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한국을 바꾼 지식인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을 그만 옮겨올 생각이었지만 내일자 조간에 실리는 내용은 그런 생각을 접어두게 한다. 무엇보다도 설문조사에 근거한 데이터이기에 '한국을 바꾼 지식인'이란 타이틀만큼이나 흥미를 끌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저술들의 목록도 일별해 볼 만하다.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2825).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0년대 강준만 등장

전통적 지식인이랄 수 있는 세 지식인의 틈새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전북대 교수 강준만(51)의 약진은 변화된 지식인 지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10명의 응답자가 그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았으며 그가 글을 쓰는 잡지 ‘인물과 사상’은 6명이 영향력 있는 저술로 꼽았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의 민감 이슈를 도발적인 문체로 제기한 ‘게릴라 지식인’이었다. 모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인물과 사상’은 강준만 1인이 글을 쓰고 출판하는 독특한 체제도 관심을 끌었지만, 거침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전방위적 비판으로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강준만은 “진의가 왜곡되기 쉽다”며 기자들의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팩스 또는 e메일로만 외부와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회적 개입은 책 쓰고 신문에 기고하는 것으로만 한정된다. 강준만은 언젠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등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칼날 화법은 어느 순간 많이 순화된 것이 사실이다. 1인 출판으로서의 인물과 사상은 지난 2005년 막을 내리고 지금은 다수 필자가 참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지식인들은 몇 년 못가서 초기의 기개와 전의를 크게 상실했는데 이는 기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무응답과 외면에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수 지식인으로는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복거일(소설가) 이문열(소설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과학자로는 임지순(서울대 교수)과 황우석(전 서울대 교수)이 거명됐으며 김대중(전 대통령), 기업인 황창규(삼성전자 사장)를 선택한 이도 있었다. 영향을 준 지식인을 국내·외 구분 없이 물었기 때문에 해외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새뮤얼 헌팅턴,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꼽혔다.(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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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서 어린이책잔치가 있네요. 어린이날 즈음해서 아이들 데리고 놀러가시면 좋겠어요. 구경도 하고, 책도 사고...ㅎㅎ 아이들에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듯합니다.

2007 파주출판도시 어린이책잔치
 

창비 어린이책 3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한
전시와 연극 공연에 초대합니다.

1977년 처음 펴내기 시작한 창비 어린이책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창비는 지난 30년 동안 『몽실 언니』 『괭이부리말 아이들』 『문제아』『짜장면 불어요!』 같이 꾸준히 사랑받는 창비아동문고에서부터 ‘재미있다!우리고전’ 씨리즈, 동시집, 어린이교양서, ‘우리시그림책’ 씨리즈까지, 우리 어린이들에게 깊이 있고 다양한 읽을거리를 선물해 왔습니다.
2007 파주출판도시 어린이책잔치를 맞아 창비는 지나 온 30년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돌아보고, 어린이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선물해 주기 위해 「창비 어린이책 30주년 기념전」을 마련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5월, 책향기 가득한 파주출판도시에 오셔서 창비와 함께 뜻깊고 재미난 시간 보내세요.

  • 기간: 5월 4일(금)~13일(일) 오전 10시~오후 5시
  • 장소: 파주출판도시

1. 어린이연극『초정리 편지』공연
제10회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창작부문 대상작 『초정리 편지』로 만든 어린이연극.
석수장이를 꿈꾸는 소년 ‘장운’에게 난생 처음 보는 글자를 가르쳐 준 토끼 눈 할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조선시대 초정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재미난 이야기 속에서 한글창제의 비밀을 만나보세요.

  • 일시: 5월 6일, 13일 오후 3시(공연시간 40분)
  • 장소: 파주출판도시 창비 사옥 뒤뜰 무대
  • 공연: 극단 사다리

    2. 창비 어린이책 30주년 기념 전시
    첫 번째 창비 어린이책 『꼬마 옥이』의 초판본부터 근래에 출간된 그림책까지, 책과 원화, 육필원고 등에 담긴 창비 어린이책 30년 역사를 만나보세요. 30년을 함께 일궈 온 작가와 편집자, 어린이독자의 인터뷰를 담은 동영상과 책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 동영상도 함께 상영합니다.

    창비 어린이책 30주년 기념 엠블럼
    • 일시: 5월 4일(목)~13일(일)
    • 장소: 파주출판도시 창비 사옥 2층 전시장
    • 내용: 책, 그림, 동영상으로 만나는 창비 어린이책 30년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동영상 상영

    3. 창비 어린이책 특가 판매
    창비 어린이책을 특가에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예쁜 그림책 포스터와 엽서를 드립니다.

    • 일시: 5월 4일(목)~13일(일)
    • 장소: 파주출판도시 창비 사옥 입구 판매전시장
    * 공연과 전시 모두 무료 입장입니다.

    * 파주출판도시 어린이책잔치 공식 홈페이지(http://www.pajubfc.org)에서 장소 및 교통편, 다양한 행사 내용을 더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주)창비 어린이책출판부
    http://www.changbikids.com

* 공연 후 추첨을 통해 『초정리 편지』를 선물해 드립니다.

[창비 어린이책 30주년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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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
시정곤·정주리·장영준·박영준·최경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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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어 '열풍' 비슷한 바람이 불었다. 특히나 출판시장에서 그 바람은 거셌다. 현 사회의 이슈를 알아보려면 서점엘 가보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 관련 도서들이 즐비한 것을 보면 바람이 분 건 확실한 것 같다. 왜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니, '대입 논술'이라는 유난히 민감한 문제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도서들이 작문·논술 관련 참고서였지만, 그와 더불어 잘 포장된 문법책들, 한국어 어휘 관련 도서들도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 나왔다.

최근에 대학에서 영어 강의 비중을 대폭 늘리겠다는 발표들이 잇다르면서, 이제 이슈는 '영어'로 귀향한 것 같다. 영어는 항상 우리 사회에서 대접받는 손님, 아니 주인이었다. 이런 발표에 따라 우리 사회는 다시 영어 문제로 민감해졌고, 각종 방송 뉴스, 토론의 주제로 다뤄지면서 바람에 날개를 달았다. 영어를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21세기가 왔고,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대학의 영어 강의 비율을 대폭 늘리고, 나아가 잠시 고개 숙인듯 했던 영어 공용어화의 필요성도 언급된다. 그래서일까? '한국어 소멸'의 위기감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언어는 생성, 발전, 소멸한다. 마치 인간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 지금까지 많은 언어들이 생성(발생)됐고, 많은 언어들이 발전했으며, 또한 많은 언어들이 소멸했고, 소멸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언어의 생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은 아닐까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는 언어가 소멸되는 단계, 그러면서 몇 개의 언어로 정리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학계의 보고에서도 어떤 언어가 새로이 생성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수 천 개의 언어가 사라졌고,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한국어도 예외일 수 없다는 위기감은 항상 있어 왔으나 최근 다시 머리를 들이 밀고 있다. 왜일까?

한국어 '열풍' 비슷한 바람이 불었고, 다시 '영어'에 자리를 내주는 형세에 대한 반발에서 국면 전환의 전략일까? 말하자면, 출판 업계의 음모설 정도?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이지만, 한국어 소멸 위기를 말하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음모설 주장 만큼이나 좀 헤픈 느낌이 든다. SBS의 <웃찾사>의 한 코너에 이런 개그가 있다. 얼핏 어리숙하고 모자라 보이는 학생(주인공)이 다소 불량스러워 보이는 학생 둘이 나와 개그를 하는데, 불량 학생이 이렇게 말한다. "너 나한테 맞으면 죽어!" 정상적이라면 여기서는 쫄아야 맞겠지만, 이 개그의 웃음의 묘미는 이런 반전에 있었다. "에이!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나요." 이 개그에서처럼의 웃음을 주진 않지만, "한국어가 곧 죽을 것이다."라는 말에 "에이! 한국어가 그렇게 쉽게 죽나요."라는 대구를 해주고 싶은 것은 왜일까?

이 책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은 사실 1998년 복거일이 영어공용어화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에 대한 반론의 제기의 성격을 띄고 기획, 출간된 것이다. 여기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면, 이렇게 되고, 이런 문제들이 생기고, 이렇기 때문에 한국어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럼 또 이런 문제들이 있고 등등, 그런데도 영어 공용어를 하겠다는 것이냐? 이런 문제를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논하고 있다.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지 않듯이 한국어도 이 책에서처럼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그만큼 이 책의 주장들, 상상의 상황들이 다소 과격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상상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분명 언어는 안쓰면 사라지게 돼 있다. 박물관에 보존된다고 해서 그 언어가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공용어화는 결국 한국어의 소멸을 야기하게 될 것은 자명한 결과라고 하겠다. 하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기까지, 또한 영어 공용화 정책이 성공하기까지도 그리 쉬운 문제일 것 같지는 않다. 우리말이 사라지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체성을 잃는다는 협박성 발언도 이제는 식상하다.

한국어가 사라진다, 그렇지 않다는 입장들을 좀 차지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영어 공용어화가 한국어를 살아지게 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영어 공용어화가 그렇게 필요한 것일까를 우선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본다. 영어가 왜 필요한가? 공용어, 나아가 모국어로서 영어를 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문제들에 차분하고 냉철하게 판단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 문제는 전문가들에게 숙제로 주면 좋겠다.

나는 기실 영어 공용어화를 절대 반대한다. 왜냐하면 나는 영어를 못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써는 영어를 못해도 하등의 지장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근데 이런 사람이 비단 나뿐일까? 나뿐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영어가 싫고, 영어 공용화를 그렇기때문에 반대한다. 옛날 얘기 잠깐 하자면, 중학교 2학년때 지독한 영어 선생의 무지막지만 영어 단어 시험에 질려 그때부터 영어와 결별을 선언했다. 쪽지 시험을 통과 못하면 죽어라 패는데, 제깐엔 어케 통과나 해보자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영어 단어를 적어 놓고 컨닝을 하다고 들켜 정말 죽어라 맞은 안 좋은 추억이 있었더랬다. 하여간 영어가 나는 싫다.

그러나, 나는 영어를 배우고 싶다. 그리고 중국어와 일본어, 여력이 된다면 독일어나 프랑스어 등을 배우고 싶다. 나아가 희랍어나 라틴어 등도 배우고 싶다. 독서를 하면서 이런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나는 영어가 너무 싫지만, 내가 필요로 하고 그럼으로써 노력하여 배우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목적은 영어로 된 책을 잘 읽는 것이다. 중국어를 배워서 한시를 멋드러지게(한시를 중국어로 읽으면 운이 산다.) 읊어보고 싶다. 일본어는 배우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유럽 여행을 가보고 싶은데, 유럽의 한 나라 정도 언어를 배우고 싶다. 배우고 싶은 열정을 가진다면 그깟 언어 하나쯤은 충분히 익힐 수 있다는 자만이 나에게는 있다. 그런데 영어공용어화라? 뭘 그렇게까지.

우리 사회는 영어를 잘할 필요성이 있다.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큰 이유다. 직장에서도 영어를 강조한다. 그런데 따지는 것이 영어 성적이다.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공용어가 영어가 아니라서 우리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대하는 우리 마음가짐의 문제이고, 교육의 문제이고, 사회제도의 문제이다. 그런 것을 바꿀 따름이지, 영어 공용어화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네덜란드의 택시기사는 5개국어를 하는 모습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외국어의 필요성에 따라 언어를 배우고 익혔을 뿐이지, 대학입시, 취직을 위해 영어성적 따기에 심취한 것이 전혀 아님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소리만 잔뜩 했다. 이 책의 다소 과격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의 '영어'가 어떻게 잘못 걸어 왔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 많이 담겨 있다. 저자들의 의도는 한국어 사멸의 시나리오 작성에 있었겠지만, 그런 "쉽지 않은 죽음" 보다는 오히려 이런 쪽에서 나에겐 도움이 된 듯 하다. 다양한 자료들이 풍성한 것을 장점이라고 해야겠다. 참고로 영어공용어화 논쟁의 추이도 이 책을 통해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겠다. 어떤 허무맹랑한 주장과 반박, 논쟁이 오고가는지 따라가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로 추가할 수 있겠다. 

p.s. 사람이 쉽게 죽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자릴 빌어, 무참하게 죽어간 미국의 젊은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그런데, 미국 청년들의 죽음만 안타까울까? 총이 아닌 최첨착 무기로, 대형폭탄으로 수십명, 수백명이 죽어간 소식을 간간히 뉴스단신 정도로 전해져 올때 나의 마음이 씁쓸한 것은 왜일까? 모든 죽음은 슬프다. 지나치지 않다면 한국어 사멸의 위기에 대한 경각심은 무용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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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21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공용화에 관한 가장 읽기 쉬운 책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이 책만으로는 양쪽 모두의 의견을 듣고 비판하기는 힘들죠. 저도 영어공용화 반대입니다. 필요한 사람들은 그 분들만 자체 공용어화 하시면 됩니다. 필요없는 이들에게까지 강요할 건 아니죠. :)

멜기세덱 2007-04-2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소설에선가, 영화에선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아빠, 엄마, 딸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는 모습. 그런 것도 재밌을거 같아요. 다양한 여러개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적, 인식적 풍성함을 준다고 생각해요. 영어공용어화보다는 다양한 언어 교육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네요.
 

'시간강사 제도'에 대한 칼럼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시간강사 제도'가 아직까지도 근본적 해결없이 지속되어 온 것은 분명 고등교육기관이라는 '대학'의 야만성과 폭력성, 그리고 악질 자본주의적 사고에서 기반한다고 본다. 분명 미미한 하나의 변화의 단초이지만, 이 기회를 통해서 하나하나 '근본적인' 해결로 나아갔으면 한다.

  '시간강사 제도', 근본적인 기로에 서다
  [김명인 칼럼]'겨우 존재하는 사람들'과 대법원 판결 2007-04-16

 세상에는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인들이며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령과 같은 불안한 존재들이다. 이를 테면 고학력사회 속에 섬처럼 살아가는 고졸자, 혹은 그 이하의 저학력자들이 그렇고, 농촌 노인들이 그렇고 점점 늘어가는 실업자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고 중요한 노동력이자 생산력 기반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 지상에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물질적, 정신적인 소외와 고통은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갚아야 할 잠재적인 빚으로 쌓여가고 있다.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 대학 강의의 40%를 책임 지다
  
  여기 또 하나의 겨우 존재하는 인간군이 있다. 그들은 시간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2005년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는 약 5만 명의 시간강사들이 존재하며 한국 대학의 시간강사 의존율은 40퍼센트라고 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5만 명의 시간강사들이 현재 한국의 대학교육의 40퍼센트를 감당하는 고등교육의 중추적 주체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출석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사람들 열 명 중의 네 명이 그들인 셈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학력과 학식, 그리고 인격에 관계없이 그 점에서 시간강사는 누구나 똑 같다. 강의실에서는 엄연히 '교수님'이지만 강의실 바깥에 나서는 순간 그들은 마치 허방을 밟는 것처럼 존재의 불안정 상태에 빠지게 된다.
  
  대학에 따라서는 이들에게 휴게실이나 연구실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겉치레에 그치고 교직원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하기는 하지만 도서관 이용은 제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약간의 권리라는 것도 학기 중에 한할 뿐 그들이 아무리 한 대학에 오래 출강했다고 하더라도 방학 중에 그들의 대학 내 신분은 제로 상태가 된다. 대학에서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교수-교직원-학생-비정규 일용직(경비, 청소직 등)의 다음 서열로 최하층에 속한다. 그들은 계절적 일용잡급직인 것이다. 학기 중에 주어진 시간만큼 강의를 하고 그에 해당하는 강사료를 받는 것, 오직 그것만이 그들이 대학과 맺는 관계의 전부이고, 그 외의 부분에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대학은 그들을 철저히 타자로 만든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강의가 끝나자마자 보따리를 싸서 이 낯선 공간을 어서 떠나는 일뿐이다.
  
  그들이 대학 안에서만 불안한 것은 아니다. 대학 밖에서도 그들의 불안은 그대로 이어진다. 시간강사라는 직업(?)은 그저 명예직이고 어엿한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은 예외이지만 강사료를 기본수입으로 하여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강사들의 대학 밖 사회 속에서의 존재 형태는 좋게 말해서 프리랜서고 솔직히 말하면 비정규직의 최악의 형태인 시간제 일용노동자(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그 불안한 시간강사 직조차 안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못해서 그들은 그 어떤 생활상의 장기계획도 세울 수 없다. 그저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한 학기 두 학기를 근근히 살아 나갈 뿐이다. 간혹 주 20시간 이상, 심지어는 3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강의를 하는 이른바 '강사재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재벌은 커녕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강의에 의존하는 눈물겨운 슈퍼맨들이며 그런 기회 역시 결코 안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할 수 있을 때, 자리가 있을 때 거의 필사적으로 벌어두자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삶은 불안에 피폐까지 더한 것이 된다.
  
  '시간강사' 제도,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다
  
  며칠 전 대법원에서 시간강사들을 근로자로 인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산재보험료를 납부하는 것(대학에서 시간강사들의 산재보험료 일부를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재판의 원고는 일부 사립대학들로 그들은 시간강사가 학교당국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고정급여를 받지 않으며 소속이 없기 때문에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간강사의 근로자성을 부인하고 그에 따라 대학은 그들을 위한 산재보험료 부담의무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바로 그 논리야말로 그들의 열악한 비정규직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반론을 세워 원고 패소 판결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시간강사의 근로자성(노동자적 본질)을 명확히 한 이 판결은 그러나 시간강사 문제의 매듭을 지은 판결이 아니라 시간강사 문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간강사 제도는 시간강사는 근로자가 아니라는 허구적 전제 위에서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제도이기 때문에 시간강사도 근로자라는, 그것도 아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인되고 그 전제 아래 시간강사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하면 그 제도는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강사가 조만간 전임교수가 되기 위한 일종의 도제 혹은 연수과정이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지금도 일부 명문대나 지방 국립대 등의 일부 학과의 경우 그런 관행이나 인식이 아직 현실성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만간 전임교수가 될 예비교수로서의 시간강사는 아무리 근로조건이 열악하고 강사료가 적다고 해도 일종의 통과의례 삼아 시간강사 기간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학의 수도 늘어나고 대학생 수도 늘어나 대학이 과거의 엘리트 교육기관이 아니라 대중교육기관으로 변신하게 되면서 대학은 늘어나는 교육수요의 처리를 저임금 시간강사들에게 분담시키게 되었고, 이는 점점 하나의 관행이자 제도로 굳어져 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5만의 시간강사가 전체 대학교육의 40퍼센트를 감당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수천만 원에 이르는 대학교수 1인의 연봉으로 최소한 서너 명의 시간강사에게 연간 강사료를 지급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대학들이 이 좋은 제도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대학들은 시간강사들에게 '조만간 전임교수가 될 예비교수들로서 당신들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돈을 주어 가면서 오히려 교육훈련을 시켜주는 것'이라는, 결국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다'는 이데올로기 아래서 사실은 학문후속세대들의 고급 학술・교육 노동력을 고도로 착취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의 난립과 학위의 남발로 한편으로는 비싼 대학원 등록금을 받으면서 저임금 시간강사 예비군을 넉넉하게 확보하는 정책 또한 지속해 왔다.
  
  그 결과 학문후속세대로서의 시간강사들은 저임금과 불안한 생활에 쫓겨 창의적 연구와 학문선배들에 대한 선의의 학문적 경쟁의 기회를 잃어 가고, 전임교수들은 전임교수들 대로 전임동료들의 항상적 부족으로 교육, 연구, 행정부담의 3중고에 시달려 대학교육의 질은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말은 이젠 지나가건 소도 웃을 말이 되어 버리고 지성의 깃발이 펄럭임을 멈춘 곳에서 경쟁적 시장주의가 대신 준동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놈의 경쟁력'을 온전히 갖추기 위해서라도 지금과 같은 시간강사 제도라는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노골적 착취제도는 근절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쟁에는 '생산적 불안'이 필요한 법인데 시간강사라 불리는 수많은 학문후속세대들이 생산적 불안에 사로잡힐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고 '생존적 불안'의 바다 위를 떠도는 상황에서 한국 대학의 세계적 경쟁력 싸움은 처음부터 지는 싸움일 수밖에 없다.
  
  대학 사회의 '비열한 안정' 뒤흔들 투쟁이 다가오고 있다
  
  시간강사는 비정규직 근로자다. 대학과 국가가 이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대학과 국가에게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하나는 시간강사 제도를 폐지, 혹은 최소화하여 현재의 시간강사들의 대다수를 일정한 유예기간과 평가과정을 거쳐 정규직 교육노동자, 즉 전임교수로 광범하게 채용하면서 대학교육체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간강사 제도를 유지하되 그들에게 전임교수들에게 버금가는 당당한 교육노동자로서의 지위와 대우, 그리고 복지혜택을 제공하여 그들의 불안한 삶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당연히 현재의 대학원 교육체계와 학위부여 제도의 획기적 변화도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과 함께 이제 시간강사 문제는 하나의 사회적 이슈로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특히 올해 7월부터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면 2년 뒤 시간강사들 역시 해고냐 정규직화냐 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상태로 간다면 지금은 대학사회의 그늘에서 불안 속에 그저 겨우 존재해 왔던 그들은 더 열악한 존재의 불안상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이 이제 더 이상 '겨우 존재하는' 상태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희생 위에 존재해 온 대학사회의 비열한 안정을 뒤흔드는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감을 회복하는 길로 나서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시간강사의 현실에 대해서는 여러 채널을 통해 박노자 교수가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 문제는 대학당국과 시간강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 정규직 대학교수들의 무게있는 발언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김명인 교수의 이 칼럼은 그런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남의 일이 아닌 시간강사의 문제를 더이상 우리 대학사회의 정규직들이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럴때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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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1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근본적인' 시정이 필요하죠. 잘 보았습니다. 담아갈게요~
 

'글字'냐 '글짜'냐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말을 글로 적는 것(표: 부호)을 우리말로 '글자'라고도 하고, 그것을 우리말이 아니고 '글+字'로 이루어진 '글字'라고도 한다.

문제는 '글자'냐 '글字'냐 하는 시비보다 더 급한 것이 그 적기다. 어떤 쪽으로도 '글자'로 적고 있는데, 그 소리가 [글자]가 아니고 [글짜]이어서 그 적기를 '글자'로 하느냐 '글짜'로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字'가 말밑이라면 '글자'로 적고, 말밑이 아니라면 '글짜'로 적기로 되어 있는 것이 한글 맞춤법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전들의 적기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문세영『조선어 사전』(1938), 이윤재『표준 조선말 사전』(1947), 한글 학회『큰사전』(1957) ·『우리말 큰사전』(1992), 북한『조선말 대사전』(1992) 들에는 '글자'로 우리말로 다루었다. 또 하나는 조선총독부『조선어 사전』(1920), 민중서관『국어 대사전』(1961), 삼성출판사『새 우리말 큰사전』(1974), 민중서림『국어 대사전』(1982), 연세대학교『한국어 사전』(1998), 국립 국어원『표준 국어 대사전』(1999) 들에는 '글字'라고 반한자말로 다루었다.

『두시언해』초간본(1481) 16권 15쪽에 "글ㅈㆎ(字ㅣ)",『번역소학』(1518) 8권 16쪽에 "글ㅈㆍ 긋(字劃)",『신증유합』(1543) 상권 1쪽에 "字 글ㅈㆍㅈㆍ"들이 '字'를 '글ㅈㆍ(글자)로 적고 있으나, '글字'식 적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한자밖에 모르던 이들이 '글자'를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다. 『금강경 삼가해』(1482) 5권 8쪽에 "구름 가운데 기러기는 두어 줄 글字를 스고(雲中鴈寫數行字)라는 것이 있다. 원문의 '字'를 '글字'로 옮긴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한나라'(우리나라)를 '한國'으로 적는 것이 "한이라는 國"이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글字'가 "글이라는 字"라면 말이 안 된다. 그러면 '글字'가 "글을 적는 字"라면 말이 되는가. 이것도 말이 안 된다. 그것은 '字'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字'를 새겨 읽을 때 "글자 자"라고 하는데, 그때 그것이 '글자 字'일까 '글字 字'일까? 다른 보기를 들어 보자. '瓦'가 '기와 瓦'일까 '기瓦 瓦'일까. '件'이 '물건 件'일까 '물件 件'일까. '巾'이 '수건 巾'일까 '수巾 巾'일까. '樣'이 '모양 樣'일까 '모樣 樣'일까. '全'이 '온전 全'일까 '온全 全'일까. '檎'이 '능금 檎'일까 '능檎 檎'일까.『훈몽자회』(1527)에 옛말로 '닝금 檎'이라고 했다. 덧붙이건대, '곡식 穀, 기운 氣, 보배 寶, 아이 兒, 재주 才'를 '穀식 穀, 氣운 氣, 寶배 寶, 兒이 兒, 才주 才'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 국어사전들의 '邊두리, 醜접, 缸아리'도 '변두리, 추접('주접'의 거센말), 항아리'로 적어야 한다.

'글자 · 글字' 문제는 '글字'가 아니라 '글자'라는 것이다. 사전들의 올림말 '글자'에 [-짜]라는 소리 표시가 붙어 있다. 그게 아니다. '글자'가 우리말이면 소리만 [-짜]가 아니라 '날짜'처럼 낱말 자체가 '글짜'인 것이다.

우리말 '글짜'의 '글'은 '글발, 글씨, 글월' 들의 '글'이다. '글짜'의 '-짜'는 '가짜, 공짜, 날짜, 대짜, 말짜, 민짜, 별짜, 뻥짜, 생짜, 알짜, 얼짜, 정짜, 조짜, 진짜, 통짜, 퇴짜' 들의 '-짜'이다. 이 '-짜'는 '것'이나 '물건' 또는 '일' 따위 뜻의 말조각이다. 따라서 '글짜'는 '글字'가 아니라, 글을 적는 '-짜'다. 그 '-짜'는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날짜'(날을 적은 것)와 '글짜'(글을 적은 것)는 같은 유형이다.

<한글새소식> 416호(2007.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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