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頭言]

무너지는 傳統

姜信沆(成均館大 名譽敎授)


  原來 우리네 言語生活 習慣으로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事實은 傳統을 조금이라도 지키고 있는 집안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行列字를 따져서 意味深長하게 지은 사람의 이름은 옛날에는 이를 ‘冠名’이라고도 했는데, 그 이름을 가진 사람과 同一한 人格体로 여겨서 비록 子孫들이라고 하더라도 長成하면 마구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 代身 마련된 것이 ‘字’였다. ‘字’는 집안 어른이나 親舊들이 負擔없이 使用하였는데, 그렇다고 子孫들이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러한 言語習慣이 書簡文 形式에 남아 있었다. 客地에 나가 있는 子孫들은, 故鄕에 계신 父母님이나 祖父母님께 便紙를 올릴 때에는 便紙 겉封에 受信者인 父母님이나 祖父母님의 姓銜을 적는 것이 아니라 自己 이름을 적고 그 밑에 ‘本第入納’이라고 썼었다.

  이 習慣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媤同生’을 ‘도련님’ 代身에 ‘미스터 김’, ‘媤누이’를 ‘작은 아씨’ 代身에 ‘미숙아’ 하는 집안이라면 몰라도, 父母님이나 媤父母님의 姓銜을 차마 함부로 적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면, 自己 이름을 쓰고 그 밑에 ‘本第入納’이라고 써 왔다.

  그런데 어느날 集配員 어른께서 이게 무어냐고 묻더니, 自己가 모르는 말이니 앞으로 쓰지 말라고 하더란다. 이 말을 들으니, 한때 어느 機關에 있을 때, 내가 ‘敗北를’이라고 쓰면 上司가 ‘敗北을’이라고 고쳐 놓아서, 이 境遇는 ‘北(배)’라고 읽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벌컥 火를 내면서 自己가 모르는데 國民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하던 생각이 났다.

  年末年始에 참으로 많은 크리스마스 카드와 年賀狀이 오고갔다. 千篇一律的으로 印刷된 글 밑에 署名이나 해서 보낸 카드가 많았으나 精誠껏 人事말을 쓰고, 겉封에서도 貴下 代身 敎授님, 先生님, 座下 等이라고 쓴 것이 있었다. 中國에서 온 카드는 勛鑒, 道鑒, 台啓, 啓, 收 等 더 多樣했다. 이들이 모두 發信者와 受信者와의 關係를 생각해서 골라 쓴 것들이다. 우리도 얼마 前까지만 해도 硯右, 侍史, 机下, 案下, 下鑑 等 여러 가지로 썼는데, 요 近來에는 受信者 이름만 달랑 써서 보내거나 受信者 이름 밑에 아무 職銜도 쓰지 않고 ‘님’만 쓰는 사람까지 생겨서 모든 面에서 傳統이 너무 쉽게 무너져 가는 것 같다.

  요 近來 某 日刊紙의 칼럼欄에 커다란 活字로 ‘硬直된 敬語 體系는 社會의 生氣를 옥죄는 사슬이다’라는 題目이 달린 글이 실려 있어서 깜짝 놀라 仔細히 읽어보니, 內容은 題目과 그렇게 一致되는 것이 아니어서 安心한 일이 있었다.

  아무쪼록 새해를 맞이하여 福 많이 받으시고(迎春納福),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시기(萬事如意, 四季皆如意) 빌며, 無病長壽하시기(延年益壽) 빕니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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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천양희 지음 / 샘터사

리뷰어 :멜기세덱
상품평점 :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니 함께 '시의 숲을 거닐'면서 나는 천양희의 길고 긴 시의 낭송을 듣는 듯 했다. 옛 시인들이 남긴 가슴의 한 움큼 어린 그 무엇들을 천양희의 가슴울림으로 전해 들으면서, 그에 덧붙인 천양희의 감성어린 되새김을 내 가슴으로 담으면서, 한 구절 한 구절들이 마치 하나의 시와 같았다. 이 책은 그래서 한 편의 시라고 말하고 싶다. 제목은 <시의 숲을 거닐다>. 천양희는 바로 이 시를 써내려간 것은 아닐까?

2007년 1월 2주 문학/예술 신간안내메일 <독자추천>란에 제가 쓴 리뷰가 올라갔네요..ㅎㅎ

아직까지 한 번도 이주의 리뷰에 뽑혀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거라도 되니 기분이 나쁘지 않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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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1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파란여우 2007-01-10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추천했어요^^(당연하지!)

프레이야 2007-01-1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 ^^

마노아 2007-01-1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메일 보고서 앗! 했지요. 반가웠답니다. ^^

멜기세덱 2007-01-1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감사, 늘 감사합니다. 물만두님, 파란여우님, 배혜경님, 마노아님. 그러고 보니, 알라딘에서 한가닥씩 하신다는 분들이 다 모이셨네요. 아하! 추천이 많지 않아도, 댓글이 몇가닥씩 길게 달리지 않아도, 이주의 마이리뷰 한 번 뽑혀보지 못했어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네요...ㅎㅎ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
이재성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이들이 문법을 어렵게 생각한다. “문법 어렵지 않아요!”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문법은 어렵게 생각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국어 문법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문법은 어렵고 따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문법을 어떻게 하면 쉽게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수도 없이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 방법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왕도는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문법에도 왕도는 없어 보인다.

  근래에 들어 우리말 관련 책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의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라는 책은 베스트셀러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글쓰기 관련 책들도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다. 최근 대학 입시에서의 논술 반영의 영향이 큰 듯하다. 글쓰기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부분이 아무래도 맞춤법이나 문법이지 싶다. 그래서인지 문법 관련 책들도 출간되는데, 이 책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이하 <국어책>)이 그런 종류다.

  사실 이런 대중적 글쓰기 관련 도서들을 나는 외면해 왔다. 아니 내게는 별 도움이 되는 책들은 아니어서 읽을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이런 분야의 전공서적들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어디까지나 전공서적은 아니기 때문에 내겐 외면의 대상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근 이 <국어책>을 읽게 된 것은, 뭐랄까 어떤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수년간 공부해 온 문법을 어떻게 설명하고 풀어놨기에 대중적으로, 그러니까 문법이라면 치를 떨 일반인들이, 이 책을 그렇게도 많이 사서 읽을까 하는 의문에서 오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어느 정도 그런 호기심을 풀 수 있었다.

  “제발 외우려고, 공부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문법책을 내던졌던 거예요!”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그럼 난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법이라는 것이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 되는 거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 문법 공부를 해 왔건만, 문법은 외우지 않고 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자 참 “구라가 심하다.”고 생각이 되는 대목이다.

  문법은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하나의 규칙을 찾아내어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규칙은 어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이럴 땐 이 규칙이, 저럴 땐 저 규칙이, 어떨 땐 규칙이라고 할 수 없는 예외적 사항들이 적용된다. 그러니 외워야 하는 것은 문법 공부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우는 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 전공을 말아먹는 일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우지 말라고? 외우지 않고 되는 것은 없다. 저자의 뻥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뻥일 뿐이었으니, 이 책을 ‘내던져’ 버려야 할까?

  이 책은 문법을 나 같은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국어학을 하나의 공부대상으로 하는 나와 같은 국어학도의 입장이 아니라, 대중의 입장, 즉 일반 언어사용자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일반 언어사용자, 즉 언중들에게 있어서 문법은 보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 책은 제대로 ‘뻥’치고 있다. 사실 다소 재밌게 읽히기는 했지만,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는 이 책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여기서 이 책의 몇 가지 점들의 문제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 내가 문법을 공부하는 것은 문법의 전 분야가 아니라, 그 한 부분이랄 수 있는 학교문법을 공부하고 있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는 문법이란 것이 바로 학교문법인데, 학교문법에 있어 이 책은 어떤 설명들은 학문문법, 즉 개인 문법학자의 설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점은 분명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문법 용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다. 문법 용어에는 아무래도 한자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처럼 “어려운 한자어를 써서 겁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자어를 쓰지 않고서는 문법의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간소화를 이루기 어렵다. 논의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어 더 왈가왈부 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읽는 처음부터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어 언급하고 간다.

  저자는 말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글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말이 먼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에서는 말과 글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말이 중요하면 글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과 글을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보인다.


“[더우기]라는 소리를 영어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ㄷㅓㅜㄱㅣ’가 됩니다. ‘더우기’가 맞춤법에 맞는 표기인지 ‘더욱이’가 맞는 표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한글을 마치 한자처럼 네모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어요. 훈민정음을 만들 때 우리나라가 한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네모반듯하게 규격화되어 있는 한자의 글자꼴에 이미 익숙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글도 한자처럼 모아서 쓰게 되었어요.”


  미치고 팔짝 뛰겠다. 이 저자는 우리나라 맞춤법의 기본 원리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문법을 논하면서 말의 소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식의 말은 너무하다 싶다. 더욱이 한글의 모아쓰기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를 저자가 알고 있다면 이런 식의 무식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자는 한자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듯싶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앞에서도 내가 학교문법을 공부한다고 했는데, 학교문법이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 무식한 것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쉽게 만든 문법”이라고? 갈수록 가관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게 학교문법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말하자면 일반 언중들의 말하기에서 사용하는 하나의 규칙이다. 저마다 말하는 것이 다르고, 문법을 논하는 학자마다 그 규칙들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규칙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교문법인 것이고, 그런 규칙이 가르치는 곳이 학교일 수밖에 없기에 이름하여 학교문법인 것이다.

  “문법은 규칙인데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규칙만으로 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문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맞는 말인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문법이 규칙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말은 그리 간단한 것이 못된다. 특히 우리말에서의 규칙화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일반화되지 못하고 규칙화되지 못하는 것을 문법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그 예외적인 것들을 빼버린다? 그럴 수 없기에 여러 가지 예외적 현상들을 문법에 포함시키고 있다. 저자 말대로 ‘제대로 된 문법’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제대로 된 문법을 하고 있는가? 웃지 못 할 일이다.

  이 책에서 ‘-아/어, -게, -지, 고’를 부사형 어미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현행 7차 학교 문법에서는 이것을 분명 부사형 어미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런 언급 없이 부사형 어미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자의 소홀함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 문법에서는 부사형 어미라고 인정하지만 이러이러 해서 부사형 어미라고 할 수 없다 식의 설명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7차 학교문법에서는 “국어에서 궁극적으로 연결 어미는 부사형 어미로 볼 수 있다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도 그 안에 들어있다고 보여 진다. 부사형 어미에 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논의가 있고 필자의 주장은 그 일부이다. 그 일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중에게 내어 놓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중주어문도 학교문법에서의 견해와 조금 다르다. 저자는 서술절 내포문으로도 볼 수 있고, 이중주어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앞서 주장한 대로라면 이 또한 모순일 수 있겠다. 학교문법에서는 원칙상 이중주어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아무런 언급 없이 이중주어문으로도 볼 수 있다고만 한다. 마치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어 설정의 문제도 학계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부분이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논란으로 정리되는데, 저자는 아마도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는 듯하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하게 되면 보어의 규칙화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온다. 이런 이유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괜한 필수적 부사어로 짜맞추기식 설정이라고 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형격조사 ‘의’에 대해 전면 부정하면서 ‘연결조사’로 설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말만 듣고 어디 가서 이건 연결조사야 하면 창피당하기 십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저자의 주장을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는 부분도 크다. 하지만 학교문법에서 소유격조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관형격조사로 이름 하면서 체언간의 연결의 역할을 하고 있음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의 상대높임법 분류에도 문제가 있다. 현행 7차 문법에서는 격식체를 4가지, 비격식체를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격식체를 2가지만으로 구분한다. 거기에다가 “비격식체에서도 상대방이 아주 높을 때만 ‘-요’를 붙여 상대방을 높인다는 사실을 표시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요’를 붙이지 않는 것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요’는 분명 두루 높임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더라도 붙여 쓰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담겨있다는 것은 이 책이 ‘4천만’ 국민의 ‘국어책’으로 기능하기에 의문을 들게 한다. “만약 몽룡이가 형을 무서워하고 어렵게 생각한다면, 몽룡이는 형을 아주 높은 사람으로 생각해 ‘-요’를 붙여 말할 거예요.”라는 설명에 과연 수긍할 수 있는가? 웃지 못 할 노릇이다.

  저자의 주장은 시제의 문제, 즉 미래시제의 설정에서도 나타난다. ‘-겠’이 그것인데, 현행 학교문법은 미래시제로 ‘-겠’을 설정하고 있다. 분명 이것은 문제이지만, 그런 언급은 전혀 없이 ‘-겠’은 미래시제가 아니라고 설명하면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미래시제 ‘-겠’의 설정여부는 학계의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그 논란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학교문법과 배치되면서까지 일반 대중에게 떳떳하게 내어놓는 저자의 자신감을 높이 사야 할 듯하다.

  이 외에도 사동 표현에서 ‘-시키다’가 빠져있다. 그리고 이중모음을 설명하면서 “두 개의 단모음을 합해서 만든 글자”라는 어느 문법책, 언어학 책에도 없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중모음은 단모음 두 개의 합이 아니다. 그럼 이중모음은 다시 단모음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얘긴데, 어느 문법학자도 이중모음을 단모음 2개로 나누지 않는다. 저자가 반모음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엿보이지만 이만 줄이기로 하겠다. ‘4천만’의 ‘국어책’임을 자임하는 이 책이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면 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삽화와 예들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따분하고 지루하게 문법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 책의 중반까지는 그런 대로 가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는 여느 문법책과 차별을 두기는 어렵긴 하다. 하여간 이 책이 ‘4천만’에게 쥐어질 ‘국어책’이기에는 저자의 사견과 일방적 주장이 곳곳에 너무 많이 담겨있어 지극히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그 ‘뻥’, 즉 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외우지 않고 알 수 있다는 그 ‘뻥’은 ‘뻥’으로 검증되었다고 본다. 만약 문법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저자가 굳이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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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1-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법 공부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수업시간엔 학교문법을 위주로 배우긴 했지만 그 때마다 교수님께서 "학계에는 이런 이런 의견도 있으니 참고해라"라고 하셨던 게 생각나네요.

멜기세덱 2007-01-0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문법을 다루다 보면, 애매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공부하다보면, "이게 무슨 문법이냐?"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도 참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는 게 솔직히 쉽지 않죠. 하여간 어려워요...ㅎㅎ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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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캐비닛』을 읽고난 후의 느낌이랄까, 흔한 감상이랄 것은 조금 남달랐다는 정도이다. 조금 독특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이 소설을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직접 고른 한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된 거 같지는 않다. 평범의 언저리 그 이상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 작가의 역량이 범인의 그것보다 높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소설이 평범의 언저리에서 조금 벗어난 것은 작가의 어떤 필력때문이라기 보다, 이 소설의 이야기가 된 소재의 약간의 독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우리에게 '캐비닛' 하나를 던져주고는 뭐 특별할 것 없은 없다고 말한다.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찍감치 집어치우""볼품없고 낡아빠진 캐비닛", "상상할 필요도" 없는 "평범한 캐비닛"이라고 수차례 말한다. 그럴 바에야 왜 그따위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캐비닛'을 던져주는 것인가? 여기에 조금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래서 그 '캐비닛'을 열어보게 하는 것이다. 뭐 '칠천팔백예순세 번'의 자물쇠를 열려는 시도 같은 것은 우리에겐 필요없었으니, 호기심의 발동은 즉각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이 '캐비닛'을 열고 부터는 사실 흥미로웠다. '루저 실바리스'와 '심토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허허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궁금증들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건 이해할 수 없건 상관없이, 우리가 부정하고 있는 환상과 마법은 우리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 각자의 집에서, 심지어 우리 몸속 깊은 곳, 대장이나 맹장 같은 곳에서 매순간 일어나고 있으며 또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는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하다.

에이 그런게 어딨어? 하고 우리는 처음엔 반문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그 반문이 역전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누그러진다면 또 모를까. "에이 그런게 어딨니? 있다면 뭐 할 수 없고." 사실 이 소설속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믿기에는 너무나도 허무맹랑할 뿐이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이야기라든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자신의 성기가 사라져버렸다는 남자',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도플갱어, '고양일로 변신하고 싶'은 사람 등등, 별의별 특이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한다. 이걸 어떻게 믿어? 난 도무지 못 믿겠다. 하지만 이런 일이 정말로 있을까 하는 의문이 조금은 일었다고 해야겠다. 그런 의문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들은 죄다 '거짓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아니 죄다 거짓말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들 속에는 혹시 '나도?'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저도 심토머인가요?>란 장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 답은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도 '심토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기사 이 소설의 화자 '공대리'도, 그리고 '손정은'도 조금씩은 '심토머' 기질이 보이고 있다. 나도 어떤 점에서 '심토머'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 듯도 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조금씩은 '특이한' 부분들이 있다. 남들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어느 한 부분이라도 달라야 하는 것이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당연지사 아니던가? 그런데도 모든 것은 획일화 표준화 하려는 이 사회에서 저마다 조금씩의 '심토머' 기질을 숨기고 잘라내려고만 한다는 것은 잔인한 처사가 아닐까?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이 우리의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그저 '평범한 캐비닛'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안에 담은 것들은 특이와 이상(異相)과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인 것이다.

이 소설 전체의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특이한 것들을 모아놓고는 이것은 하등 특이할 것이 없다는 작가의 '구라' 속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그 '특이'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평범'의 다른 모습일 거라는 얘기 아닐까?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다양한 환상적 상상적 소재들은 소설의 흥미와 재미를 이끌어 내기에 효과적인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읽어내는데 그리 지루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아쉬움들로 인해, 그런 흥미와 재미에도 불구하고 다소 높은 평가를 하기에는 석연찮을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심사위원들이 그런 아쉬움들을 몇가지 지적하고 있지만, 어떤 치밀한 구성이나 이야기의 개연성 등은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전개의 치밀함에서 오는 소설에 대한 흡인력보다는 이야기들의 특이한 소재의 흥미성만 강하게 남는다는 얘기다.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은희경의 심사평을 들어보자. "몇 가지 아쉬움을 말하자면, 우선 소설이 좀 길다.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길면 늘어지게 마련이다. 쓰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재미있는 소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늘 읽는 사람을 의식하여 독자보다는 늦게 그리고 조금 웃어야 톤과 길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은 더구나 병렬형 구성이다보니 독자는 금방 패턴에 익숙해지는데, 이미 이 작품과 낯을 익힌 독자에게 자기 소개를 하는 듯한 초기 설명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중간중간 화자가 권력자가 되어 훈계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 역시 작가가 화자와 동일시되는 부분에서 좀더 냉정해져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 소설은 소설로서는 다소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의 말처럼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소설자체의 내구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아쉬움이라면 그런 아쉬움이다. 특이한 것들을 갖다 놓았지만 뻔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의 내구성이라고 한다면 그런게 좀 부족하다 싶은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고, 그래서 읽어난 후의 아쉬움이 크다. 김언수라는 소설가에게 그 아쉬움의 폭만큼의 '기대'는 남겨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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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교사들에게 말한다

이승복(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여전히 교실에서는 입시위주의 수업방식이 문제다. 시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을 읽는 게 아니라 작품 분석의 결과를 외우라고 해서이다. 이런 현상을 결코 긍정적이라 말할 수 없다.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이런 상황도 나름의 변명은 있다. 입시성적에 기울어 있기는 해도 그나마 정규교과에 들어가 있는 덕분에 시교육이 있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시교육은 아예 사라질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전히 시교육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상황은 분명히 개선돼야 하고, 그 개선은 시교육 자체에서가 아니라 중등학교 교육의 총체적인 정책에서부터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정책의 변화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는 바람직한 시교육의 모형을 설정해 보고 개선방향을 모색해 보아야만 한다.

중등학교의 모든 교육이 그러하듯, 시교육의 최종 목표도 건전한 사회인 양성에 놓인다. 정상적으로 교과과정을 마친 사람이라면 능히 건전한 사회인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등학교의 시교육은 미적 체험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시적 체험을 생활체험으로까지 이어가게 해야 한다. 결국 시교육이란 시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기쁘고 유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적체험과 생활체험을 이어주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시를 읽으면서 지적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시를 공부한 학생이 알게 된 게 무엇이냐가 아니라, 시를 접한 학생이 궁금해 하는 게 무엇이냐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많은 교사들도 공감한다. 다만 지적호기심을 위한 시교육의 필요성과 효율은 이해가 되지만 시교육을 위한 좀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의 존재이유와 방식 자체가 비사실적인 것을 포함하는 '발견'과 '제시'에 있는 만큼, 시교육의 방법이란 것도 항상 새로울 수밖에 없다. 기존의 방법론으로 새로운 시에 접근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교육의 성격에 따라 단계별로 구분해 보면 어떤 방법이 있어야 할지를 가늠해 볼 수는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단계란, '즐기기', '잘 읽기', 그리고 '써보기' 등이다.

먼저 '즐기기' 단계란 학생들에게 시라고 하는 것이 즐길 수 있는 대상임을 알게 하자는 것이다. 시에서 흥미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르기'와 '거듭 읽기' 그리고 '외우기' 등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고르기'란 학생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시작품을 고르게 하는 것인데, 학생들은 작품을 고르는 과정에서 스스로 선택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 읽기'란 시작품을 즐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동시에 최소한의 시 읽기 방법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은 같은 작품을 거듭하여 읽는 동안 시작품에 대한 아우라와 스키마를 스스로 마련하는데 그 내용과 수준에 있어서 매우 현격한 자기성장을 발견해 내곤 한다. '외우기'는 암송할 수 있는 시를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암송은 기억하고 있다는 만족감 외에도 같은 시를 매번 새롭게 해석해 낼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시를 외운 학생들에게서는 높은 수치의 충족도가 발견되곤 한다.

두 번째로 '잘 읽기' 단계란 현재의 교과내용에서와 같이 용어와 개념 학습을 통해 분석을 체험하고 모범적인 시 읽기의 전형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시와 관련된 다양한 개념과 용어를 학습하되 구체적인 방법으로 '말하기'를 제시할 수 있다. '고르기' 과정에서 특정한 시를 선택한 이유라거나 암송할 수 있는 시에 대해 요즘하고 있는 해석내용, 그리고 시의 화자를 향해 하고 싶은 말 등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해 보는 것이다. 이때의 구술과정에서 학생은 작품에 대한 편견을 조정하고 총제적인 자기정리의 기회를 획득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써보기' 단계에서는 ' 시 읽기'와 '말하기'에서 얻어진 판단 내용을 문자로 정리하여 써보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시적소통 체제 즉 시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시도를 경험케 한다. 문장화 과정에서는 정서와 감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힘을 기르고 동시에 자신의 정서가 지니는 특징을 파악하게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시적 형상화 과정에서는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자신의 시적 의지를 오차 없이 전달할 수 있는지 알게 한다. 이리하여 '써보기' 단계에서는 시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며, 시적소통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세계와 대상이 있으며, 그런 이유에서 시적 체험과 생활체험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자각케 하는 것이다.

교사들에게 말하고 싶다. 시는 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삶의 문제이며, 인간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의 양식이다. 시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시인이나 평론가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 단지 학생들로 하여금 시를 즐기게 하되 이왕이면 시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고, 생활 속에서 시가 지니는 효과를 누리게 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시교육에서 교사의 몫이란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찾아가는 경로를 곁에서 살펴보며 지원해 주는 일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시교육의 시작과 결과까지의 과정에서 주된 내용은 교사의 몫이 아니라 학생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시교육 담당교사는 지도안의 내용보다 애정어린 시각을 우선시해야 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 한발한발 잘 다가서고 있는지를 살펴주는 것이 교사의 주된 역할임을 가슴에 새겨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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