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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이런 일이

알라딘 서재 개점 이후 최초로 투데이 100이 넘었습니다.

중복 서평 논쟁에 곁가지 격으로 동참한 글 한 편 올렸기로서니,

투데이 100을 가볍게 넘어버리다니...

이 논쟁의 뜨거움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이 참에 한마디만 더하고 넘어가자면,

어떤 중복 서평 반대론자의 견해에 근본적인 인간관으로는 성악설을 지지하고, 그러니 대부분의 서평자들이 불량 서평을 쓸 것임으로, 그것을 대량유포하는, 즉 중복 서평을 마구잡이로 이곳저곳에 올리고 다니는 행태는 문제라는 논지를 보았습니다.

(해당 논의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39886 )

과연 그럴까요?

근본적인 인간관으로써의 성악설과 서평을 쓰는 인간들이 불량 서평을 쓸 것이라는 논리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이런 논지가 가능하겠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못났으니까, 모자란 서평을 쓸 것이다." 이게 오히려 합당하겠습니다.

그 분의 견해대로라면, 즉 근본적인 인간관으로써 성악설을 지지한다면, 대부분의 서평자들의 서평은 악평일 것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성악설로부터 불량서평설의 도출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굳이 저를 성선설의 입장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아니 성악설을 지지한다고 쳐도, 그로부터의 도출이라면 오히려 좋은 서평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여집니다. 성악설을 기막히게 따르는 인간이라면 무엇하나 좋은 시선으로는 보지 않을테니까요. 어떤 책의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신랄하게 비판(좋게 말해 비판이지 심하면 거의 비난의 선까지 가겠지요?)하는 서평을 쓸테니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성선설을 지지하는 견해일 때 불량서평이 나올 가능성을 더 높게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착한 사람들은 서평을 안쓰면 안썼지, 남 욕하는 짓을 잘 못할테니까요.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좋은 서평이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좋은 일입니다. 중복서평을 반대하는 논자들의 견해에 빼놓을 수 없는 근거 중의 하나가 불량서평의 무분별한 유포 가능성이라고 보여지는데, 이것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 아닐까 하네요.

이제는 논쟁의 결실을 맺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결실이라면 불량서평의 근절 대책들을 간구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것을 인터넷 서점에게만 맡겨 놓으면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불량서평이 문제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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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1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불량서평을 문제삼아야죠. -_- 그치만 이것도 알아서 깨닫고 그만해주길 저 혼자 소원하고 있습니다. 어휴 벌써 1000권이 훌쩍 넘었더라구요.

제 투데이도 장난 아닌걸요. 전에도 이런 적은 있었지만, 밤 12시까지 가면 거진 300이겠어요.

물만두 2007-01-1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축하드려요^^;;;

파란여우 2007-01-1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불량서평이라면 저처럼 쓸데없는 긴 글도 포함되는거죠?
음, 암튼 잘하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1-16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 알라딘의 불량서평을 조사하셨나요? 1000권이 넘었다는 얘기는? 이거 알라딘에서 뭐하나 아프락사스님께 주든가 해야지 안되겠어요.
물만두 님> 친히 거동하시어 축하해 주시면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만두님에게는 투데이 백넘는거는 아무일도 아니겠지요...ㅎㅎ
파란여우 님> 그렇게 따지면 제 서재는 문을 닫아야 한답니다. ㅎㅎ 근데 왠지 길면 좋아 보여요...ㅎㅎ

paviana 2007-01-1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용히 추천만..ㅎㅎ

마늘빵 2007-01-1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세덱님 한 분이 2000편이 넘었던데요. -_- 한줄에서 다섯줄 짜리 리뷰가.
 

[나를 움직인 한 卷의 冊]『李鈺 全集』

不遇한 知識人과의 만남

鄭夏英(梨花女大 敎授)


  이 世上에 태어나서 살다 간 사람들 中에서 自己가 이룩한 만큼 認定받는 사람도 있지만, 相當한 業績을 남기고서도 一生을 苦難 속에 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 境遇가 許多하다. 나는 1970年代 初盤에 그런 사람을 冊을 通해서 만났다.

  大學院 時節에「沈生傳」을 처음으로 接하고, 그 作品의 높은 文學性에 感歎을 禁할 수 없었다. 身分이 다른 男女의 悲劇的 사랑을 다룬 이 漢文小說은 簡潔한 文體와 짜임새 있는 構成, 感動的 主題로 讀者의 心琴을 울리는 作品이었다. 이 作品의 作家가 바로 李鈺(1760(英祖 36)~1812(純祖 12))이었다. 그는 燕巖 朴趾源과 同時代를 살았고 文學的 才能에 있어서는 결코 燕巖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國文學 專攻者들에게조차도 生疎한 人物이었다. 그는 寒微한 家門에서 태어났고, 自己 所信을 굽히지 않았던 까닭에 出世의 길이 막혀 있었다. 게다가 自己 作品을 看守해 줄 변변한 後孫조차 없어서 그의 作品이 널리 流布되지 못했고, 그 結果 우리는 그의 作品을 쉽사리 만나볼 수 없었던 것이다.

  李鈺의 不幸은 그가 지은 작은 글에서 發端되었다. 그는 成均館 儒生으로서 正祖에게 지어 바친 글에서 當時에 流行하던 小說文體를 使用하였다. 이것은 임금의 强力한 文體反正 意志를 拒逆하는 일이어서 强한 譴責을 받았다. 그런데도 固執을 버리지 않고 다시 科擧 試驗에서 小說文體를 使用하자 嶺南 三嘉縣으로 充軍되는 罰을 받게 된다. 넉 달 동안의 軍隊 生活에서 풀려난 뒤로 그는 科擧의 꿈을 접고 故鄕인 京畿道 南陽으로 내려가 農事를 지으며 著作 活動을 하였다. 그는 文無子, 梅花外史, 絅錦子, 桃花流水館 主人이라는 號를 쓰면서 韻文과 散文을 넘나드는 作品 活動을 하였다. 그는 上層 知識人의 文學을 追求했으면서도 庶民 階層의 文學에 各別한 關心과 愛情을 보였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李鈺의 作品을 切親한 親舊 金礪가 모으고 校訂하여 自身의 文集인『潭庭叢書』에 收錄해 놓은 것은 그나마 多幸이었다. 11卷으로 된 그의 作品들은「沈生傳」以外에도 20餘 篇의 傳과 嶺南 紀行文, 書簡, 序跋, 記, 論, 說, 策 等 多樣한 形式을 띠고 있다. 이들 作品에는 作者의 豊富한 體驗과 世上을 보는 銳利한 觀察力이 잘 드러나 있어 文學史的으로 重要한 意義 가진다.

  別途의 冊으로 傳하는『藝林雜稗』에는 詩創作論과 더불어 65首로 된 漢詩「俚諺」이 들어 있다. 朝鮮 社會의 庶民 階層을 代表하는 네 部類의 女性들을 登場시켜 삶의 哀歡을 노래하고 있는데, 漢詩의 形式을 取하고 있으면서도 內容은 民謠風의 情緖를 담고 있다. 伽藍本『靑邱野談』에 따르면 漢文 戱曲「東廂記」도 그의 作品이라고 하니, 그의 文學的 才能이 實로 多樣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랫동안 公開되지 않았던 李鈺의 文集 全貌가 近來에 公開되면서 그의 全作品이『李鈺 全集』으로 飜譯되어 나왔다. 이를 通해서 우리는 朝鮮時代를 代表하는 獨特한 文人 李鈺을 새롭게 만나고, 아울러 우리 傳統 文學의 格調 높은 作品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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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論說]

옛날 사람들의 多樣했던 語彙

安秀桔(서울大 名譽敎授)


  우리 어렸을 때 서울 뒷골목들은 생각보다 놀 거리가 적었다. 그래서 같이 놀아줄 아이들이 必要해서 옆집 大門에서 “인희야↗ 나와↗ 놀자↗”라는 말을 그리 쉽게 외쳐댔던 생각이 난다. 淸進洞, 그리고 公平洞 等 골목 속 다닥다닥 붙은 집들의 大門 밖에는 어린아이 키 程度의 윗面이 傾斜진 시멘트 쓰레기桶이 하나씩 있었고 그 쓰레기桶 뒤에 유난히 다리 긴 거미들이 살았는데, 그것을 잡을까 말까 기웃거리고 있으면 “生鮮… 비웃드령!”을 외쳐대는 바지게 行商 아저씨의 으르렁거림이 들리곤 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生命을 대단히 重視해서 살아 있는 動物과 죽어 있는 動物의 差異는 컸다. “비웃드령!” 하고 외치는 것은 지금 말로 “비웃을 들여 놓으셔요” 하는 말로, ‘비웃’이란 ‘靑魚’를 말하되 ‘靑魚’라는 말은 隱然中에 살아 있는 물고기 ‘靑魚’를 뜻했고, 이를 잡아서 그 살코기를 食用으로 가지고 다닐 때에는 ‘비웃’이었던 것이다.

  漢字로 ‘貊’字에서 ‘百’대신 ‘者’를 쓴 글字는 멧돼지 ‘豬’이고, ‘돼지 豕邊에 놈 者’, 즉 ‘猪’는 ‘돼지새끼’이고, 집돼지, 멧돼지 合해서 豕이지만 죽은 살코기를 생각할 때에는 豚으로 나타낸다. 옆에 肉달月邊이 있으니 肉으로 分類하는 것으로 봐도 首肯이 갈 것이다. 卽 죽은 다음에는 같은 글字를 쓰지 않는 것이다.

  같은 模樣으로 해서 살코기도 多年間 기른 成牛 고기는 ‘beefsteak(佛語로는 bifteck)’라고 부르지만, 송아지로 아직(먹이는 대로 살로 가서 斤數가 늘어나는 成長期의 끝點에서 잡아) 採算性이 높은 소의 살코기는 ‘veal’이라고 부르고, 그 어린 소는 살아 있을 때는 ‘calf’이다. ‘veal’은 엷은 살빛이고 구우면 곧 희뿌연 빛이 되며 veal에서 깊은 맛을 企待할 수는 없다. 지난 世紀까지만 해도 儉素했던 獨逸의 시골 푸줏간에는 平常時 ‘veal’밖에 없고 맛이 깊은 ‘beefsteak’가 必要하면 미리 注文을 해야 했다.

  이 ‘veal’을 國語院에서 ‘犢牛肉’이라 이름붙여 公告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지만, 于先 한 가지 差異點만 指摘하고 지나기로 한다. 그것은 正確하게 따져 商業的 目的으로 키울 만큼은 키운 ‘veal’과 우리나라 農村에서 옛날에 말하던 ‘어린 송아지 고기’와는 다르다는 點이다. 客談으로 英語 語彙를 說明하자면 암소와 수소는 각각 ‘cow’와 ‘bull’이고 ‘ox’는 빠른 成長을 爲해서 去勢해서 기른 수소이다.

  워드 프로세서에서 ‘시간’을 찍어서 漢字로 變換을 하면 豫定했던 ‘時間’은 안 나오고 ‘屍姦’이란 單語가 먼저 나와서 깜짝 놀라게 된다. 이때 ‘屍’는 ‘죽음(death)’을 겪은 ‘주검’, 卽 屍體이다. 英語의 境遇도 屍體는 ‘corpse’라고 다르게 부른다.

  韓國에서는 한동안 ‘주검’을 ‘死體’라고 말하는 記者들이 있더니 昨今은 亦是 ‘屍體’라고 쓰는 傾向이 늘어난 것 같다. 아마도 放送 關係에서 關心 갖는 有志들의 꾸준한 努力의 結實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한동안 猛威를 떨쳤던 ‘먹거리’도 요새 ‘먹을 거리’로 가닥을 잡게 된 것 같다. 이러한 些少하게 보이는 ‘되잡음’의 效用을 믿는 것이 眞正한 知性人일 것이다.

  우리들의 話題로 돌아와서 上述한 바와 같이 ‘屍’라는 글字는 하나의 글字인데도 ‘專門 述語’인 셈이어서 生死를 가름하는 ‘corpse’에 該當되는 漢字를 아는 사람들은 ‘檢屍’ 等 亦是 ‘屍’字를 活用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제대로의 單語를 안 쓰고 풀어쓰게 되면 初等學校 學生과 마찬가지로 흔한 말에 偏重되어 單語 使用 頻度 分布에 ‘富益富 貧益貧’ 現象이 일어난다.

  反對로 述語를 제대로 찾아 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單語 使用 頻度 分布曲線(Zipf's curve)이 눕게 되어 그 言語는 內容 密度가 높은 ‘强力한 言語’가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척 많지만 20年 前까지만 해도 그 옛날 書堂에서 千字文을 발板으로 出發을 했던 韓國 사람들 言語의 單語 發生(使用) 패턴은 英語나 中國語보다 그 分布가 더 平平해서 情報 密度의 見地에서 가장 强力한 것이었다.

  英語의 境遇는 第一 흔하게 使用(發生)하는 ‘the’가 大略 10分의 1을 차지하고(열 單語에 한 單語는 ‘the’) 두 番째 자주 發生하는 ‘of’가 그 2分의 1, 卽 거의 20分의 1, 세 番째로 자주 發生하는 ‘and’가 大略 30分의 1, 그리고 열 番째 자주 나타나는 ‘I’가 100分의 1 程度이다.

  이러한 規則性을 Zipf의 法則이라 하는데 놀랍게도 全世界 어느 言語나 모두가 다 大綱 이러한 規則性(對數 눈금으로 直線이라는 勾配만 다름)을 갖고 있는 것이다.

  韓國語의 境遇(30年 前) 가장 자주 發生하는 單語는 ‘것’으로 發生 確率은 2.285%니까 英語 ‘the’의 10%에 比해 出發點이 낮고, 따라서 Zipf의 曲線이 가장 누워 있는 言語이다. 이는 우리가 日常生活에서 쓰고 있는 低邊 單語數가 제법 많다는 뜻이 돼서 ‘韓國 사람 말 못해서 죽은 사람은 없다’라는 俗談에 根據가 된다고 하겠다.

  卑近한 例가 우리에게 ‘分岐’點이란 말은 흔하고 漢字를 쓰면 ‘分期’點하고도 區分이 되는데, 英語에서는 ‘bifurcation’이라는 라틴말級이 되고, 아니면 ‘forking’이라는 말, 卽 ‘포크’라는 食卓 單語를 손질해서 쓰게 된다. ‘forking’이란 單語는 우리말로 그 級을 比較했을 때 ‘사타구니’쯤 되는 것이다. 풀어쓰자면 ‘갈림’이 되는데 이때에는 ‘離別’리라는 말과 混同될 危險性이 있다.

  急變하고 있는 地球村에서 우리는 漢字 述語들을 다시 活用하고 지난날의 語彙를 回復해야 한다. 그리고 變해가는 時代에 日常的으로 새 單語를 만들어 쓸 줄 알아야만 未來가 있다고 할 것이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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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중복리뷰 논쟁을 보면서 그게 무에 대수라고들 그리 열을 내시나 하는 의문이 들었을 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점차 뜨거워지는 논쟁의 뒷자락을 대강 쫓아 훑어보았을 뿐 별반 그 논쟁의 대열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몇몇 지인들이 그 대열에서 고군분투하시기에 말없는 성원을 보낼 뿐이다.

그래도, 여기서, 논쟁의 막바지라고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이제는 마무리가 되어 다시금 알라딘 마을의 행복지기들의 자리로 돌아와 그 맡은 바 역할을 다 하시옵사 하는 의미에서 나도 몇마디 올리지 않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우선, 몇 마디 알라딘에 미안한 말을 하고 가자. 내가 알라딘에 칩거하기 시작한 것은 근 몇 년이 되지 못한다. 사실이야 버는 돈이 얼마 없어서 책 몇 권 사보기가 힘든 판국에 알라딘을 이용할 기회가 없었으리라.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기 시작한 데에는 무엇보다 인터넷 서점의 각종 할인제도에서 기인한다. 오프라인에 발품팔아 가면서 사온 책을 적게는 몇 십원에서 많게는 몇 천원까지 깎아주니 나로서는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 지극히 경제적이었던 것이다. 인터넷 서점으로 먼저 접근한 곳은 포털사이트 다*과 연계한 리**라는 곳이었다. 나는 거기가 제일 싼가보다 했는데, 얼마 지나서 알게되니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후 그래24나 알라딘을 알게되었고, 네**에서 가격비교를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네**의 가격비교는 참으로 유용하게 이용하였다. 필요한 서적들을 찾아서 모아놓고 네**의 가격비교를 이용하여 가장 저렴하게 판매하는(각종 할인 쿠폰 및 적립금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다. 이후 알라딘에 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렇게 경제적 인사는 못되지만, 더 싸게 더 많은 적립금을 주는 곳으로 발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런 다중적 생활을 하다가 각 인터넷 서점에 쌓이는 적립금들이 별반 효과를 내게 주지 못하다는 판단이 서게 되었다. 도서 구입이 분산되다 보니, 적립금이나 각종 혜택들도 분산되어, 효율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기가 힘들었다는 판단에서 였다.

그런 가운데, 알라딘의 이런 서재 마을을 알게되어 두루두루 둘러보다가, 나의 도서구입의 많은 부분을 알라딘에서 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알라딘에 칩거를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보다 효과적인 것도 같고, 이래저래 돌아다니기 귀찮아서이기도 하고, 알라딘 서재의 여러 지인들을 흠모해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알라딘에서 책을 많이 산다고 알라딘에 자랑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여간 중복리뷰 논쟁을 보면서 나는 이전의 나의 행각을 돌아보았다. 나는 굳이 알라딘에서 책을 사야만 하는 의무도 제한도 없다. 다만 나는 알라딘의 고객일 따름이다. 알라딘은 나를 고객으로 유치하기 위해서 각종 혜택을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난 그것을 이용한 권한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권한도 있다. 알라딘이 나한테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중복리뷰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 보면 안될까? 나는 알라딘에 고용된 서평노동자(?)가 아니다. 내 서평은 어느 곳에나 내가 원한다면 게재될 수 있다. 다만, 그것에 어떤 법적 제재가 따른다면 난 올리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나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얼마간의 사례를 준다면 그것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나는 다른 경쟁사에 내 서평을 올릴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뭐 나만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알라딘에서 아무것도 받는 것이 없다. 땡스투를 받지 않았느냐고? 맞다. 나는 땡스투로 현재까지 만원 이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은 알라딘이 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알라딘이 주는 게 절대 아니다.

그럼 누가 주는 것이냐? 그건 바로 책을 산 그 구입자가 내게 주는 것을 뿐이다. 내 서평을 참조한 대가로 그 구입자가 내게 주는 것이 이치에 맞는 계산이다. 따져보면 그 구입자가 내게 주는 것도 아닐 수 있다. 땡스투는 말하자면 알라딘의 상업술이다. 책 많이 팔아보자는 상업술일 뿐이지, 알라딘이 서평써주는 사람들 고맙다고 소정의 원고료를 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어떻게 보면 22% 할인해 줄거 20% 할인해 주고 1%씩 나눠주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것을 두고 알라딘을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니까 알라딘에서 땡스투 몇 십원 받았다고 이게 알라딘에 내 서평을 팔아먹은 것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알라딘도 내게 서평을 사간 것이 절대 아닌 것이다. 나는 고객으로서 알라딘의 상업적 전략을 이용한 것이고 그것이 내게 유용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서평을 올리는 것이다. 뭐 그런 교묘한 생각을 가지고 서평을 올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는 나같은 사람을 누가 또 욕할 수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욕을 한단 말인가? 알라딘에서 내 서평에 원고료 주고 사가면 난 딴데 절대 올리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알라딘에서 나를 고발하고야 말테니까 말이다.

이주의 마이리뷰에 한번도 당선된 적 없지만, 나는 그것도 별 문제가 될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게 뭐 신춘문예도 아니고, 이중 게재를 금지하고 있지도 않으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돈 몇만원 받지 않느냐? 하는데, 그게 알라딘의 상업 전략과 맞물리기 때문에 주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야 그런 돈 줄 알라딘이 아니다. 내가 알라딘을 완전 매도하는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알라딘이 장사하는 곳 아닌가? 이게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라딘은 알아주기 바란다.

중복리뷰가 알라딘에 손해가 된다면 알라딘은 법적 제재 또는 규약을 만들면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평에 대한 대가를 좀 올려야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손해 안된다는 얘기다. 그래24가 이걸로 손해봤으면 진작에 금지시켰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손해보는 것도 아니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 문제될 일이 아니다.

좀 비약이 될지도 모르지만, 중복 서평이 금지된다면, 알라딘이나 그래24나, 리**에서 같은 책을 판매하는 것도 좀 문제지 싶다. 출판사가 자기 책 팔겠다고 이곳저곳 찔러보는 것과, 내 서평 팔겠다고 이곳저곳 올려놓는 것은 다른 일인가? 출판사는 책 살 사람에게 파는 것이지 알라딘이나 기타 인터넷 서점에 책파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책 살 사람들 보라고 서평 올리는 것이지, 알라딘 좋으라고 서평올리는 거 아니지 않는가? 그게 그건데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누군가 논문을 이곳 저곳 팔아먹고 다닌다고 문제라는데, 하긴 그건 문제다. 그렇지만 나는 서평 이곳저곳 팔아먹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 서평 볼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다 싶어 이곳저곳 올려놓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알라딘이 내 서평 사주면 난 다른데 안 올린다. 내 서평의 저작권은 내게 있다. 알라딘 서재를 통해 올릴 뿐이지 그 저작권을 알라딘이 사 간 것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알라딘과 나의 계약상에도 명시되어 있으니 뭐가 문제인가? 이곳에서 몇 십원 받아먹었으니 다른데 올리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한다면, 내가 누구 좋으라고 서평쓰는데 하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알라딘의 서평노동자가 아니다. 알라딘에서 월급 안준다. 알라딘에서 월급주면 난 다른데 서평 안쓴다. 사실 알라딘에서 월급을 줄 만큼 내가 서평을 탁월하게 쓰지는 못한다. ㅎㅎ

중복리뷰는 그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좋은 서평(책 좋다는 서평이 아니라, 그 책에 대해 유효적절한 정보를 담고 있는 서평이 되겠다.)은 알라딘 이용자도 그래24 이용자도 리** 이용자도 다 볼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서평(수준 이하의 서평일 수도 있고, 출판사 알바가 이곳저곳 책 자랑삼아 올리는 서평들이 되겠다.)이 중복 게재되는 게 문제일 따름이다. 이런 문제는 무엇보다 인터넷 서점 자체적으로 정화시키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겠다.

두서가 없고, 논리가 없다. 여기서 마치면서, 좋은 리뷰를 볼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싶다. 책을 볼 사람이라면 그 책에 대한 좋은 리뷰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꼭 알라딘에 와서만 좋은 리뷰 볼 필요는 없으리라. 그래야 한다면, 그래서 알라딘이 장사가 잘 될 일이라면, 알라딘은 반드시 그 서평들을 큰 돈 주고 살 것이다. 중복리뷰가 문제가 아니라 불량리뷰가 문제일 따름이다.

알라딘의 서재폐인들은 알라딘의 서평노동자가 아님을 선언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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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고독 2007-01-15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

마늘빵 2007-01-1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제 글에 주소붙여넣기 하겠습니다.

승주나무 2007-01-15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선언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말을 듣다 보면, 우리가 쓰는 서평에 대한 땡스투가 우리의 계좌로 이체된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땡스투나 적립금도 역시 '도서구매'의 관점에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인데. 그리고 리뷰왕이 한 주에 총합 100명 정도씩 뽑히고 거기서 상당수가 중복 리뷰어들이라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겠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의 자본주의보다 독자들의 자본주의를 공격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잖아요. 잘 읽고 갑니다.

jedai2000 2007-01-1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태까지 나온 글 중 가장 공감가는 글이군요.

물만두 2007-01-1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백배!!!

멜기세덱 2007-01-1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고독 님> 감사합니다. 아직 전 20여년 쯤 고독했었는데요..ㅎㅎ 공감할 수 있는 알라디너들이 많다는 것이 저의, 그리고 우리의 행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프락사스 님> 노고가 많으십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일 뿐인데요...
승주나무 님> 제가 써 놓고도 멋지다고 생각했어요..ㅎㅎ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라딘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알라딘이 입장을 표명하면 더이상 알라딘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 같아요. 이자릴 빌어 알라딘의 목소리를 촉구합니다.
jedai2000 님> 행복한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여태까지 제게 달린 댓글 중에 가장 행복한 댓글이었습니다.
물만두 님> 언제나 간단명료명쾌하십니다. 감사백배!!!

비로그인 2007-01-15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합니다. 추천합니다.

멜기세덱 2007-01-1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 님> 첨 뵙는듯 해요. 감사한 일입니다.
 

[語文隨想]

自筆 署名 有感

張鍾權(詩人 ․ 季刊 <리토피아> 主幹)


  創作物이 들어 있는 郵便物을 받으면 于先 表紙를 들치고 맨 앞張 面紙에 쓰여 있는 著者의 自筆 署名을 살피게 된다. ‘平素 베풀어 주신 關心과 사랑에 感謝드리며 그동안의 熱과 誠을 다한 作品集을 보내 드리오니 삼가 恩惠로운 가슴으로 챙겨 두시고 또 읽어 주시길 바라나이다.’라는 뜻의 文句가 大部分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署名을 發見하면 보낸 이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 환한 微笑가 퍼진다. 보낸 이의 고맙고 따스한 마음이 먼저 달려온다. 수고로운 그동안 作品 活動의 結果物을 누구보다 먼저 보아 주십사 보내주는 마음이 너무 고맙다. 그래서 아름다운 自筆 署名이 담긴 冊은 그 冊에 담긴 수고와 精神이 두 곱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읽는 이의 마음이 積極的일 것은 自明한 理致이기 때문이다. 오래오래 冊床 앞에 챙겨 두고 틈이 날 때마다 바라보게 된다. 보낸 이의 마음을 생각하면 읽는 것도 즐겁다. 書架가 비좁아 헌 冊을 整理할 事情이 생겼을 때에도 署名이 담긴 冊은 끝내 살아남아 자리를 지키면서 平生 그의 同志가 되기 마련이다.

  創作 印刷物은 그 自體로 所重한 것이다. 그러나 一次的으로는 機械文明의 냄새가 짙어서 人間的인 體溫을 느끼기가 어렵다. 勿論 內容을 읽어 가면서 充分히 著者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不拘하고 精誠이 가득 담긴 自筆 署名의 價値를 否認할 수는 없다. 이처럼 自筆 署名이 重要한 意味를 갖게 되는 것은 받는 이에게 肉筆을 通해 自身의 마음과 香氣를 最大限으로 傳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낸 이의 精誠과 香氣가 그대로 배어 있어서 더 고맙고, 自身을 眞正한 벗으로 여겨주거나, 아니면 尊敬스러운 對象으로 信賴해 주는 것 같아 또 고맙기 그지없다. 날로 刻薄해져 가는 現代社會에서 그래도 나를 認定하고 記憶해 주는 사람이 있어 더 感謝하는 마음이 생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香氣로운 人事말까지 곁들여 있으면 얼마나 感動的이겠는가.

  多年間의 作業을 通해 創作 作品集을 만들어 낸 분에게 그 結果物은 더할 수 없이 所重하다. 누구든 한사람이라도 讀者의 모습으로 다가와 自身의 精神的 産物을 읽어주길 苦待한다. 그런데 先輩, 同僚 할 것 없이 平素 잘 알고 지내던 知人들에게야 오죽하랴. 平素 顔面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한 番쯤 읽어 달라는 所望이 이 自筆 署名에 많이 담기게 된다. 어느 程度 讀者를 確保하고 있는 著述家들이야 아무래도 贈呈本을 많이 보내지는 않는다. 쓰기만 하면 읽어줄 사람은 따로 있어 幸福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래도 自身의 著書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多少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自身을 아껴주는 사람들에 對한 報答이고, 그리고 自身이 아직 이 땅에 살아 있다는 强力한 證據이며 一種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단 한 마디의 文章으로 멋들어진 人事를 달아 보내는 自筆 署名은 받는 이에게 잔잔한 感動을 불러일으키기에 充分하다. 精誠을 다해 써 내려간 글씨들이 마치 받는 이가 世上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런 感情으로 冊을 읽어 들어가기 始作하면 그 內容은 當然히 理解의 速度가 빨라지며 企待 以上의 感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보내는 사람은 보내는 사람대로 받는 이마다 입장에 따라 다른 文句를 만들어 내느라 苦悶을 하기 마련이다. 著書를 만들어 내는 程度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作業을 通한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所重한 人間的 態度일지는 不問可知의 일이다. 反對로 대충대충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簡潔한 文句를 使用하여 휘갈겨대는 署名은 아니 함만 못한 境遇도 있을 수 있다. 그럴 境遇 形式的인 人事와 署名은 오히려 받는 이에게 不快感만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文句가 쓰여 있느냐, 어떤 筆體로 쓰여 있느냐,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이런 것들이 받는 이에게 미묘한 感情의 變化를 줄 수 있다. 그런 面에서 볼 때 分明히 自筆 署名 또한 나를 숨길 수 없는 거울일 수 있는 것이다. 받는 이에 對한 自身의 相對的 態度가 알게 모르게 傳達이 되기 때문이다.

  글은 勿論이지만 글씨 亦是 自身의 存在에 對한 속일 수 없는 痕迹이다. 우리는 平素 숱한 말과 글과 글씨로 因해 감춰 두었다고 생각했던 속마음을 사실은 猖披할 程度로까지 露出시켜 버리는 일을 자주 經驗한다. 조금만 더 神經을 쓰고, 조금만 더 自身을 낮추고, 조금만 더 相對方을 尊敬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작은 失手들이 두고두고 未安스럽게 하거나 荒唐하게 만드는 일이 없지 않은 것이다. 人事 文句에서부터 呼稱과 마무리까지 받는 이마다에 따른 精誠스러운 選擇이 얼마나 重要한지는 남의 著書를 받아볼 때 確然하게 알 수가 있다.

  精神없이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는 科學文明의 社會가 不安하고 危殆롭다. 따뜻하고 所重한 人間的 냄새가 자꾸만 退色하여 사라져 간다. 機械와 速度에 빠져든 世上은 어디를 向해 가는지도 모르고 덩달아 꼬리를 물고 달려간다. 이럴수록 人間的인 香氣가 必要하지 않을까. 나는 너를 생각한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意味가 있는 存在이다. 나는 當身을 尊敬한다. 그래서 當身은 나에게 希望이요 生命과 같은 存在이다.

  但 몇 줄의 아름다운 自筆 署名을 通해 人間的인 香氣와 信賴와 尊敬과 感謝의 마음을 보내고 받으면서 따뜻하고 甘味로운 人間味를 챙겨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듯하다. 機械文明 亦是 人間 精神의 所産이기는 하다. 그러나 人間 精神의 産物인 機械文明에 人間이 거꾸로 끌려가는 듯한 世上에 살면서 人間的인 自尊心을 지키고 交換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肯定的이며 可能性이 있는 世上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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