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28일)이면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2006년 추계학술답사를 떠납니다. 대학생활의 백미라하면, 축제나 농활 등이 있겠지만은, 이 학술답사도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나의 독고다이 생활방식과 귀차니즘의 여행기피증에 의해, 대학생활 내내 이 먼길 떠나는 답사를 경험한 기억이 없습니다. 이것이 대학을 졸업한 지금 저의 아쉬움으로 기억되는 것 중에 하나이지만, 그래서인지, 조교가 된 지금에야 답사를 떠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아쉬움 하나 접을 수 있겠군요.ㅎㅎ

  물론 대학생의 신분으로 떠나는 학술답사의 추억을 만끽할 수는 없겠지만은, 조교라는 신분의 이질적이면서 양면적인 성격을 중용을 거부하고, 다분히 한쪽으로 기울이어 최대한 대학생답게 답사를 즐기고 싶습니다. 물론 조교로서 해야할 일들은 해놓고 말이죠.ㅎㅎ

  이번 학술답사는 그래서인지 많이 설레고 긴장됩니다. 아니, 그동안 나를 설레게하는 이 학술답사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해서였을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대강의 일정을 보면서 가장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안도현 시인과의 만남입니다. 얼마전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선생님을 만났을 때보다 더 기대가 되는군요.

  올해 학술답사는 전라북도 일대의 군산, 익산, 김제, 만경 등지를 돌아보는 일정입니다. 전라북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문인이 바로 안도현 시인이 아닐까해요. 그러면서도 안도현 시인의 이력이 우리과의 학생들에게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저에게는 시라는 매개가 하나 더 있어요.

  안도현 시인을 만난다기에 안도현 시인의 시집을 죄다 사 읽는 치밀함을 지니고 내일 떠납니다. ㅎㅎ 첫날 뵙게될텐데요. 최근 나온 2권의 시집을 짐꾸러미에 찔러두고 갑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이번 강연에 주가되는 시들을 담아 놓고 있어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시인의 대표적 시집이기 때문에, 이 둘을 골랐습니다. 두 권 모두 재판된 새책들이네요.ㅎㅎ 여기에다가 싸인을 모두 받을 욕심으로 지금 가득차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강연 외에, 또 저를 설레게 하는 것은 익숙한 곳이면서도(제 고향은 아닙니다만, 부모님이 익산에 사세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아리랑>>의 주무대인 김제, 만경, 그리고 군산 일대를 돌아보는 것이지, 아직 그곳이 우리 민족의 애환과 아픔과 고통을 담아내고 있을테지요. 땅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아리랑'의 슬픈 곡조를 찾아내고 올랍니다.

  또한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하면 판소리를 빼놓을 수 없겠죠. 판소리를 집대성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재효에 대해 세미나를 가지는 시간이 있답니다. 이참에 판소리 한 대목 배울 수 있으면 또한 좋겠네요. 아울러 채만식 기념관에도 가본다는 군요. 이래저래, 보람된 학술답사 되게끔, 대학생때 못한 것까지 모두 합쳐서 제대로 된 학술답사 만들어 가지고 오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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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희야양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의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하여간에 요즘 유행타는 뭔가 특이하거나 특별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프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 다시 보니 참, 놀랄만한 일임에 틀림은 없다. 가슴 뜨겁게하는 진한 감동임에는 또한 틀림없다. 그런데 이 동영상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이랄까, 그 감동만으로 기뻐할 수 만은 없는 내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희야양의 연주를 보면서, "어쩜 저럴 수가!"라는 감탄을 먼저하게 된다. '네손가락의 피아니스트'라는 별칭도 그런데서 연유할 것이다. 참 이것은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사실에 주목하고, 어떻게 그런 장애를 딛고 이렇게 아름답게 연주를 할 수 있었을까 하면, 그 사연들 속에서 감동을 받는다. 나도 마찬가지.

  우리는 또한 그녀의 피아노 치는 모습에 심금이 울린다. 한 손에 두 개의 손가락만으로 펼쳐내는 음율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고, 손이 찢어질 것 같아 보이는 모습, 가히 온 몸줄기에 소름이 돛이는 듯도 하고, 식은 땀이 나기도 하면서, 눈물을 머금게도 된다.

  분명 이런 것들로 자아내는 감동도 감동이다. 하지만 거기에 전제되는 것은 무엇보다 희야 양의 장애이다. 장애를 전제로한 감동일 뿐이다. 이런 감동으로만 보는 것은 희야 양에 대한 일종의 모독일 수도 있다.

  희야 양이 자신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고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희야 양에게는 피아노 연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희야 양은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보다 진정으로 들어주길 바랄 것이다.

  나는 이 동영상을 보면서, 2가지 생각을 하게된다. 우선은 장애인이라는 전제를 벗겼을 때 우리에게 희야양은 어떤 감동을 줄 것인가? 그런데, 또한 그런 감동을 우리에게 주어야만 하는가? 그런 싸구려 감동을 벗겨내야만이 희야 양이 이 사회에서 정상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동영상은 일본의 모 방송에 초대되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다. 여기서도 희야 양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감동을 자아내고는 있지만, 희야 양도 기뻐하는 모습이지만, 일본이라는 사회에까지 가서, 희야 양이 사람들앞의 뭔가 신기한 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과 교차되면서, 예전의 모 프로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며 아파하고 힘들어 하던 희야양의 얼굴이 떠올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런 나의 생각들이 다만 죄스럽기도 하다.

  또 하나의 생각은, 화면에서 보여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이다. 어머니의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감고 희야 양의 연주를 차마 보지 못하는, 희야 양이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지만, 그 시간 시간들이 매우 큰 고통의 시간들임을 어머니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 어머니도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연습을 게을리하는 딸아이에게 핀잔을 주기도 하고, 연주해서 아픈 손가락을 장난을 하며 더 피로하게 만드는 딸아이를 혼내기도 하고, 연주를 마치고 힘들어 하는 아이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어머니, 아이에게는 고통이 남지만, 또한 기쁨이기도 한 피아노 연주. 그 두 가지에서 어머니는 오히려 우리 누구보다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일본까지의 먼 길을 건너가면 방송에 출현을 택한 어머니의 마음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모르는 이들로부터 오해의 말들을 듣기도 할 것이다. 바로 어머니의 머금은 눈물 안에는 이런 것들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희야 양의 통해 얻은 감동이 다만 유쾌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이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그런 감동이다. 희야 양을 더이상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부르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희야 양은 피아니스트이지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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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09-11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지금은 나이가 어리니까 단지 네 손으로 친다는 것만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한 실력과 예술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잊혀지고 말겠죠. 그나저나 예전에 작곡가 라벨은 한 손으로 칠 수 있는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네 손가락으로 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써줄 작곡가는 없는지 모르겠네요.
 

  바람을 맞다(천양희,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가 오려나 거우누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천양희 시인의 시집 󰡔너무 많은 입󰡕(창비, 2005)에 수록되어 있는 시다. 이 시는 먼저 《현대시학》1월호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2005년 초였으리라 생각된다.


천씨는 미당문학상 후보작 중 독자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한 ‘바람을 맞다’가 “마들 들판과 수락산의 바람을 맞아가며 틈틈이 구상해두었다가 지난해 11월 가다듬은 시”라고 소개했다. “마침 분위기가 새해와 어울리는 것 같아 시 전문지 ‘현대시학’ 1월호에 신년시로 주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년시로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시에 담긴 시인의 의도를 따라 읽는 것은 시읽기의 기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벽두에 잡지에 싣는 시에는 흔히들 아는 그런 것들이 담겨있겠다.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이러한 제한을 먼저 내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대학을 졸업한 후배에게 전화를 받았다. 물어볼 것이 있다며, 이 시가 있는데 몇 구절 해석이 안 되는 곳이 있단다. 그러면서 내가 좀 봐줬으면 한 것이다. 이렇게 물어온 그 후배가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는데, 참 부담스런 노릇이었다. 더욱이 이 시를 학교현장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에 내 멋대로의 해석은 다소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이런 부담을 가중 시켰던 것이다.

 

  먼저 이 시를 한번 읽어낸 후의 인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첫 구절은 보면 ‘바람이 일어’서고, ‘초록빛 생명’이 중첩되면서, 생동감을 일으킨다. 건너 뛰어 마지막 구절로 가보아도 “여장부처럼/바람이 일어선다”고 말하고 있어 ‘일어섬’의 의지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그 반대적 의미와 견주어 생각해볼 때, 거기에는 무엇에 대한 지향과 의지, 그리고 생동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전반부의 ‘초록빛 생명’, ‘영원한 초록빛 생명’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명’에 대한 언급은 인간적 삶의 언급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중반부에서 보여지듯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는 것이다.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왔다’는 사실은 또한 앞으로도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삶에 대해 ‘여장부처럼’ 담대히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마무리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이 시는 큰 어려움 없이 읽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시를 더욱 시적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바람’이 가지는 중충적, 다의적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바람’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선 1행에서 ‘바람’은 ‘일어선다’라는 서술어의 도움으로 생명을 동하게 하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바람’은 바람[望]과 동의적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3행에서 ‘바람’은 이와는 달리 다소 부정적 의미에서 이해된다. 슈베르트의 「마왕」이 비유적 의미로 동원되면서 ‘마왕’의 유혹과 현혹의 목소리가 아이를 죽게 한 것처럼 ‘초록빛 생명’의 ‘숲을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바람’의 부정적 의미는 7행에서 인간적 삶에 부는 ‘바람’으로서 고난과 시련의 부정적 의미로 기능한다고 하겠다. 10행에서 더욱 확실해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다시 첫 행의 ‘바람’과 같은 의미로 전환된다.

 

  이 시에서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나뉠 수 있겠다. 표면적인 의미의 ‘바람’[風]이 바람[望]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시련과 고난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나뉘어진다. 그러니까 ‘風/望/수난과 시련’이라는 중층으로 ‘바람’은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시의 해석에서 다시 앞서 말한 신년시로 이 시가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새해 벽두 희망을 제시하는 신년시의 기능에 이 시는 충분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 이해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정도는 내게 물어온 후배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해석이 잘 되지 않는다는 그 몇 구절은 3행과 8행에서 10행의 “삶은 우리의 수난/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하는 구절이다.

 

  3행의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라는 구절은 몇 가지 사전지식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괴테의 말을 인용하고 있고, 이 「마왕」이라는 곡도 괴테의 이야기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위에서 ‘바람’의 중층적 의미를 밝힌 것을 참조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삶은 우리의 수난/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라는 구절은 3행에 걸쳐있다시피 3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8행에서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듯이 ‘삶’에도 ‘수난’이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 ‘초록빛 생명’은 ‘삶’과 연결된다고 이야기했으니 이것도 어려울 것이다 없다. 이어서 행을 바꾸어 나오는 ‘목숨’은 ‘초록빛 생명’, ‘삶’과 이어지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의미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삶’보다는 그 어감이 앞 행의 ‘수난’과 연결되면서 색다르게 다가온다. ‘반성문’은 삶에 대한 성찰이고 그러한 성찰이 없었던 삶에 대해 자성한다.

 

  이어서 10행에서는 보다 뚜렷이 그러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 행위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적으로 늘 반성하고 자성하며 자신의 삶이 보다 진실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어지는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행위는 삶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담대히 맞서 이겨내지 못하고 타협하고 피해버리는 그러한 행위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지막 행에서 분명 잘못한 것이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9, 10행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하나의 성찰이며 거기에 대한 반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바람이 일어선다”. ‘여장부처럼’ 담대히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 바람을 담고 있는 신년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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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2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년이 다가오니 이 시가 더욱 와닿습니다. 제 서재로 가져가서 볼게요,
시에 대한 섬세한 고찰, 감사합니다.^^

멜기세덱 2007-01-0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는 배혜경님 되시길 바래요.
 
나의 형, 이창호
이영호 지음 / 해냄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바둑? 하면, 조훈현과 함께 이창호를 떠올린다. 조훈현 9단보다는 이창호 9단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보다 많은 듯 싶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창호라는 이름이 바둑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화 <고스트 바둑왕> 식으로 말하자면 현재 신의 한수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바로 이창호라고나 할까!

  이창호 9단은 75년생이니 현재 32살이다. 아직은 젊은 나이지만, 바둑에서만큼은 중견, 그 중에서도 철옹성의 무너지지 않을 듯한 바둑역사의 거대한 성을 쌓아올린 현재의 바둑황제에 등극한지 이미 오래다. 조훈현 9단과는 사제관계로, 그의 제위를 물려받았다고나 할까? 아직까지는 세계바둑계의 최고수, 1인자, 그는 바로 이창호이다.

  이창호는 이렇듯 바둑에 관한한 유명하다.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이창호란 이름 석자는 알고있다. "이창호? 아! 바둑" 그렇다. 이창호는 바둑이다. 10년을 넘는 세월 세계 바둑의 일인자로 군림해온 그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터, 그가 나가면, 우승은 우리의 것이었다. 우승제조기라고 불러도 좋았다. 국제대회에서 그의 활약은 골프의 타이거 우즈를 뛰어넘고, 농구의 마이클 조던을 앞지르며, 축구의 펠레보다 뛰어나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해본다. 바둑이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다면 이창호는 세계적인 인기스타가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바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여건상 바둑을 배울수는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배워보고 싶다는 정도, 그것이 대학에 오면서 시간의 여유가 생겨 배우기 시작해서, 현재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바둑을 둘 줄 안다고는 할 수 있겠다. 모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서 3단의 기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곧 동시대를 살아가는 바둑의 최강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는 바로 이창호였으므로, 이창호에 대한 관심은 그의 활약이나, 그에 관한 기사, 그의 뒷얘기들을 담아놓은 책들로 이어졌다.

  지금 이 책 <나의 형, 이창호>는 지금까지의 이창호에 관한 이야기중 최고라고 할 만하다. 동생 이영호 저자가 이창호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기록한 글이기에 더욱 생생하고, 이창호라는 인간의 진면목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이창호 이야기가 이창호의 뒷얘기였다면, 지금 이 책은 이창호의 현재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이창호가 바둑과 동일한 명사가 되었다는 것은 이창호가 바둑의 신화, 혹은 신격화되었다는 이야기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의 이 책은 이창호의 인격화, 다시말해 인간적 면모들을 풀어내고 있으면서, 그 신화의 내용을 가일층 두텁게 하기도 한다. 그가 신이었다면 신화는 당연한 것일 터이지만, 인간이 이루어낸 신화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에 더욱 이 신화의 질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창호가 출전하는 바둑대회에서는 늘 언제나 이창호의 우승을 당연히 해왔다. 하지만 이 책은 이창호가 우승을 일구어낸 것은 진땀나는 승부와, 그 안에서의 좌절과 인내와 노력으로 이루어 낸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 즉 이창호가 이룩한 이 신화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간성에서 기인한 것임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창호는 어린 나이에 바둑을 시작해서, 성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창호는 우리 어느 누구보다도 진정한 면에서의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바둑판 위에서 삼라만상의 변화를 읽고, 돌 하나하나의 생과 사를 통해 인생의 의미들을 진정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창호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여러가지 면모들을 체득하고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이창호의 뒷얘기, 단순 에피소드로만 읽혀지지 않는다. 하나의 인생론이며 철학서이고, 실용서로서 사용이 가능하다. 이창호라는 인간의 면모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바둑판과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바둑의 신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많은 사람들이 한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부분들에 대해 재미있는 상상들을 하곤 한다. "바둑의 신이 있다면, 몇 점을 깔고 두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어느 최정상의 고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3점이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둔다면, 4점에 두겠다." 이외에도 바둑의 신을 설정한 여러가지 상상들은 많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바둑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은 바둑을 두지 않는다.

  바둑은 하나의 인생이다. 인생의 모든 변화를 그려내는 것이 바둑이다. 그러하기에 신은 이러한 바둑을 두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다. 인생의 의미를 무엇하러 신이 찾으려 하겠는가? 사람만이 바둑을 둔다. 두어야 한다. 둘 수밖에 없다. 그렇하기에 이창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바둑에 매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창호는 바둑의 신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라고. 중국에서는 그를 신의 경지에 올려놓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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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라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5년 3월부터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다지 많이 읽는 편은 못되고, 한 권 한 권 사모으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다. 그 전 줄곧 이용했던 것은 시중의 서점과 리브로였다. 그러던 차에 알라딘을 알게되었고, 2005년 3월 첫거래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줄곧 이용하고 있다. 최근 플래티넘 회원에까지 이르렀으니, 나름 알라딘 주요 고객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내가 이런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알라딘과의 첫 만남 이후 줄곧 알라딘을 이용하게 된 것은, 낮은 가격과 상대적으로 빠른 배송, 그리고 배송 상태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알라딘의 이 독서가들의 서재때문이기도 하다. 알라딘의 개인서재는 참으로 좋은 점이 많다. 많은 이들이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알라딘은 굉장히 폭넓은 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충분히 이런 것들을 자랑할만 하고, 나로써도 가급적이면 알라딘을 이용하자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책들을 알라딘에서 사왔다. 어느새 나도 알라딘의 한 가족이 된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옥의 티라고나 할까? 아니면 치명적 오류라고나 할까? 하얗게 잘 다려놓은 와이셔츠의 김치 국물 한방울은 굉장히 돋보이기 나름이고, 그 사람이 아무리 깔끔했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치명적 이미지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백로가 노는 곳에서 까마귀는 그야말로 돋보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돋보임은 얼굴 찌푸림과 함께이겠지만.

  나는 2005년 3월 이후 20여차례 알라딘과 거래해왔다. 1년 5개월간 거래액은 아마도 200여만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한다. 자랑은 아니다. 17개월간이니 그간 1달에 1번 이상 알라딘에서 주문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 그 횟수는 더 늘어났다. 이렇게 거래가 늘어날 수록 기대는 더욱 커지는 법이다. 거기에서 많은 거래에서 오는 알라딘에 대한 신뢰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신뢰는 단 한 번의 오점으로 일거에 누너지는 모래위의 쌓은 성일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여차례의 거래에서 나는 4번의 교환요청을 하게 되었다. 산술적으로 5번의 1번은 교환을 요청해야 했다는 것인데, 이는 20%의 확률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굉장히 높은 수치다. 이것에 대해 알라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환요청의 사유는 모두 제품상태 불량이다. 잘 읽다가 텅빈 백지의 페이지가 나타나거나, 갑자기가 10여페이지를 건너뛴다거나, 제본이 이그러져 있다거나, 페이지가 접혀져 있는 상태로 제본이 되어 있다거나. 이러한 것들은 나를 굉장히 불유쾌, 불쾌하게 만든다. 신뢰도 마이너스, 모래위의 쌓은 성이되는 순간이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은 상품질의 저하를 전제하고 있는 것인가? 배송이 빠르다는 것은 제품상태의 불량에 대한 보상적 차원인가? 알라딘 서재를 꼼꼼히 운영하는 것은 제품상태의 철저한 확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물어보고 싶다. 상품의 질이 떨어진다면 당연히 가격은 저렴해야 하기에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은 내세울 장점이 못된다. 제품의 상태가 불량할진데 배송이 빠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제품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하면서 알라딘 서재를 어떻게 꼼꼼히 운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말한다. 알라딘은 일차적으로 서점이다. 책을 파는 곳이라는 얘기다. 책을 파는 곳답게 책에 대한, 책의 상태에 대한 철저한 책임감을 가져주길 바란다. 나는 책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책의 상태를 매우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다. 시중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은 내 스스로 책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에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적어진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사는 책은 전적으로 책을 파는 회사에 대해 신뢰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알라딘이 나에게 이런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에 나는 무척 실망하고 있다. 교환율이 거래당 20%에 달한다는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는 나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알라딘이 인터넷 서점의 주인공으로 서기에는 부끄러운 수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가격, 배송, 커뮤니티 등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어디까지나 서점에서는 책이다. 책이 확실해야 가격도 배송도, 폭넓은 커뮤니티도 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갈에 지나지 않다. 알라딘의 발전을 위한 제언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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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08-3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쓴 글이라, 다소 오해를 살만했던 것 같습니다. 장문의 답글을 읽고보니, 다소 걸리는 표현들이 있네요. 조금 해명을 하자면, "제작상 하자 상품을 입수해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수준낮은 매도의 뜻은 전혀 아니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 또한 알라딘을 아끼고 사랑하는 알라디너의 한 사람으로써, 알라딘이 보다 나은 인터넷 서점으로써 발전해 가길 바라는 뜻에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음을 분명 천명합니다. 오해의 소지가 분명히 있었음을 인정하며, 위의 표현들은 상품에 대한 알라딘의 보다 책임있고 철저한 관리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글을 쓰는 동시에 또한 새로운 상품을 주문하고 있는 나를 볼 때 알라딘은 저에게 무척 소중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관심이 모이고 쌓일 때 알라딘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때로는 관심과 격려, 때로는 질책으로 나타나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독한女心 2006-08-3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30회중 2번 교환했습니다.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요..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책 살땐 디게 꼼꼼하게 따져서 보잖아요. 티 하나 있어도 딴거 고르고.. 온라인에서는 차곡 차곡 순서대로 판매하다 보니 그런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알라딘은 다른곳처럼 교환이나 환불에 인색하지 않아서 좋아요. 방금 교환 신청한게 하나 있는데 4분만에 답변이 완료되는 신속함!!!-_-깜짝 놀랬다는.. 알라딘은 온라인 서점이지만 친절함은 바로 앞에 손님을 보고 대하듯이 해서 좋아요!! ^^ 저는 비록 실수는 있지만 계속 알라딘 이용할께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