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나는 '쓰다'의 주어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6. 14)의 연재물,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나는 '쓰다'의 주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서문이란 대표적인 '곁다리텍스트'이며, '곁다리텍스트'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김윤식 서문집>(2001, 사회평론)은 놀라운 책이다. 그 놀라움을 낳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형식이다. 아니, 텍스트 너머에 어른거리는 긴 세월의 고된 글 노동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은 국문학자 김윤식(70)이 1973년부터 2001년까지 낸 책들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물론 이후에도 그는 많은 책, 많은 서문을 썼다). 어느 프랑스 비평가는 한 책을 이루는 여러 물질적 요소 가운데 본문을 뺀 나머지(서문이나 발문, 헌사, 판권 난, 저자 소개, 표제, 부제, 제사, 차례 따위)를 곁다리텍스트(파라텍스트)라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서문집’의 텍스트는 곁다리텍스트만으로 이뤄진 텍스트다.(*나의 '곁다리텍스트를 위하여' 참조) 

-도대체 한 저자가 제 책의 서문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할까? 서문의 길이도 천차만별이고 책의 두께도 그럴 테니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김윤식 서문집>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해보자면 100권 안팎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낸 책 95권의 서문이 묶였다. 그 모두가 순수한 저서는 아니다. 책 끝머리에 모인 7편의 서문은 역서와 편서의 서문이고, 나머지 서문 88편에도 아주 드물게 같은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끼여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빼도 이 책에 제 서문을 빌려준 김윤식 저서는 80권이 넘는다.

-그것만해도 보통 저자라면 엄두도 못 낼 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2001년 이후에도 기운차게 책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2001년까지의 저서 가운데 ‘김윤식 서문집’에 그 이름이 빠진 책이 없다 쳐도, 김윤식이 지금까지 쓴 책은 100권에 바짝 다가간다. 거기에 편서와 역서를 보태면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은 10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책들 대다수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니라 학문이나 비평의 영역에 속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김윤식 서문집>의 서문, 다시 말해 서문들의 서문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모으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생각에 책의 서문이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물론 이 표현은 겸양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서문을 곁다리텍스트로 여긴 프랑스 비평가의 생각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앞에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붙이면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천료(추천 완료) 소감’을 옮겨놓고 있다. 문학청년의 치기가 묻어나는 그 소감에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의 지난 반세기 글 노동을 지탱한 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었을 테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저자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김윤식 평론 문학선>, 1981, 서문).

 

 

 

 

 -김윤식은 말하자면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외로운 게임의 중독자였다. 요즘 젊은 세대 말로 글쓰기 ‘폐인’이었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사가이자 문학비평가다. 다시 말해 그의 방대한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분류하고 배열하고 논평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니,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읽다’의 주어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읽기는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근대’의 표지를 지닌 채 발설된 모든 문학 텍스트를 향했다. 임화와 이상과 김동리가 보여준 이념의 엇갈림도, 이광수에서 신경숙에 이르는 세대의 엇갈림도 김윤식이 보기엔 근대성 안의 엇갈림일 뿐이었다.

 

 

 

 

-‘쓰다’와 ‘읽다’의 붙박이 주어 김윤식에게 소위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지녔을까? “명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문학사와 비평>, 1975, 서문). 이것이 겸양에서 나온 말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자신이 엮은 <애수의 미, 퇴폐의 미- 재북 월북 문인 해금 수필 61편 선집>(1989)의 서문에서 그가 ‘명문’에 대한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곧 명문이란 없다는 점.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대수로운 것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임화의 ‘수필론’과 서인식의 ‘애수와 퇴폐의 미’가 조금 말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일이 그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되지도 않는 자기 감정을 질펀하게 노출시켜 남을 감동시키고자 덤비거나 대단치 않은 스스로의 주제를 돌보지 않고 흡사 무슨 도사의 표정을 짓는 짓 따위에서 벗어나, 자기 분석을 겨냥하는 일이 그것이지요. 자기 성찰과 자기 도취의 형식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수필이라는 이름의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진술은, 소설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발언, 곧 “(문학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기준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그 정답이다. 언어의 밀도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윤식의 소설 현장 비평>, 1997, 서문)는 말과 통한다.

-이 기준들은 보기에 따라 꽤 엄격하다. 김윤식의 문장은 이 기준들을 넉넉히 채우고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문제는 명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기 이후 텍스트에서 사뭇 가시기는 했으나, 김윤식 텍스트는 ‘문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다. 그의 웅장한 학문적 성채의 적잖은 부분은 읽어내기 힘들만큼 조악한 한국어를 벽돌로 삼아 세워졌다.

 

 

 

 

-한 세대에 걸쳐 김윤식이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문학 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에 대한 그의 이 대범함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직업적 나태였다 할 만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란 무엇이겠는가’, ‘~가 아닐 것인가’ 같은 표현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자기 도취에 빠진 도사의 표정’에서 얼마나 멀까? ‘언어의 밀도’를 잃어버린 ‘명문’의 허세에서는 또 얼마나 멀까?

-김윤식이 ‘쓰다’의 주어일 뿐만 아니라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글쓰기 무게중심이 중기 이후 ‘연구자의 논리’(근대문학 연구)에서 ‘표현자의 사상’(현장 비평)으로 조금씩 옮아가면서, 그 읽기 대상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당대 소설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표현’과 ‘인식’의 완전한 일치”(<작은 생각의 집짓기들>, 1985, 서문)라 스스로 정의한 비평에서 이 원로 비평가는 성실했는가? 아니 그 비평의 전제인 읽기에서 그는 성실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는 월평들은 김윤식이 이 시대의 가장 열정적인 소설 독자(가운데 한 사람)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단 한편에서 들추듯, 그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런 트집이 무슨 소용이랴? 20세기 한국문학 텍스트를 김윤식만큼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해 김윤식만큼 많이 쓴 사람도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텍스트들이, 그리고 그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김윤식의 손을 거쳐 한국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얻었다. <김윤식 서문집>은 그의 이 끝없는 읽기-쓰기의 그림자다. 한국문학은 이 불세출의 독자-저자에게 큰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짐작에 그의 저작을 30-40권쯤 갖고 있는 나 또한 그에게, 혹은 한 '주어'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06. 06. 14.

P.S. 고종석이 '또다른 다산(多産) 저자들'로 꼽고 있는 고은과 강준만에 대한 군말도 마저 옮겨온다.

-다산성에서 김윤식과 겨룰 만한 저자가 한국에 있을까? 있다.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고은(73)과 언론학자 강준만(50)이다. 고은 저서의 저자 소개에 ‘저서 1백여 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고은 자신이 이미 그 무렵부터 저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해온 데다, <김윤식 서문집> 같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들의 낱권을 각각 한 종으로 친다면, 고은의 저서가 1백 종이 넘는 것은 확실하다. 저서의 다수가 시집인 터라, 글자수로 따져서 고은이 김윤식과 겨루기는 어렵겠지만.

 

 

 

 

-고은의 산문은 한 시절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김윤식이 ‘명문’과 관련해 빈정거린 ‘도사의 표정’과 ‘자기도취의 형식’을 짙게 지니고 있었다. 또 청년 김윤식의 글보다 훨씬 더 문법에 대범했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고은 특유의 주정적(主情的) 문체 속에서 서로를 지워내며 기이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강점이 되었다.

 

 

 

 

-강준만은 그 저서 수에서 이미 김윤식을 앞지른 듯하다. 강준만 저서의 적잖은 부분은 자료의 가공/재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점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지만, 그것은 강준만이 김윤식에 뒤지지 않는 ‘읽다’의 주어이자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강준만이 사실과 현실에 바짝 붙어서 (미시)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여느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언어를 쓰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눈길이 있지만, 그것 역시 이론을 학자들의 닫힌 담론 공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과 결부시킬 수 있겠다.

-고은 같은 탐미 취향은 없으나, 강준만은 그 대신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그 같은 다산 저자에게 드문 강점이다. 강준만의 글은 김윤식이 강조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갖는” ‘자기 성찰’의 글에 가까워 보인다.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는 없을까? 있다. 고은처럼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김정환(52)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양이 고은이나 강준만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름답게 쓰면서 많이 쓰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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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권력(權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이다. "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고, "복종 시키는 힘"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힘'의 근원에 따라 그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 '힘'의 근원이 권력의 소유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권력의 부여자(그러한 권력에 대해 인정하고 복종한 자)에게 있는가? 어쩌면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도 같을 것이고, 또한 다를 것이다. 권력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은 그 둘의 공존과 복합의 산물인 것은 아닐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시조로 내셨을 적부터 거기에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아담을 먼저 만들어 아담에게 권력이 있었다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아담은 하와보다 육체적 힘이 있었다.(이것은 현대의 남녀의 육체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에 가능하다고 하겠다. 누가 알겠는가? 하와가 아담보다 더 덩치가 컸을지!) 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했고, 육체적 힘이 강한 아담은 그 노동에 더 효과적이었을 터이다. 하여튼 하와는 이러한 아담에게 '복종'함으로써 그에게 권력이 있음을 '인정'하였을 터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디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관계는 사회를 형성해 나아감에 있어서, 이 권력의 소유와 인정을 반복하여 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가정을 구성하고, 집단을 구성하며, 나아가 부족과 나라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 곳, 어느 것 하나 권력이 존재할 수 밖에는 없게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권력은 타협과 공존과 평화의 또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여간에 작금의 우리사회 어디에도 권력 아닌 것은 없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권력은 정치권력, 이른바 정권으로 대표된다. 여기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이 있으니, 그것은 경제적 권력, 천하게 말하여 돈의 힘이다. 아차! 태고로부터 권력의 상징이 무력이 빠질 수는 없겠다. 이밖에 사회는 곳곳에서 권력과 그에 대한 복종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힘은 있으되, 복종이 없다면, 그 힘의 행사에 대해 그 누구하나 인정함이 없다면, 그것은 권력이 될 수 없다. 애써 그것을 권력이라 한다면, 정당성 없는 권력이 되겠다. 이 태초부터 존재하여 온 이 권력이라는 것은 그 정당성, 이른바 힘에 대한 인정과 복종이 있어야 함을 현대의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권력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되, 여기 또 하나의 권력이 있으니, 그것은 권력 아닌 권력, '문학권력'이다. 문학과 권력, 이 두 단어가 합성되어지리라고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문학이라는 것은 근대의 산물이고, 이 근대라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여 왔던 시기가 아니었는가? 이성의 힘이라 포장된 가장 야만적 살육이 진행되었던 근대에 형성되어, 현대(엄밀한 의미에서 현대라는 명명이 가능한가는 의문이지만)의 초첨단과학적 무력과 그보다 무서운 자본주의적 경제의 권력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의 문학에 권력이 존재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영국에서의 '문학'의 진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따져보면 '문학권력'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것이리라.(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 서론<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제1장<영문학 연구의 발흥>을 참조하면 좋겠다.)

  더 따져볼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문학을 '한다'는 것에서부터 문학을 향유하는 것에까지 이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은 그리 깊이 파고 들어가서 찾아내야 하는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누군가의 문학작품을 읽고 거기에 감명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작품의 작가에게 일종의 문학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종류의 작은 권력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거대한 문학권력이 형성될 수 있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권력은 앞에서 이야기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학계에서 작용하는 이 '문학권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재의 대한민국 문학계에 존재하는 그 힘은, 정당하게 부여받은 '권력'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책 <<문학권력>>은 바로 그 정당성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애초에 권력은 '인정'(복종)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으되, 그것은 지속적 인정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권력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권력에 대한 인정의 지속이 있을 때에는 그 정당성이 유지 존속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속이 중단되어 회의되었을 때에 그 권력은 그 순간 정당성을 잃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부당한 권력이라 이름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권력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 <<문학권력>>에서는 현재의 우리 문학계의 권력의 정당성, 즉 그 권력이 오용되어 권력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만연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이상 그것은 문학'권력'이랄 수 없다. 대신 그 권력에 물음표를 달아줄 수는 있겠다. 물음표를 달아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권력이 다시 정당성을 갖기 위한 자기 갱신을 해야한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금 그 권력에 대한 인종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런 물음을 던진다. "'한국 문학의 위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그 물음 옆으로는 큰 글씨로 "문학권력"이라고 써 놓았다. 따라서 이것은 이 책이 표방하고 있는 지금의 문학'권력'에 물음표를 달아 놓아서, 이제 스스로 성찰하여 갱신하고, 다시금 정당성을 찾으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학권력'이 왜 그 정당성을 잃게 되었는가? 역사적으로 권력은 자기 갱신을 모른다. 권력의 소유는 그것에 대한 소유욕을 낳고, 이러한 소유욕에 의해 잘못된 권력의 행사를 낳는다. 자연히 이것은 썩을 수 밖에 없다. 문학'권력'도 그러한 권력의 역사적 향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일까? 자신들의 문학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그것은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끌어드리고 말았다. 저열한 상업주의와 결탁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줄 호의병들을 모아들였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학에 과대한 상업적 포장을 하고, 대단한 문학인 것인냥 선전유포하고, 자본과 미디어와 결탁하여 결국은 문학대중들을 오도해온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억압과 소외를 그 이면에 동반한다. 그러한 권력옹호를 지탄하고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또한 오염된 권력의 당연한 처사 아니었는가?

  온갖 잡다한 문학권력유지 행위가 자행되어 왔다. 말이 좋아 '주례사비평'이지 그것은 "100% 30kg 감량"이라고 선전하는 다이어트식품 사기와도 같은것 아닌가? 자신들을 비판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원천차단을 행하고 있음을 이 책에서는 폭로하고 있다. 어쩌면 이 문학권력은 이제 썩을 대로 썩은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현재까지의 오염된 권력의 패퇴에는 그 부작용이 공공연해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때에, 이러한 폭로의 함성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문학계의 '권력'은 그러한 단계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하는 작은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강준만의 이 책이(강준만과 권성우의 공저라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강준만의 작업이다. 사실 강준만의 편역이라함이 더 정확하겠다.) 나온지 5년이 되었지만, 아직 이 '문학권력'은 무너지지 않았음을 본다. 사실 그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오늘날의 문학권력이 너무나 공고한 것은 아닐까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끝으로 나는 이 책을 평가하면서 별 5개를 주었다. 책 자체의 평가라기 보다는 이 책에서 회의되고 비판되는 '문학권력'이 어서 빨리 정당해 질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절실하여, 그에 대한 응원의 작은 힘이나마 보내주고자 함에서의 별 5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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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내가 속한 모대학에서 시행하는 수시모집 적성평가에 시험감독으로 다녀왔다. 비가 어기적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적성평가를 보기위해 모인 많은 수험생들과 그에 못지 않은 학부모들로 학교가 떠들썩 했다. 주말을 주말답게 보내야 한다는 내 철두철미한 원칙이 오늘은 깨져야 한다는 억하의 심정과, 내 채우지 못한 잠을 내리는 빗방울이 놀리고만 있는 듯한 생각에 뭔가 어깃장이라도 놓아야 내일 산뜻하니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을 듯 싶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때도 대학의 입시제도 등에는 문외한이었던 나는(운이 좋았는지 별 신경 안쓰고 이 모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대입제도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시행되는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대충을 주워들어 풍월을 대강 읊기는 하겠으나, 남들 하는 소리 앵무새처럼 따라할 뿐이니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오늘 이 적성평가 감독은 처음이다. 몇 번 이런저런 시험에 감독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무게있는(?) 시험 감독은 처음이니 적잖이 긴장이 되기도 했다. 막상 감독에 임해서는 뭐 그리 별반 다를 것도 없고, 나하고는 무려 9년의 차가 있는 젊디 젊어 애티가 줄줄이 흐르는 수험생들을 보면서 왠지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머리 속에는 '지금 얘네들이 왜 이런 시험을 볼까?'하는 어깃장이 놓여졌다.

  지금 이 시기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중간고사 기간이다.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 강의실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중간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우리 후배들이 불만이 많다. 도대체 공부할 자리도 없는데, 이놈의 수시니 적성평가니 하는 것때문에 주말 우리 후배들의 공부장소를 박탈해 버리고 있으니 그 불만이 아니 나올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것때문의 어깃장은 아니다. '적성평가? 지금 얘네들이 대학 들어오겠다는 애들 아닌가?'  이런데서 오는 어깃장이다.

  분명, 오늘 모인 많은 수험생들은 우리의 모대학에 들어오겠다는 학생들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 시험은 그들 중에서 누구를 받아들여야 할지를 선택하기 위해 평가하는 자리다. 그런데 '적성평가?' 뭔가 이상한듯이 야릇하다. 내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때 이과 문과를 선택하기 전에 이 '적성검사'라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사실 이때의 적성검사가 그다지 신뢰성이 있는듯 보이지는 않다. 나는 그때의 적성검사에서 이학계열에 적성이 있는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이과엘 갔고, 대학은 보란듯이 문과, 그것도 문과 중의 문과계열이랄 수 있는 곳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이쪽이 내 적성에는 오히려 더 적합한 듯 싶다.) 그러나 그때의 '적성검사'와 오늘 이 '적성평가'는 그다지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검사'와 '평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에서 왜 '적성'을 평가하고 있을까? 얼핏 들으니 "대학에서의 학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는 검사 "라는데, 말하자면 똑똑한 놈 뽑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말 그대로 '적성평가'라면 그 결과를 기초로 해서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알맞은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게 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인데, 지금의 이 '적성평가'라는 것은 대학 입학의 중요한 한 시험과목으로 그 위상을 드높이니, 본말이 전복되어도 한참을 뒤집혔다.

  시험감독을 하면서, 문제들을 얼핏보니, 예전에 본 IQ테스트 같기도 하고, 그냥 저냥 머리 좋은가 하는 검사만 같다. 사실 적성이라는 것이 이런 시험으로 딱하니 판별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둘째치고, 과연 이 평가를 대학 입시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가가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대단히 무가치, 무의미, 무분별 등등등, 여러 無한 것임에 틀림 없으리라. 말하자면 그렇게 뽑아 놓아도, 말짱 도로묵이 될 것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적성평가'가 대단히 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각 유명대학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대학이라면 이 적성평가로 거둬들이는 수익이 어지간히 적지 않단다. 뭐 그게 잘못 됐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수익이 많은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장사에서도 좋은 물건 팔아 돈 많이 벌면 그제 자랑이지 어디 욕 먹을 일인가? 그런데, 쓰잘데기 없는 물건 비싸게 팔아먹어 돈을 긁어 모았다면 그건 욕먹을 짓이고, 죄 받을 짓이긴 하다. 문제는 거기에 있을 듯 싶다. 지금의 대학에서 시행하는 '적성평가'라는 게 '쓸데없는 것' 아니냐라는 의문에 긍정한다면, 이것은 문제 아닐 수 없고, 욕먹을 짓 아닐 수 없으며, 어깃장을 놓아도 수 만 장을 놓아야 하리라.

  각 대학이 자신의 대학에 와서 공부 잘할 학생들을 뽑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적성평가'이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대학의 장삿속은 아닌지, 그 속에서 허우적 거려야할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쓰다보니 길어졌고, '오늘'은 어제가 된 지금이다. 하여간에, 오늘 어깃장은 여기까지만 하자. 한 가지, '적성평가'는 대학오기 전에 미리미리 해두는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게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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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10-2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는 금욜에 수시 면접본다고 시험을 월~목으로 몰아서 본-_-; 이제 나갈 물고기들보다는 새로운 물고기들에 관심이 많은건지 원. 그나저나 문법 달달달 외우기 힘들어요 ㅠ_ㅠ

마노아 2006-10-2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님의 얘기에 공감이에요. 교육정책도, 교육현장도 불만이 너무 많아요. 안티 교육이에요^^;;;

멜기세덱 2006-10-2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제가 언제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건 이매지님이 시험 잘 보시는 거랍니다. ㅎㅎ
마노아님...저는 안티교육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처지네요....ㅜ.ㅜ;; 문제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안티'말고 다른 걸 해야 될 거 같아요. ㅎㅎ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 인터뷰 특강 시리즈 3
김동광, 정희진, 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몇 달 전에 내가 생활하는 학교에서 어떤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몇몇 쟁쟁한 인사들을 초청해 특별강연을 한다는 포스터였는데, 지금 보니 바로 이 책에 실린 그 강연에 대한 홍보포스터였던 것이다. <<한겨레21>>에서 이벤트성으로 연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이란 주제의 이 강연 포스터에 유독 나의 눈길을 끌게 한 것은 평소 좋아하던 박노자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시대의, 아니 세기의 사기꾼으로 지칭될 황우석 사태가 터진 이후여서인지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이런 강연을 마련한 듯 보였다.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는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이 참으로 허탈감을 느꼈으리라.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 그 이상일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느 방송프로그램에서 황우석 교수에게 큰 기대와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는 희귀병으로 온갖 고통의 세월을 보내던 한 아이를 본 적이 있다.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의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나같이 별 기대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도 '허탈'이란 마음은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하면 어떤 면에서 좀 약한 것이 아닌가 할 때가 있다. 많은 거짓말을 우리는 '거짓말'이라고 칭하지만 그런 거짓말에도 고저가 있고 장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로 죄 짓는 것을 사기라고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의 '거짓말', 한 노래가사의 어머니처럼 애써 자장면이 싫다고 하는 그런 거짓말도 있다. 그럼 거짓말은 때론 유익한 것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짓말들이 사실 울며 겨자 먹기일 뿐이지 그것을 유익의 차원까지 끄어올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세상에 거짓말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거짓말이 없었다면 이 세상이 존재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다. 어딜 가나 거짓 아닌 것이 없다고 할 때, 그런 세상에서 속고만 산다는 것은 비참한 노릇이다. 때론 속아주기도 하고, 때론 속아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속아주는 것이야 무에 그리 힘들 일이겠는가? 문제는 속지 않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7차례의 인터뷰 강연이 진행되었다. 기획의도는 사실 황우석 사태라는 시류를 탄 것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거짓말에 대한 성찰은 언젠가는 필요한 것이기에, 편집장 고경태가 이 책의 머리말에 쓴 것처럼 "거짓말로 가득 찬 세상. 이 책은 항(抗)거짓말 치료제가 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공부해서 속지 말고" 살아야 하겠다. 속지 않으려면 일단은 무엇이 거짓인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고, "알면 다친다."는 소리도 있지만, 여기서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관용어가 가장 어울리고 적합하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과학사회학자 김동광, 역사학자 한홍구와 박노자, 법학자 김두식, 새터민 김형덕, 여성학자 정희진, 그리고 저 멀리 인도에서 온 평화운동가 프라풀 비드와이까지 모두 8명이 우리 사회의 거짓말 7부분에 대해 흥미진진한 강연을 펼쳤다. 사실 그 강연을 직접 가보고 싶었지만, 당시에 이래저래 바쁘고 서울까지 올라가기가 벅차 단념해 두었다가 이 책을 만나서 한편 기쁘기도 하고, 한편 후회도 되지만, 이 책을 통해서는 그 강연 현장에서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이 된다.

  흔히들 세상에 거짓이 가득차 있다고 말하는데, 정작 뭐가 거짓이냐고 물어보면 쉬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실 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거 속는 것 같은데, 뭐가 거짓말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러니 뭐가 거짓말인지 알려주어야 할 것이기에, 그 많은 거짓들을 시시콜콜 다 얘기할 수는 없겠고, 그 중에서도 이 사회에 만연한 덩치 큰 거짓말들 7가지 택한 것이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는 얘기가 있잖은가? 우리 민중들은 그런 사람들일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이 7가지 항거짓말 치료제를 맞으면 그깟 자잘한 거짓말이야 한방에 충분히 날려버릴 것이다.

  첫 번째 강연자는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씨다. TV에 나와서는 차분하고 다소곳하게 말씀을 잘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만난 정혜신은 조금은 당차보이기도 하다. 주제는 '사람에 대한 거짓말'이다. 사실 이 주제는 너무 크다고 생각이 된다. 사람에 대한 거짓들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사실 세상의 모든 거짓말들은 어쩌면 이 사람의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혜신은 당차게 이야기 한다. 자신이 하는 말 중에 참말이라고 확실할 수 있는 이 말, 바로 "모든 사람은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다."라고 선포한다. 그렇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거짓말이 발생한다. 그러니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참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그들을 대해야한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또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우리 사회에서 거짓말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정혜신의 이야기는 이런 순진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희망을 갖게 한다.

  두 번째 강연자는 과학사회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을 하는 김동광 씨다. 얼마 전 최재천 교수의 '통섭'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도 좀 다른 듯 보인다. 과학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는 이 강연 첫머리에 잘 이야기가 되고 있으니 넘어가자. 여기서는 과학에 어떤 거짓말들이 있는지 이야기 한다. 사실 현대/근대 국가의 성립의 기초는 몸통은 과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가권련은 이런 과학에 기반에서 성립된 것이리라. 그러기에 거기에는 많은 거짓들이 존재한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겉으로는 거짓이라는 것을 배제하고 객관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 실상 안에는 온갖 거짓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기술이 많은 이로움을 외피로 하고, 그 이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죽여오지 않았던가?

  세 번째 강연은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읽어 오던 박노자가 한홍구 씨와 함께 한국사의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전 박노자의 여러 저서에서 이 나라의 거짓된 이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순신 동상의 건립배경들을 보면서, 그것이 김일성 동상과 어떤 면에서는 같은 성격이 아닌가 하는 의문들을 꾸준히 제기해온 것이 박노자이다. 그런데 한홍구는 사실 여기서 처음 만난다. 박노자와는 또 다른 느낌의 관심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를 다루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많은 거짓이 침투하기가 어느 것보다 쉽다. 역사가 왜곡될 때에 우리 현대사회에서 많은 잘못된 것들이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이 역사를 의심하고 진실이 무엇인가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법학자 김두식 씨의 강연이다. '거짓말 권하는 사회'라는 주제로, 우리의 기억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위증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위증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이라는 얘기는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학계에 만연한 거짓들에 대해 폭로한다. 사실 너무나 공공연한 것이지만,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이것은 폭로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 사회는 이런 거짓들을 강요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북한에서 월남한 김형덕 씨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 북한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나의 견해와는 조금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많은 언급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해서 보다 옳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섯 번째는 페미니스트 정희진 씨의 이야기다. '남자'의 거짓말과 말의 권력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장에서 나는 무척 흥분했다. 사실 페미니즘이니 페미니스트 하면 쓸데없는 소리하는 것으로만 생각해 온 것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사회에서 여자는 배제되어 온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이 사회의 거짓의 만연을 사실상 유발시키는 장본인이 아닌가 한다. 많은 부분에서 정희진의 강연은 나의 그동안의 편협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생각들에 하나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정희진을 앞으로 더 알아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마지막으로 평화운동가 프라풀 비드와이의 '인도에 대한 거짓말'이다. 사실 19세기나 20세기의 제국주의적 침략 속에는 오리엔탈리즘이 내재해 있다. 현재에도 이것은 꾸준히 적용될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동남아나 인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뭔가 신비스럽게 미개해 보이는 나라 아닌가? 이런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거짓된 생각들을 한풀 벗겨주는 유익함이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강연 중에서 한 가지 아쉬움 점이 남는다. 큰 건더기의 거짓된 주제들이 몇 개 빠진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거짓말들, 우리 문학의 거짓말들이 그것인데, 기회가 된다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치료제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한다.

  이 책을 통해서 이것으로만 항치료제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는 힘들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가? "공부해서 속지 말고" 살자고 했던가? 그렇다 이 책이 이 세상의 거짓에 대해 공부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의 역할을 충분할 터이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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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해콩 > 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2006년10월13일 제630호
     
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언어의 압축력을 만들어내는 ‘지혜의 건전지’… 언어는 ‘섞임’의 토양서 자라는 것, 순 우리말 고집은 ‘대인기피증’ 같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 년 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관련의 한 학회에서 한자를 “서양인 등 한자문화권 외부인들의 한국어 학습의 장벽 중 하나”로 꼽은 한 국내 학자의 발표를 들은 일이 있었다. 이 의견이 국내 학계에서 거의 통설인 듯한데,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렇게만 보기 힘들다. 이것이 외국어 학습의 변증법이라 할까?


△ 한글날을 맞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외국인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이들이 글쓰기에 한창이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한자는 최대의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사진/ 연합)

 

최악의 걸림돌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좋은 학습 방법을 쓰면 바로 최고의 디딤돌이 된다는 법. 한국어를 전공하지 않는 학습자들에게 한자 학습이 추가 부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자를 배울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진 전공자 같으면, 초기의 진입장벽, 즉 어려운 습자 과정이라는 산맥만 넘으면 그야말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표적수사’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많은 한자어들이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의미의 압축성을 과시한다. 예컨대 ‘일조권’(日照權)과 같은 의미의 표현을 영어로 지어보시라. 직역하자면 ‘햇빛을 누릴 권리’ 같은 설명식의 표현이 되는데, 한국어 능통자가 긴 설명 없이 이 의미를 석 자의 한자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누가 봐도 부러운 일이 아닌가? 내 모국어인 러시아어 같으면, ‘일조권’을 의역하는 데 적어도 4~5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일조권’과 같은 의미의 표현은 유럽 언어들에서도 하나의 관용구가 될 수 있지만, ‘표적 수사’나 ‘친인척 비리’ 정도면 아예 따로 문장을 지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표적 수사’의 러어 의역을 한국어로 다시 직역해보면 ‘수사의 주체 내지 감독자가 특별히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자가 표적이 되어 불공평하게 진행되는 수사’쯤 될 것인가? 어쨌든 학생 때 나는 이런 압축적 표현력을 가진 한겵?일의 언어가 끝없이 부럽기만 했다. 약 7년 전 국내의 한 전문 번역자 양성기관에 출강했을 때 ‘지식기반 사회’의 러어 번역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영어 같으면 준비된 번역어가 있지만, 이 간단한 여섯 글자의 한자 표현을 러어로 좀 어색하고 장황한 문어로 의역해야 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한자어들을 익히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정리할 수도 있구나!” 하고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학생으로서 나의 진정한 사랑은 고사성어였다. 나에게 넉 자짜리의 고사성어는 거의 한 권의 책과 맞바꿀 수 있는 지혜의 무게를 지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지금도 동아시아 종교사 수업 때면 불교의 방편론을 설명하려고 늘 칠판에 쓰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들어보자. 이 간단한 표현 하나를 머리에 떠올려 계속 반추하고 명상을 해보면,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서도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는 처세법을 다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처세서를 사느라 돈 쓸 일도 없이. 나는 이 표현을 접하면 꼭 남의 말에 잘 응대해 이 고사의 유래가 된 제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에게서 개인적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고마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일일삼성(一日三省),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재점검하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대로 하루에 몇 번씩 각종 고사성어를 떠올리면서 내가 이 부류에 해당되지 않는지 생각해본다. 눈이 높아봤자 재주가 따르지 않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안고수비(眼高手卑) 아닌가, 자신의 밭에 물을 대듯이 이미 내린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논증 과정을 편의적으로 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이 아닌가? 러어에도 어떤 유럽 언어에도 없는 이 ‘지혜의 건전지’ 없이 내가 과연 살 수 있었을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고사성어를 모르고 사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럭저럭 살아갔겠지만, ‘임기응변’의 의미를 한 번도 고심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왠지 아쉬움이 생기기도 한다.

 

한글 통해 한자·한문·일본어까지 익혀

 

하이퍼텍스트인 인터넷에서는 한 사이트의 가치가 다른 사이트와 링크가 얼마나 잘되는지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언어 공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습 대상으로서 특정 언어의 가치는, 그 언어가 다른 언어의 연속 학습의 디딤돌이 어느 정도 돼줄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돼 있다. 나에게 한글의 가치는 한글 공부 그 자체에도 있었지만, 한글을 통해 한자, 한문 그리고- ‘한자 코드’를 통해- 초급 일본어까지 익힐 수 있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한자 문화권 바깥에서 이 한자 문화권 안으로 틈입한 자인 나로서는 배우기 쉬운 과학적·체계적기호 체계로서의 한글이란 바로 난삽한 한문·일본식 국한문 혼용 표기 세계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 “한자는 ‘남의 글’일 뿐일까?” 지난 8월 충북 충주 탄금호에서 열린 호수축제 기간 동안 도내 대표 서예가 125명이 천자문 합작 휘호를 하고 있다.(사진/ 연합 박일 기자)

 

나는 지금도 중국의 고전 한시까지 습관적으로 한글로 표기해 한국식 발음으로 읊고, 현재 체류하고 있는 후쿠오카의 간판이나 식당 메뉴판들까지도 한국어 한자어 지식을 총동원해 어렵게 판독하다시피 한다. 나는 한국어 속의 한자어를 익혔기에 일본어를 따로 배울 일도 없이 “요야쿠가 무료데스”를 들으면 예약이 무료인 줄로 당장 눈치챌 수 있다. 과연 ‘토종 한국인’들도 한자를 ‘국어 속의 이질적인 요소’ ‘남의 글’로 배척하기만 해야 하는가? 대중적인 글에서 한자를 남용할 일은 없지만, 국내 인구보다 30배나 많은 이웃 나라들의 인구에게 통하는 ‘코드’가 이미 우리 언어 속에 내재돼 있다는 것을 굳이 나쁘게만 볼 일인가?

메이지 시대 초기의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처럼 한자를 아예 폐기처분해 ‘언문일치’의 완전을 기하자는 일본의 근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나, 그들 후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한국의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언어 국수주의자들이 한자를 ‘남의 글’로 규정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경우 아마도 이미 고조선 시기에 이용됐을 법한 한자를 ‘남의 글’로 본다는 것은, 불교를 ‘외래 종교’라 규정해 1868~72년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를 강제 환속시켰던 메이지 시대 초기의 신도(神道) 국수주의자들의 사유 방법이나, 기독교를 “독일 민족에 이질적인 유대인들의 종교”로 생각했던 히틀러의 사고방식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두도 아닌 순수 한문만 쓴데다 그 저술에서 ‘신라’라는 자신의 국가 명칭을 겨우 몇 번만 썼을 뿐 주로 ‘국적이 없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했던 원효를 ‘우리’ 지성사에서 빼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진정한 ‘남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 사용을 굳이 그렇게까지 꺼릴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우리에게는 예컨대 일본어나 영어에서 온 차용어들이 제국주의 침략과 연상돼서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고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단어들에 과연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한 유명한 국수주의적 언어학자가 ‘커피’라는 ‘외국말’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하여 ‘미국 차’라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역시 ‘순 우리말’이 아닌- 표현을 써왔다고 하는데, ‘커피’에다 과연 ‘미국’이라는 꼬리표를 꼭 달아야 하는가? 커피 원두의 원산지로 알려진 곳은 에티오피아고, 그 원두가 잘 자라는 한 계곡의 이름이 나중에 아랍어 ‘Qah’wa ’(중독성이 있는 음료)의 유래가 됐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럽 언어의 ‘커피’와 같은 단어는, 터키어를 매개로 하여 그 아랍어 단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 정도의 계보를 가진 단어라면 ‘미제 침략의 언어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공유해도 좋을 세계사의 일부분이 아닌가? ‘남의 말’이 만약 모두 ‘침투’라면 바깥 세계에서도 ‘태권도’와 같은 한국어 차용어를 서둘러 그쪽의 ‘순 우리말’로 ‘순화’해야 하는가?

 

단어들에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음과 양의 합침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두 사람의 합침이 가족을 만들고 수많은 방언겙訛?영향들의 합침과 스며듦이 언어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사람이 외부인들과의 ‘소통’ 속에서 성장하듯 언어도 외부와의 ‘섞임’을 토양 삼아 자란다. 외부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꺼리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흔히 ‘대인기피증’이라고 진단한다. 솔직히 말하면, ‘순 우리말’을 고집하시는 분들을 보면 꼭 떠오르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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