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3. 옛 聖賢의 지혜 ― ‘가르침과 배움’


  孔子와 老子 이외의 다른 성현들의 지혜에서도 우리는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慧眼을 얻어낼 수 있다. 여기서는 孔子와 老子를 제외한 聖賢들의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명언들을 간추려 보도록 하겠다. 이 또한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지혜일 것임에 틀림없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大學-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명쾌하게 따져보고 돈독히 실천하다.1)


學莫貴於自得, 得非外也, 故曰自得. -程子-

학문은 自得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므로 자득이라고 한다.2)


學問是自家合做底, 不知學問, 則是欠闕了自家底. -朱子-

공부는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하나니,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스스로를 부족하게 만든다.3)


無往而非道, 無往而非工夫. -王陽明全集-

어디 간들 도 아닌 것이 없으며, 어디 간들 공부 아닌 것이 없다.4)


學必以自得爲貴. -南冥集-

학문이란 모름지기 스스로 깨침을 귀하게 여긴다.5)


佛家云: “鴛鴦繡出從君看, 莫把金針度與人.” 其意謂以繡示人, 姑不說針法, 使看者推究自得也. 若並與針法, 恐得之不深也. -星湖全書-

불교에서는 “원앙새 수놓은 솜씨는 보여줄지라도, 바늘을 남에게 주지는 말라”고 한다. 그 뜻은 수놓은 솜씨는 남에게 보여주되 수놓는 방법만큼은 말해주지 않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리하여 스스로 알게 한다는 말이다. 만일 수놓는 방법까지 가르쳐준다면 배우는 자가 깊이 터득하지 못할까 우려한 것이다.6)


  이 밖에도 우리나라의 뛰어난 학자인 서경덕,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등의 명언들이 많이 있으나 지면이 허락지 않아 실지 못함을 다만 아쉬워할 뿐이다.7) 위에서 보인 것은 무엇보다도 ‘自得’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들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孔子는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를 말하였으되, 이것은 곧 ‘自得’과 一脈相通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배움의 道’는 다른 것이 아니라 ‘自得’인 것이며, 이 ‘自得’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섬기는 것이 ‘가르침의 道’일 것이다.

 

 


 

  • 1) 번역문은 김영, 󰡔인터넷 세대를 위한 한문강의󰡕, 한울, 2005, p.81.
  • 2) 번역문은 박희병 편역, 前揭書, p.33.
  • 3) 같은 책, p.53.
  • 4) 같은 책, p.75.
  • 5) 같은 책, p.112.
  • 6) 같은 책, p.140.
  • 7) 옛 성현과 학자들의 공부에 대한 지혜를 모아둔 책이 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창작과비평사, 1998)이다. 본고는 이 책에서 많은 부분 참고하고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두며, 아울러 보다 더 선인들의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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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2. 老子의 ‘배움의 道’


  파멜라 메츠는 老子의 ꡔ道德經ꡕ을 ‘배움’을 주제로 다시 풀어 썼다.1)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현주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국 사람들은 정치가 바로잡혀 나라가 든든할 때 孔孟을 읽었고, 반대로 정치가 어지러워 나라가 흔들릴 때에는 老壯을 읽었다더군요. 제 생각입니다만, 공자 ․ 맹자는 나무 뿌리와 줄기 를 그냥 두고 잘못된 가지를 바로잡거나 병든 잎을 다듬는 방법을 말하고, 노자 ․ 장자는 아예 새 묘목을 심어 제대로 된 나무를 길러내는 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가 서서 신선한 출발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공맹을 읽었고, 그 나라가 세월과 함께 늙어서 아무래도 새 나라로 바꿔야겠다는 민심이 움직일 때는 노장을 읽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2)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교육이 근본부터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3)는 생각에서 老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교사가 가르칠 때

학생들은 그가 있는 줄을 잘 모른다.

다음가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사다.

그 다음가는 교사는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교사다.

가장 덜 된 교사는 학생들이 미워하는 교사다.


교사가 학생들을 믿지 않으면

학생들도 그를 믿지 않는다.

배움의 싹이 틀 때 그것을 거들어 주는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진작부터 알던 바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다.


교사가 일을 다 마쳤을 때 학생들은 말한다.

“대단하다! 우리가 해냈어.”4)


  슬기로운 교사는 학생들을 시시콜콜 간섭하고 억압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교사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교사는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줘야 함을 말하고 있다. 현 우리나라의 교사는 과연 어떤 교사일까? 슬기로운 교사는 아닐지라도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사는 몇이나 될 것인가? 생각해 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지 조금 더 老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슬기로운 교사는

모든 부분들을 희망과 연민의 눈으로 본다.

전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낮춘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처럼 반드럽고 단단하게 만든다.


  교사가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낮추어 학생을 섬기는 자세를 가질 때 슬기로운 교사가 될 수 있다. 학생을 섬기는 교사만이 학생들을 ‘희망과 연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교사가 될 때 “학생들 위에 있지만 그들은 무겁다고 느끼지 않는다. 학생들을 앞에서 이끌지만 학생들은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며 교사를 존경”5)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사의 권위가 무너졌다고들 한탄한다. 그것은 곧 슬기로운 교사가 드물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 1) 여기서는 파멜라 메츠, ꡔ배움의 道ꡕ, 민들레, 2003.을 텍스트로 하여 老子가 전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는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 2) 上揭書, p.6.
  • 3) 上揭書, p.7.
  • 4) 上揭書, p.29.
  • 5) 上揭書,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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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1. 孔子가 말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


  ‘가르침과 배움의 道’를 논함에 있어 그 출발은 孔子에서부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자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의 정치를 바로잡아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관심을 가지면서, 수많은 제자를 포용하여 가르치는 敎育者로서의 일생을 보냈다.1) 오늘날에 있어 孔子의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지혜를 주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볼 때, 孔子는 大敎育者가 아닐 수 없다. 대교육자 孔子의 말씀 속에서 그의 ‘가르침과 배움의 道’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Ⅱ.1.1) 孔子의 ‘배움의 道’

  孔子는 배움을 말함에 있어 그 즐거움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論語 學而-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論語 述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안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탐구한 사람이다.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論語 衛靈公-

내가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며 생각해보았지만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論語 公冶長-

10가구쯤 되는 조그만 읍에도 반드시 나처럼 진실하고 믿음성 있는 자는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배움에 있어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2)에서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현재 우리 교육의 현장에서 과연 배움의 즐거움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孔子의 말씀처럼 배움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교육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하고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닐까 감히 단언해 본다.


    朝聞道, 夕死可矣. -論語 里仁-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


    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論語 公冶長-

자공이 묻기를, “공문자를 어찌하여 文이라고 시호하였습니까?”하자,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명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이라 부른 것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論語 爲政-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이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論語 憲問-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의 내면적 성취를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의 눈을 의식한 학문을 한다.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배움의 즐거움이 어찌나 큰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와 같은 자세가 진정한 배움의 자세의 극치일 것임에 틀림없다.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를 孔子는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不恥下問’의 자세요, 다른 하나는 ‘爲己之學’의 자세이다. 알고자 하는 바는 그 누구에게 물어서라도 아는 것,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배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수양과 발전을 위한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力說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Ⅱ.1.2) 孔子의 ‘가르침의 道’

  위에서 살펴 본 바,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가 곧 孔子가 말하는 배움의 道라 할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교사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렇다면 교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論語 述而-

마음속으로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도 남은 세 귀퉁이를 가지고 반응해오지 않으면 다시 더 가르쳐주지 않는다.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助力者로서의 교사의 역할이다. 학생 스스로 분발하게 하고, 알기를 애태워하며, 세 귀퉁이를 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한 귀퉁이를 잡아주는 ‘助力者’, 그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이며, 교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자세인 것이다.

  또한 孔子는 교사가 先入見을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論語 子罕-

나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런 선입견이 없다. 어떤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묻되 진실한 태도로써 한다면, 나는 그 문제의 自初至終을 듣고 성심성의껏 다 말해준다.


  즉, 선입견이 없이 학생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것, 나아가 “열린 마음을 갖고 학생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3)이 孔子가 말하는 교사의 자세, 곧 가르침의 자세인 것이다. 더욱이 孔子는 가르침에 있어 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학문과 행동과 진실과 믿음”4)이 그것이다. 학문은 곧 지식의 전달일 것이며, 그와 함께 교사의 행동 또한 가르침의 방법이 된다.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하며, 학생 개개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孔子의 ‘가르침의 道’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論語 雍也-

염구가 말하였다. “제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니, 지금 너는 스스로 안된다는 한계를 긋고 있구나.”


  앞서 助力者로서의 교사의 역할을 말하였다. 그러나 학생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분발하여 힘쓰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그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이끌어 주는, 그리하여 더욱 힘을 북돋아주는 역할 또한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세임에 틀림없다.

 

 


 

  • 1) 김영, ꡔ논어를 읽는 즐거움ꡕ, 인하대학교출판부, 1998, p.30.
  • 2) ꡔ論語ꡕ 雍也,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 3) 김영, 「군신 ․ 사제 관계 重言과 寓言」, ꡔ한국한문학 연구의 새 지평ꡕ, 소망, 2005, p.1067.
  • 4) ꡔ論語ꡕ 述而, 子以四敎, 文行忠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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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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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에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귀뚜라미」


  안치환의 노래다.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서는 마음은 잔잔한 풀밭을 헤매면서 귀뚜라미 울음에 왠지 모를 가슴 속 어느 한 덩이, 덩이가 울렁이는 듯하다. “귀뚜루루르 귀뚜루루르 보내는 내 타전소리가/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귀뚜라미는 내 가슴에서 크게 울었다.

 

  이 노래를 좋아하면서,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안치환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야말로 주옥같은 이 가사는 곧 시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시를 쓴 이는 나희덕이라는 여류시인임을 알았다. 나희덕! 이 이름도 왠지 귀뚜라미 울음의 작음 울림으로 들렸다. 그로부터 나는 나희덕이란 이름을 내 귓가에 귀뚜라미 울음과 같이 기억했고, 이 노래를 좋아 듣던 만큼이나, 듣던 때에나 또한 흥얼거릴 때에나, 나희덕이란 이름도 함께 기억했다. 하지만 그 이름뿐이었다.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배추의 마음」


  이 시는 중학교 3학년 1학기 1단원 시의 표현 소단원(2)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나희덕! 그 이름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내가 중학생이 아니고, 이놈의 국어교과서를 학교 다닐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할 입장에 있어, 새롭게(이제 다시 8차 교과서를 펴낸다고 하니 새로울 건 이제 없지만) 7차교과서를 공부하다보니, 이 책에 나희덕의 시가 있었던 것이다. ‘배추의 마음’을 읊는 나희덕의 마음이 아하 곧 ‘배추의 마음’임을 느끼면서, 내 소매에는 ‘배추 풀물’이 들었고, 어느새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들려왔다. 나희덕! 나희덕! 이 이름이 계속해서 내 주의에서 맴돌았다.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대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라진 손바닥」


  ‘배추 풀물’이 거의 다 빠져갈 즈음, 나는 재미삼아, 대학교 말년, 교양수업으로 시창작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나는 전공이 국어교육이었지만, 국어국문학과 강의 중에 이 수업을 들은 것이다. 이 과목은 국문과 전공과목이지만, 내가 들었으니, 교양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그만큼 대충 들었다.) 아하 이런, 나희덕! 그 이름은 또 내게 확 띄었다. 아뿔싸, 이젠 도저히 나희덕을 만나지 않고는 아니 되겠구나. 하지만 나는 참으로 게을러서 나희덕 시인을 이제야 만났다.

 

  삼일간의 예비군 훈련 덕분인 것이다. 삼일 동안 4권의 시집을 읽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나희덕 시인의 이 시집 『사라진 손바닥』이다. 말하자면, ‘사라진 손바닥’이 불현듯, 혹은 우연처럼, 혹은 어쩔 수 없는 필연처럼.

 

  왜 그렇게 돌고 돌아, 이제야 만나야만 했을까? 나희덕이라는 이름을 안지는 10여년의 세월이 더 지난 듯한데, 왜 이제여야 하는가? 하긴, 그걸 묻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은 없다. 내 운명은 왜 이런가 하고 따지니 보다, 앞으로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처럼. 그러니, 이제는 나희덕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필요할 터, ‘사라진 손바닥’이 내 얼굴에 뺨을 치고 말게끔 그렇게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희덕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준 예비군 훈련에 고답다는 말과 함께, 나는 이 시집『사라진 손바닥』을 통해, ‘연밥’도 여러 그릇 얻어먹었다고나 할까, 나희덕 시인이 숨겨 둔 ‘빈손’ 또한 잡아보았다고나 할까, ‘흰 꽃’이 하얗게 내 앞에서 빛났다고나 할까, 그럴 수 있어서 또한 즐거웠다. 귀뚜리미가 울고, 풀물 냄새도 나고.

 

  이렇게 내가 오랜 세월을 거쳐 나희덕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왜일까? 나는 거기에 나희덕의 시의 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시인의 말>


  ‘관념’을 떨쳐버리고, 잘 짜여진 비단결처럼, 나희덕의 시는 곱디고운 아름다운 옷으로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시집 곳곳에는 따뜻함과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귀뚜라미의 울음처럼, 배추의 마음처럼, 따뜻한 겨울 솜옷처럼,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나희덕의 힘이 아니겠는가?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그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국밥 한 그릇을

눈물도 없이 먹어치웠다.

국밥에는 국과 밥과 또 무엇이 섞여 있는지,

국밥 그릇을 들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삼키려는 게 무엇인지,

어떤 찬도 필요치 않은 이 가난한 음식을

왜 마지막으로 베풀고 떠나는 것인지,

나는 식어가는 국밥그릇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국밥 한 그릇」 부분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으니, 나희덕이란 이름은 내게 참으로 여린 잎사귀의 흩날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김진수는 ‘직조술로서의 시학’이라고 명명하였거니와, 나는 나희덕이 만들어 내는(만들어 낸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문제가 있지만) 시들은 따뜻한 털옷,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해낸, 바늘로 세세히 박음질을 한 그런 옷의 시학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한 동안은 나희덕의 시세계에서 이런 따뜻함 느끼지 않을까 한다. 근데, 지금은 한여름이군! 아하! 그렇다면 또한 얼마간이 지난 후에 또 우연처럼 나희덕이 내게 찾아올 것이야!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을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땅 속의 꽃」


  그 때까지는 ‘땅 속의 꽃’으로 남아있을 나희덕의 시를 내가 ‘흰개미’가 되는 그 때에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렇게 나희덕의 시는 내게 또 다가올 것이다. 나희덕과의 기나긴 인연의 줄 굵게 잡고 놓지 않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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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오늘 보내주신 책 두권 잘 받았습니다. 넘 감사하고 기쁩니다.
즐겁게 독서할게요. 제 서재에 페이퍼로도 간단히 올렸어요. 괜찮죠?
그러고보니 나희덕의 시집 한 권 사야지 하면서 미루고 있었는데, 이 시집
제가 좀 바구니로 담아갑니다.^^
 

 

  Ⅱ. 聖賢들의 ‘가르침과 배움의 道’


  지금의 우리는 많은 위기에 直面에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이 敎育의 문제이다. 명나라의 유학자 王陽明은 당시의 교육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근세에 아이를 가르치는 자들은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에게 字句를 익히라 다그치고 품행을    방정히 하라고 요구하지만 아이들을 禮에 의거하여 지도하는 법을 모른다. 또 아이들이 총명하    기를 바라지만 아이들을 착하게 키우는 법을 모른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때리고 벌    을 주기를 죄인 다루듯이 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를 감옥으로 생각하여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스승을 원수처럼 여겨 보려고 하지 않는다.1)


  그야말로 오늘날의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豫見한 것이 아닐까할 정도로 이러한 문제는 지금도 여전하다 못해 더욱 甚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교육현실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 全般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까지 慘憺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慨嘆하고 覺醒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溫故知新’과 ‘法古創新’의 격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하겠다. 溫故와 法古, 즉 옛 聖賢의 말씀을 되새겨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1) ꡔ王陽明全集ꡕ, 若近世之訓蒙穉者, 日惟督以句讀課仿, 責其檢束, 而不知導之以禮; 求其聰明, 而不知養之以善; 鞭撻繩縛, 若待拘囚. 彼視學舍如囹獄而不肯入, 視師長如寇仇而不欲見. 번역문은 박희병 편역, ꡔ선인들의 공부법ꡕ(창작과비평사, 1998), pp.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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