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김선미 지음 / 마고북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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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으로 여행관련서를 읽은 듯하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 굳이 그런 책들을 읽을 필요가 없었거니와, 그것외에 읽어야 할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라는 책도 나와 인연을 맺기에는 참 어려웠을 듯하다. 이 책도 하나의 상업적전략으로 인해 여름휴가철에 때맞춰 출간되었고, 이 곳 알라딘에서 홍보차원의 서평단을 모집, 거기에 덜컥 당첨이 인연을 맺게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관심은 이 책과는 너무 먼 곳에 계속 있었을 터였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격은 우선 귀차니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성격탓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내가 사는 인천만해도 한 10여년을 살았으나 살고 일하는 곳 외에 다른 곳엘 가본 적이 많지 않을 정도이니, 어디 몇 날을 잡아 먼 곳으로 가는 진짜 '여행'은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또한 실행해 본 기억도 없다. 멀리 떠나봐야 명절에 시골집 내려가는 정도인데, 그것도 고속도로를 타고 훌쩍 갔다가 훌쩍 올라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귀차니즘과 함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도 어쩌면 이 여행을 기피했는지 모른다.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매번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는 여행 이면의 많은 어려움들을 나는 두려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내 기억속의 여행은 전무에 가깝다. 아! 이것은 지금의 나 -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 - 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이 책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는 우선 기행문이다. 엄마와 두 딸의 여행. 3모녀의 여행은 그저그런 여행이 아니어서 특별하다. 거반 보름간의 여행, 그것도 매번 야영을 해가며 숙식을 해결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어쩌면 위험천만한 여행이었다. 어머 어떻게 그럴수가! 라는 감탄을 우선 동반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감탄을 대단함에 대한 극찬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들은 아주 잘 이 여행을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직을 각오하고 한달간의 휴직계를 낸다. 그리고 여행을 계획한다. 여행을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여러가지 문제와 고민하지만, 결국 여행에 돌입하고, 3모녀가 14일간의 3번국도를 따라가 제주도와 마라도까지의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에서의 즐거움, 우여곡절, 여행중에 일어나는 엄마와 딸들간의 티격태격 등 그야말로 흥미진진 읽게하는 기행문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나 또한 그 도전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 책은 기행문이면서도 살아있는 교육론이라고도 생각이 된다. 제목을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내가 간혹 한자시험과 관련된 일을 하다보면, 요즘 엄마들의 극성은 아이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아직 유치원,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시험에 억매이게 하는 엄마들은 극성은 자칫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과 성숙을 저해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이 엄마는 아이들의 그렇게 자라고 성공하길 바라지 않는다. 살아 쉼쉬는 길 위에서, 자연과 세계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서 성숙하고 성장하는, 바로 길 위에서 자라게 하려는 엄마의 교육적 의지가 이 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다만 염려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엄마들이 이 책을 읽고 무작정 자식들을 끌고 나가지나 않을까 하는, 전국 도처에 여행학원이 생겨나고, 여행자격시험이 생겨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자기성찰과 인간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 여행을 통해 자란것은 아이들만이 아닌 우선 자기자신이다. 인간을 자라게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길 위'에서 이다. 세상속에서 자연속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세상을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한층 성숙된 자아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곧 실체로써의 세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권의 책 속에서 보는 세상은 눈앞의 하나의 세상보다 못하다. 이런 통찰이 이 책에는 담겨있어, 흥미진진한 기행의 현장에 간접적이나마 동참하게 되는 즐거움과 동시에, 인문학적 성찰에서 오는 깨달음, 그것들이 어울려 이 책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감동에 내가 동하여 나는 주말과 광복절 사이에 낀 하루를 휴가내서 무작정 떠났다. 밤차를 타고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의 하나의 경상도 울산엘 내려갔다. 무작정이라고는 하지만, 지인들이 있는 곳이기에 내려간 것이다. 거기에서 울산의 먼 바다를 바라다보며 내 안에 가둬두었던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어 어쩔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으로 미뤄두고 싶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혼자만의 멀고 긴 여행을 생각해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 또한 훌쩍 자라기 위해서는 "길 위"로 나가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여행을 위한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계획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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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에 나는 감행했다. 무엇을? 빚을 지고 야밤을 틈타 도주하는 야밤도주는 아니다. 울산행. 언젠가 한번쯤 가보리라던 울산을 향해 감행한 것이다. 울산에는 참 그리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12시 버스를 타려고 밤 11시쯤 집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기사분께 물었다. "울산엘 가면 뭘 봐야될까요?" 시원스럽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니 울산하면 딱히 떠오르는 그 무엇은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이런 노래가 생각이 난다. 

"동해나 울산은 잣나무 그늘
경개도 좋지만 인심도 좋구요
큰애기 마음은 열두폭치마
실백잣 얹어서 전복쌈일세
에헤에야 동해나 울산은 좋기도 하지

울산의 아가씨 거동좀 보소
임오실 문전에 쌍초롱 달고요
삽살개 재놓고 문밖에 서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린다네
에헤에야 울산의 아가씨 유정도 하지" -울산아가씨

이 노래는 민요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국악인 김영임씨의 목소리로 들으면 참 구수하면서도 애절하다. 이 노래를 찬찬히보니, 울산에 대한 정보도 참 많다. 우선 '잣나무'가 좋은가 보다. 그러니 잣도 자셔야겠다. 바닷가이니 전복도 좋단다. 혹시나 울산의 특산물이 잣과 전복인가? "실백잣 얹어서 전복쌈"을 먹어야 겠다. 사람 인심도 좋다니 듬뿍듬뿍 많이도 줄테지.

바닷가라서 그런지 울산의 노래들은 여인들의 애닲은 이별이야기들이 주테마인듯 싶다. 어느 항구도시나 이런 이별노래 쯤은 다 가지고 있기는 하다. 위의 민요에서도 떠나 임을 그리는 울산아가씨의 마음이 참 '유정'도 하다.


운무를 품에안고 / 사랑찾는 무룡산아 /산딸기 머루다래 / 따다주던 그손길

앵두같은 내입술에 / 그이름 새겨놓고 / 꿈을 찾아 / 떠난 사람아

둘이서 거닐던 / 태화강변엔 / 대나무 숲들은 / 그대로인데

어느곳에 정을두고 / 나를 잊었나 / 나를 나를 잊었나

돌아온단 그약속에 / 내청춘이 시든다 / 까치들이 울어주니 / 님 오시려나
아 울산아리랑

석양을 품에안고 / 사랑찾는 문수산아 / 산딸기 머루다래 /따다주던 그손길

배꽃같은 내가슴에 / 그리움 물들이고 / 꿈을 찾아 / 떠난 사람아

둘이서 거닐던 / 정자 바닷가 / 하얀파도는 그대로인데 / 어느곳에 정을두고
나를 잊었나 / 나를 나를 잊었나

돌아온단 그약속에 / 내청춘이 시든다 / 까치들이 울어주니 / 님 오시려나
아 울산아리랑  (울산아리랑, 작사 오은정, 작곡 김정일, 노래 오은정)

아~ 애절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참 좋은 울산정보가 있다. 무룡산, 태화강변, 대나무 숲, 문수산, 정자 바닷가. 그러고 보니 태화강변은 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하다. 이 노래는 민요풍의 트로트로 오은정이란 가수가 불렀다. 나름대로 구성지고 간드러지게 잘 불러냈다.

말이 나온 김에, 가수 김상희가 불렀 나름 히트한 노래가 있다. <울산 큰애기>란 노래인데, 이 제목은 맨 위에서 말한 <울산아가씨>도 간혹 <울산큰애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어찌보면 이 노래들이 비슷한 연원을 가지고 있지 싶다. 김상희의 이 노래에서는 울산에 대한 정보는 울산이 경상도 소속이라는 정보 정도이다. 그런데 울산에 김상희의 울산큰애기 노래비가 있단다.

자! 이만하면 울산에 대한 정보는 많이 얻은 듯 하다. 12시차를 타고 왔더니 4시가 좀 넘어 도착을 했다. 인천에서는 고속버스는 없고 시외버스만 있어 6시간이 걸린단다. 그런데 막차여서 이리저리 걸치지 않고 직행을 해서 4시간밖에 안 걸렸다. 새벽에 도착하고 보니 어딜 갈 수도 없고 해서 찜질방을 찾아 보았다. 앗 그런데, 울산의 관문이랄 수 있는 울산터미널의 주변은 기대이하였다. 여기저기 남성휴게실 아니면, 안마시술소, 술집, 성인오락실, 뭐 무슨 유리방이라는 것만 있다. 찜질방을 열심히 찾아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고, 잠시 사우나에 갔다가 지금은 근처 PC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기대를 크게 품었지만 첫 대면은 실격이다. 그런데, 울산기행은 이제부터이니 "동해나 울산은~" 이래서 좋은 것이여! 그것을 찾아 오늘 하루 햇볕에 살을 태우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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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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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보다 조금 뒤에 나타난 대신이 바로 황제(黃帝)이다. 고서에는 <황제(皇帝)>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황천상제(皇天上帝)>라는 의미이다. 황제의 <제(帝)>라는 글자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그리고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鐘鼎文)에도 나타나는데 본래는 상제(上帝)를 지칭하는 글자이다. 또 <황(皇)>자는 <제(帝)>의 형용사로서, <제>의 빛나는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시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대아(大雅)편>, <황의(皇矣)편>에 <위대한 상제[皇矣上帝]>라는 구절이 있고 <소아(小雅)편>, <정월(正月)편>에도 <위대한 상제>라는 의미의 <유황상제(有皇上帝)>, <황황후제(皇皇后帝)>라는 말이 보인다. 이것은 모두가 상제의 장엄하고 위대함을 찬미하는 말들이다. 본래 고대에는 나라의 군주를 <제>라고 부르지 않았다.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王)>이라 칭하기 시작했으며, 문왕(文王), 무왕(武王) 때부터 시작해 진(秦)나라에게 멸망당한 난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만 <왕>으로 불려졌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야심에 찬 제후의 무리들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다투어 <제>라 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秦)은 서제(西帝), 조(趙)는 중제(中帝), 연(燕)은 북제(北帝)라 칭하였다. 후에 진나라의 시황(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게 되자 성품이 더욱 나빠져서는 <황제(皇帝)>라는 두 글자를 자신에게 갖다붙였다. 그래서 자칭 <황천상제>라 하였는데 그것이 후대에 계속 전해져 내려와 인간 세상 제왕의 통칭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145~6쪽

상고시대에 한 차례의 무시무시한 홍수가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다. 갑골문을 보면 옛날이라는 의미의 <석(昔)>자를 ..., 그것은 태양의 위나 아래에 물결이 굽이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 뜻은 아마도 예전에 아주 무서운 홍수가 범람한 때가 있었으니 모두들 그날을 잊지 말라는 의미인 것 같다. 또 기록에 의하면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홍수에 관계된 전설을 갖고 있는데 그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자연계의 변화로 인한 홍수가 전세계에 범람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류는 그 대홍수로 인한 참담했던 기억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범람했던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히 추정할 수가 없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는 4천 몇백 년 전의 요순시대라고 하기도 하지만 정말 그러했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3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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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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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시대에는 문학이라 이름지어진 것들이 무척이나 많이 있다. 예로부터 주어는 것이나, 현대에 이르러 탄생되어진 것이나, 우리는 문학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그것들을 묶어 놓는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그 종류안에서도 질적이 차이를 가진다. 그러한 것들에 어느 것은 문학이고, 어느 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수세기를 거쳐 우리에게 주어졌고,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그것에 답하려 하였지만, 아직까지도 딱부러지게 정의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는가,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말이다. 여기에 시를 문학으로 대체하여도 이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그 시대와 사회에 걸맞게 문학은 재정의되고, 재탄생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문학사의 재정립이 되고, 그 시대의 고전은 변화하였으며, 정전의 목록은 새롭게 제시되어졌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 우리가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문학중의 문학, 정전중의 정전으로 인식하게 된 어떤 것이 있다. 세대가 바뀌고, 시대는 변하여도 우리에게 여전히 문학의 정수로써 손 꼽히는 그 무엇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아닐까?

  사실상 영문학의 시작이라하면 셰익스피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영문학의 시작이 아니라, 세계문학사에서도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철부지 어린 아이들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알며,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의 내용도 줄줄이 꿰고 있다. 초등학교의 교과서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실려있을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근대문학의 시초이자 뿌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셰익스피어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이 시대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그의 작품을 내어놓고 있다. 그것은 이야기로, 혹은 그림책으로, 때로는 영화로 수없이 재창조되어 나타나고 있고, 다만 책으로 출간되어진 것도 다양다종하다. 하지만 이것은 셰익스피어를 널리 알리는 하나의 방도도 되지만, 셰익스피어의 진수를 맛볼 수 없게하는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그것은 새로이 번역되고 재구성되며, 정작 셰익스피어가 전하고자 했던 바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정전이라 일컫는 많은 고전들에 고통으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한데, 그 해결방법은 그것의 원전을 찾아내어 읽거나, 원전을 충실히 연구하고 해석한 완역본을 찾아 읽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외국의 원전을, 그것도 고전의 원전을 읽어낸다는 것은 전문 연구가나 가능하지 않겠는가? 또한 최상의 번역본을 찾아내어 읽는 것도 일반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는 것은 이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이 아닌가한다. 여기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원전에 충실히 번역하여 내어놓은 책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았던 <햄릿>을 보다 흥미롭게, 보다 짜릿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여기에 나타난 셰익스피어를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셰익스피어와 그의 유명 작품들을 원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읽는다면, 보다 흥미롭게 새롭게, 그리고 진정한 셰익스피어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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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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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사상가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상가는 누구일까? 몇 이름 건너지 않아 나올 이름 중에 하나가 바로 장 자크 루소일 것이다. 루소, 그 이름이 우리 학창시절을 아름답게 하지만은 않지만, 중요한 이름이었고, 그 중요도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서 그의 사상의 유효함을 반증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름 지금의 내게도 루소는 소홀할 수 없는 이름이다. 그가 남긴 저서 <<에밀>>때문이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루소는 또한 큰 산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루소를 알지만, 그의 저서를 읽어본 이는 얼마 되지 않는듯 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대표적인 역작인 <<에밀>>이나, <<사회계약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등은 그 유명함에 비해 그리 썩 잘 읽히지 않는 것임에 분명하다. 굳이 그것을 읽지 않아도 시험보는데는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교과서나 문제집에, 그리고 임용시험대비 교육학서적에 잘, 아주 잘 요약되어 설명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이나, 지금의 임용고시생인 지금에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루소에 대한 앎은, 사실 우리를 곤욕스럽게 할 뿐이다. 그의 교육사상을 요약하여 암기한다고 해도, 단지 소용이 다하면 지워져버릴 따름이다. 그의 사상이나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들을 단지 요약하여 암기하는 것에 그치는 우리의 루소 배우기는 그만큼 따분하고, 짜증날 뿐이다.

  루소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를 모조리 읽어낼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해도, 그의 중요한 저작들을 읽어내는 것은 루소를 배우는 가장 기본적 소양일 것이다. 적어도 <<에밀>>이나 <<사회계약론>> 등은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 몇 페이지에 도식화하여 암기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 책 한 번 읽는 것보다 비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압축은 추상화를 낳고, 극도의 압축은 극도의 추상을 낳아, 사람들의 이해를 매우 곤란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어떤 위대한 사상가의 저서를 읽어낸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 옳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내는 것은 둘째치고, 그 서문만을 읽기에도 벅차다. 철학이나 사상가들의 저서는 현대인들에게 읽혀지기 매우 어려운 것임에 분명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의 예가 바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나온 이 책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오해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 분명하다. 굳이 <<사회계약론>>에 입문서가 필요할 것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이 입문서로써보다는 어려울 것이라는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줄수 있다는 데에 오히려 이 책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이 독자에게 <<사회계약론>>이나 <<에밀>>을 바로 집어들게 한다면, 이 책은 그것으로 목표를 다하고도 남은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학술서로써는 모자란 점이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사회계약론>>에 대한 친절한 안내자 혹은 해설자로써도 훌륭하다. 고등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루소를 배우는 것보다, 더욱 쉽게 친절하게 설명되고 있다. 말하자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사회계약론>>으로 이끌어주는 역할과, <<사회계약론>>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역할. 이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만족한다는 것에 이 책을 루소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할 만하다. 사실, 루소를 해설하는 많은 책들이 진정 루소의 저서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책이 오히려 더욱 진정한 루소 해설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장점을 하나 더 들자. 이 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현재적 의미, 현재적 유효성에 대한 큰 주제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사상으로써 추상적인 죽은 사상으로써가 아니라, 루소의 사상이 아직까지 어떻게 유효하고, 그것을 현재적 의미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하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18세기를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 책의 세 가지의 미덕은 이 책의 얇지 않은 두께가 놀라울 정도로 우리를 더욱 풍부한 루소의 세계로 안내해 주고 있다. 재밌게 읽을 수도 있는 책이다.

  지금 나는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주문하러 간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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