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1) 진화(珍貨) 보기 드문 물품. 색다른 물품.

    (2) 진ː화(進化) ①생물이 오랜 동안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종류의 것으로 되어가는 일. ②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 일.↔퇴화.

    (3) 진ː화(鎭火) 일어난 불이 꺼짐, 또는 일어난 불을 끔.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에는 이 '진화'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쓰인 '진화'의 의미는 곧 (2) 진ː화(進化)의 ②의 뜻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미 FTA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하는 순간, 결코 대충 살아가지 않는 국민들이 무서워서라도 정부는 대충 협상을 하지 않게된다. 단 한번이라도 국민들에게 '물어보는' 절차를, 헌법이 정한대로 가동시킨다면, 한미 FTA는 '새로운' 방향으로 ― 그것이 또한 '바람직한' 방향이기를 소망한다 ― 진화하게 된다.
  나는 지금 한미 FTA 문제를 넘어서 '자신의 경제적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이 땅의 국민들이 어떻게 '협동진화'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은 지금 '견제와 균형'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협동과 진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한미 FTA 국민투표에서 찬성하든 반대하든, 협상안을 직접 보고 스스로 투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면, 서로 모르는 국민들끼리 '협동'을 통해서 하나의 '진화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그마가 아니라 상식이고,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질문이다.
  그야말로 "이 폭주가 멈추는 날, 진화가 시작되리라"는 새로운 경구가 필요한 순간이다.
(pp.261~2.)

  위의 인용한 글에 나타나는 5번의 '진화'는 모두 "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 일."이란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글 전체에서 한미 FTA는 '진화'이냐, '퇴화'이냐를 논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것에 대한 다방면에 걸친 증명이 이 책의 내용이다. 그런데 '진화'로 가는 길이라면 반대할 이유도, 이 책이 만들어졌을리도 없겠거니와, 이 책에서의 증명의 결과, 그것은 '진화'는 아니다. 엄밀히 말해 '퇴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나, 현재로써는 '퇴화'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진화'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찬 미래로 가는 '특급열차'일 것이되, 그렇지 않으니 '폭주'하는 기관차, 장차 거대한 벽에 부딪쳐 폭발하고 탈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것을 '폭주'하고 규정하고, 그것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 책과는 좀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진화'라는 단어의 말뜻을 우선 논하는 것은, 한가지 철학적 문제를 먼저 짚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것이 곧 '진화'라는 말의 뜻이되, 어떤 것이 보다 좋은 것이고 보다 고도의 것이 되는가 하는 철학적 말놀음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진화'와 동의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발전'일 터인데, 여기에도 같은 문제가 담겨있다. 인류의 역사는 '진화'했는가? 또한 인류는 '발전'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누구하나 명쾌히 답변하기 어렵다. 과연 진정한 '진화'는 무엇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미 FTA를 통해 '진화'된다느니, '발전'하는 것이라느니 등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자는 이 '진화'라는 개념에 단순한 양적 물적 '발전' 이외에 질적 '행복'을 추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진화'라는 개념에서 진정한 인간의 '진화'가 무엇인가를 해결해야만이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 풀려질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담으로 치자. 그런데 나는 이 '진화'라는 동음이의어를 가지고 이 책을 재구성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제시한 3가지 '진화'의 동음이의어들이 이 책에 중심테마들을 절묘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1)의 '진화'와 노무현
  진화(珍貨)에서 진(珍)은 '보배'를, 화(貨)는 '재물'을 의미한다. 풀어보면, 보배로운 재물(물건)을 뜻한다. 사전에서의 의미인 "보기 드문 물품, 색다른 물품."에는 긍정적 의미인 이 '보배'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아주 좋고 귀한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와 현 한미 FTA 폭주기관차의 '자랑스런' 특급기관사 노무현 대통령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사전에서 제시한 말뜻 그대로 '보기 드문', '색다른' 것으로써의 '진화'로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특종(特種) 혹은 별종(別種)이겠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독창적 상상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 아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저기의 언론이, 어쩌면 국민 대다수가, 아니면 이 책의 저자 우석훈이 그렇게 노무현을 보고 있다.

  가장 황당한 것은,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이라 불리는 스크린쿼터, (광우병 의혹이 여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의약품 가격 재조정, 배기가스 규제완화 등의 사안을 한국이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결정적 협상카드를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준 꼴이었다. 결정적 협상카드를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준 꼴이었다. 뭔가 잘못 먹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이 '4대 선결조건'에 관한 의혹을 전면 부정해왔으나, 7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이 사실을 시인했다.)  (p.73.)

  이런 노무현 대통령은 어처구니 없이 '특별'하다. 박정희도 김일성도, 전두환 장군님(?)도 이런 점에서 노무현에 못 미친다. 하기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대통령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금상첨화라는 말은 여기에 쓰라고 있는 말 아니겠는가? 그가 운전대를 잡고 질주하고 있는 기관차에 우리는 탑승하고 있다. 내릴 수도 없다. 미 특수부대 요원들을 투입해 이 달리는 열차에서 구조를 요청해야 할까? 그런데 우리의 '진화(珍貨)' 노무현은 자신이 운전하고 있는 이 폭주기관차가 고장이 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미 최정예 특수부대 FTA협상단에 구조요청을 이미 해놓고 있으니 말이다.

  (2)의 진화, 과연 한미 FTA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는 망하는 것이냐? 한미 FTA를 놓고, 망하는 것이냐, 흥하는 것이냐, 첨예하게 논쟁하고 있다. 한 나라의 흥망이 걸린 이 문제에서 양측은 극단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 나라는 달리고 있다. 어디로? 나는 잘 모른다.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노무현 정부도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한미 FTA의 결과를 놓고, 한쪽은 우리가 사는 길이요, 발전하는 길이라 홍보하고, 한쪽은 절대적 망하는 길이라 목 놓아 울어대니, 이것은 '진화'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한미 FTA가 이대로라면 망하는 것이라고. 이런 목소리가 있다면, 우리 정부는, 아니 노무현 정권은 새삼스럽게라도 되돌아 보아야 하는 것이 일단은 정상으로 보인다.

  (3)의 진화, 폭주하여 불타는 대한민국 기관차를 진화(鎭火)하라!
  진화(鎭火)는 곧 "불을 끄는 것"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 했으니, 뭔가 타는 냄새가 나고 있다면 일단은 소화기를 챙겨야 한다. 그도 없다면, 바가지에 물 가득 담아 손에 들고, 타는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를 찾아 나서야 하겠다.
  질주하여 과열한 열차의 기관에서 냄새가 난다. 기관사는 속도를 즐기는데에 여념이 없다. 소화기를 어디에다 두었더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열차 기관에 접근금지! 기관사는 그렇게 명령했다. "달려라 달려 대한민국 기관차야"
  현재의 우리 상황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적어도 우석훈이 이 책에 써놓은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진화'시킬 것인가가 궁극적 해결책이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우석훈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이다. 진화의 소화기들이 있기는 하다. '국민투표'소화기.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저 달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소화기를 내어 놓을 이유가 없다. 어쩌면 좋겠는가?

  이 책 전반에서 부족한 나름, 조목조목 한미 FTA에 대해 분석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논하고 있다. 때론 너무나도 심각한 나머지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 "그대여 떠나라"한다. 그러나 저자는 작은 희망하나를 결코 놓지 않는다. 
  요즈음, 북한 핵 실험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한미  FTA 논쟁은 일단 뒷전으로 밀린 듯 하다. 조심스럽지 않게 음모론을 제기해 보자면, 이 북한 핵 실험 발표는 미 부시와 노무현의 장난이 아닐까? 시기가 절묘하기도 하니 말이다. 부쩍 FTA논란이 거세게 일 때에, 국민들의 관심사가 높아져갈 때에, 느닺없이 북한이 핵 실험을 해버렸다. 지상파 뉴스에서 FTA 관련 뉴스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국민들의 당장에 핵이라도 날라올 것만 같아 불안에 빠져 있다. 이런 음모론이 가당찮은 것이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알아야 한다"는 것의 절실함이다. 한미 FTA 체결을 제지하기 위해서나, 어쩔 수 없이 체결이 된 후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알아야'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아! 나는 도대체 경제는 모르겠는데, 정말 그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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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최민식의 "꽃피는 봄이오면"을 직접 연주해보자!

 

게임방법은 지나가는 화살표가 박스에 들어왔을 때 키보드 방향키를 누르시면 됩니다.

과제다 시험이다 머리 아프실텐데 기분 전환 하시라고 올려 봅니다...^^

대학원 후배가 머리 아플 때 "쉬엄쉬엄(시험시험)"하며 하라고 올려준 건데...

생각보다 듣기가 괜찮더군요. 연주가 모두 완료되면 스스로의 연주를 들어볼 수도 있는 것이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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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런데...... 만일 어쩌면 우리에게 다시 그런 식의 결단의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불현듯 그런 불길한 생각을 해 본다. 상황을 조금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그런 암울한 결단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암울한 먹구름이 끼어들고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북핵 위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쟁 위기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 점차 눈앞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다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하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라크에처럼 미국이 정말 막무가내로 북한을 공격한다면? 그때 나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할 것이며 어떤 결단을 해야 할 것인가? 북미간의 축구경기도 아니고 대량 살상이 불 보듯 뻔한 전쟁이라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원하지 않더라도 그 참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설사 100만 분의 1의 가능성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며, 우리 마음속의 이 명백한 불안은 그 가능성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전쟁이 터지고, 한반도가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그저 내 한 몸, 내 가족만 살겠다고 산으로 숨어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그 부당하고 야만적인 전쟁에 대해 모든 것을 걸고 항거할 것인가? 차마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질문이지만, 나는 지금이 이 질문을 감당해 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공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마음속으로라도. 특히 이른바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더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적 결단의 순간을 맞지 않고 싶다면, 그런 순간이 오지 않도록 지금 당장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된다.>2003.02.17"
                                                      김명인,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6, p.28.

  북한이, 우리의 반쪽이, 그 '무서운' 핵을 실험하겠다고 공포하고나서, 그 살벌한 말한마디의 충격에 빠져 별다른 대응책도 제대로 간구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에, 또 한 방의 커다란 사건이 터져버렸다. '그야말로' 핵 실험을 강행해버렸다는, 그 사실을 성대하게 만방에 널리 알린 것이다.

  오늘 한 후배와 저녁을 하면서 내가 물었다. "만약에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대로 군대로 끌려갈 거냐?", "별 수 있어요. 가야죠, 군대로!", "야! 너는 앞으로 제대로 된 시인은 되기 글렀다. 젠장!"

  나는 오늘 낮, 김명인 선생님으로부터 "북한이 핵 실험 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읽은 이 책의 위 구절이 떠올랐다. 2003년의 그 '결단'은 2006년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해진 것은 아닐까? 누군가 말했다. "교사는 지성인"이라고. 지성인은 지식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시인이 되겠다는 그 후배녀석에게 시인이란 무엇일까? 시인이란 존재를 '알바트로스'에 비유했던 그 시인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진보적 지식인'의 최전선에 나는 과감히 시인이란 존재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되겠다는 그 녀석이 '가야죠, 군대로!"라고 말했을때 나는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아하 교사가 되겠다, 시인이 되겠다, 하는 이 못난 인간에게, '결단'은 애초에 불필요했던 것인가?

  북한이 핵 실험을 했다고 해서,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2003년의 '백만분의 일'은 현 상황에서 그 '만'자가 떨어지고 남음이 있다. 오늘 일제히 9시 뉴스는 그 소식을 다루면서,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의 가능성을 낮지 않게 점치고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추측이다. 만약 미국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사전에 노무현 정권에 '동의'(?)를 구할 것이다. 그 '동의'에는 'NO'라는 대답은 수반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끝끝내 "NO"를 말할 수 있을까?

  노무현이 노하지 못하고, 한나라가 당근이라 생각하고, 열우당이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땅의 지식인들은 지금 '김명인의 결단'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해야할 것이다.

  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결단'을 내리려고 한다. 이 결단이 공갈이 된다하더라도 이렇게 말하겟다. "나는 이 땅의 전쟁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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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우리시대의 논리 3
김명인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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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동안 뜸 했다. 이 '한 동안'은 조금은 긴 '한~ 동안'이다. 자그마치 한 달하고도 닷새는 지났으니 말이다. 그럼 무엇이 뜸 했는가? 뭐 다 아시겠지만, 서평쓰기가 뜸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뜸하기 전에는 꽤나 많이 썼나보다 하면, 또 그건 아니지만서도, 한 달에 두서너 편은 꾸준히 서평을 써왔다. 일주일에 한 권 이상씩은 꾸준히 읽어 왔고, 그 중에서 몇 권여를 서평으로 남겨왔다. 하지만 요새는 한 달 이상을 쉬었다. 그렇다고 책 읽기를 쉰 것은 아니다. 단지 서평만을 쉬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뜸 했을까?

  몇 가지 이유를 대는 것은 어렵지 않겠다. 우선 현재의 처지가 독서의 여유만을 가지기에도 궁핍한 처지이고, 대략적으로 심리적인 압박과 부담 등으로 인해, 서평쓰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기 때문인지, 서평을 쓰는 것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음의 여유가 없이 무턱대고 읽어 내려간 독서는 서평으로 되새김할 건덕지가 남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수박 겉핥기식 서평은 무의미하기에, 나는 한~동안을 서평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왜 "한 동안 뜸 했었지"를 말하는가?

  아시다시피, 이제 그 '뜸'함을 접고 한 권의 책에 대해 서평을 남기고자 함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알라딘 서평단 모집에 응모해 당첨되어 책 한 권 받아놓고 반드시 읽고 서평을 써야하는 것처럼 그러한 각오와 목적을 가지고 읽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도 공으로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서평을 써야하는 강제와 의무를 없었다.

  이 책을 얻기까지의 경로를 얘기하자면, 다분히 나의 개인사가 조금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야기하는 판에 조금 적나라해 보도록 하겠다. 어느 날 이 책의 저자가 나에게 이 책을 내밀었다. 친필 사인과 함께 건네 온 이 책은 저자에게 있어서나,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은 의외의 책이었다. 왜 의외냐? 우선 저자와 나와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면서, 교수와 조교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저자의 일거수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었기에, 어떤 책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정도는 미리 입감할 수 있었을 것인데, 어느 날 문득 내민 이 책은 그 감지망에 전혀 탐지되지 못했었기에 나에게 의외의 책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에게도 의외의 책이었다.

  "이 글들을 이렇게 엮어서 책으로 묶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 책의 발상은 순전히 후마니타스 편집부의 것이다. 처음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이 인천까지 나를 찾아와서 쓴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사실 난감한 심정이었다. 자기 글을 사랑하지 않는 글쟁이는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이런 잡다한 글들을 묶어서 칼럼집이다 에세이집이다 하고 엮는 일들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못 된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학습해 왔던 나로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의 본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은) 칼럼들을 전부 수집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홈페이지에 끄적거려 놓은 낙서들까지 전부 원고화해 놓고, 지금과 같은 이 책의 '컨셉'까지도 이미 그려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랬으니, 이 책을 안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아하! 그래서 나나 저자에게도 의외의 책은 의외의 책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이 책을 서평을 쓰기위해 처음부터 읽기를 시작하였을까? 공으로 받았으니 답례상의 서평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서평을 쓰기에 어느 정도의 주저함을 일으켰으면 일으켰지 서평을 써야한다는 부추김은 절대 되지 못했다. 괜스레 써 놓은 서평은 스승에게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쓰는가?

  나는 사실 이 책을 나와 저자와의 관계를 어느 선에서 뛰어넘어 보고 싶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뛰어넘어서, 내가 모시는 교수님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서, 단지 한 일반 독자로서, 그냥 한낱 인문학도로서,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으로서, 문학평론가 김명인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80년대를 불꽃처럼 살아온 김명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읽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서문격인 머리글을 읽고서 확실히 굳힌 생각이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성격이 어떤 면에서는 그의 내면까지를 읽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지금은 그 예측이 굉장히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내가 저자를 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이다. 우리 과에 새로운 교수님으로 저자가 부임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스승과 제자의 관계-맺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한 번의 시험해서 낙방을 하고 있던 차에, 과 조교가 되면서, 교수와 조교의 2차 관계-맺기가 이루어졌다. 사실 그를 처음 보고,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시인인 줄로 알았다. 서점에서 시인 김명인의 시집을 보았고, 거기에 사진 대신 박혀있는 캐리커처를 보았을 때, 저자와 얼핏 비슷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 김명인 만큼이나 유명한 문학평론가 김명인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민중문학논쟁을 일으키고, 한국민중사사건으로도 유명한 저자 김명인에 대해서는 전에 아는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어느 정도의 유명세를 탔는지도 몰이다. 그가 80년대 중반에 문학평론가로 등단해서 잠시 활동하다가, 90년대 초반 평론을 긴 세월 접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러한 상황이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여간 새로운 교수님을 맞이하여 나는 그의 책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창비, 2004)을 우선 사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그에게 문학평론가로서의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각, 비판적 의식, 그리고 그의 힘 있으면서도 유연한 필치에 일단 합격점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의 두 번의 투옥, 80년대 학생운동, 한국민중사사건 등에 연루되었다는 사사(私史)를 알게 되면서, 그리고 한창 평론/비평 활동을 하다가 중도에 갑자기 '불을 찾아' 떠난 일 등을 듣게 되면서, 그의 인간적 이력과 내면이 무척이나 궁금해오던 차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로구나 싶었다. 그것은 충족되었다. 다만 그의 정치적, 문학적 측면에만 국한되었지만, 그것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그의 다른 면은 그와 함께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지간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살짝 그의 일반생활을 보자면, 그의 날카로움과, 예리한 비판적 시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을 좋아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학생들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들을 보면, 그의 필치와는 어쩌면 상극이고, 어찌 보면, 참 좋은 대조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멸의 문학', 즉 현재의 문학이라는 것에 대한 그의 견해와, 비판, 그리고 그것의 대안 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배반의 민주주의'는 그의 정치적 면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두고 있다. 제목의 배치와는 다르게, 책의 전체배치는 정치면을 앞에, 문학에 대한 것을 뒤에 두고 있을 따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선 정치에 대한 배신감을 말한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에게, 90년대를 거쳐 이룩한 민주주의가 2000년대에 들어 '배반'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신식민지화,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 한때나마 희망을 걸었던 '노무현 정권'의 무책임함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미국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전쟁광적인 부시 정권과, 그에 아무런 자존감 없이 밀약을 거듭하는 현 정권, 아울러 미국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 영원한 우방으로 착각하는 우리의 보수세력들, 그들에 대한 저자의 강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이 장들에서는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넓은 지식, 그리고 인간적 면모,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그의 관심 등, 그의 다양한 인간적 측면들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다분히 이 글들은 칼럼이면서, 시론(時論)이면서, 읽기이고, 분노와, 경고와, 고백과, 희망이 곳곳에 녹아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단편들이 하나의 커다란 무엇인가로 통일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이 책으로 엮은 것이리라.

  문학에 대한 그의 단상들은 이 책의 후반부를 구성한다. 간단히 말하면, 80년대의 역사성의 문학, 그와는 이질적인 90년대의 일상성의 문학, 그러면서 문학권력화하고, 상업주의와 밀교하는 오늘날의 문학에 대해 다분히 반성적 성찰을 보이고 있으면서, 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80년대의 역사성과, 90년대의 일상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각각의 단상들이 일관되게 유기적으로 펼쳐내고 있다.

  "일상성과 역사성의 결합을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순간이 곧 우리 문학이 80년대와 90년대를 제대로 한꺼번에 넘어서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역사와 혁명의 이름 아래 일상성이 소거되거나 연역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이 80년대라면 일상성의 발견, 혹은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와의 연결 고리를 놓쳐 버린 것이 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속에 드리워진 역사, 어느 결에 역사의 한 굽이가 되고 마는 일상. 이것을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통일해 내는 일, 그리하여 우리의 이 지리멸렬하고 무상한 것처럼 보이는 삶이 사실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영원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정녕 살아봄 직한 세상의 실현을 향한 간절한 움직임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은 과연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일까."

  이처럼 저자는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처럼, 문학에 대한 환멸감, 정치에 대한 배신감을 격분에 차서 분노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어떻게'를 물어보며, 조심스레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스스로 '잡문집'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저자의 태도에서 너무 겸손한 것이란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은 일반 독자대중에게 '잡문집' 그 이상이 가능하게끔 해준다. 오히려 정치와 문학을 비판하고 있는 다른 어떤 책들보다, 쉽게, 그리고 친근히, 그러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들이 나에게만은 바로 노신의 잡감문이고 리영희의 에세이들이다."

  내심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심중을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에게도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볼 때 '노신의 잡감문'과 '리영희의 에세이들'과 더불어 이 책을 또 한 권의 보기로 놓아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만약 미래에 이런 책을 내놓게 될 수 있다면 이렇게 서문에 써 넣으리라. "이 글들이 나에게는 노신의 잡감문이고 리영희의 에세이들이며, 김명인의 잡문집이다."라고.

(* 별을 다섯 개 주었다. 계면쩍은 일이긴 하지만, 하나를 빼고 4개를 주어볼까 했지만, 그래도 5개가 마땅해 보인다. 6개에서 하나를 빼어서 5개라고 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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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10-1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바람구두님 말씀을 들었어요! 선생님께 괜히 누가 될까봐, 감히 '들이대'질 못 했습니다;; 죄송해요, 맨날 바람구두님 서재 구경만 하고, 인사 한 번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ㅎㅎ. 아참 글고, 서재명은 사실, 선생님 아뒤를 보고 흉내를 낸 거에요...ㅎㅎ;;
 
 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을 읽는 시간

경향신문의 고전읽기에서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새물결)가 다루어지고 있길래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나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을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그 영역본을 타대학 도서관에 대출신청했다(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고아원'에 가 있다). 올 문단의 큰 논쟁거리를 가져온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진 스스로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내용정리를 마저 끝내는 일도 아직 미뤄둔 숙제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페이퍼들을 자주 올렸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도 <탐구1>이었다. 그의 '비평'은 '고진식 비평'이라고 따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비평을 접하기 어려웠던 거 아닌가? 철학과 문학을 횡단하는 쪽으로는 김우창 교수의 비평 정도가 예외적이었을 뿐) 독특하고 흥미로웠는데, 게다가 '읽히는' 비평이었다(아래의 기사를 보니 <탐구>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고진급의 비평가가 흔한 건 아니라는 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읽은 게 <은유로서의 건축>이었던 듯하며 나는 이 책을 영역본과 나란히 놓고 읽었다.

 

 

 

 

영역본을 위한 이 선집이 <탐구>에서 더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후에 나는 고진의 애독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후에 출간된 고진의 모든 책을 사들였으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정도를 빼고는 다 읽어본 듯하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몇몇 저작(가령 <의미라는 질병> 같은 비평집)을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 혹 당신이 아직 이 거물급 비평가를 만나본/읽어본 적이 없다면 (뚜쟁이로서 말하건대) 한번쯤 시간을 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대충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면 당장 비평을 써보시라. '고진을 넘어선 비평'이 탄생하는 흔하지 않을 장면을 나는 목도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9. 30) ‘타자’와 ‘윤리’에 대한 치열한 성찰

한 권의 책이 생각하는 감각을 바꾼다고 할 때, 이는 날카로운 칼에 베는 일과 같다. 한 번 벤 자리는 아물어도 예전 같지 않다. 벨 때의 고통은 떠나겠으나 몸은 이미 전과 다르며, 미열이 가시지 않는 혼미함 속에서도 정신은 각성되어 있다. ‘탐구’를 읽고 나서는 전처럼 생각하기 힘들다.

저자인 가라타니 고진(1941~)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탐구’를 ‘전환’이라 일컫는다. ‘탐구’의 글들은 1985년에서 88년까지 잡지 ‘군조우(群像)’에 연재됐는데, 그 2년은 첨예한 논쟁의 연속이었다. 고진이 ‘기존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해야 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 이후 고진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패배한 전쟁’이라 일컫는다. 그의 싸움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을 ‘안’에 묶어 두려고 했다. …나는 바깥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바깥이란 일단 그렇게 파악되면 이미 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내성과 소행’)

그는 형이상학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경제학, 문학, 철학의 영역으로 전략적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형이상학과 맞섰다. 자리를 옮겼을지언정 고진은 한 번도 쉽사리 자신을 형이상학 밖에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형이상학의 내부로, 사유되지 않은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종국에는 형이상학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한 논리적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1983)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 초월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그 전투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메마른 감각과 갑갑한 논리였다. 거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타자’라는 생명력이었고, ‘윤리’로서의 소통이었다. 이제 고진은 형이상학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고 할 것이다.”(‘탐구’ 후기)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자(他者)’이다. ‘타자’라는 말은 그 함의와는 달리 결코 낯설지 않다. 빈번히 사용되는 이 개념은 낯선 존재를 범박하게 처리하는 상투어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타자라는 말이 자기 확장의 의미를 띠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용법을 가장 경계한다. 그에게 타자는 주체의 ‘바깥’이지만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바깥’이다. 만약 그 ‘알 수 없는 거리’가 빠져있다면 타자는 그저 주체 ‘안’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서 상정되는 신은 자기의 확장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소리이다. 자신의 말을 마치 누군가의 말인 양 듣는다. 그때 타자와의 ‘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게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가 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아시는 신의 상정, ‘기복 신앙’은 자기독백이다.

여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비대칭적 관계’이다. 타자는 내가 품는 의미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이쪽에서 자명하다고 저쪽에서도 자명하지는 않다. 이때 고진이 ‘타자’로 문제 삼으려는 것은 ‘독아론(獨我論)’이다. 독아론은 나에게 타당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독아론에서 남은 나와 동일한 주체로서, 동일한 규칙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화된 존재일 따름이다.

고진은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독아론의 소산이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서 배제된 존재들은, 광인(푸코, ‘광기의 역사’)처럼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이란 무수한 존재들간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들을 뛰어넘는 ‘가늠할 수 없는’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성찰하는 일은 ‘윤리’적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비대칭성’을 품으면서도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탐구’는 이렇듯 ‘타자’와 ‘윤리’에 관한 책이다.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탐구’를 선정했다. 80년대 후반의 저작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꼽힌 것은 ‘탐구’가 90년대의 맥락에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소위 동구권의 몰락 이후 ‘역사의 종언’이 고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이성 혹은 자본주의의 독백일 따름이다. 문제는 그에 맞서는 해체주의가 90년대에 이르러서 파괴력을 잃고, 지적 유희의 경향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 때 빠져있는 것 역시 ‘타자’와 ‘윤리’였다. ‘탐구’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어려운 지적 수사에 이르지도 않았다. 다만 실제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제 고진이 ‘탐구’에서 자주 인용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안에 신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비이다.”(윤여일|‘수유+너머’ 연구원)

06.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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