 생각해볼 때, 정민 교수나, 이 책의 집필진 중 한 사람인 고미숙 씨 같은 분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라거나 <<한시미학산책>>같은 책에서부터, <<열하일기>>의 열풍을 일으킨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이르기까지, 고전문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의 폭을 넓히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부분에 어느정도 부합한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다소 나는 위험천만의 우를 범하고 있는지 않난 하는 회의를 갖게 한다.

  "그렇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다. 세상사 모두 그러하듯, 산맥은 우뚝한 봉우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상에 가린 작은 봉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을 좀더 우뚝하게 만들어 주는 깊은 계곡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선 아득한 정상에만 시야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인간의 삶이란, 따지고 보면 그의 다채로운 일생 가운데 아주 특징적인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의 삶을 기술하는 작업도 이런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진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대비시켜 그들의 삶을 다루려는 이 글에서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라이벌로 맞세운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정 국면만을 부각시키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책머리에 8쪽)

  저자들 자신도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 위험성을 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의 이러한 위험성에 큰 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불화한 두 '천재의 갈림길> 월명사 VS 최치원

  월명사와 최치원이 과연 라이벌이 될 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이다. 여기서는 시대가 그들을 라이벌이게 만들었다는 것이 고작이다. 다소 긴 시간의 층을 건너뛰면서까지 이런 자의적인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필요가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여기서는 조동일 교수의 생극론적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곧, 향가와 한시의 상호대립적, 보완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표자로써 월명사와 최치원을 내세운 거인데, 과연 이러한 생극론적 관점이 라이벌의 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의문이다. 시대가 그들을 라이벌로 읽히기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것은 시대의 역사이지, 문학사라고 하기에는 다소 의문스럽다. 그들의 작가적 존재가 많이 가벼워 지는 것에서 그러하다.

  <삼국의 여성을 읽는 두 '남성'의 시각> 김부식 VS 일연

  김부식과 일연이 이러한 라이벌로써 읽히는 것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과연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을 라이벌로까지 내세울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강력한 문학사의 라이벌로써 존재하기 위한 문학사의 거대한 봉우리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는 데서 오는 회의이다. 그들은 문학사에 있어 중요한 존재들이긴 하나, 그들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함은 그들이 남겨놓은 역사서때문인 것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논하고 있는 이 글도 편협한 데가 없지 않음을 느낀다.

  <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 이인로 VS 이규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라이벌다운 라이벌관계라고 생각한다. 그 둘은 다양한 문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시대와 공간과 세월의 굴곡을 넘어 현시점에서 이규보의 승리를 단언하는 것은 자칫, 잘못이겠지만, 이규보의 문학관, 세계관에 동조되어지는 것을 어쩔 수는 없는 듯 하다.

  <건국이 만들어낸 역사의 두 갈래 길> 정도전 VS 권근

  여기서 정도전과 권근의 라이벌 구도에 의문을 던진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세울만한 능력을 지녔고 권근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지켜나갈 능력을 지녔다. 정도전과 권근, 라이벌이라 하기에 그들의 임무가 달랐던 것이 아닐까 한다.

  <사대부 문인의 두 초상> 서거정 VS 김시습

  김시습에 무게가 확실히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이 가는 길이 달랐건만, 김시습의 삶의 다이나믹함이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일까? 서거정과 김시습은 김시습의 거대한 때문에서인지 모르지만, 라이벌로 인식되시기에 서거정은 조금 작다.

  <가문소설의 시대를 연 선의의 경쟁자> 김만중 VS 조성기

  김만중의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반면, 조성기는 전문학자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여기에서는 다소 반가울 만한 것이, 조성기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킨데 있다는 것 뿐, 라이벌로 읽기에는 조성기가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다.

  <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사이> 박지원 VS 정약용

  너무 다른 두 인물이다. 박지원이나, 정약용이나 둘은 이런 구도를 결코 용납지 않았을 것만 같다. 너무 멀리서 있는 거대한 봉우리는 어쩌면 그 크기와 외양을 비교하기에는 그 위치가 너무 멀지 않은가? 이것은 고미숙씨가 말하고 있는 박지원과 정약용의 거리이다.

  <두 중세인이 그려낸 사유와 정감의 극점> 이옥 VS 김려

  반가운 것은, 이옥과 김려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의식화되고 무비판적이 되어버린 고루한 편견들을 버리라는 추상과 같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울리고 있다.

  <연행예술의 극점을 추구한 두 예술가> 신재효 VS 안민영

  판소리와 시조라는 두 장르는 우리에게 우리 문화 전반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고 특히 안민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은 관심이 간다.

  다소 난잡하게 서평을 쓰게 된다. 하지만, 이 흥미로운 구도의 연구는 그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작위적이고 의도적인 라이벌 구도의 형성에서 오는 문제점을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사의 굴곡을 보다 세심하게 그려내는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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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제1부 제2장 <상상의 지리와 그 표상 : 동양의 동양화>이다.

  99쪽에서 "오리엔탈리즘은 1312년, 비엔나 교회회의에서 ... 각 대학에 아리비아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시리아어에 관한 일련의 강좌를 설치하는 것이 결정된 시점으로부터 서양의 기독교세계 속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100쪽과 101쪽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분야는 매우 큰 지리적 야망을 갖는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이 잡다하고 엄청나게 거대하며 동시에 거의 무한대의 세분가능성을 오리엔탈리즘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인정하여야 한다."

  102쪽에서 "슈와브의 생각에 의하면 '동양'이란 말은 아마추어와 전문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열광과 같은 뜻이었고, 아시아적인 것이란 이국성, 신비성, 심원함, 생식력 등과 놀랍게도 부합되었다. 이것은 과거의 르네상스 극성기에 유럽에서 나타난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정열이 그대로 동양으로 바뀐 것이었다."

  104쪽에서 "19세기의 중요한 작가 가운데 상당수가 동양열병에 걸렸다. 곧 위고, 괴테, 네르발, 플로벨, 피츠제럴드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오리엔탈리즘 저술의 한 장르를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분명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06쪽 "사물이 구별되는 방식에는 언제나 어떤 정도의 순수한 자의성이 작용하고 있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자의적이다. 지리적 위치에 의하여 동양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은, 그 기준을 서양 지신들에 두었다는 자의성을 농후히 가지고 있다.

  107쪽에서 "사물 가운데 정신에 의해 판별되고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허구적인 실재밖에 갖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어서 "사람은 자신이 속하는 공간의 외부에 있는 생경한 공간을,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상이나 연상 또는 꾸며 낸 이야기로 가득 채우게 된다."

  결국, 동양은 서양의 외부로서 서양이 만들어낸, '상상의 지리와 표상'들로 가득 채워진다. 즉, 서양은 동양을 자의적으로 '동양화'하였다.

  이 장에서 이런한 상상의 결과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대상화, 표상화하였는지 입증한다. 110쪽에서부터 140쪽까지 동양, 특히 이슬람이 어떻게 서양에 의해 이미지화 되었는가를 입증하는데, 가히 어린아이들의 단순한 놀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이미지는 더욱 확고히 굳어져, 모든 동양에, 모든 동양인에게 상징적으로 부여되었던 것이다. 재미를 느껴도 된다면, 마호메트가 어떤 캐릭터로 상징화되고 이미지가 부여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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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책에 나오는 구절들을 적어 남기고 싶어 마이리뷰의 밑줄긋기를 이용하고 싶었으나, 별도의 자리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일단은 이곳 마이페이퍼를 이용한다.

  오늘은 제1장 <동양인에 대한 인식>(pp.67~98)이다.

  아더 제임스 벨푸어

  "그는 '동양인'이라고 하는 말의 선택 그 자체가 이미 정해진 규범적인 것이라고 말했다."(p.69)

  "지식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지배한다는 것, 곧 그것에 대하여 권위를 미치고자 하는 것이다."(p.70)

  결국 서양은 오리엔탈리즘, 곧 동양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동양을 지배했고, 권위를 미친 것이다.

  "이집트는 영국에 의해 병합되기까지 동양의 후진성을 말하는, 소위 학문적 사례로만 얘기되는 존재였다."(p.75)

  "밸푸어의 '오리엔탈리즘'에 상응한 것이 크로머의 '종속적 종족'이다."(p.77)

  "본질적인 지식의 핵심, 그 긴 발전의 궤적에 접근한다. 그 지식이란 크로머나 밸푸어가 1세기에 걸친 근대서양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계수한 학문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며, 그것은 곧 동양인에 관한 그 인종, 성격, 문화, 역사, 전통, 사회 그리고 장래성에 관한 지식이었다."(p.79)

  "동양인이 동양인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범죄였다."(p.81)

  "18세기 중엽 이후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규제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가 생겼다. 그 첫째는 유럽에서 동양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한 점이다. ... 둘째의 양상은, 유럽이 지배자의 지위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갖는 위치를 차지했다고 하는 점이다."(pp.82~83)

  "오리엔탈리즘이 제도의 면에서도, 내용의 면에서도 급속하게 진전된 시대는 유럽의 엄청난 팽창의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p.85)

  결국,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의 봉사한 오리엔탈리즘인 것인가?

  "19세기와 20세기에는 오리엔탈리즘의 여러 관념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 ... 소위 동양 르네상스가 생겼났다는 점이다."(pp.86~87)

  "나폴레옹의 이집트점령과 함께, 오늘날 우리들의 문화적, 정치적인 관점을 지금까지도 여전히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 동서양 관계의 과정이 급격하게 시작되었다."(p.87)

  "오리엔탈리즘은 지금까지 제국주의, 실증주의, 유토피아주의, 역사주의, 다윈주의, 인종주의, 프로이트주의, 마르크스주의, 슈펭글러주의 등의 지배를 받아왔다."(p.88)

  "오리엔탈리즘이란 결국 현실에 관한 정치적 비전이며, 친구들(유럽, 서양, '우리')과 이방인(동양, 동방, '그들') 사이의 차이를 확장하는 구조"(p.89)

  동양이라는 것은, 곧 동양에 대한 서양의 타자화인 것

  "오리엔탈리즘의 현실이란 반인간적인 것임과 동시에 지속적인 것이라는 점을 나는 말하고 싶다. 오리엔탈리즘의 범위는, 그 여러 제도 및 광범한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오늘에까지 존속되고 있다."(p.89)

  "동양인에 관한 적합한 연구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이다."(p.91)

  "이국적인 것을 취급하는 사고양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그 근대적인 전개의 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엄격한 구분 위에 기초지워진 지식 특유의 지극히 개탄할 만한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p.92)

  "그의 구별은 동양인과 서양인을 분리하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정통적인 구별과 같다."(p.95)

  여기서 '그'는 전 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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