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확산 민중이 대항하자”/김명인 인하대 교수

“1987년은 부르주아민주혁명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부르주아민족국가는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의해 사실상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열린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의 여섯번째 토론회가 23일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당에서 개최됐다.

발제자로 나선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다시 민중을 부른다’라는 발표문에서 1987년 6월항쟁 이후 20년을 한국이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분석하고 반신자유주의 운동을 펼치기 위해 민중 개념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자본화되지 않는 모든 인간은 사회 밖으로 내몰린다.”며 “오늘날의 극단적 양극화와 불평등, 경쟁주의는 신자유주의 시장독재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노동계급의 분발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상황”이라며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주체를 구성한다는 맥락에서 민중개념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탄생해 1970,80년대에 발전한 ‘민중’ 개념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이면서도 억압적인 사회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포함한 개념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1970∼80년대의 민중개념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장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 인민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상당한 적합성을 지닌다.”고 평가했다. 이어 “정규·비정규 노동자계급, 농민, 도시빈민, 이민자 등 신자유주의 시장독재체제의 희생자들이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반신자유주의 연합을 이뤄 세계적 규모의 저항운동을 펼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전망이고 희망”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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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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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전까지 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여행하고 오는 참이다. 단 한 사람을 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 혼란과 무질서와 더러움과 굶어 죽어 지독한 썩은내가 진동하는, 굶주린 개와 고양이가 죽은 시체를 물어뜯는, 그런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긴장감과 지독한 더러움과 냄새를 참아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고난의 여행이다. 난 지금 그 여행으로 충분히 지쳐있으면서도 이렇게 즉각적으로 리뷰를 끄적이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그런 긴장과 괴로움은 해체되지 않았으며, 자칭 눈 뜨고 있다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눈먼 자들이 주는 어떤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도중,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불에 멈춰선 김에, 보는 능력도 멈춰 서버렸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시작으로 한편 그를 도와주면서 그의 자동차를 훔친, 그러나 그의 눈멂까지도 훔쳐버린 눈먼 자동차 도둑. 첫 번째로 눈먼 남자를 진찰한 의사, 그에게 진찰받은 아이, 노인,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이들은 눈 멂은 전(全)도시적으로 전염되어버린다. 이른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된다. 그러나 그 도시에 단 한명의 눈뜬 자가 있으니, 의사의 아내는 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이단아가 된다. 모두가 눈이 멀었을 때 단 한 명의 눈뜬 자는 타자일 수밖에 없겠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할까?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우리가 눈을 떴다고 우쭐대지 마라. 너희들의 눈뜸은 눈 멂만 못하느니라. 우리가 확실히 이 세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온통 하얀 백색의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너희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의 진실, 이 사회의 본질,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지극히 하얗게 바라보는, 백색 악의 질병, 곧 눈멂의 상태에 갇혀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눈 크게 뜨고 우리 현재를 잘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눈뜬 자들의 삶의 모습과 세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다만 눈뜸과 눈멂의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를 부각시킨다면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되겠다. 다만 환상적이든 그렇지 않던 간에, 리얼리티는 이 소설에 살아있다. 우리 눈뜬 자들의 도시는 여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올곧이 그려져 있다. 너무나도 리얼리티하게 말이다.

 

  눈이 먼 사람들은, 그들의 눈멂이 위험한 전염병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들은 통제되어지고 감시되어진다. 이것은 곧 이 사회의 눈뜬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우리 눈뜬 자들은 이 사회적 정치적 체제 속에서 감시되고 통제되어진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외곽에서는 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다. 다만 그들은 우리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고 거짓말 치고 있을 뿐이다. 이 통제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인격적, 수많은 非적 행위들은 또한 우리 눈뜬 자들의 공간에서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오히려 눈뜬 자들의 공간에서보다 더 잔인하게, 더 다양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런 의식 이면에는 인간의 본질적 삶의 방식 혹은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로 눈먼 남자의 자동차를 훔친 도둑이 눈먼 자들 중에서 가장 첫 죽음의 희생자로 기록되어짐으로써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인간적 본질, 곧 인간적 윤리의식과 도덕의 본질은 바로 이런 보편적 권선징악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의 순간에 개과천선의 태도를 보인다. 이것 또한 보편적 개념의 윤리의식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주의 깊게 볼 대목 중의 하나는 바로 눈먼 자들의 눈먼 자에 대한 약탈과 강간이 아닐까 한다. 눈먼 재소자들에 대한 눈뜬 군인들의 무차별적 총알 세례와는 또 다른 방식의 우리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인간의 지배욕과 탐욕, 그리고 모든 비인간적 요소를 작가는 이 상황에 담아 재현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죄악의 모습, 현대 사회체제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러한 약탈과 강간을 우리는 이 소설적 사건에서 축약과 상징적, 비유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눈뜬 자들의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사라마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희망적 요소를 가지고 있을까? 거두절미 하건대, 주제 사라마구는 무엇보다 의사의 아내의 희생적 행위와, 인간적 연대와 유대를 그 희망, 곧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 본질의 회복의 희망적 요소, 원인자로 보고 있다. 그렇다. 이 아가페적 사랑의 희생과 인간관계의 연대와 유대는 이 소설의 다양한 장면에서 보이는 약탈자와 지배자들, 탐욕과 권력의 이합집산과는 그 본질적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연대요 유대인 것이다. 그것이 있기에 우리 눈뜬 자들의 도시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우리 눈뜬 자들의 이 도시 어딘 가에도 ‘의사의 아내’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작가의 개입이다. 적당한 용어를 찾자면 편집자적 논평 비슷한 것도 삽입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끝자락에서 첫 번째로 눈먼 남자의 집을 찾아가서 만난 작가인 눈먼 남자가 바로 주제 사라마구의 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장면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이 먼 세 가족이 움직였다면 이산가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함께 움직여야 마땅하건만, 눈먼 작가 남자만 남과 여자인 아내와 딸만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얻기가 어렵다. 결국 작가라는 인물과의 만남은 이 소설에서 불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편집자적 논평의 성격을 띤다면 얘기는 다르겠다.

 

  이 장면에서 작가라는 인물은 주제 사라마구의 가면이다. “내가 여자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내 아내와 두 딸이오, 내 말은 언제 여자들이라는 말을 쓰는 게 좋은지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한다는 거요, 나는 작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 낯간지러운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상상해 보라, 작가가 내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주제 사라마구는 작가라는 인물 설정을 통해 작가라는 존재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 살짝 언급한다. “이제 아무도 그걸 읽을 수 없소, 따라서 그 책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눈이 먼 독자들에게는 더 이상 작가라는 존재는 의미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 우리 눈뜬 독자들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사라마구의 쓴 소리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집에 이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결국 이 세상에 이성이 없는 비인간들에게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란 삶에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인내나 얻는 사람”이기에 그는 여전히 작가적 삶을 위해 인내하고 있는 것을 지도 모른다. 이런 소설을 통해 세상 사람들, 곧 눈을 뜨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호소하면서 말이다.


  “지금 이대로 살아가자는 거요, 지금은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소, 나는 내 아파트가 어떻게 되는지 계속 주의 깊게 지켜볼 생각이오, … 방금 또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 당신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이곳에 당신네 손님으로 사는 거요, 이곳은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을 만큼 넓으니까”


  여기에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대로 살아가자’는 것은 곧 의사의 아내를 중심으로 한 7인의 연대와 유대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또 다른 연대와 유대를 이루고 살아가자는 것이 된다. 곧 첫째도 연대요, 둘째도 연대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사라마구가 말하고 있는 이 눈 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 눈먼 현대인들에게 말하는 본질적 눈 뜸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요소는 이런 작가의 개입이 이 소설의 리얼리티, 혹은 온 도시의 사람들이 눈이 멀었다는 비현실적인 논리를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화 시켜 받아들이도록 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지금 책을 쓰고 있소”라고 말하면서 마치 작가 자신이 이 환상적 현실을 경험하여 진술하고 있다고 여기게끔 독자들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함정은 “작가란 다른 사람들과 똑같소, 모든 것을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소, 따라서 물어보아야 하고 상상해야 하오.”라는 서술을 통해 살짝 피해갈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 의해 쓸려면 똑바로 쓰라는 호통을 듣기도 한다. “말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따라서 그런 형용사들은 우리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아실 거예요”라고 소설 똑바로 쓰라는 호통이다.

 

  이상의 것들 이외에 이 소설은 재미있는 요소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본질적 문제의식, 그리고 보편적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작가의 문체에서도 독자로 하여금 소설적 상황을 보다 사실적으로 혹은 몰입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문장부호의 극소적 사용이다. 특히 대화의 상황에서 대화를 나타내는 “”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다만 반점만을 찍고 있는 점이다. 문자 기호 자체가 시각성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이 소설적 상황과는 적절한 배합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이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자기호의 시각적은 극단적으로 해체시키면서, 말하자면 대화를 문장부호를 사용하여 처리할 경우의 시각성을 없애버림으로써 소설적 상황에 독자로 하여금 일부분이나마 체험하게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작가의 문체적 특성에 기인하면서 작가의 주도면밀한 소설적 구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러모로 좋은 작품을 읽는 기쁨이 남는다. 우리 사회에 대한 주제 사라마구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면모는 이 작품 하나만을 읽어 본 나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주제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을 사라, 마구! 곧 마구 사서 읽으라는 암묵적 강요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리라. 우리 사회의 내면적 눈먼 장님들인 우리들에게 세상을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회복하여 진정한 눈을 뜨도록 요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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翰墨游戱(한묵유희)

  • 翰 편지 한, 글 한, 줄기 간
  • 墨 먹 묵
  • 翰墨 문한(文翰)과 필묵(筆墨)이라는 뜻으로 문필(文筆)을 이르는 말
  • 游 놀 유, 헤엄칠 유
  • 戱 놀 희, 연극 희

 


 

제 사무실 벽면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알고보니 20년도 더 먹은 글귀더군요.

며칠 전 학교 축제 때 대선배님이 오셨는데, 이 글귀를 자신이 써서 걸어놓은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대학때부터 서예를 좋아하셔서 선생님을 하시는 지금도 서예와 서화를 하신답니다.

그래서 새삼 다시보게 되었는데요, 이 글귀 '翰墨游戱'.

翰墨의 뜻은 문한과 필묵을 합쳐 이르는 말인데요, 문한은 글이나 글을 짓는 사람을 뜻하고, 필묵은 붓과 먹, 그러니까 글이나 서화의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둘을 합쳐 문필(文筆)이라고도 한답니다.

그러니까 한묵(翰墨)이라는 것은 글을 쓰거나 서화를 그리는 일이나, 그러한 일을 하는 선비들 혹은 서생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네요.

유희라는 말은 논다는 뜻이니까요, 한묵(翰墨)으로 노닐다(游戱)는 의미가 되겠네요. 글을 짓거나 서화를 그리면서, 그것을 유희로 여기고 즐기고 노는 사람들을 이르는 뜻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서화를 그리고, 대나무, 매화도 치고...ㅎㅎ

오늘날 이 한묵유희(翰墨游戱)하는 사람들을 찾는다면

여기 알라디너들을 꼽을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한묵유희(翰墨游戱)의 진수를 보여주는 분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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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한묵유희라. 생소하지만 저도 동감입니다. :)

비로그인 2007-05-2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렇군요 고상한 표현 딱 맘에 드는데요 :)

비로그인 2007-05-23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 ! (탁)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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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학교 후문가에 장미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어버이날도 지났고, 스승의 날도 지났는데, 아직 뭐가 남았길래 꽃타령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하긴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은 카네이션으로 불이 났을 것인데, 오늘은 장미 한 송이 송이들이 어여쁘게 포장되어 거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아직도 꽃 줄 날이 남았는가보다 했다. 그러고보니 이 꽃 주는 5월에 어느 누군가에게도 꽃을 줘 본 기억이 없다. 멀리 계시는 부모님께 자못 송구스럽다.

왠 꽃일까 했던 의문은 이내, 오늘이 5월의 셋째 주 월요일, 성년의 날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물어 듣고야 해결되었다. "만 20세가 된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인으로서 자부심과 책임을 부여하는 날"로 문화관광부까지 나서서 주관하는 날이란다. 기실은 장미꽃 상인들이 주관에 후원에, 북치고 장구치는 것도 모자라 꽹과리까지 요란스레 쳐 대는 날인 줄 알았다. 내가 성년이 되던 날, 후배들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받은 기억도 나고, 더불어 백석의 시집을 받은 감회로 잠깐은 즐겁기도 하였다. 세월은 훌쩍 지나고 나는 낼모레 서른을 바라보는 서른 즈음,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고인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지금이다. 그런데, 이 땅의 젊은 동량(棟梁)들은 오늘 성인이 되었다. 기쁜 일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땅의 성인이 된 그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축하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일까? 어제 나는 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은 탓으려니 했다. 이 땅의 이 젊은이들은 오늘 성년이 되었지만, 성년이 되기도 전에, 아니 세상에 태어나 울음 울고, 제 어미 아비에게 재롱도 부리기 전에, 굶주리어 죽어간 그들이 생각난 이유는. 브라질 세아라 주의 크라테우스라는 곳엔 "태어난 지 며칠 혹은 몇 주 되지 않아 배고픔과 쇠약, 설사, 탈수 등으로 숨진 이름 없는 아기들의 무덤", 곧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가 있다는데, 그들은 오늘 이 기쁜 성년의 날을 맞아 보지도 못하고 참혹한 굶주림에 그렇게 이름도 없이 죽어갔단다. "1분에 250명의 아기가 이 지구상에 새로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는 122개 나라에서 태어난단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곧 이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는 운명을 맞는 거야." 이것은 그 무슨 아이러니일까? 우리 이 땅의 아이들이 성년을 맞은 오늘은 그들, 그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아이들의 죽음의 또다른 비극은 아닐까? 갑자기 마음 한 켠이 답답하고 울울(鬱鬱)하다.

왜 하필 어제 나는 이 책을 읽었고, 또한 왜 하필 오늘은 '성년의 날'이어서, 붉게 활짝핀 장미꽃 한 송이 받아보지 못하고 굶어 죽어간 저 절반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적해지는가? 오늘 이 땅의 성년을 맞은 이들에게 살갑게 축하의 말을 전하지 못하며 하루 종일을 힘없게 지내야 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그리고 그 절반은 굶주리지 않으며, 또한 그 절반은 배불리 먹으며, 또 그 절반은 배가 불러터져 남겨 버리는가? 무엇인가 불합리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또한 그래서는 더더욱 안 될 것만 같다.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되어야 한다.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인 장 지글러는 그 원인들이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로 인해 구호 조치가 무색해지는 현실, 구호조직의 활동과 딜레마,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은 굷는 현실, 사막화와 삼림파괴의 영향,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영향, 특히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금융과두지배",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차별적인 정책 등을 들고 있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자들의 죄가 아니라는 것, 그들이 게으르고 무능력해서도 아니고, 타고난 원죄, 죄앗을 씨앗을 품어서도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것은 저 저열(低劣)한 이 세계의 돈의 지배자들의 탐욕과 그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갖혀서 절반의 굶주리어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한 우리들에게 그들의 굶어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니, 그것은 큰 벌 받아 마땅할 죄악이다.

'비참(悲慘)'하다는 말은 오늘날 이 세상의 현실에 두고 말해야만 타당할 것이다.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직"한 현실이 이것 말고 그 무엇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의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저 브라질의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젖먹이 아이들의 분유에도 세계의 자본과 금융과두지배자들의 돈놀이가 존재하고, 쌀 한 톨, 밀 한 알 가지지 못해 굶주리 배를 부여잡을 힘도 없는 아프리카의 참혹한 민중들 뒤로 몇몇 금융자본가들의 베팅게임에 남아돌아 썩아가고 있는 이 불합리한 현실 말고 그 어디에 '비참'이란 말을 붙일 수 있으랴? 나는 다른 것을 찾는 것을 포기하겠다.

저자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다. 부록으로 주경복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잘 신자유주의를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신자유주의가 그 무엇이더라도, 이 세상을 어떤 놈들이 좌지우지하며 주물러 대더라도, 저 죽어가는 이들을 밟고 내가 살아간다는 현실은 정말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굶어 죽어가는 절반을 두고, 우리 절반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그 절반이 굶어 죽어 사라진 후, 우리 절반의 절반이 또 그 꼴을 당하고야 말 것이라는 자명한 예측을 나의 이 멍청한 머리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말하나 마나, 세상의 절반이 굶어 죽어가는 이 현실은 불합리와 비참함과 죄악이라는 것을, 나는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겠다.

몇몇 매체들에서 오지를 탐험하고, 기아와 전쟁의 현장을 탐방하고, 구호의 손길을 사뿐히 뻗는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때 몇 번의 전화다이얼을 돌려본 기억으로 오늘 나는 생색이라도 낼 수 있는 그런 인종이 못된다. 가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찔끔했었다고, 어떻게 저런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느냐고 분노의 혈기를 머리끝까지 솟아올렸다고, '쯧쯧쯧' 세치 혀로 세상의 현실을 한탄했었던 적 있었노라고 자랑스레 떠버릴 수 있는 그런 인종 또한 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오늘 이 성년의 날이 마냥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 이 못난 인간아! 아 우리 못난 인간들아! 오늘 우리는 울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글러의 말에 난 겸허히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할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내가 그런 생명체이긴 할 걸까? 오늘 내가 하루 종일 우울했었던 것에서 내가 그런 생명체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을 뿐이다. 누가 그랬을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그런데 '빵'도 없이는 더더욱 살 수 없고, 어느 꽃 피는 봄날 화창한 5월의 셋째 주 월요일에 붉은 장미 한 송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저 성년의 장미 한 송이 받아든 그 젊은이는 알고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다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픈 맘도 전혀 없이 배부른 우리들은, '배부른 돼지'가 못내 부러울 저 굶어죽어가는 세상의 절반의 사람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내, 내가 이런 글쓰기의 여유나마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리어, 너무나 굶주리어 배고픔의 울음 한 번 크게 울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들의 영령들에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또 답답해진다. 그냥 희망만을 부여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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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58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마늘빵 2007-05-2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곧 읽어볼 생각입니다. :)

멜기세덱 2007-05-2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들이 '아프'지 않게 말이에요.ㅎㅎ

마노아 2007-05-3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군요! 멜기세덱님 축하해요^0^

멜기세덱 2007-06-01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황스럽네요.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한숨쉬고 한탄하고 푸념에 절망만 늘어놓은 것을...이주의 마이리뷰라니...

프레이야 2007-06-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이매지 2007-06-0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조금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멜기세덱 2007-06-0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배혜경님, 이매지님> 감사합니다.

드팀전 2007-06-0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많이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스승의 옥편 - 한문학자의 옛글 읽기, 세상 읽기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지난 2월에 인천 교보문고 나들이를 갔다가 이 책을 만났다. 지하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교보문고에 들어서면 제일 처음보이는 신간서적 코너를 살펴보다 이 책이 눈에 확 띄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민 선생의 책을 좋아해서 그의 신간소식에 귀를 기울여 왔었다. 그 즈음에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과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이란 책이 연이어 출간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던 때였다. 이 책이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같은 시기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옥편'이라! 그 자리에서 집어들고 <책머리에>를 읽어보았다. "지난 10년간 쓴 글을 모았다.", "책 속에는 올해 열다섯이 된 둘째의 다섯 살 때 이야기부터 최근 이야기까지가 섞여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의 삶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는 책이란 얘기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2권의 책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른 종류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문들을 모아두고 있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단문이 책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보았다. 그가 지금의 한문학자가 되기까지 이런 스승의 삶의 가르침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덜누덜해진 스승의 옥편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던 제자 정민의 모습이 아른거려 그만 책을 덮고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사실 교보문고 나들이의 본래 목적은 책사러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책을 구경하는데 있다. 간혹 몇 권의 책을 사오기도 하지만, 그날 구경한 책들을 메모지에 꼼꼼히 적어오는 것에 주 목적이 있다. 그 날도 이 『스승의 옥편』을 메모지의 가장 윗편에 굵은 글씨로 적어놓고, 집에 와서 알라딘의 보관함에 담아 놓았다. 보관함에 담아 놓은 책은 오래 묵히는 것이 많았지만, 이 책 만큼은 며칠을 묵히지 못했다. 그렇게 이 책을 주문하여 구입한 후에 책상의 한 자리에 올려두고 매일 몇 편씩 읽어갔다. 사실 단숨에 읽어도 별 무리없는 책이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10년의 삶의 향기가 배어있는 이 책에서 정민 선생의 진한 향기를 맡기는 조금의 시간과 여운을 가져야만 했던 것이다.

한문학자라고 하면 흔히 좀 보수적일 것 같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옛 사람들의 사상을 되풀이하는 것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고전이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지루함의 대명사니까 말이다. 하지만 또한 많은 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많은 한문학자들이 고전을 현대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한문학자들 가운데 가장 선두주자는 바로 정민 선생이 아닌가 한다. 그의 책 『미쳐야 미친다』나 최근에 나온 『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등이 그런 작업의 성공적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 속에서는 옛사람은 살아 있고 오늘의 사람은 어느 틈으론가 사라져 버린다. 정민 선생의 이런 작업들 속에서 그의 면모를 살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성격이 사뭇 다르다. 한 두 쪽의 짧은 글들은 그의 생활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기존의 그의 작업들과 비슷한 방식의 글들은 이 책의 1부와 4부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들에서는 정민이라는 개인의 삶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그리고 솔직한 고백으로 울려나고 있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4학년짜리 누나가 덧셈 뺄셈을 못하고 일곱 살배기 제 동생이 못내 한심했던지 제가 가르치겠다고 먼저 나섰다.
  "7 빼기 5는 뭐야?" "7 빼기 5?" "그래! 7에서 5를 빼면 뭐냐구?" "7!" "뭐? 어째서 7이야! 7에서 5를 뺐는데?" 누나의 말꼬리가 조금 올라간다. 답답하다는 듯 동생이 말한다. "자! 여기 7이 있지?" "그래." "그리구 여기 5가 있지?" "그래." 동생은 손가락으로 5를 가린다. "7에서 이렇게 5를 빼고 나면 7만 남잖아? 그러니까 7이지." 할 말 잃은 누나가 쪼로록 달려와 말한다. "아빠! 얘 좀 봐. 7에서 5를 빼면 7이래요."
  나는 에디슨이 생각나서 기특해서 혼자 막 웃었다. 
    -「에디슨이 생각나서」전문, 144쪽.

이런 그의 '생활 속의 단상'들에서 정민이라는 개인의 삶과 사유를 엿본다는 것은 이전의 그의 성공적 작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그가 한문학자로서 살아온 인생의 여정들 속에 이런 내면이 있었다는 사실들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의 한문학자로서의 성공적 작업들, 그러니까 고전을 현대적으로 번역해 내고 그것은 오늘날에 적합하게 재구성해내는 그의 고전을 보고 해석해 내는 시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내면의 고백과 같다. 정민이라는 한 개인이 올곧이 살아있는 책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그는 소리소문없이 세상에 내어놓은 까닭은?

옛사람의 글을 현대적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문학자가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 또한 예외가 아니가. 한자 한 글자 한 글자에 다 뜻이 있어, 그것을 문자 그대로 풀어내기만 한다고 그것이 번역이랄 수는 없다. 그 안에 담긴 상황과 문맥을 함께 풀어내야 진정한 번역일 것이다. 그런 작업들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는 인상깊은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있다. 한시를 번역하다가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로 했던 것은 그의 스승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이라고 더욱 간단히 바꿔버렸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은 시가 가지고 있는 운치와 운율과 여운을 더욱 살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민 선생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아찔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그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민 선생의 문학적 감수성을 이 책에서 자주 엿볼 수 있다. 특히나 그는 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러편에서 시를 읽으며 느낀 감회들을 적고 있다. 보통 한시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서정주나 신석정, 김용택의 시들도 즐겨 읽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나,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들에 얽힌 단상들도 이 책에는 등장한다. "피곤한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또한 명문장이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 그리고 주변 생활의 단상에서 오는 다양한 사유 속에서 그의 고전의 현대화 작업들은 보다 창조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아닐까?

또한 이 책에서는 그가 자식을 키워오면서 느끼는 기쁨들과, 세상의 여러 씁쓸한 단상들, 그리고 지난 추억에 대한 구수한 정취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정민이란 한 개인이 있기까지의 희로애락을 이 책 한 권에 담아놓은 것이다. 옛 글 뒤에 묻혀있던 오늘날의 한 한문학자가 옛글이 아닌 자식의 글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옛사람의 풍취 그 이상으로 정민이란 개인의, 우리 시대의 뛰어난 한 학자의 짙은 내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애착이 간다는 3부의 '생활의 발견'에 모은 글들이 그만큼 나에게는 값지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독서에 관한 좋은 글들이 담겨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다만 부록에 지나지 않게끔 느껴진다. 이 책의 진한 정민이란 사람의 향기에 깊게 취할 따름이다. 언젠가 그의 이런 글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옛글의 명문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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