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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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리뷰: 21편
 마이리스트: 5편
 마이페이퍼: 785점
 7분께서 즐겨찾고 있음

  누군가 날 이렇게 '즐겨찾고' 있다. 자그만치 7'분'씩이나. 7분이 나를 즐겨찾고 있는데, 나는 그 귀하신 분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이곳 알라딘 서재에는 좋은 기능이 있어서, 누군가를 '즐겨찾기'에 등록을 해서 단번에 찾아갈 수도 있고(물론 그 사람의 서재를) 또는 누가 나를 자주 찾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여기서 후자의 기능, 곧 누가 나를 즐겨찾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능은 참으로 정당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왜 정당하지 않은가?

  <즐겨찾기>에 대하여

  '즐겨찾기'라는 것은 아마도 인터넷이라는 허공, 혹은 비공간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네트워크를 형성함에 있어, 허공 속을 헤매는 적막함을 벗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기능이라고 본다. 그만큼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결속을 강화시켜주는 기능이겠다. 이런 좋은 기능을 나 또한 사용하고 있다. 좋은 리뷰와 페이퍼를 남기고 있는 멋진 분들의 서재를 나 또한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고, 하루에도 수시로 찾아뵙고 있는 중이다.

  불합리한 기능 추가

  이런 '즐겨찾기'에 나는 다소 불합리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즐겨찾기를 당한 당사자에게 자기가 즐겨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지 말지를 정하는 권한이 즐겨찾기를 하는 본인에게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불합리한가?

  '즐겨찾기' 하는 사람인가? 당하는 사람인가?

  누가 나를 즐겨찾기 하는가를 알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즐겨찾기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가 누군가를 즐겨찾고 있음을 알리지 않을 권리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가? 나는 이것이 즐겨찾기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함이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누가 내 서재를 방문했는지 크게 알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 방문자 수가 10명이면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내 서재를 방문해서 좋은 것을 얻어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즐겨찾기 수준에 이르면, 당연히 지극히 알고 싶어지고, 그러다보니, 알 권리가 나에게 없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고, 그것은 왠지 불합리해 보이고, 나는 나는, "내 귀의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 서재를 도청당하는 기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서재를 즐겨찾기에 등록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고, 그들또한 당당히 누구인지를 밝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가?

  생각난 김에 투표를 해 보자.

  누군가를 즐겨찾고 있는지 당사자에게 공개해야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투표기간 : 2007-07-30~2007-07-31 (현재 투표인원 : 47명)

1.
42% (20명)

2.
57% (2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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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07-1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고 싶던 말을 다 해주셨네요. 1번에 투표했습니다.

마법천자문 2006-07-19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기 해주시는 건 물론 고맙지만 정확히 어떤 분들인지 모르니까 꼭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해리포터7 2006-07-1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멜기세댁님! 저두 맨날 이 즐겨찾기 때문에 고민에 빠져듭니다..제가 즐겨찾는걸 공개해? 말어? 하지만 이 알라딘에 서재를 연이유가 저자신에게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맹글어서요..전 뭐 다른님께서 즐겨 찾아주시면 감사합니다. 이러고 기뻐한답니다.ㅎㅎㅎㅎ

마늘빵 2006-07-20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는 접니다.

멜기세덱 2006-07-2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7님 > 물론 찾아주니 고맙죠.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왜 나를 비밀리에 찾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 지더라구요. ㅎㅎ 혹시 알아요, 절 좋아하는 데 말하진 못하고...그럴까봐요...ㅎㅎ
달의눈물님 > 전 그 사람들과 좀더 긍정적 관계가 이뤄질 수 있으리라고 봐요. 감시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당당히 공개하고 즐겨찾으시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아프락사스님 > 그 하나로 무게추가 확 기울어 버렸어요. 감사!!

멜기세덱 2006-07-2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 님>결국 우산을 파는 아들과 나막신을 파는 아들을 둔 어머니와 같은 슬픔을 가진 건가요.^^ 해법도 그곳에 있겠죠. 나를 즐겨찾아 주는 이들이 과연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오히려 행복일 듯 싶어요. 그 궁금증이 이렇게 바람구두님께 찍히는 영광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위의 글이 저를 즐겨찾아 주시는 분들께 괜한 오해 없기만을 바랍니다. 저는 그분들께 고마울 따름이에에요.ㅎㅎ 아웃팅! 전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데요.

sayonara 2006-07-2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갠적으론 궁금하기도 하고, 공개된다는 것이 뭐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1번이지만...
뭐,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니까요... ㅎ

부엉이 2006-07-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 늘 궁금해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인듯해요. 넘 변태적인가..^^;;

조선인 2006-07-2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즐겨찾기를 했습니다만, 제가 누굴 즐겨찾고 있는가를 늘 공개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즐겨찾기를 하는 목적은 다양할 수 있으니까요. ^^;;
 

  결혼이란 무엇일까?

  '結婚' 즉 혼인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인다. 혼인이란,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부의 관계를 맺는 것이 결혼이다. 부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일종의 관계맺기이다. 이 관계맺기는 사회의 주된 유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계맺기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가능한데, 결혼이라는 관계맺기는 가장 기초적 사회 성립의 단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결혼에는 따라서 사회성이 크게 작용한다. 흔히들 사랑의 결정으로서의 결혼은 근대적 산물에 불과하다. 아니 그것이 사실적 산물, 실체하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근대적 관념에 불과하겠다. 현재까지, 결혼에는 사랑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지금에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랑이라는 요소가 이 결혼을 결정짓는데 어느 만큼 작용한는지를 조사해 본다면, 머리를 갸웃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결혼이란 것이 사랑의 결론, 결정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한국전후 7~80년대까지만을 생각해보더라도,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사랑은 그 성립조건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는 사회적 위상과, 상호 가문의 동급성에 따라, 혹은 경제적 여하에 따라 성립되었고, 그 결정과 판단은 부모라는 가부장의 몫이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볼 때 결혼은 사랑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 도출이 가능한가? 여기에 불만을 갖는다면, 현대라는 시간을 제쳐놓고, 이전까지의 결론으로만 본다면, 인정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결혼에 관여한 것이 사랑이 아닐진대, 성의 문제는 또한 더욱 크게 소외더었다고 볼 수 있다. 성이라는 것이 자손번창, 즉, 유전자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때에도 결혼은 이 요소와 밀접히 연관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여기에서는 자손번창의 유리성을 가진 여성의 간택이 중요했을 따름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왕비 간택을 생각하며 확실해지는 듯 하나, 왕비 간택에서 이런 자손번창의 요소는 단지 일부분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결혼에서의 결정 요소는 자손번창도 그 큰 요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쉽게 결론을 말하자면 결혼이라는 행위, 사회적 관계 맺기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적 요인만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성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며, 유전자 번식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성의 측면, 여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을테지만, 여기서는 크게 논하지 아니한다.

  얼마전에 <<섹스의 진화>>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섹스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다양한 의문점들을 도출하고 해설하고 있다.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이 왜 일부일처제를 택하고, 결혼을 하며, 일생을 한 명의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키우고 사느냐? 그것은 대부분의 동물(인간의 일부를 제외하고, 일부를 포함한)들과는 다르지 않느냐?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물음 들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섹스나 결혼 등을 크게 작용한 요소가 유전자 번식이라는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유전자 번식을 위한 본능의 작용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역사의 길을 들어선 후부터는 이 유전자 번식의 목적은 큰 폭으로 축소되어 졌다고 본다.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은 사회적 위세를 드러내는 효과적 방법으로 작용했고, 그것은 현재에도 비공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에는 권력과 경제적 부를 드러내는 또다른 측면에서 기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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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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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 아침은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가 추적추적 끈덕지게 내리는 ‘흐린 날’보다 더욱 축축한 날이다. 이런 날에는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시를 읽는 것이 다소 모자람 있지만 제격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부분


  내가 아직은 이런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니다. 아직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술도 잘 못한다. 아직까지 ‘술잔의 수위’가 줄어드는 데에 아까움을 느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왜일까? 이런 흐린 날에는 그래도 이 시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니 말이다. 그래서 시는 이중, 삼중, 다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또한 저렇게. 그리하여 모든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시의 목표라면 목표이다.

  시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 재미난 일화가 있단다. 정작 시인은 시집제목을 ‘等雨量線’으로 하려고 했는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들이 상업적 전략을 발휘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면서도 공감과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제목을 골랐으니 그게 바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이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시집이 대박이 났단다. 원래 붙이려던 ‘등우량선’으로 했다면 아마도 쪽박을 찼을 거라는 안도의 한숨 속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하다. 무슨 아쉬움이 남았을까? 그건 아마도 제목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다만 상업전략에 치우쳐 무시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제목이라는 것은 시집의 얼굴이 되고, 시집으로 엮인 시들의 전체적 맥락의 중심이 되는, 그리고 그 시들을 풀어내는데 열쇠가 되는 그런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시집의 제목을 ‘등우량선’이라 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되질 않았으니, 시집은 많이 팔렸더라도 끝내 아쉬움은 남았으리라. 그 후에 시인은 이런 생각 품지 않았을까? ‘정말로 등우량선이라 했으면 팔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시인은 왜 시집의 제목을 ‘등우량선’으로 하려고 했을까? 여기서 「등우량선」을 읽는 것이 필요하겠다. ‘等雨量線’이란 제목을 단 시는 모두 4편이 있는데, 이중 가중 짧은 「等雨量線 2」를 맛보도록 하자.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날

연기나는 地球儀; 머리에 깍지낀 손을 얹고

포로들은 이란 고원을 넘어가고,

이집트로 들어간 그때부터

대일파스만한 관광 엽서, 받았습니다.

이 인류를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은

사막으로 나가봐야겠지요?

거기서 누군가가 울었습니까?

해가 람세스 신전으로 내려가고

그대가 보낸 北 아프리카의 붉은 밤;

덴 것처럼

그날 내내 내 얼굴이 후끈후끈했습니다.

피가 없는 평화를 원한다면

날 내버려두십시오.

나는 남조선, 선거 끝난 담벼락을

터덜터덜 지나왔습니다.

                        「等雨量線 2」 전문


  ‘등우량선’이란 기상도에서 같은 강우량의 지역을 선으로 이어그인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왜 ‘등우량선’이란 제목을 달고 있을까? 얼핏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알아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뚫어지게 쳐다볼 필요는 없다. 이 시는 부분적으로 다양한 사건들 상황들 지역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놓았다. 아니 그것을 선으로 그어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상에 그어진 ‘등우량선’인 셈이다. 그 선으로 이어진 지역은 곳 같은 등급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날”은 “포로들은 이란 고원을 넘어가”던 날이다. 그리고 “대일파스만한 관광 엽서, 받”은 날이기도 하다. “나는 남조선, 선거 끝난 담벼락을/터덜터덜 지나”온 날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그것은 조금만 더 시집을 충실히 읽어내면 또 다른 시편들에서 찾아 낼 수도 있다.

  아까 제목이 시집을 대표한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시집은 첫째 번으로 실리는 시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시집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제목보다 더욱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동급으로 줄그어 놓은 시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첫째번의 시를 읽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논에 물 넣는 모내기 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斜線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름다운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아직은 바깥이 있다」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바깥’을 말한다. 새삼스레 왜 ‘바깥’인가? ‘바깥’은 대립적 존재로써 ‘안’이 있다. 우리는 어쩌면 늘 ‘안’에서 사유하고 살아간다. 그러하기에 ‘바깥’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소외되고 잊혀진다. 그래서 시인의 ‘바깥’의 관한 사유는 새삼스러운 것이 된다. 안과 바깥은 대립적 사유에서는 ‘바깥’은 소외되지만, 이 시인의 ‘바깥’의 사유는 대립을 넘어 조화로, 조화를 넘어 지향으로써의 ‘바깥’이 된다. 그럴 때에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또한 안과 밖은 이면대립이 아니다. 밖은 셀 수 없을 만큼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범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과 밖은 다중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계를 무너뜨리며 거기에 ‘등우량선’이 그어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시인의 사유에서 등우량선은 이런 ‘바깥’에 대한 사유 속에서 그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等雨量線 2」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졌다. 내가 존재하는 곳과,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곳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리고 저 멀리 소외되었던 포로들이 고원을 넘어가는 곳까지도 그 선은 놓치지 않는다. 무엇하나 놓쳐버리지 않고, 나와 같이, 나와 같은 의미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의 제목은 ‘등우량선’이 되어야 했다.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이런 시인의 사유의 큰 틀에서 잠시 방황하고 주저했던 시기의 단편에 지나지 않으니, 시집의 제목으로써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으리라. 하지만 어떠랴? 이 시집을 엮고 있는 모든 시들이 어쩌면 등우량선으로 그어져 같은 등급의 시들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니, 시인은 제목을 바꾸는 데에 그리 반대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이 시집에서는 나는 좀 특별히 울컥한 대목이 있어 이걸 말하고 끝나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안부 1」 전문


  화자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노인이거나 중풍을 맞은 환자이거나. 그런 어머니를 아들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그런 아들의 마음은 곧 어머니의 마음과 등급을 이룬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고 말하는 아들의 마음은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시는 어머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머니는 때론 ‘꼬마 계집아기가’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등급을 이룬다. 이런 등급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 시도 또 하나의 등우량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바깥에 대한 사유는 결국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려는 조화와 사랑의 결과, 곧 ‘등우량선’으로 줄줄이 이어 결코 끊이질 않는 인연의 선을 만들어 놓았다. 황지우 시인의 사유 속에는 이런 기상도가 그려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의 등우량선만으로 그려진 일기도말이다. 그게 이상한 것은 ‘안’의 삶과 사유 속에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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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4-1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우량선에 대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집 제목을 왜 저걸로? 갸웃하면서 시를 읽었네요. 멜기세덱님의 리뷰를 읽고 등우량선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거 같습니다. 시인의 아주 넓은 마음 속에는 세상 만물이 등우량선 범위 내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확실히 동양과 서양 사이의 경계선은 유럽측에 언제나 무엇인가를 인상지운 것이었다."(141쪽)

  '무엇인가를 인상지운 것'은 자기화 하는 것, 아니 자기 멋대로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을 이용가능하게끔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양은 언제나 유럽의 '사업'대상이 된다.

  "우리들이 아는 한 그들의 대부분은 '식민지의 개량을 촉진함과 동시에 자국의 지식을 높이고 예술을 향상시키는 것을 희망하여 아시아의 여러 학문과 예술을' 연구한다고 하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지녔다."(152쪽)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의 공통된 목표'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자 한다. 자국은 곧 제국이며, 그 제국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힘었으며, 그들의 지식은 침략과 약탈에 봉사하였다. 결국 오리엔탈리즘은 그들의 이익이 목표였던 것은 아닐까?

  "유럽인이 고전적 동양이라고 하는 과거로부터 끌어낸 것은, 자기를 위해서만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는 비전(및 수천 개의 사실과 인조물)이었다."(153쪽)

  결국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의 이익을 위한 사업이었다.

  "이집트에 대한 나폴레옹의 계획은, 연면히 계속된 유럽과 동양의 만남 속에서도, 오리엔탈리스트의 특수한 전문적 지식이 직접 기능적으로 식민지지배의 도구로써 이용된 최초의 보기가 되었다."(154쪽)

   "유럽의 중요한 오리엔탈리스트는 거의 모두 실베스트르 드 사시의 제자였고, 유럽에서는 어언 4분의 3세기에 걸쳐 그들이 이 분야를 지배했다."(159쪽)

  실베스트르 드 사시는 당시의 유일한 아라비아어 교사였단다. 동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언어를 알아야 했던 것일까?

  "동양에 대한 서양세계 공통의 사명이 낳은 유산은 대대로 계승되어 새로운 프로젝트와 새로운 비전 그리고 새로운 사업이 되어 나타났으며, 그것들이 옛 동양의 남은 부분과 정복자로서 유럽정신을 결부시키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이후, 오리엔탈리즘이란 말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오리엔탈리즘의 서술적 사실주의는 격상되었고, 더 이상 단순한 표상의 한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 실제로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 변했다."(166쪽)

  "수에즈 운하의 구상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의 논리적인 귀결과, 더욱 흥미 깊은 것으로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노력의 논리적인 귀결이 같이 나타난다."(173쪽)

 


 

  오랜만에 놓아두었던 <<오리엔탈리즘>>을 다시 읽었다. 오리엔탈리즘을 충실히 건설하였던 그 제국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밤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충실함을 다했을 것인데, 나는 오히려 그들만도 못하니 애석할 따름이다. 알지 못하고는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과 그 수행자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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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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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나는 공선옥 작가와 몇 번의 통화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조교로 일하는 곳에서, 지역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방학 중에 연수를 하는데, 여러 강좌 중에 <소설가와의 만남>이라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공선옥 작가가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업무상의 통화였지만, 내게는 참 흥분되는 일이었다.

  공선옥 작가가 온다기에, 나는 공선옥 작가에게 사인이라도 받아둬야 겠다고 생각해서, 가장 최근작인 이 책을 다짜고짜 샀다. 그리고 읽었다. 읽지도 않고 사인을 받기에는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공선옥이란 이름, 작가 공선옥을 그전에는 알지 못했다. 공씨 작가는 공지영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이 공선옥이란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꽤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를 만나게 되는 날이 꽤나 기다려졌다.

  몇 번의 통화에서 나는 공선옥 작가가 어떤 사람일거라는 추측을 조금은 할 수 있었다. 연수 강좌를 맡았기에, 몇가지 서류와 함께, 강의 원고를 작성해 나에게 보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가라는 사람이 원고를 어떻게 써야되느냐, 3시간 동안 말해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느니, 말주변이 없다느니 하는데, 그 목소리 또한 왠지 털털한 느낌이기도 했고,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과는 다른 느낌. 왠지 말을 조용조용 조리있게 잘 할 것만 같고, 분위기 고상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옆집 아줌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 것은 공선옥 작가에 대한 무례일까? 그건 아닐거라는 생각은 이 책 <<유랑가족>>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그녀의 그런 목소리, 그런 솔직한 대답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 가난하여 '이 땅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처럼/ 나 또한 가난한 '유랑작가'일 뿐." (작가의 말)

  자기는 가난한 작가, 그리하여 '유랑작가'이니, 고상한 척, 잘아는 척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유랑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털털해 지고, 또한 옆집 아줌마처럼 생활력 강하고 모든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치워야하는 그런 작가여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유랑가족>>은 떠도는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이전에, 왜 유랑, 즉 떠돌아야 하는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가난이라는 문제, 가난한 사람들의 삶, 거기에서 오는 많은 아픔들, 고통들, 그래서 결국에는 유랑해야만 하는, 그래야만 질긴 생명 부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구성은 5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며 한 편의 연작소설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단편들이 등장인물의 중복, 또는 장면의 교차, 또는 가난이라는 주제의 큰 틀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구성을 갖게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인물은 작가의 분신처럼 생각되어지는 '한'이라는 사진작가이다.

  이 '한'이라는 사진작가는 어쩌면 작가와 동일시 되어진다. 공선옥 작가는 가난이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한 장의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서도 이 '한'이라는 인물, 그리고 이 '한'의 가족들 또한 그 '가난'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즉 가난한 작가 공선옥처럼 '가난하다.' 그러기에 나는 '한'을 보면서 공선옥 작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질긴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몇 가지 나의 의문은, 이제 가난타령은 진부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선옥 작가는 왜 이리 가난에 천착하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 둘은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의문이리라.

  '가난' 타령은 이전 소설에서 많이 애용되어 왔다. 2~30년대의 사실주의 소설, 대표적으로 현진건의 소설에서나, 1950년대 이후의 전후소설에서 이 '가난'의 모습은 너무 많이 나왔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더이상 '가난'의 이야기들은 적어도 소설에서는 더이상 먹히지 않는 소재가 아닐까? 98년의 IMF이후 가난이라는 것이 이슈가 될만도 했지만, 빠른 요즘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 또한 빨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진부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런데 유독 공선옥은 가난이라는 이야기를 써내고 있다.

  왜 이리도 가난에 천착하는가?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가난 이외에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가난을 가장 잘 아는 작가라는 뜻일까?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그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곧 '가난'을 이 시대에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면서, 소외되어 있는 이 시대 이 세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이 사회의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가난이 먹히지 않는 소설계에서 공선옥 작가의 '가난'이야기는 그녀를 계속적으로 가난한 작가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모르겠다. 잘 팔리는 소설을 써야 가난에서 면할 수 있는 방법이기때문에, 진부한 소재로 외면받는 가난이야기는 잘팔리기에는 애당초 그른 것이 아닌가? 그럴 수록, 작가가 가난할 수록, 공선옥은 가난 이야기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나는 공선옥 씨처럼 유행적인 담론이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인 경험과 사유에 의해 굳건히 뒷받침된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일층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선옥 씨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존재다. 먼 훗날 누가 21세기 벽두에 한국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가 하고 물을 것이라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비한 타임캡슐 안에 공선옥 씨의 소설들을 넣어두어도 될 것이다."

  작품의 해설을 쓴 방민호 평론가의 말이다. 그렇다. 누구도 쓰지 않는 이 시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공선옥은 그렇지 않은 다른 소설가에 비해 어떤 면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먼 후일에 그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공선옥 작가의 가난말하기가 그래도 이 당대에 이슈가 되고 잘 팔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지독한 가난에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겠는가?

  며칠전에 공선옥 작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연수에 강좌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신 권지예 소설가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부랴부랴 <<꽃게무덤>>을 사놓았다. 그런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공선옥 작가를 만나서 꼭 사인을 받아두고 싶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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