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서울시교육청에서 초중등 남자 교사를 일정비율 임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에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여성들의 불만이 만을 것이다. 사실 나같은 사람에게는 희소식이긴 하지만, 과연 별다른 문제는 없을까?

일단 일반 공무원 채용에서 적용되고 있는 이 방법이 교사 선발에까지 적용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따져봐야 할 듯하다. 사법시험 이나 특수 공무원 선발 등에는 적용되고 있지 않은데, 교사의 정체성이 다시 한 번 고려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수급 불균형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래는 <한국일보> 기사를 스크랩한 것이다.


 

“신규교사 30% 남성 채용” 논란
서울시교육청 추진에 임용시험 女준비생 반발

 

서울시교육청이 신규 교사 임용 때 남자 교사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늘리는 방안을 추진해 논란이 일고 있다. 시ㆍ도 교육감이 초ㆍ중등 교원 신규 임용시험에서 남자 교사 비율을 30% 내에서 자율 선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조만간 열리는 전국 시ㆍ도 교육감협의회에 이 방안을 올려 정식 안건으로 다루도록 할 방침이다.

조학규 서울시교육청 교원정책과장은 8일 "갈수록 남녀 교사간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며 계획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올해 초등교사 임용고사에 최종 합격한 여성 비율만 봐도 ▦서울 88.0% ▦부산 97.0% ▦대구 91.6% ▦인천 82.0% ▦대전 95.3% ▦광주 95.0%다. 서울 한강초교의 경우 교장부터 평교사까지 모두 여교사로만 구성돼 있다.

남자 교사 비율을 높이겠다는 방안에 대해선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교사가 한쪽 성으로 지나치게 쏠린 현재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남자 교사가 학생들에게 올바른 성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 주거나, 여교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학교 업무를 분담하는 차원에서 여교사들의 지지도 적지 않다. 서울 은평초교 이영숙(46ㆍ여) 교사는 "여성화를 무조건 나쁘게 볼 수는 없지만, 어린 학생들이 남자 교사에게서 교육 받는 경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 봉현초교 김선경(53) 교감은 "무척 반가운 소식"이라며 "아무리 사정을 해도 체육부장을 맡겠다고 나서는 여교사가 없어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올해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응시 예정인 박모(31ㆍ여)씨는 "가뜩이나 '독립 유공자 후손 가산점'이다 뭐다 해서 일반 교대ㆍ사범대생들이 교직에 진출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는데, 남성들에게 별도 혜택을 준다면 여성은 교사 되기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 없다"고 주장했다.

입력시간 : 2007/04/08 18:31:


박원기 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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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미FTA를 맺느니 못 맺느니 시끄러운 가운데, 나의 관심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비사범대 교직이수자에 대한 교원자격증 발급 비율을 대폭 줄이겠다는 소식이었다.
* 관련기사 http://news.media.daum.net/society/people/200704/02/donga/v16248328.html
* 관련뉴스 http://tvnews.media.daum.net/part/societytv/200704/02/ytni/v16248728.html

교육인적자원부의 이러한 조치는 그들 말대로 “교사 자격증 취득 요건을 강화해 교사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수급 불균형도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 정말 그럴 듯 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조족지혈(鳥足之血), 문자 그대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 조치, 아니 흉내에 불과하다. 요즘 인기있는 개그프로의 한 유행어를 따라해 보면, "이건 조치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니여"다.

교육인적자원부는 그 전신 '교육부'에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강조는 필자)가 된 것이다. 박노자 교수의 지적처럼 무엇보다 '인적자원'의 활용가치를 중시하는 개명(改名)이다. 그렇다보니 '교육'적 논리보다는 '인적자원'의 효율과 경쟁력만이 강조되어 왔다. 그 정책으로 유지되어 온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까지의 교원수급정책이었다.

 

 

 

1950년대 이후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교원의 수급은 용이하지 못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로인해 정부 당국의 교원자격 남발은 시작된다. 어떻게든 부족한 교사를 충원해야 했고, 당시에는 교사가 그리 인기직업은 아니었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한 교원자격의 남발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선 사범대학을 늘리고, 그로 부족해 비사범대의 교직이수 과정을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복수전공 및 부전공 이수를 통해서도 교원자격증을 발급하게 된다. 이로 인해 8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교원수급의 정체현상이 나타내게 된다.

교원수급의 정체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문제의 원인은 첫째도, 둘째도 교육당국의 교원수급 정책에 있다. 교원이 부족할 때(사실상 교원이 부족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한 만큼을 충원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이름하여, 예산부족으로 말이다.) 대대적으로 교원을 양성하다는 명목하에 교원자격을 남발했고, 교원이 어느정도 충원되어서까지 교원자격을 남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정체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교육당국은 이런 교원자격의 무분별한 남발에 대해 이런 식의 논리로 변명한다. 교원의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논리말이다. 말하자면, 10놈 중의 한 명보다는 100놈 중의 한 놈이 더 나을 거 아니냐 하는 논리말이다. 질 높은 교원을 선발하기 위해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은 더 많은 교원후보생들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들을 잘 양성하고 교육하여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많은 인원을 확보해 놓고, 그들 중에서 젤 잘난 놈 하나 뽑으면 되는 것이라는 소리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인지, 대학들의 돈벌이 장사를 시켜주려는 심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교육대학원이라는 특수대학원을 현직 교사들의 재교육 목적으로 설립해 놓고, 여기서도 교원자격증을 판매하고 있다. 교육부의 논리는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다. 다다익선(多多益善)

여기서 잠깐 이 적체현상의 심각성을 살펴보자. 인천의 모대학교 사범대학 모 과를 예로 들면 이렇다. 이 과의 학년 정원은 40여 명이다. 이 인원이 대학 4년을 마치고 졸업한다.(군대로 인한 휴학, 복학 인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 40명은 넘는다.) 여기에 전과로 4명이 추가된다. 편입학으로 4~8명 가량 추가될 수 있다. 복수전공(단, 사범대학생만이 복수전공이 가능하다.)으로 8명이, 부전공(비사범대 가능)으로 8명이 추가된다. 따라서 이 과에서 배출하는 교원자격은 7~80명 선이다. 이 대학교는 교육대학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일 교과목의 교원자격증 발급자는 한 해에 100명을 넘게된다. 또한 비사범대학의 교직 과장 이수자까지 합하면, 더 늘어난다. 작년도 임용시험에서 이 과목 선발인원은 3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 학교에서 배출하는 인원만이 시험을 본다고 하더라고 합격률은 30%도 못된다. 나머지 70%는 뭐하느냐? 재수 준비에 박차를 가할 뿐이다. 다른 분야로의 진출은 현실적으로 막혀있다고 봐야한다.

작년도 이 지역의 이 과목 경쟁률은 20:1(실경쟁률은 다소 낮음)에 달했다. 30여명 뽑는데 1000명가량이 지원했다는 소리다. 이 적체는 10년이상 계속되었다. 앞으로는 더 그러할 것이다. 내년도 모집인원은 아무리 좋게 봐도 예년보다 더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번 부전공 이수자 교원자격 발급을 줄여 교원자격 취득자 수를 15%가량 낮춘다고 하더라도 교원수급이 그보다 더 줄어버리니, 이건 낮춘것도 아니고 안 낮춘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코미디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이번 조치는, 그간 사범대 학생들의 계속적인 요구사항 중의 하나였다. 부전공 및 교직 과정 이수자에 대한 교원발급을 중단하고, 기타 무분별한 교원자격증 남발을 중지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중 극히 일부인 부전공 이수자에 대한 교원자격 발급 비율 감소 조치는 티도 안나는 조치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 수급 불균형을 해소할 거라는 허무맹량한 소리를 해대니 기가 찰 노릇이다.

사실상 교육인적자원부는 수급 불균형에 대한 해소의 노력을 보인 것이 하나도 없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을 뽑으려면 머릿수가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돈 안드는 정책이다. 돈 안들이고 질 높은 교사 똑똑한 교사 뽑겠다는 얘기다. 군계(群鷄) 중에서 한마리 학(一鶴)을 뽑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많은 닭들 중에서 뽑아봤자 그건 학이 아니라 닭일 뿐이다. 무분별하게 교원자격증 발급해 놓고, 거기서 뽑아봤자, "그게 그거"라는 사실은 우리 교육 현실은 말해주고 있잖은가?

좋은 교사 뽑기 위한 노력은 이렇게 돈 안드는 티내기 전법으로 일관한다. 한 가지 좋은 예가, 이번의 교사 선발 방식의 변경이다. 현행 2번의 시험에서 3번의 시험으로 변경하는 내용인데, 다시 한 번 "그게 그거다." 논리인 즉, 2번 줄세우는 것 보다, 3번 줄세우는 것이 더 좋은 놈 뽑기에 낫다는 얘기다. 하긴 맞는 말이긴 하다. 시험 잘 보는 교사 뽑아야 학생들 시험 잘 보게 가르칠 것이 아니겠는가?

교육인적자원부의 교육 정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책없는 전시행정인지 이루 다 말하기도 어렵다. 출산률 감소에 따른 학생수의 감소로 교원 선발 인원을 대폭 줄이는 처사 또한 그 무대책의 정책에 하나이다. 현재 각 학교에서는 학생수의 감소로 인해 과밀학급이 편성되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교원 수급을 줄이고 대신에 학급당 인원을 더욱 늘린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강국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면서도 사회 제도 및 여러 측면에서 그에 걸맞지 않은 현실들이 보고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교육문제다. 선진국으로 가는 이 마당에 출산률 감소의 위기를 학급당 학생 수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정책을 간구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교원 수급 불균형을 줄이면서, 적은 예산으로 장기적인 학급당 학생수를 줄여나가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툭하면 예산 부족을 핑계삼는 교육인적자원부에는 교육예산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있는지를 묻고 싶을 따름이다. 현행 교원양성체계 또한 체계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체계가 없다. 그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체계없는 이러한 조치들이 무슨 실효가 있겠는가? 교육인적자원부는 그 옛날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가장 탁월한 전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무식하기 이를데 없는 '인해전술'이 오늘날 우리의 교원 수급 전략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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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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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이 다 그럴 것이지만, 특히나 문학은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문학'하면 시와 소설로 대표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이 얼핏 머릿속으로만 상상하여 꾸며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기실은 발품을 팔아가며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고 그 안의 온갖 사물을 보고 또 보아야 참 된 몇 줄의 시 한편이 나오는 것이다. 좋은 시인은 발품을 많이 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일일이 조사해 본 결과는 아니다. 의심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있을 것이다.'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소설만큼 작가의 발품이 많이 필요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이나 『아리랑』『태백산맥』『한강』의 대작을 완성한 조정래 선생 등이 보여주듯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리 길의 발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발품이라는 것이 다만 돌아다니는 것뿐만은 아니다.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 정리해야 하고, 등장 인물에 알맞은 언어, 문화, 생활까지, 나아가 다양한 분야의 왕성한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품을 모두 팔았을때 한편의 소설은 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의 소설 『분노』를 일으면서 먼저 든 생각이 바로 루슈디의 발품이 무척이나 많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해박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한 편의 소설을 쓰기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치밀한 구성 또한 이러한 발품의 노력의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살만 루슈디는 독서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름이다. 어쩌면 그의 책 한 권쯤은 읽어낼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전자일 뿐이고, 그가 『악마의 시』를 써 시끄런 소동을 일으켰다는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또한 쉽게 읽힐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기도 했다. 이 책 『분노』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내 생각을 마냥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간 이 책을 읽어내면서 시종일관 앞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말릭 솔랑카 교수'다. 그는 영국의 '사상사 학자'였고, '인형 제작자'였고, 순간의 '분노'에 휩싸여 처자식을 죽이려했던 적이 있었으며, 이때문에 처자식을 버리고 뉴욕으로 도피한다. 뉴욕에서 은둔하며 지내던 그의 삶을 속내 깊이 파고드는 서술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그는 뉴욕으로 건너온 이후에도 그가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적 '분노'를 표출하고, 이로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이 소설의 테마는 바로 이 '분노'이다. 그가 왜 분노하고, 어떻게 분노하는지 명쾌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데에 이 소설의 난해함이 있으며 동시에 긴장감이 생긴다. 그가 무엇에 분노하는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겉만 본다면 그의 분노는 정신이상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간혹 그는 몽유병 환자같은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 또한 확실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분노는 사소한 것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고, 어떤 뿌리 깊은 심연에서부터 오는 것인 듯도 하고, 아무런 이유없음에 기인하는 정신질환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어떻게, 어떤 행동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지도 우리는 쉬이 알 수도 없다. 이 점에 대해 분노한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furia'는 분노, 광기를 뜻하는 라틴어이다.(p.70 각주 참조)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만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 격정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p.436 각주 참조) 따라서 '푸리아'는 이중적이며 역설적이다. 중의적 표현이라는 소리다. 이 소설에서 솔랑카의 분노는 그의 '열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소설의 결론은 그가 분노로부터의 해방을 이뤄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그가 만들어낸 '퍼핏 킹'들의 그 증거이기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분노하는가? 왜 뜬금없이 처자식을 죽이려 했는가? 그의 순간적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왜? 왜?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가족, 친구, 또는 알 수 없는 그 누구-에 의해서건, 우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서건, 세상의 온갖 체제에 의해서건 끊임없이 분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솔랑카의 분노는 어쩌면 이런 분노 유발의 원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듯 하다. 우선 그가 사상사를 강의하면서도 별난 취미인 인형 제작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대학 동료 교수들의 편견에서 그의 분노가 유발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리틀 브레인'이 왜곡되고 자신을 배반하는 상황이 또한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아닐까? 후반부에 그의 어릴적 아픈 기억이 고백되는 것에서 알수 있지만, 의붓 아버지의 성추행에서도 깊은 분노의 원인이 있기도 한 것은 아닐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의 '분노'를 유발하고 그 분노에서 그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외적 원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면한 가장 큰 원인은 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푸리아의 역설은 분노라는 동전의 이면에 열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외적 분노의 인자는 내적인 분노를 유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른 이면의 열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닐라'의 등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분노로부터의 해방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열고 있고, 이 소설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가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노 유발 인자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한 인물을 통해 보여주면서, 그 분노가 어떻게 열정과 삶의 긍정적 측면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루슈디의 해박함과 폭넓은 지식, 그리고 명쾌한 독설, 칼날 같은 풍자, 머리아프게 하는 난해함은 이 소설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 주고 있으면서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를 분노케 하는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고, 우리 내면에 내재한 그 '푸리아'를 어떻게 열정의 푸리아로 이끌어 낼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읽어내면서도,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했으면서도,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루슈디의 어법의 매력을 이 책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의 '푸리아'는 이런 쪽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갈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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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도올과 박노자의 기독교 상식

도올 김용옥의 문제제기를 기화로 하여 한국 기독교와 관련된 글들을 몇 차례 옮겨오고 몇 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그가 출간한 <기독교 성서의 이해>(통나무, 2007)도 출간되자 마자 사두긴 했는데 아직 펼쳐볼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그 책에 대한 차분한 리뷰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미리 읽어둘 만하다.

경향신문(07. 03. 24) ‘보수 교리’ 뒤엎은 ‘도발적 비판’

도올 김용옥은 최근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라는 두 권의 저서를 동시에 출간함으로써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충격적인 화두를 던졌다. 삼위일체와 동정녀 탄생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적 예수의 신성(神性)성 문제 등과 관련해 정통적인 한국 보수 신학계와 교회가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올은 “콘스탄티누스(313년) 이후의 역사는 ‘성서주의’의 본연으로부터 너무 이탈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교화된 다른 차원의 기독교 발자취”라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성서주의’는 ‘교권주의’와 대비되는 말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도 ‘교권주의’의 산물로 파악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다가 이단으로 지목된 아리우스를 황제교화된 교회의 권위로 부당하게 축출된 하나의 희생양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보수적 신학자인 이국헌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된 존재(니케아 신조)이며, 그 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다(칼케돈 신경)”라는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도올은 오히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보다 반대파 아리우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교권적 해석을 거부한다.

도올은 또 “복음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파테르)와 아들(휘오스)’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은 예수의 자기 이해 속에서 일차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며, 가부장적 유대인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쓰였던 토속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신적 존재”라기보다는 “자비의 품”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버지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증명하려던 일체의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올은 유일신론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한다. 예수 이전의 유대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참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서 기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어떨까. 도올은 “마르시온이 구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라면서 구약성서와의 단절의 정당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의 율법적 정신을 대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더이상 편협한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적 하나님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의 창세기가 지니는 다양한 메타포와 예언서들이 외치는 정의와 공의는 시대를 막론하고 신자들에게 언제든지 효력을 발생한다.

도올이 말하는 ‘낭송문화로서의 복음서’는 여전히 문학적 효과 이상을 던져주지 못한다.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도 심청전의 문맥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청의 죽음과 연꽃에서의 부활은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렇게 ‘믿는’ 자에게는 감동이 크며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또 다른 의미의 “역사적 사실”이 된다. 예컨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의 확충이라는 점과 그리스도 복음의 독특성이 다른 문맥 속에서 보편적 이야기로 세속화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는 또 동정녀 탄생을 우리나라의 시조설화인 난생설화와 비교하고, 마태가 이사야서 7장14절을 인용하여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것은 그릇된 인용이라고 비판한다. “순결한 처녀로서의 마리아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난센스”라면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은근히 부정하는 눈초리다.

이 책에서 도올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요한복음과 로고스 기독론’이다. 로고스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이는 ‘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과 나의 말씀은 하나로 통한다. 이러한 논리를 확대해서 도올은 로고스의 화신으로서의 아인슈타인을 언급한다. 범인이 접하기 어려운 상대성이론의 수리적 사유를 영감으로 구성해 내었는데 그것이 로고스다. 그 로고스가 아인슈타인이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육화되어 나타났다. 이를 극단화시켜보면 ‘과학적 진리의 구조’를 띠고 발언되는 모든 견해는 로고스의 기능을 가지게 되며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로고스의 화신이 된다. 따라서 붓다도 ‘연기(緣起)’적 사실을 말한 것 하나만으로도 로고스의 화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도올의 일부 주장은 실상 진보주의적 신학자들이 이미 개진해왔던 내용이다. 이러한 책이 만일 서양에서 발행되었다면 그다지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무수히 나왔다. 유독 한국에서 반론이 거센 까닭은 그만큼 한국 그리스도교가 보수적인 색채가 짙다는 뜻도 되겠지만 진보적인 해석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까닭도 있다.

성서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열려 있는 책이기에 다양한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한 해석과 주장들을 감정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 다투는 식으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며, 성숙하고 열린 자세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본다. 본서의 출간을 기화로 한국 기독교계에 진보와 보수간의 건전한 대화의 신학적 풍토를 기대해 본다.(이명권|코리안아쉬람대표·종교학박사)

07. 03. 25.

P.S. 마지막 문단의 멘트, 곧 "이러한 책이 만일 서양에서 발행되었다면 그다지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무수히 나왔다." 같은 진술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식적인 주장을 상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지적/정서적 성숙이다. 그럴 때 아래와 같은 박노자의 '만감' 또한 '상식'(공통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의 교육문제에 대한 박노자의 지적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지만 종교문제에 대한 그의 '외부자적 시선'에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제기한 문제가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지각'을 갖고 있는 걸 보면 그의 마음상태도 거의 한국인이 다 된 듯하다). 

박노자글방(07. 03. 14)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 행위

유럽 같으면 조금 더 대담하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한국 같으면 "이미지 클럽/대딸방에서 아르바이트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여성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일이 "부끄러운 직업"으로 인식되지요. 물론 실제로는 성매매 정도로는 아니지만 일단 성적 이미지를 상품화시키고 남성의 일방적인 만족을 전제로 하는 직업인 만큼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또 심신상의 피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에 별로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과연 다른 직종에 비해 그렇게 "부끄럽게"만 생각해야 하나요? 솔직한 말씀으로는, 저는 "마사지 클럽 아가씨"보다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훨씬 더 부끄러운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사지클럽에 오는 손님도 한 시간 동안의 "플레이"를 "사랑"으로 착각할 일이 없지만 서빙하는 여성도 굳이 "사랑" 따위를 연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 않습니까? "클럽"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일시적인 만족을 주되 본격적으로 외로움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대체물"이라는 것을, 양쪽에서 다 알고 솔직하게 하는 것이지요. "유사 성행위"와 남녀간의 진짜 사랑 사이의 거리란 거의 천문학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대다수의 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이야기나 행해지는 행위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의 사이의 거리도 거의 같을 것입니다. "우리 종파"가 아닌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느니 진정한 영적 생활을 못한다느니 하는 이야기와, 차별과 배제가 없는 하나님의 평등한 사랑을, 사실 같은 차원에서 논하기조차 어렵지요. 그리고 만법의 연기를 깨닫고 팔정도를 통해 사생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원래 논리와, "49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의 메꿀 수 없는 갭이 벌어져 있는 것이지요. 대다수의 교회나 사찰에서 "신앙"이라고 포장하여 파는 것은, 마사지클럽에서의 "유사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진정한 신앙의 "대체품" 내지 그 수준에도 못미치는 신앙적 "짝퉁 상품"입니다.

그런데 마사지클럽 아가씨가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 아닌 사랑이라고 거짓말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수많은 목사님 분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달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이 분들이 차라리 이미지클럽에 가서 거기에서 진솔함과 겸손함을 배웠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분들께서 "부자가 낙원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충실히 따라 가난은 몰라도 적어도 국내 도시 근로자의 한달 평균 소득인 1,600.000-1,700.000원 정도로 자신들의 소득과 소비를 조절했으면 그나마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결고리가 보였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과연 많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면 지금의 교회가 "사학법"을 갖고 떠드는 대신에 아이들의 인성을 파괴하는 성적, 등수 없애기 운동 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회"/"사찰"이라는 제도상에 이야기되어지고 실행되어질 수 있는 "신앙"과 진정한 신앙의 차이는, 말그대로 이미지클럽과 이도령과 성춘향의 첫날밤의 차이 정도지요. 그러면서도 저 분들은 이 사실을 꾸준히 부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직자들이 "사회적 어른"의 대접을 받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대딸방"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부끄러워하실 것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반론이 가능해요. 대형 교회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성령"을 받아보고 미쳐보는 것이, 마약복용이나 알콜 중독, 인터넷상에 이효리 팬클럽하는 일 등 또 다른 종류의 "자기 물화"보다 낫지 않느냐는 반론이지요. 맞습니다. 비툴어진 사회에서 비툴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하다면 안방 극장과 술보담 교회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거기에 다니다가 아주 광신으로 안나가는 한에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위안"과 진정한 의미의 "신앙" 사이의 차이를 좀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안"이야 교회에서도 사찰에서도 휴게텔에서도 다 가능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어딜 가나 뭘 하나하고 무관하게 자기 안에서의 거짓을 불태우고 자기 바깥에서의 거짓을 적어도 "거짓"이라고 정확하게 부를 수 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 마음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런 민감한 문제(다 알지만 대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가 어젯밤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후'에서도 다루어졌다. 나는 예고편만 보았을 뿐인데, '한국인'으로서의 감각에 따르면 기독교계의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이었다(한기총에서는 이미 방송취소를 요구한 바 있다). 관련기사는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8340§ion=sc4 참조. 방송 내용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의 뉴스엔 기사에 정리돼 있다.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 후’가 국내 대형 교회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을 방송한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큰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뉴스 후’는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라는 제목으로 대형 교회의 세습, 부당한 부의 축적 등에 대해 취재한 내용을 24일 오후 10시50분 방송한다.

취재진에 따르면 K교회 김모 목사는 공금횡령 혐의로 지난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교단 법정은 ‘기소유예’의 면죄부를 안겼고, 김 목사는 아들을 자신의 후임자로 내세웠다. 김 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부정당선자금과 당선 사례금 2억3,000여 만원과 부인 명의 별장 건축비 3억1,000만원, 미국 유학 중이던 큰 사위 생활비 2억원 등 총 30여억원의 교회 공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다. 또 지난 1998년 100% S교회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한 기업체는 이 교회 당회장인 목사의 장남 조씨가 취임했으며 조씨는 수익 부서들을 개인소유회사로 넘기는 방법으로 2년 만에 재벌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조씨는 모두 200여 억원을 탈세하고 횡령한 혐의로 지난 2005년 1월 50억원의 벌금형이 확정됐음에도 벌금을 한푼도 내지 않고 해외로 도피,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취재진은 밝혔다. 조씨는 ‘뉴스 후’ 취재 결과 일본 도쿄의 부자 동네에 살면서 도쿄 소재 S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또 S교회는 미래에 교회 시설을 확충하겠다는 명분으로 경기도 파주에 땅 3만평을 장로들의 명의로 집중적으로 사들였으며 이 가운데 2만여 평이 교회 소유가 아닌 조 목사 개인 소유로 드러났다고 취재진은 전했다. 취재진은 또 “매입 당시 땅값은 평당 1만원이었으나 지금은 최대 60만원까지 급등했다”고 덧붙였다.

취재진은 “조 목사가 교회 돈으로 자신의 부동산 자산을 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을 S교회 측에 제기했으나 교회 측은 토지법상 농지를 교회 재단 명의로 살 수 없어 장로들의 이름으로 매입한 뒤 조 목사 개인 소유로 바꿨다고 해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회측 주장과 달리 농지뿐 아니라 교회 재단 명의로 소유할 수 있는 일반 땅들도 조목사 개인 소유로 바뀐 사실도 드러났다”고 설명했다.(김은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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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를 추적한 BBC 다큐멘터리
톰 라이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예수. 그는 누구인가? 새로운 약속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마가복음 1:1) 예수의 세계를 선포하는 이 새로운 약속(신약)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죄악된 영혼을 구원시킬 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한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필요치 않다. 다만 "그를 믿는가?"의 물음만이 필요했다. 누구도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그가 무엇이기에, 그가 과연 어떠하기에 등의 물음을 가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일 뿐인것이다.

구약의 시작은 이렇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절대적 믿음을 첫장 첫구절에서 강요하고 있다. 이 시작을 받아들인다면, 성경 전체의 그 어떤 기사와 이적을 받아드리지 못하겠는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은 '천지창조'에 비견될 바 못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아들은 그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곧, 구약과 신약은 그 구조가 동일하다. 절대적 믿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첫마디부터 내놓는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작품에서 첫장 첫구절의 시작은 무언가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해하지 못할바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기독교는 믿음을 강요했다. 성경의 독자에게 수많은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것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믿어야 구원받는단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논리적 이해(사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를 쓸데없는 것으로 곧잘 치부하곤 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왜 하나님을, 왜 예수님을 이 땅의 신자들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따질 수 없는가? 신성모독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신성 모독이라면, 신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나는 이 땅의 기독교가 예수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예수가 보여주었던 그의 삶과 사상을 우리가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땅에 육화되어 온 것이 아닌가?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하는 방법으로는, 인간적 방법인 논리적인 이해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 책 『예수』는 그런 논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도와준다. 예수가 왜 이땅에 왔고, 그의 삶과 사상은 어떠하였으며, 성경의 내용을 충분히 따져보면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이다.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사복음서는 그 내용의 차이가 꽤나 많다. 그것을 우리는 대조해 보면서, 인간의 방법, 즉 역사적이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각각의 복음서들에 저자들의 주과적 진술들이 보이게 된다. 마태가 신에 들려 저도 모르게 술술 써내려간 것이 마태복음이 아닌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한 예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되었을 때 예수가 말하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굳은 믿음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역사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각 복음서의 집필자들이 그 복음서의 예상 독자들이 처해있던 상황들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고 있었을까를 상정한다. 그럴 때에 복음서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실증적인가? 과연 이 땅의 기독교는 예수를,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예수에 대한 믿음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허무맹랑하게도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걸 절대적으로 믿으면, 너희에게도 그런 기사와 이적이 이뤄질 것이라고 호도하는 이 종교가, 이제는 예수 '읽기'를 통해서 충분한 이해를 통해 반석위에 굳건한 믿음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이 책은 예수 '읽기'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단숨에 읽고 깊이 음미해야 할 책,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 사족
간혹 많은 분들이 내가 닉네임으로 쓰고 있는 '멜기세덱'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온다. 여기서 시원스레 알려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멜기세덱(Melchizedek) 구약에 잠깐 나타나는 아주 신비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창 14:18, 20; 시 110:4). 그러나 이 사람의 존재 속에는 오랜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고 그돌라오멜과 여러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중에 그를 만났다. 그때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의 십일조를 그에게 바쳤다. 그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것은 주님의 최후의 만찬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이었다(창 14장 참조). 그 후 수천 년이 흐른 뒤 다윗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멜기세덱을 다시 한 번 언급했다(시 110:4).

  예수님과 멜기세덱 :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레위 지파나 아론의 자손이 아닌 '멜기세덱의 제사장'이라고 말했다(히 5:1-10; 6:20). 그리고 멜기세덱은 탄생, 아비, 어미, 족보, 죽음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히 7:3). 이러한 면은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신학적 평가
  신학자들은 멜기세덱을 놓고 오랫동안 씨름해 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멜기세덱을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판정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가 족보 없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1세기에 이 서신서를 읽었던 독자들은 인간의 족보에 대해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론으로부터 내려온 완전한 족보가 없다면 그들은 아무도 제사장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종류의 제사장을 강조하면서 아론이나 레위 반열이 아닌 영원한 제사장 반열인 지극히 높은 제사장 멜기세덱을 바로 예수님의 반열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히 7:4-10).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직접 희생 제물로 드려 더 이상 희생 제사가 필요 없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히 7:26-28).

이상 하용조 목사 편찬, 『비전성경사전』, 두란노, 37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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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17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앞부분에 멜기세덱이 잠깐 나와요. 분위기가 참 신비로웠어요^^

마늘빵 2007-03-1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의미군요. 음. 이 쪽 계열은 영 몰라서.

멜기세덱 2007-03-1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전 코엘료를 읽지 않았거든요. 연금술사에 멜기세덱이 나온다? 신비롭다? 마노아님 때문에라도 읽어봐야 할려나....ㅎㅎ
아프락사스님> 제가 쓰이기에는 너무나 크죠! 이쪽 계열도 알고 보면 재밌을거 같아요..ㅎㅎ

Jeanne 2007-06-05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평신도 사역자양성' 이라고 해서 부지런히들 교육하고 있지 않나요?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로 압니다... (전 학교에서 배웠지만요)
(태클 아니에요...;)

멜기세덱 2007-06-0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세요. '평신도 사역자양성'이 얼마나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할런지는 의문이고요,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성경의 '무오류'성을 곧이 곧대로 믿고있다고 판단이 됩니다. 성경 해석의 권위가 여전히 성직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