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文隨想>

專門用語를 소리로만 읊는 젊은이들

金允溟(檀國大 電子工學科 敎授)


  <한국경제신문> 2006년 11월 11일자 제1면 上段에 보도된 것을 보면, ‘글로벌 人的 資源 포럼’에서 미국 하버드大學 로버트 배로 교수는 “교육의 質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며, 科學과 數學 점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경제 성장률이 높다.”고 강조했다. 교육의 質을 높이고 科學과 數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의미가 분명한 學術用語들을 많이 가진 좋은 言語가 있어야 한다. 그런 面에서 言語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無形의 基盤施設(infrastructure)이다.

  우리의 학문이나 기술 용어 대부분은 西歐에서 만들어진 것이 日本에 들어와 漢字化의 과정을 거친 다음, 우리나라에 떠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幸運인가, 不幸인가? 그것을 不幸이라 치고, 全面的으로 뜯어고칠 생각을 한번 해보자면, 그 일은 너무나 엄청나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漢字 用語는 그냥 漢字로 적는다. 여기에는 아무런 反論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한글은 대단히 우수하여 모든 용어를 한글로 적어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지나친 自慢이며 근거 없는 盲信이다. 한글은 생각만큼 그렇게 萬能이지 않다. 한글은 영어와 같은 표음문자이지만, 言語史的 상황과 현재의 사용 환경이 서로 다르므로 동일한 주장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영어는 거의 모든 용어를 알파벳으로만 적고 있지만,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같은 소리文字이면서도 한글로는 잘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영어는 소리문자라 하여도 알파벳 몇 字가 모이면 의미를 가지게 되어 있다. 漢字도 낱자마다 그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소리문자로 바꾸면 갑자기 그 의미를 잃게 되거나 不分明하게 된다. 여기에서 용어를 영어와 한글로 쓸 때 근본적 차이가 발생한다.

  專門用語의 정확한 의미 전달은 교육에서 절반을 차지한다. 용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지 않고서는 아무리 공부하여도 별 효과가 없다. 뜻이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은 용어는 정확하게 사용되지 않고 살짝 變質되거나 誤解되어 사용된다.(이렇게 해서 언어는 또 進化해 간다.) 엄밀하게 定義된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하는 학문 세계에서, 이것은 쥐약이다. 거의 모든 학술용어가 漢字로 된 우리나라에서 漢字 없이 학문을 擧論한다면 그것은 詐欺이며, 良心 不足이다. 용어의 정확한 의미 理解가 없이 ‘무어네, 마네’ 하면서 初 ․ 中 ․ 高 ․ 大學에서 敎育이라는 것이 行해지고 있다. 대학 교수들도 자기 세대는 한글 세대로서 漢字를 전혀 배우지 않았노라 하면서, 정확한 의미 解讀 없이 소리로만 전문 용어를 열심히 읊고 있다. 차라리 英語로만 가르치고 배워라. 그러면 自己欺滿은 避하리라.


  조상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녹아 있는 노래들의 深奧한 뜻은 漢字와 더불어 씌었을 때 더욱 감칠맛이 난다. 전통 사상이 잘 반영된 俗歌體의 頌佛歌詞이며, 지금도 放送으로 간간이 들을 수 있는 悔心曲의 첫머리를 純 한글로만 적어보겠다.


일심으로 정념 아 아미이로 타불.

억조창생은 다 만민시주님네 이내 말씀을 들어보소.

인간세상에 다 나온 은덕을랑 남녀노소가 잊지를 마소.

건명전의 법화경이로구나 곤명전의 은중경이로다.

우리 부모 날 비실제 백일정성이며 산천기도라.

명산대찰을 다니시며 온갖 정성을 들이시니

힘든 남기 꺾어지며 공든 탑이 무너지랴 지성이면 감천이라.

                                              (별회심곡)


  위의 歌詞에 한자를 쓰지 않아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지만, 거기에 漢字를 섞어서 다시 적어보겠다.


一心으로 精念 아 阿彌이로 陀佛.

億兆蒼生은 다 萬民施主님네 이내 말씀을 들어보소.

人間世上에 다 나온 恩德을랑 男女老少가 잊지를 마소.

乾命前의 法華經이로구나 坤命前의 恩重經이로다.

우리 父母 날 비실제 百日精誠이며 山川祈禱라.

名山大刹을 다니시며 온갖 精誠을 들이시니

힘든 남기 꺾어지며 功든 塔이 무너지랴 至誠이면 感天이라.

                                              (別悔心曲)


  같은 노래 구절이지만 달리 적힌 두 노래를 읽어볼 때, 槪念이 구체화되어 마음에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確然히 다름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문화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對應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하여 언어가 基盤이 되어 받쳐주어야 한다. 自國 말과 글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일종의 傲慢과 獨善이며, 언어적 鎖國이다. 우리말과 글이 풍족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분량의 漢字를 숙달시켜 잘 활용되도록 하고, 적절한 외래어들을 우리말의 일부에 편입시켜서 새로운 뜻을 정확히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소리글자인 우리 한글이 세계적으로 널리 발음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한글은 母音價를 나타내는 것에는 큰 부족함이 없는 것 같으나, 子音價를 나타내기에는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영어의 f, r, v, z 발음 및 발음부호 θ(theta)를 지금의 한글로는 정확하게 나타낼 수가 없다. 물론 소리를 제대로 표시할 수 없는 다른 자음들도 더 있고, 영어 아닌 다른 언어를 나타내기에 부족한 것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선 영어 표기에 부족한 최소한의 몇 가지 音價를 생각해 보고, 이를 정확히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한글 子音 몇 개와 母音 한두 개 만드는 것을 語文學界에 제안하는 바이다. (<語文생활> 통권 제109호,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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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12-1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학자의 얘기여서 그런지 귀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네요. "자음 몇 개와 모음 한두 개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 이런 정도는 그냥 흘려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란 이름을 안 것은 대학에 갓 입학해서다. 내 전공이 국어교육이고, 그러다보니 대학 1학년 필수과목 중의 하나가 <국어학개설>이다. 이런 언어학 관련 강의 첫 시간에는 의례히 언급되는 몇몇의 이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촘스키다.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 격으로 촘스키는 언급된다. 변형문법은 최근까지의 언어학계에 있어 거의 지배적 이론의 위치에 있다. 그렇기에 촘스키란 이름은 세계적 권위의 언어학자  쯤으로 기억되어졌다.

  촘스키란 이름은 그렇게 기억되었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발음상 쉽고 재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그의 이름이 들려오는 곳에 <언어학>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촘스키가 그 촘스키가 아닌가 보다 했다. 그러나 이 촘스키는 그 촘스키였던 것이다.

  언어학자, 그것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언어학자, 언어학계에서 ‘한 획을’ 굵직하게 그어 논 大언어학자가 언어학하고는 별반, 아니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에서 그 이름이 크게 울리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 외교, 언론 등의 분야에서 그의 비판적 목소리에는 그의 언어학자로서의 목소리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했고, 그렇기 때문에 내 관심을 끌었다.

  사실 촘스키의 이름이 내게 크게 울리면서 ‘그를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우선 촘스키란 이름을 처음 접했던 그때의 모습, 바로 언어학자로서의 촘스키를 아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언어학 관련 저서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저서를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촘스키 읽기는 지금까지 미뤄져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촘스키 과련 서적을 구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어학 관련 서적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촘스키 읽기를 시작하겠다는 뜻은 없었다. 단순히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니, 이 기회(값싸게 살)에 사 둬서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구입하게 된 것이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3권의 시리즈였고 덤으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얻었다. 그 후로 조금은 오랫동안 내 책상위에 쌓여 있었다.

  이제야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이 책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이다. 그리고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열심히 이 책을 읽었다. 쉽고 흥미 있었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명쾌하면서 신랄한 비판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이제 촘스키 읽기의 시작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애초의 언어학 관련 저서로부터 촘스키 읽기가 시작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면서, 아 이게 천만다행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것들은 우리가 대부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는 것들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 ‘돈을 가진 자’, 그리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권력’, ‘권력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잘 알지 못한다. 촘스키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언어학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날카로운 시각의 정치비평가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언어학자의 모습이 아닌 촘스키는 더 다가가고 싶게 나를 유혹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천만의 다행.

  사실 촘스키를 ‘집어 들게’한 것은 『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이다. 거기에 실린 짤막한 인터뷰에서 촘스키의 비판적 목소리를 엿들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도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시대의 양심~』에서 접했던 촘스키의 모습을 계속해서 읽어볼 수 있었다. 좀 더 친근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것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현대의)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지식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곧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식인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족속들은 그 진실이 말해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제도라는 이름을 그것을 가둬둔다. 여기에도 촘스키의 목소리는 칼날을 드리운다.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탄원서에라도 서명하겠다는 촘스키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촘스키에게 “표현의 자유”란 생명과도 같다.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의 촘스키의 사명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 “표현의 자유”는 지식인으로서 살아있게 하는 숨결과도 같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은 너무 자명하다. 그러나 너무 자명하기에 우리는 거기에 무관심하다.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그러한 무관심 속에 우리를 지배하는 그 무엇들은 더욱더 그 세력을 공고히 하고 우리를 헤어 나올 수 없는 암흑 속으로, 곧 無知 속으로 밀어 넣는다. 촘스키는 우리들에게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앎이 곧 힘이다.

  이 시대를 일컬어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대라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의심하라”(『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는 촘스키는 진정한 “자본주의는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 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거대한 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라고 ‘현재의 경제체제’를 정의한다. 몇몇의 거대한 기업들이 이 세계의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어떻게 ‘자본주의’라 칭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라는 이름하에 이러한 세력들은 모든 ‘경제’를 독점하고 지배한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한다. 여기에 우리는 무기력하게 지배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촘스키의 목소리는 친절히(?) 다가온다. “한국의 금융시장은 완전히 미국의 지배하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말이다. 모든 것들을 먹어 삼키기 위해 범죄로 서슴지 않는 그들인 것이다.

  그들은 경제를 지배하고, 자본을 독점하기 위해 ‘권력’을 동원한다. 나아가 ‘권력’을 소유하고자 한다. 다국적 기업들은 어지간한 국가보다도 그 힘이 세다. 국가보다도 힘이 센 다국적 기업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촘스키는 말한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에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알지 못하면 저항할 수 없고, 싸울 수 없다. 그러니 오늘날의 현실에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우리는 알아야 하고, 지식인은 ‘진실’을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민주주의’ 또한 의심한다. 의심의 도를 넘어 아예 ‘가짜’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라고 과감히 말한다. ‘방관자’, 그렇다. 그래야만 그들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함부로 시비 걸지 못하게 아예 그 근본을 없애겠다는 노릇인 것이다. 때로는 협박을 동원하기도 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심 조장”이 그것이다. 우리도 이 대목에서는 크게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협박에 어지간히 당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렇게 ‘방관자’를 만드는 민주주의, 그리고 협박과 공갈을 일삼은 오늘날의 지배체제는 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 “모든 형태의 지배구조를 찾아내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촉구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할 수 있는가? “가난한 흑인은 암살해도 상관없지만 권력을 움켜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언론? 지식인들? 그들을 촘스키는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들에게 ‘정당성’을 묻지 않는다. “권력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에게 순응하고 동조한다.

  그러나 모든 지식인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와 같은 극히 일부의 지식인들이 있어 우리에게 이러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인들이 너무 미미하기에 그들의 대략 ‘미친 놈’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굴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내 목표”라고 말하는 촘스키의 목소리는 더욱더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두렵게 생각하고, 그들이 언제라도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 국가이익을 위협받을 때마다 미국은 ‘비합리적이고 반드시 보복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동네 뒷골목의 불량배쯤으로 여기면 그만일까? 폭력조직 일제단속 기간에 조직폭력배로 구속시키면 되는 것일까? 어불성설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아래 우리는 시나브로 종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나라라면 언론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줘야” 하고 “비밀로 감추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모든 문서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촘스키는 말한다.

  우리는 참 무서운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이 책을 통해 촘스키의 날카로운 시각과 명쾌한 열변에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두려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힘’을 기르고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떠오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세상일을 염려하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그 사람, 바로 촘스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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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12-13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전투적인 조직의 초청이라면 전국, 전세계 어디라도" 간다는 촘스키를 우리 알라딘 서재님들과 함께 초청해 보면 어떨까? ㅎㅎ 근데, 우리가 '전투적'이기는 한가? ㅎㅎ

딸기 2007-01-1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촘스키는 그 촘스키였던 것이다." 재밌어요 ^^
반대로 저는, 비판적 지식인 촘스키의 글은 많이 읽었는데,
정작 언어학자 촘스키를 몰라서 많이 아쉬워요. 생성문법에 대해 들은 거라곤
과학책(생물학책)들에서 단편적으로 본 것 밖에 없거든요.

그러고보니,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1-1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 유명한 딸기님 맞으시죠! ㅎㅎ 몸소 찾아와 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너무나 기쁘답니다. 많은 분들의 귀한 서재를 몰래몰래 훔쳐보면서 먼저 인사드리지 못하는 저는 참 못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드려요. 아참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딸기'랍니다. 너무 좋아요...ㅎㅎ

딸기 2007-01-15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히히 그 유명한 딸기냐고 하면, 유명하긴 하지요. '딸기'를 모르는 사람은 갓난아기 말고는 없을테니까요.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
근데 저는 정작 딸기를 안 좋아해요. ㅋㅋ 시어서... 인삼딸기는 그래도 괜찮아요, 안 시니깐.

멜기세덱 2007-01-1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삼딸기도 있나요? 난 왠지 인삼은 싫은뎅..ㅎㅎ 하긴 알라딘 갓난서재인 말고 '딸기'님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거에요.ㅎㅎ
 

 

<卷頭言>

‘素錢’ 이야기

文珷永(仁荷大 國語敎育科 敎授)


  우리나라가 素錢의 주요 輸出國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순한 製品일 것 같은데 그 規格이나 硬度 등 때문에 상당한 技術力이 요구되는 産業이라고 한다. 數十年 素錢을 만들어 왔고 輸出 商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지도 꽤 여러 해 됐을 법한데, ‘素錢’이 아직 ꡔ표준국어대사전ꡕ(1999)에도 登載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다수 言衆들에게는 여전히 新語인 셈이다.

  언젠가 專攻 授業 시간에 ‘소전’이 무엇인가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분명히 ‘소’를 짧게 發音했음에도, 대뜸 ‘小傳, 小錢, 小戰’ 등의 뜻을 얘기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어떤 학생은 제법 ‘小篆’을 떠올리는 듯도 했다. 그러고 나서 칠판에 ‘素錢’을 써 주었다. 말로 물었을 때 기대했던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학생들에게 그 槪念 자체가 없었음이 분명한데도, 한동안 잠잠하다가 그 逐字的인 意味를 가지고 正答에 가까이 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하긴 漢字能力 4급 정도의 實力이라면 ‘素’의 ‘희다, 바탕, 소재…’와 ‘錢’의 ‘돈, 쇠돈…’의 知識을 가지고 기본적인 語義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할 터였다. 어쨌거나 그날 講義에 참여한 학생들은 앞으로 ‘素錢’에 관한 한, 얘기할 때나 글 한 구절 읽거나 적을 때, 산뜻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漢字의 造語力이고 漢字語의 힘이다.

  漢字는 너무 어려워서, 또는 남의 나라 글자여서 우리글에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머지않아 쉽고 과학적인 우리 글자 한글만 쓰게 되는 날이 올 것인데, 그때까지만 限時的으로 漢字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또 각종 出版物이나 印刷 媒體에 漢字 表記가 현저하게 줄어든 현상을 보고 한글전용이 定着 段階에 접어들었다고 誤判하기도 한다. 모두가 文字의 意義와 國語 語彙의 特性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말미암은 잘못된 생각들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漢字는 우리 글자이기도 한 것이고, 出版物이나 각종 媒體에 漢字가 줄어든 것은, 불필요하게 어려운 漢文투의 表現이 쓰이지 않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잘못된 文字政策과 國語敎育의 跛行으로 量産된 이른바 한글 世代를 겨냥하여 時流를 따를 수밖에 없는 出版界의 商術의 한 斷面이기도 한 것이다.

  年前에 우리나라 靑少年 非文解者의 비율이 20%라는 유네스코의 통계를 본 적이 있다. 全世界的으로 標準化된 기준을 적용해 조사한 결과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주어진 글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理解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섯 사람 중 한 명꼴이라는 얘기다. 한때 우리나라는, 가난하지만, 배우기 쉬운 한글과 義務敎育의 普及으로 文盲率이 4% 이하라고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初 ․ 中等學校에서 漢字를 제대로 敎育하던 時期의 얘기일 것이다. 쉽다는 한글도 어렵다는 漢字의 밑바탕이 있어야 그 眞價가 드러날 수 있다는 逆說的인 眞實을 가르쳐 주는 事例라고 할 것이다.

  漢字敎育은 한글專用 때까지의 過渡期에 ‘裁量活動’으로 대충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漢字는 東北亞時代 中國 ․ 日本과 交流하고 경쟁하는 데 쓰려고만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漢字는 우리 모두의 수준 높은 國語 能力을 든든히 하기 위해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語彙力의 바탕인 것이다.(<語文생활> 통권 제109호,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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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눈을 봤습니다. 눈이, 함박눈이 내리더군요. 아침 집을 나서면서 골목길 옆에 주차된 차 지붕위에 얇지만 햐얗게 쌓인 눈을 보고서는 '아, 눈이 왔었네!'란 생각의 아쉬움을 달려주려는 듯, 그렇게 하늘에서 눈이 왔습니다. 올 겨울 들어 저에게는 첫눈입니다. 첫눈 소식은 몇 차례가 있었지만, 제가 깨어있는 공간에, 제 머리 위로 하얗게 소북이 내려 앉는, 그 눈은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참 아름답게 내리더군요. 함박눈이었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거셈이 없이, 피부에 전해지는 추위의 싸늘함 없이, 어느 시인이 읊었던 시의 한 구절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내리는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뿌려지는 그 풍경, 그 설경이란 가히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소리를 내지 않은 함박눈의 방문을 우연찮게 깨달았습니다. 순간의 비명과 함께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습니다. 내 머리 위로 싸분히 내려앉는 함박눈은 아쉽게도 쉬 녹아버리더군요.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머리가 젖고, 옷이 젖어드는 것도 잊은체, 어린아이, 강아지처럼 주위를 뛰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였어도 좋아겠습니다. 손바닥을 위로하고 내리는 함박눈을 내려받았습니다. 손 위에 손털처럼 가뿐히 내려앉은 함박눈 한 송이를 냉큼 입에 넣었습니다. 아무 맛도, 별반 차갑지도 않았지만, 내 속 가득히 산뜻해지고 시원해지더군요.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산성비가 어쩌구, 오염이 어쩌구 하더군요. 저라고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때는, 저에게는 올 겨울의 첫눈이 그렇게 아름답게 내리는 그 순간에는, 그렇게 해보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일 모레에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창밖으로는 그 광경을 보았겠지요. 저는 그들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무엇이 되었건간에, 우리가 누려야할 최소한의 낭만은 빼앗아 갈 수 없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저는 그들이 대학생으로서 충분히 누려야할 낭만을, 푸르고 푸른 청춘의 시간에 가져야할 이상, 그런 것들을 무엇엔가에 이리저리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이런 낭만을 회복시켜 줘야하지 않을까요? 내년이면 가수 김광석이 참 찡하게 불러낸 노래 '서른즈음에'에 제가 딱 걸려버립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런 생각들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생이 이제는 아니지만은, 지난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무엇을 했던가의 회의보다는 어떤 낭만이 있었는가의 후회가 더욱 큽니다. 그런 아쉬움들 모두 오늘 제게 보내준 하늘의 함박눈을 맞으며 달래고 또 달랬던 것이지요.

푸념과 체념은 이것으로 족하겠습니다. 그것이 길어지면, 제 삶이 궁구해질테니까요. 이번 겨울은 왠지 예감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 내려준 함박눈을 보면서, 그리고 내 머리위에서 사뿐히 내려앉아 녹아버린 그 함박눈이, 제게 그런 기분 좋은 예감을 가능케 합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왼놈이 왼말을 해도" 제 맘 하나 꽉 붙들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이번 겨울 저에게만은 첫눈인 이 함박눈이 내리는 설경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무엇보다 제게 의미깊게 다가오는 그런 눈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시험에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되었으면 좋겠구요, 이 겨울 모든 알라디너가 행복하고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을 인내하여 봄을 기다리지 마시고, 겨울은 그 겨울의 모습 그대로 만나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이 겨울은 따뜻할 거라 생각해요. 오늘 이 함박눈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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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2-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의 겨울도 따스하기를 바래요. ^^

이리스 2006-12-0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내년이면 서른 즈음.. 이시군요. ^^;
눈을 보고 이렇게나 좋아하시다니 감성이 풍부하신 분 같아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편지 한 통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
 

문항 57~60은 비문학제재 언어학관련 지문이 출제되었다. 대략 3,000개의 토착어가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언어의 다양성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출제된 문제들을 보면 내용 일치, 글의 성격과 관련한 글쓰기 전략, 글의 적용, 어휘 등에 대해서 묻고 있다.

[57~60]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언어는 배우는 아이들이 있어야 지속된다. 그러므로 ㉠성인들만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면 그 언어의 운명은 어느 정도 정해진 셈이다. 언어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추리하여 인류 역사에 드리워진 비극에 대해 경고한다. 한 언어학자는 현존하는 북미 인디언 언어의 약 80%인 150개 정도가 빈사 상태에 있다고 추정한다.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북부에서는 기존 언어의 90%인 40개 언어,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23%인 160개 언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90%인 225개 언어,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는 기존 언어의 50%인 대략 3,000개의 언어들이 소멸해 가고 있다고 한다. 사용자 수가 10만 명을 넘는 약 600개의 언어들은 비교적 안전한 상태에 있지만, ㉡세계 언어 수의 90%에 달하는 그 밖의 언어는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소멸할지도 모른다.

언어가 이처럼 대규모로 소멸하는 원인은 중첩적이다. 토착 언어 사용자들의 거주지가 파괴되고, 종족 말살과 동화(同化) 교육이 이루어지며, 사용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 외에 ‘문화적 신경가스’라고 불리는 전자 매체가 확산되는 것도 그 원인이 된다. 물론 우리는 소멸을 강요하는 사회적, 정치적 움직임들을 중단시키는 한편, 토착어로 된 교육 자료나 문학 작품,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개발함으로써 언어 소멸을 어 정도 막을 수 있다. 나아가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라도 20세기의 히브리 어처럼 지속적으로 ㉢공식어로 사용할 의지만 있다면 그 언어를 부활시킬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나 식물 종들을 보존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언어를 보존할 수는 없으며,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 공동체가 경제적 발전을 보장해 주는 주류 언어로 돌아설 것을 선택할 때, 그 어떤 외부 집단이 이들에게 ㉣토착 언어를 유지하도록 강요할 수 있겠는가? 또한, 한 공동체 내에서 이질적인 언어가 사용되면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더라도 전 세계 언어의 50% 이상이 빈사 상태에 있다면 이를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다.

왜 우리는 ㉤위험에 처한 언어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언어적 다양성은 인류가 지닌 언어 능력의 범위를 보여 준다. 언어는 인간의 역사와 지리를 담고 있으므로 한 언어가 소멸한다는 것은 역사적 문서를 소장한 도서관 하나가 통째로 불타 없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또 언어는 한 문화에서 시, 이야기, 노래가 존재하는 기반이 되므로, 언어의 소멸이 계속되어 소수의 주류 언어만 살아남는다면 이는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까지 해치는 셈이 된다.

57.  위 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1점]

① 언어의 소멸 가능성은 사용 인구의 수와 연관이 있다.

② 언어의 소멸은 토착 언어 사용자들의 거주지를 파괴한다.

③ 언어의 소멸에는 전자 매체도 영향을 미친다.

④언어의 소멸을 막으려는 노력은 도덕적인 문제와 연관될 수 있다.

⑤ 언어의 소멸은 문화의 손실을 가져온다.

 

57번은 내용 일치 문제이다. 일치하지 않는 것을 고르는 것으로 정답은 ②다. "언어의 소멸은 토착 언어 사용자들의 거주지를 파괴한다."는 설명은 두 번째 단락을 보면 "언어가 이처럼 대규모로 소멸하는 원인은", "토착 언어 사용자들의 거주지가 파괴", "그 원인이 된다."라고 진술되어 있어, 토착 언어 사용자들의 거주지 파괴는 언어 소멸의 결과가 아니라 언어 소멸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58.  위 글의 글쓰기 전략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실태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②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내기 위해 관점이 다른 견해도 소개하고 있다.

③대책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권위 있는 전문가의 견해에 기대고 있다.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예측할 수 있는 미래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문항 58에서는 이 글의 글쓰기 전략에 대해 묻고 있다. 이 글은 토착 언어의 소멸에 대해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은 언어적 다양성, 나아가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까지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다. 여기에 쓰인 전략으로는 우선 토착 언어가 소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①)하면서 그에 대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또한 그 현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도 소개(②)하고 있으며, 문답식을 방식(④)을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 문단에서는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까지 해치는 셈이" 될 것이라는 예측(⑤)을 하고 있다. 답은 ②로, 대책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에 기대고 있는 것을 볼 수는 없다.

59.  위 글의 논지에 비추어 <보기>를 가장 적절하게 해석한 것은?

 

<보 기>

 

 

 

 

영어에는 1인칭 복수로 we 한 가지만 있으나, 자이세 어에서는 청자를 포함하느냐 제외하느냐에 따라 núyníy 구별되고, 체로키 어에서는 ‘화자+청자’를 가리키느냐 ‘화자+제3자’, ‘화자+복수의 타인’, ‘화자+청자+복수의 타인’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①언어가 발전해 가면서 구분 체계도 복잡하고 정교해진다.

②언어 간의 차이는 인류의 언어 능력이 풍부함을 보여 준다.

문법적으로 더 세밀히 구분을 하는 언어일수록 생존에 유리하다.

④국제간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는 언어 간의 차이를 줄여 가야 한다.

⑤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더 널리 쓰이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59번에서는 제시된 지문에서 "언어적 다양성은 인류가 지닌 언어 능력의 범위를 보여 준다."는 진술을 토대로 <보기>에 제시된 내용에 적용해 볼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보기>에서는 영어의 1인칭 복수는 한 가지밖에 없으나 다른 언어에서는 2가지, 3가지로 분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을 해석해 보면, "언어 간의 차이는 인류의 언어 능력의 풍부함을 보여 준다."는 ②의 설명이 적절하다.

60.  ㉠~㉤ 중, 문맥상 이질적인 것은? [1점]

① ㉠      ② ㉡      ③ ㉢      ④ ㉣      ⑤ ㉤

 

60번에서는 사용된 표현이 무엇을 가르키는 지를 문맥에서 파악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 ㉡, ㉣, ㉤은 모두 토착어(토착 언어)를 가리키는 반면, ㉢공식어는 소멸되지 않는 언어, 즉 주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답은 ③이다.

지금까지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문제분석을 해봤다. 역량이 부족하여 문제분석보다는 문제풀이 위주가 되었다. 전반적으로 이번 문제들은 난이도가 평이했다고 판단된다. 언어사용능력 위주의 평가 문항이 주로 출제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는 수능에서도 문학적 지식보다는 언어사용능력의 평가가 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국어지식과 관련하여 붐이 일고 있는 것을 볼때, 어문규범 및 인터넷 언어사용적 측면이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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