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 시에서 배우는 삶과 사랑
천양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천양희 시인. 그녀를 만난 건 요 몇달 전의 일이다. 오늘은 2007년 정해년. 돼지는 돼지인데, 600년에 한 번 온다는 황금돼지의 해란다. 황금박쥐가 아닌 황금돼지가 날아온지 꼭 1시간 37분이 지나고 있는 지금 막 천양희의 시 에세이를 고즈넉하게 읽고 말았다. 여기서 잠깐 천양희의 시 한 편 다시 새겨보자.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 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천양희 시인이 어느 해 신년시로 주었다는 <바람을 맞다>란 시다. 몇 년도의 신년시인지를 따져서 황금돼지해 벽두에는 아니올시다 하는 것은 어리석다. 시란 時와 같아서 흐르고 흘러 어느덧 또 한 번의 1월 1일이 왔으니, 여전히 오늘 이 벽두에는 이 시가 썩 잘 어울린다. 찬 바람이어도 좋으려니, '바람을 맞다'가 문득, 옛시인의 노래가 떠오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읊었던 발레리의 시구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천양희의 우리를 위한 신년의 희망찬 목소리는 2007년 새해의 찬바람을 맞고서 또 한 세상 열심히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라는 것에 다름아닐 터이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 당신도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한다면, 이 책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를 읽어보시라. 내가 이 책을 2006년의 끝자락에서 읽고, 2007년 벽두에 되새기는 것은 다만 우연의 작용이었을까? 필연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만은 우연치고는 제법 내게 느껴지는바 많고, 그 시의적절한 울림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를 되뇌이게 한 것은 꼭 이날의 나를 위한 변주곡처럼 느껴진다. 시와 함께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에서 '거닐'었다는 것은 내게 허락되어진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일생 동안 행복했던 시간은 겨우 17시간이었다고 고백"한 괴테보다 내 지금까지의 여생에서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을 것 같지 않지만, 이 행복한 시간은 빠지지 않고 계산되어져야 할 것 같다. 시를 만나는 기쁨은 그것이 사랑이었건 이별이었건 슬픔의 통곡이었건 간에, 행복한 시간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이리라.

이 책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는 한 가슴여린 시인의 시 감상기라고나 할까? 그 시의 숲에서 울고 웃었던 한 여인의 살풀이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읽기만 해도 좋으련만, 천양희가 울고 웃었던 데서는 나도 모르게 울고 웃었고, 그녀의 살풀이 춤사위에 교묘히 빠져들었다. 같이 숲을 거닐었거니와 한동안은 그 숲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이 주옥같은 시들의 마을에서 누가 감히 탈출을 시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반역을 꿈꿀 수 조차 없다. 아니 꿈꾸고 싶지도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니 함께 '시의 숲을 거닐'면서 나는 천양희의 길고 긴 시의 낭송을 듣는 듯 했다. 옛시인들이 남긴 가슴의 한 움큼 어린 그 무엇들을 천양희의 가슴울림으로 전해 들으면서, 그에 덧붙인 천양희의 감성어린 되새김을 내 가슴으로 담으면서, 한 구절 한 구절들이 마치 하나의 시와 같았다. 이 책은 그래서 한 편의 시라고 말하고 싶다. 제목은 "시의 숲을 거닐다". 천양희는 바로 이 시를 써내려간 것은 아닐까?

여기에 엮인 글들은 천양희 시인이 조선일보 <문학의 숲>에 연재한 것들이란다. 조선일보라는 것이 좀 꺼림직하지만 뭐 어떠랴? 이 주옥의 시편들도 조선일보의 독자들에게 골고루 은혜를 부어주어야 할 것을. 우리의 귀에 낯익은 듯한 구절들도 만날 수 있고, 또는 전혀 듣지 못했던 귀한 시구들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헤세에서 괴테, 발레리와 뮈세, 그리고 신석정과 백석에 이르기까지 귀하고 귀한 우리의 옛 시인들의 구구절절 귀한 엑기스들이 들어 있다. 몇 구절 맛좀 볼까?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를 들어보자.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것 /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의 현재 살아 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성공'이라니? 그러고 보면 나는 '성공'한 사람일까? 우리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그래, 적어도 난 단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봄직 하다.

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 <슬픔>의 이 시구절은 어떤가?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내게 남은 진실이라는 것은 '이따금 울어'보지도 못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닐까? "사랑은 시인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랑은 시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뮈세는 말했다. 아 그래서 난 시인이 못되나 보다. 앞으론 나도 나의 진실을 찾아서 '이따금 울어'보아야 겠다.

예세닌과 마야코스프키의 죽음을 넘은 시의 대화를 한 번 볼까? 예세닌이 죽기 전에 <안녕 내 친구>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마지막 구절에서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건만 / 삶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네"라고 읊었다. 여기에 그의 죽음을 가슴아파한 마야코스프키는 이렇게 답했다 한다.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네 / 살아내는 것이 더 어렵다네." 절친한 친구를 잃은 마야코스프키는 그 "살아내는 것"의 어려움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자살을 하고 만다.

유치환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에서처럼 <그리움>은 우리를 어쩔 수 없게한다. 그래서 이 '그리움'은 시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천년을 가도 변하지 않을 시의 중요한 테마가 될 것이다. 우리의 천상 시인 천상병의 시도 한 번 보자.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아! 천상병의 헤맑은 웃음이 떠오르면서 천상병 그는 천상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천상 시인이란 걸 다시 한번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 그에게 무슨 '생활'이 부유해서 '걱정'이 없었을까? 그깟 대학 나와서 뭐하나 제대로 해 본 것 없으니 '부족' 없었다 말할텐가? '시인'이라는 그 명함이 뭐에 그리 '명예'로왔던가? '아내', 이것은 인정하자, 천상병 시인의 사모님은 참 아름다우시다. 세상에 천상병의 천씨 손을 내어놓지 못한 것은 그에게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정 행복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에 만족하고 즐거움을 찾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시구를 떠오릴때, 천상병은 그래도 웃음지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그 주옥의 시 줄기들의 몇몇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구구절절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천금과 같은 노래가 이 책에 담겨있다. 그래서 '주옥'이라는 과장법의 수식어구는 이 책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과장법의 수사가 아니다. 아니 너무 평범하기까지 하다.

대부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이다. 우리의 상식과 교양의 수준에서 몇몇의 이름은 떠올리고, 몇몇의 시구들은 읊조려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상식과 교양의 수준의 지평은 넓어질 수 있고, 깊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시인 수팅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외에도 세계적 시인, 천재적 시인들과 얽힌 기묘한 이야기들, 에피소드들을 곁들이고 있어 재미 또한 남다르다. 천양희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면서 '시의 숲을 거닐' 당신에게 큰 축복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나는 읊어본다. 사는 것이 슬픔이어도 좋고, 그리움이어도 좋다. "이따금 울어'볼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것이 내게 '진실'로 남을테니 말이다. 삶의 진실은 다른데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옛시인들이 눈물 흘리고 가슴시리게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시들에 분명 우리 삶의 '진실'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아!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던 백석의 그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 시구들을 이 밤에 읽어보고 싶어진다. 나는 '시의 숲'에서 당분간 나올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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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시 좋아하니?

시교육에 관한 논의를 이어가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아무래도 '학생들은 시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아주 편안한 자리에서 마음껏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때, 바로 그 때 나오는 시교육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
몹시도 궁금했던 만큼 실제로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른바 난상토론.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의 영특함은 빛이 났고 표정은 밝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예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고, 시교육 전반에 관해서도 정확히 짚어 냈다. 우리는 이 난상토론을 이어나가면서 학생들이 우리에게 현재 시교육을 반성하고 하루 빨리 대안을 모색하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학생들의 난상토론

수업시간에 시를 어떻게 배우고 있나요?
"시상(詩想), 내재율 같이 시 작품에 대해 분석한 것을 주로 배워요."
"저두요. 시 작품 분석하는 걸 배웠어요. 이 시는 무슨 율격이니, 무슨 심상이니 하는 거 있잖아요. 그리고 또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삶의 모습, 작가의 생각 그런 것들도요."

"그럼, 주로 수업시간에는 작품 위주로 수업이 진행된 것 같은데, 그러면 작품분석 외에 수행평가나 학습활동은 안 하나요?"
"시와 관련된 학습활동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시 창작은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그래요."
"저도 예서처럼 학습활동에서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우리 선생님은 근데 시 창작만큼은 빠짐없이 다 했어요. 선생님을 잘 만났나…(웃음)"
"음… 수행평가나 학습활동은 잘 안하는 분위기인 것 같네요. 그렇긴 해도 시를 배울 때 조금씩이나마 했던 학습활동이나 수행평가가 효과적이긴 하던가요?"
"창작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학생 여러분들은 어떻게 시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냥 시집 같은 걸 마음대로 보게 하구요. 선생님이 우리한테 '시는 숨어 있는 뜻이 있어서, 겉에서 볼 때는 여러 가지로 그 뜻이 해석될 수 있단다. 그러니까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해 보렴.'이라고 말하면서요,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걸 보면 너무 한 가지만 강요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예서가 말한 것처럼 시를 많이 배우는 것도 좋긴 하겠네요."
"저도 그래요. 자기 생각대로 시를 읽을 수도 있는 거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게 이상해요. 그리고 시를 직접 읽게 하지 말고 간접적으로 읽게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학생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를 읽을 수 있게요."

"시를 많이 읽고 다양하게 해석해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여러분의 생각이 옳아요. 다만 지금의 교육방식이 그런 것들을 잘 못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해 보기로 하죠. 좀 어려운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여러분은 시를 배운다는 게 작품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시를 통해서 인생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야 둘 다 배우는 게 맞죠. 어느 것 하나에다 비중을 두고 우열을 논해야 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시를 통한 삶을 배우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생각이 다른데요, 작품 자체를 배우는 거 같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예전에 어떤 시인이 수능문제에 출제된 자기의 시를 풀어 봤는데 5개 중에서 2개만 맞춘 일이 있었데요. 시인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의도와는 다르게 학교에서 가르쳐서 그렇다는 거죠. 시를 통해 인생을 가르쳐야 하는데 작품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게 아닐까요?"
"여러분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여러분들이 중학생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군요. 시교육을 같이 고민하는 동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임해 준 덕분인 것 같아요. 이렇게 시간 내주고 진솔하게 이야기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등학생들의 난상토론

시, 좋아 하나요?
"저는 문학을 매우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시를 특히 좋아하죠. 분량은 적은 반면 깊은 감명을 받을 수 있거든요."
"저도 시 좋아해요. 숨은 뜻이 있잖아요!"
"저는 솔직히 시보다 소설을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소설이 역사적 사실과 연관이 되어 있으면 특히나 더 좋구요. 그렇다고 시가 싫은 건 아니지만요."
"저도 소설을 좋아해요. 시는, 시어의 의미가 함축적이라 그런지 쉽게 이해할 수 없거든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개인 취향에 따라 호감도가 다르겠지요. 시에 대한 선호도가 중 · 고등학교 때 시를 배운 방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다들 시 어떻게 배웠어요? 전반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는지, 학습활동이나, 시 창작, 수행평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우리 학교만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요, 대부분의 학교에서 입시 위주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 혼자서, 수업 시작부터 끝까지 시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하는 방식밖에 없겠죠. 그러니 자연스럽게 학습활동이나 수행평가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뿐이구요. 물론 시 창작은 다른 나라 이야기지요."
"저도 비슷해요. 주로 선생님이 시 한 번 읽어주고, 주요 시구에 밑줄 긋고 의미 적고, 비유법 같은 경우는 색연필로 밑줄 긋고 무슨 비유법인지 적고, 같은 비유법끼리 묶어서 따로 체크해 두고. 수행평가라고 해봤자, 저희 학교에서는 시를 외우고 시험 보는 거 정도였어요."

시를 어떻게 배웠으면 좋겠어요?
"입시 위주 학습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개인적으로는 시를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가 느끼고 분석해 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수업이 됐으면 좋겠어요."
"현우 말에 동감해요. 주입식이 아니라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데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죠. 저는 시를 배울 때 그 시와 관련된 제반 사항도 다 함께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들이 그 작품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든요."
"좀 심한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학교에서 시를 배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EBS교육방송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수능에 더 도움이 되는 건 EBS교육방송이죠. EBS교육방송과는 차별되는 학교만의 학교다운 시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바람직한 시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가르치는 선생님의 열정이 필요하겠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선생님의 열정과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해요. 그리고 학생들 역시 '시'라고 하면 무작정 기피하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잠깐만요. 이스리 학생, 방금 학생들이 시를 기피한다고 했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요?"
"제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시 같아요. 시를 읽어보라고 하면 갑자기 느릿느릿하게 천천히 읽는 것처럼,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거 같아요. 시라고 하면 딱딱하고 어렵게 느끼는 게 일반적인 거 같구요. 딱 드러나지 않으니까. 시가 함축적인 데다가 한 눈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어렵다고 하겠지요."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하지만 제가 교단에 섰을 때, 제 제자들은 적어도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제 노력이 많이 필요하겠지만요."

시를 배운다는 것은 시 작품을 배우는 걸까요, 시 작품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걸까요?
"현재 학교 수업은 주로 시 작품을 배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제 생각에는 작품을 통해 인생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 자체가 작가의 경험과 생각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통해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고, 그러면서 올바른 삶의 자세를 배우고 그렇지 않은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아 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요즘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거야 다 수능 위주잖아요. 그냥 집에서 시 읽으면서 인생을 깨닫는 거랑 학교나 학원에서 '이게 중요해! 이게 나온다!' 하는 거랑은 천지차이라고 생각해요. 입시제도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은 시 작품을 배운다는 의미가 훨씬 강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생각들이 비슷하네요. 그러고 보니 시교육의 문제가 비슷하다는 말은 해결해야 할 방향도 단순하다는 의미가 되겠네요. 결코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구요. 다만 이제부터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개선과 갱신하느냐 하는 실천의 장만 남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이렇게 모여 줘서, 또 진솔하게 이야기해 줘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이어지길 진심으로 빕니다."

<시교육> 001,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시교육' 편찬위원회,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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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설문 결과를 보면서, 오히려 궁금한 점들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직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을 직접 찾아뵙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 중학교 국어교사 김형봉. 91년부터 교직에 몸담았고, 현재 3학년을 담당하고 있다. 전화를 반갑게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 바로 교무실로 찾아갔다. 2006년 10월 31일.

수업시간에 시 수업은 어떻게 진행하세요?
일단 교사용 지도서를 중심으로 가르칩니다. 다만, 학년과 단원에 따라서 그 시에서 교육하고자 하는 목표가 다르니까 좀 차이가 있죠. 예를 들어 1학년의 경우, 시의 즐거움이란 단원이 있습니다. 이 단원에서는 심상, 운율 등 시가 주는 즐거움을 재미있게 느끼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죠.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시라고 하는 게 딱딱하고 어렵고 상징적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점을 바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외에 제반사항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시되는 목표가 있으면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하고, 제반사항도 가르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교과서 외에 시를 더 가르치기도 하십니까?
안 가르칩니다. 교과서 외에는 다룰만한 상황이 안 됩니다. 시간도 모자라고요. 교과서 본문에 있는 시를 이해 · 감상시키고 그 다음에 보충 심화학습 학습활동에서 나온 시들을 더 가르치기는 합니다. 선생님에 따라 시를 좋아하고 잘 가르치면 그 외의 시들도 가르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달라요.

평가는 어떻게 하고 계세요?
시에 관련된 평가는 보편적인 것만 묻게 됩니다. 시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느끼며 감상도 사람 수만큼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을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상 현장에서는 어렵죠. 다만 서술형 평가에서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동적인 답을 유도하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객관식 평가에서는 기본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을 정답으로 이끌어 낼 수밖에 없구요.

그럼, 수행평가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선생님에 따라 다릅니다. 안 하는 경우도 있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는 시와 관련된 수행평가는 모방시와 시에 배경음악을 깔아서 낭송한 것을 녹음시켜 제출시켜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 반응은 어떻던가요?
귀찮아하기도 하고(웃음). 아무튼 아이들이 그렇게 달가와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생활이란 것이 학원까지 다니느라 바쁘니까요. 아이들에 따라 반응이 다르지만 의미 있다고, 재미있다고 했던 아이들도 있었지요.

그러한 방식이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모방시 같은 경우는 시의 의미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효과적이었습니다. 대칭이라든지… 어떤 식으로 시의 구조가 짜여있고 표현 방법은 또 어떤 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요. 한 번 수업했던 시를 되새겨 본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고.

시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시를 가르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시를 배우고나서 학생들에게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를 생각해 보면 금세 반성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매번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죠. 시를 가르친다는 게 이런 것은 아닐 텐데 하고 생각해 보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거든요.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가면서 시의 깊은 맛을 느끼기에는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요. 하긴 기본적인 사항도 하기 바쁘죠.
단 몇 줄이라도 그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의미가 함축 되어 있는 것이 시인데, 객관적이고 분석적이라는 이름 아래 공인된 한 가지만을 정답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도 답답하고요. 학생 입장에서 보면 쉽기는 하겠지만 시를 가르치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는 셈이죠. 아마 학생들도 그런 아쉬움은 분명히 느끼고 있을 겁니다. 문제지요. 교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다양한 표현을 허용하지 못한다는 게.

학생들에 따라 다양하게 감상이 이루어지는데, 가르치는 감상의 내용은 한 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그 감상에 대해 이의를 단다면 어떻게 대답하시나요?
애들이 묻질 않습니다. 잘 가르치지 못해선지는 몰라도요(웃음). 지적인 호기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선생님 저는 이 시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렇게 묻는 애들은 거의 없다는 거죠. 가끔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학생은 있지요. 대개 시는 시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선생님이 되어서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웃음)
(웃음)어려운 질문입니다. 학원이라든지 자습서에 시를 분석해 놓았는데, 주제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표현법은 뭐인지 나와 있거든요. 아이들에게 이 외의 것을 이야기하면 선생님이 엉뚱한 소리 한다고도 해요. 시를 가르치다 보면 애들의 감수성을 넓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내가 모자라서 그런지(웃음) 아무튼 의견이 주관적이면 평가하기도 어렵지요. 이런 점들이 선생님으로서 한계라는 생각도 들곤 하지요.

그럼 선생님은 바람직한 시교육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시인이 가졌던 느낌을 한 번 가져 보는 것이죠. 감정이입을 한다든가, 상상을 한다든가. 그 시 분위기에 몰입되고 인상 깊었던 것도 생각해 보고 자기 안에서 되새김할 수 있으면 성공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간다면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표현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구요.

시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다양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수용하고 그리고 자신의 표현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겠지요. 글쎄요, 더 이상 구체적으로는 답이 없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번 호의 테마이기도 한데요.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시작품을 가르치는 것인가, 시를 통한 인생을 가르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세요?
그야 두 가지가 다 관련이 있습니다만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수필이나 작품의 의미구조는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일 테니까요. 나와 관련지어서 생각하게 하고, 현실과 관련지어서도 생각해 보게 하고, 오늘날의 시대적 고민과 연관시켜 가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문학작품이 가지고 있는 역할이나 기능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모든 작품을 관련으로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시교육> 001,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시교육' 편찬위원회,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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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시 어떻게 가르치고 계세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설령 이 말이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교사는 학교교육에서 언제 어디서든 큰 의미와 비중을 지닌다.
물론 이는 어느 교과나 마찬가지이다. 문학교육, 그 중 시교육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교사들에게 물었다. 설문은 2006년 10월 한 달 동안 전국의 국어교사를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설문의 결과는 응해주신 선생님들께 다시 전달했다. 설문에 답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모쪼록 이번 설문의 결과가 우리의 시교육을 살피는 데 작으나마 성과로 이어지길 바란다.

[성별] 남자 32% / 여자 68%
[교직경력] 4년이하 / 4~8년 / 16~20년 / 20~24년 / 12~16년 / 8~12년
[담당학년] 고2 / 고3 / 고1 / 중2 / 중3 / 중1

예상에 비해 답신은 많지 않았다. 서둘러 마감한 탓이기도 했다. 아무튼 최종응답자 수는 74명이며 응답자들의 교직경력은 10년 미만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중학교 교사와 고등학교 교사의 비율은 35:65로 나타났다.

[가르치기 어려운 분야는 무엇입니까?] 시 40% / 소설 30% / 희곡 20% / 없음 / 수필
[문학장르 중 가장 흥미롭게 가르치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시 56% / 소설 34% / 없음 / 희곡 / 수필

시, 관심 많으나 어렵다
교사들은 문학 장르 중에서도 시를 가르친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본격적인 설문에 앞서 '시교육'에 대한 교사의 개인적인 취향을 물었다. 그 결과 다른 장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시'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흥미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더욱 주목해야 할 결과는 시가 가르치기 어려운 문학 장르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교사들에게 '시'란 가장 흥미롭게 가르치는 장르이지만 동시에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장르인 셈이다.

[시 수업에서 시 한 편 당 할애하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1차시 36% / 1차시 미만 32% / 2차시 28%

시 수업 상황
시 한 편을 가르치는 시간을 물었다. 설문의 결과를 보면 시 한 편을 수업하는 데 1차시 또는 1차시 미만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교사가 전체의 68%를 차지했다.
각각 45분, 50분간 진행되는 중, 고등학교 수업. 이 시간동안 하나의 시를 완전히 이해하고 느끼고 나눌 수 있을까? 현재 우리 교실의 학생 수는 35명 안팎이다. 시교육을 할 때 적정한 한 반의 학생 수는 몇 명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설문 결과에서 공통된 의견은 현재의 학생 수보다는 분명히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명의 교사가 35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감상을 하나하나 듣고 이야기할 만큼의 시간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또 주어진 교육과정 안에서 갈 길은 멀고 가르쳐야 할 것들은 많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한 편의 시를 가르치는데 45분, 50분이면 족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평가의 형태는 무엇입니까?]
객관식 평가 58% / 질의 응답식 구술평가 12% / 서술형 주관식평가 12% / 단답형 주관식평가 9% / 감상쓰기 7%

평가 형태
평가의 형태를 묻는 설문이다. 대부분의 교사가 두 가지 평가형태를 병행하지만 그 중에서도 객관식 평가를 실시한다는 교사가 58%를 차지했다. 교과서에 자신의 시가 실린 어느 시인의 말이다. "시에 대한 질문에는 모든 것이 정답이 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오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교실에서는 아직까지도 다섯 개의 답지 중에 가장 적절한 하나를 고르는 형태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답이라기보다는 가장 적절한 대답이 정답의 이름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여러가지 모습이 그려내는 삶의 양상, 그리고 이를 통해 학생들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각들은 어느 틈에 단 한 가지만을 빼놓고는 모두가 오답이 되고 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선명한 대안은 없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가방식이란 평가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정말 문제이다.

[시 수업 방법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개선되어야 한다 77% / 생각해 볼 문제다 19%
[시를 지도한 후에 만족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대체로 만족 55% / 만족하지 못 함 41%

시교육, 물론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수업에는 만족한다? 
이렇듯 시교육을 하기에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전체의 77% 이상의 교사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 시교육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체 응답교사의 반 이상이 자신의 시 수업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시 수업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수업에는 만족하는 교사들. 이는 결국 현재의 시교육은 이중의 잣대 아래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하나는 많은 시를 접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인생을 경험케 하여 세상에 대한 시각을 넓고 깊게 갖도록 한다는 이상적인 시교육론이며, 다른 하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정답을 잘 찾아 높은 점수를 받게 하고 좋은 입시결과를 얻게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시교육론이다. 그래서 전자는 개선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만족으로 이어진다.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보면서 정작 우리가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느새 안주해 버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런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대답만 횡행할 것이 두렵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만일 현재의 시교육이 개선되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시교육이 개선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양한 시교육 방법 부족 51% / 학생수가 너무 많다 22% / 교과서 시 선택 잘못 16% / 학습목표 잘못 7% / 기타 5%

시교육, 개선되어야 하는 이유
절반 이상의 교사들은 시교육의 방법이 다양하지 못한 것을 개선의 이유로 말하고 있다. 색다른 방법론에 대해 교사들은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시교육 방식을 묻는 설문에서 전체의 75%가 강의식이라 답했으며 학생 발표라 답한 교사는 16%, 토론 수업은 4%의 교사만이 답했다.
분명 시교육 방법이 다양해져야 한다. 하지만 교사들에게만 이를 책임지울 수는 없다. 대학 입학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고, 한 교사가 감당하기엔 벅찬 학생 수와 빡빡하게 주어진 교육과정 등등, 교사에게 주어져 있는 각양의 장애물을 알면서도 교사들에게 시교육의 대안과 방법을 찾안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이러한 희망적 방법을 찾아내고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누구여야 하나? 물론 교사가 여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교육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직을 희망하는 사람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시험적인 노력과 시도에 참여해야 한다. 오래지 않아 시교육을 담당하는 교사가 되었을 때 똑같은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범대학생들의 모색은 필요하다.

간략하나마 설문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좋은 시교육을 해보고 싶다는 교사들의 의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실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시교육> 001,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시교육' 편찬위원회, 4~5쪽.)


 

기존의 시(교육)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그러니까 시교육의 여러 문제들을 재확인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시는 가르치기 어려운 분야이면서 가르치기 쉬운 분야이다. 말장난 같지만, 오늘날 우리 시교육의 현실에서는 그렇다. 제대로 된 시교육은 오늘날의 교육여건상 무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재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르치기 쉬운 분야이기도 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시교육 현실을 질타하는 말이기도 한데, 시를 가르치는 것은 무슨 수학공식처럼, 암기과목처럼 되어 버려, 시교육의 현장에서는 뚝~딱 요점정리해서 간단한 공식들, 외워야 할 것들 가르치면 되는 것이니, 어찌 이보다 쉽지 않으랴?

어떤 점에서 시에 교사들이 흥미를 느끼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시를 가르치는 국어교사 본인도 시교육을 제대로 받았을까? 나는 분명 시교육 혹은 교수법을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국어교사들도 많은 이들이 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아는 바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나마 시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니 희망이 보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하듯이 얼마나 시교육이 얼렁뚱땅인지는 시수업상황 설문조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시 한 편 가르치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시 공식에 집어넣고, 몇개 특별한 것 외우게 하면 끝이니 오래 걸릴래야 걸릴 수가 없겠다. 소설 한 권은 대략 300쪽이 넘는다. 시 한 권은 끽해야 100쪽이다. 그런데, 나는 시 한 권을 읽고 이해하는 데 소설 한 권을 읽어내는 것보다는 곱절 이상이 걸린다. 시 한 편은 어지간한 단편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기는 하는가?

얼마전 안도현 시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거기서 내가 질문했던 것이 시교육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안도현 시인의 얘기가 재밌다. 안 그래도, 자기 시가('우리가 눈발이라면')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시인 아들이 그것을 학교에서 배웠다면서 문제를 내더란다. 자기 시이기도 하고, 아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질문을 하니 아니 대답하기가 그래서, 정성껏 대답을 했다는데, 아들 왈, 2개는 맞고 하나는 틀리단다. 허허!

이게 오늘날 시교육의 현주소다. 시를 놓고 객관식 문제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싶다. 시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기에 의미가 있다. 시가 어느 하나의 정답과 일대일 대응을 한다면 그건 시가 아닐지 모른다.

현직 교사들의 태도에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분명 그들은 오늘날의 시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지만 자기 수업에는 만족을 한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시나, 내 수업은 괜찮은데, 다른 선생들 수업이 문제지 하는 생각일까? 그것도 하나의 해석으로 가능할 듯 하다.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자기 수업은 괜찮다는 심보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아는 선생님들 중에서는 제대로된 시교육을 위해 어려모로 도전하고 시도해 보는 분들이 많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나라에서 정말 제대로 된 시교육을 하라고 시켜야 바뀌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일선에서의 작은 목소리가 합쳐져 큰 목소리를 이룰 때, 큰 울림으로 울릴때 그때서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시교육 방법의 부족을 들고 있는데, 더 근본적인 것은 시를 시로서 대하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를 마음으로 느끼는 것. 그것을 우리 시교육은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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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 작시(作詩)를 허(許)하라!

때는 1852년(철종 3) 10월 15일, 창경궁 춘당대. 넓은 마당은 전국에서 모인 유생들로 북적인다. 두-둥, 긴장감을 머금은 북소리와 함께 시험관이 냉랭한 목소리로 시험 시작을 알리며 시제가 적힌 종이를 펼친다. 드디어 공개된 시제는 '대악여천지동화부(大樂與天地同和賦)'. 부산했던 시험장은 한숨 소리로 가득 찬다. 하지만 이내 유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붓을 들어 글쓰기에 몰두한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과거장. 철종은 큰 걸음으로 유생들이 과문을 작성하는 모습을 살피며 과거장을 거닐고……두-둥, 다시 북이 울리자 유생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붓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얼마 후, 급제자를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과거장의 긴장감은 절정에 다다른다. "문과 장원에 김준(金準)!" 연이어 올해 정시 문과에 급제한 7명이 호명되고 음악이 울린다. 철종은 급제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은영연(恩榮宴)을 베푼다.

과거제도는 국가의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고려 때부터 실시된 시험으로 지금의 공무원 선발 시험에 해당한다. 유교의 숭문주의와 입신양명 정신이 지배했던 조선. 그리고 학문을 다진 후 과거를 통해 국가의 관리가 되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했던 조선시대 사람들. 그들이 느끼는 과거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과거에는 어떤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을까? 작시(作詩)가 과거제도에서 매우 중요한 시험 중 하나였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을 살펴보면 당시 과거에서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시험봤으며 제술에는 작시(作詩)가 필수 과목으로 속해 있어 시를 짓는 능력이 관리 선발의 한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과거에서 작시를 시험 과목으로 선정했던 것일까? 작시를 통해 무엇을 보고자 한 것일까?

일찍이 공자는 "시를 읽으면 품성이 맑게 되고 언어가 세련되며 물정에 통달되니 수양과 사교 및 정치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시가 인성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김경용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작시 능력은 개인의 경학적 지식과 논리를 전개하는 힘, 그리고 한 사람의 인성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며 특히 넓은 성품은 국가 관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기 때문에 과거에서 작시가 하나의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즉 한 편의 시를 짓기 위해서는 인지 능력과 논리 전개력 그리고 인성 등이 고루 발달해 있어야 하는 만큼, 시를 지어 보게 하면 이 세 가지 능력을 두루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서는 작시 과목을 채택했던 것이며, 덕분에 유생들은 과거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지식과 인성을 함께 쌓아갈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오늘날의 과거라 할 수 있는 공무원 선발시험은 어떻게 치러지고 있을까? 얼마 전 보도된 내용에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162대 1을 기록했다고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다. 경쟁률이 이렇게 높으니 평가는 공정해야 하며 기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공무원 시험은 주로 국어와 영어, 한국사 그리고 지원 분야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공무원으로서 갖춰야할 기본 지식을 평가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공무원을 선발하는 데 양적인 인지 내용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공무원 선발시험은 논리와 인성 그리고 표현과 정서에 관한 것을 적지 않게 간과하고 있는 셈이며, 덕분에 지금의 교육은 조선의 그것보다 이런 점에서 소홀해진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이 시대에도 공무원 선발 시험에 작시(作詩)를 허(許)하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교육에서도, 세상을 넓게 보며 만사에 두루 해박하고 다양하게 생각하며 또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인재를 길러내자는 것이다. 시를 통해, 그리고 시교육을 통해 한결 두툼한 인재를 길러내자는 것이다.
(<시교육> 001호, 3쪽.)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펴낸 <시교육>이란 잡지의 권두언쯤된다.

공무원 시험에 작시라니? 가상한 상상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공무원 시험에 작시를 포함시키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도 의문이고, 불을 보듯 뻔히 예상되듯이 격렬한 반발도 있을 것이다.

우선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과거의 과거시험과 현재의 공무원 시험을 동급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공무원 시험은 그야말로 행정직 하급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그런데 과거의 과거시험은 이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 않겠는가? 격이 조금 다르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문제는, 그때의 작시와 지금의 작시가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 과거시험에서의 작시에는 큰 틀이 있어야 했다. 단순한 인지능력과 논리 뿐만이 아니라, 유교(성리학) 사상을 바탕으로 시 전체에 그것이 함축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 담겨 있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 당근 충효예가 빠질 수가 없을 것인데, 이걸 두고 인성이라 하다면, 어쩔수 없으리라.

형식적으로도 정형시의 형태를 띄었으니, 지금의 시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작시를 하더라도 거기에 평가의 기준이 명확했던 것인데, 형식과 내용면에서 명확한 기준은 평가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것이 가능할까? 정형시를 쓰라고 해야할까? 내용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예를 지키며 살아가자, 뭐 그런 내용으로 시를 써야 할까? 사랑시를 쓰면 안될까? 풍자시도 어떨까? 해체시를 한 번 써볼까? 어려운 일이다.

딴지 걸자는 건 아닌데, 어떤 식으로든, 문학이든 시이든 간에, 각종 국가고시 등에서 반영된다면 그것의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만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는 다소 의문이다. 하여간 시교육에만 국한하여 생각해도, 진정한 시교육이 국가고시에서 평가될 수 있는 종류는 아닐 것이다. 시교육의 미래를 보다 진중하게 생각해보고 그 대안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공무원 시험, 작시를 허하라!"고 하는 둥의 가상한 상상은 좀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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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2-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은 '이를테면'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작시'를 원한 것일까요? 그랬다면 상상력이 무지 풍부한 것 같아요^^;;;;

멜기세덱 2006-12-2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죠? 요즘 논술이 뜨고 있는데, 미래를 내다보고 작시 공부를 좀 해서 그쪽으로 함 나가볼까요...ㅎㅎ 제 생각은 우리나라 시교육은 여러 잡다한 것 빼고, 시가 시로서 다가가고 다가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랍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