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이 올해로 20주면을 맞았다. 20년 전 나는 9살이었을게다. 기억나는 것은 티비에 나온 노태우를 보며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점찍었다는 사실 하나다. 왠지 모르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후보들의 이름도 또렷이 기억하지만, 9살의 나는 쪽집게처럼 대통령을 맞췄다. 하지만 어쩌랴, 왜 하필 노태우를 대통령감으로 점찍었느냐고 그 어릴 적 나에게 혼구멍을 내줄 수도 없는 모릇이다. 그렇게 역사는 흐른다. 그때의 내가 무슨 염력이 있어서 노태우를 대통령되게 한 것도 아니고, 노태우 아닌 다른 후보를 대통령감으로 보았다고 해서 그렇게 되라는 법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저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산다. 이 안에서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무기력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 아직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의 몸부림이 다만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민주화가 20주년을 맞이했다고 들썩인다. 어제 100분토론에 당시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와 설전을 벌였다. 그 주역들이라는 사람들이 죄다들 국회의원인지, 그게 옳은 건지 아닌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민주화세력들의 모습은 20년이란 세월을 실감케하기에 충분했다. 서로들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지는 않을까?

이 시점에서 역사와 함께 영원할 것 같은 '민주주의'란 성지는, 역사와 함께 많은 부분 변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그러니 해마다 오는 기념일이란 어쩌면 반성일인지도 모르겠다. 20주년인 만큼 더 큰 반성과 성찰이 필요할 때다. 그럴때에 역사에 발전이 있다면, 그것이 발전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김명인 교수도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20년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음미해 볼 만 하다.

[시론] ‘6·10항쟁’ 성찰과 실천/김명인 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 김명인 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6월 민주항쟁이 벌써 스무돌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발언을 거쳐 6·10 대투쟁,6·29선언,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가 12월16일 대통령선거에서 예기치 못한 결말로 일단락된 6월 민주항쟁. 그후 20년동안 한국사회는 ‘1987년 체제’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 6월 민주항쟁이 이룬 것과 남긴 것들을 축으로 하여 움직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민주화라고 부르든 분단체제의 변동이라고 부르든 한국사회가 이를 계기로 결정적인 질적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적 변화를 ‘시민민주혁명의 성취’라고 불러도 좋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악조건에서도 남한의 시민계급은 비약적 경제성장으로 독자적인 물적 토대를 구축해 왔고 마침내 6월 민주항쟁과 그후 ‘민주정권’들의 실천을 통해 상부구조로서의 민주적 정치제도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분단체제의 탈냉전화와 연성화에도 영향을 미쳐 이제는 통일, 혹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오랜 과제 역시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성취에 눈이 어두워 그 이면에서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군사독재의 오랜 사슬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도취하고 만족해 질적 변화의 본질을 올바로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시민민주혁명은 우리의 오랜 투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세계사적 변화의 한반도적 부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1970년대를 휩쓴 오일쇼크에 의해 순조로운 확장을 저지당한 세계자본주의가 마련한 돌파구는 보호무역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적 경제체제를 붕괴시키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무한대로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지구적 관철이었다. 이에 따라 전세계의 ‘민족주의적’ 보호경제는 연쇄적으로 붕괴되었으며 보호경제를 지탱했던 정치적 권위주의 역시 전세계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그것이 중남미의 민주화 도미노이고,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군사독재체제의 붕괴와 민주화 역시 그러한 세계사적 외압의 작용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높은 파고 앞에서 심각한 동요를 겪고 있다. 문민정부에서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역대 민주정부는 한편으로는 시민민주혁명을 추진해온 ‘민주화권력’이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신자유주의 권력’이기도 했다. 20년 전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단지 대통령 직선제나 하는 형식적 민주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와 사랑을 실천하는 본질적이고 전면적인 민주주의였다면 지금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승자독식의 개인주의와 경쟁주의, 야만적 시장주의의 무한한 확장과 사회적 양극화는 우리가 갈망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배반이자 모욕이 아닐 수 없다.

6월 민주항쟁 20년, 올해는 기념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명실상부한 국가기념일 대우를 받게 된다고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혁명기념일은 곧 혁명의 무덤이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흥청망청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어긋난 혁명의 행로를 다시 돌이키는 전면적 성찰과 실천에 다시 불을 지피는 일이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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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중앙일보에 반가운 기사가 있어 옮긴다. 올해는 우리나라 기독교계에 있어 무척이나 뜻깊은 해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무래도 이 100주년 맞이가 그리 달가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평양대부흥'이 씨앗이 되어 우리 기독교계는 기하급수적 팽창을 이룬 것은 사실이나, 어쩌면 이 '부흥'의 시나리오를 새로 쓰는 원년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양적 성장은 분명 '흥'함의 요소일 수 있겠습니다. 질적 성장을 동반하지 못할 때에는 공해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기독교가 이런 질적 '부흥'의 상태인가에 대한 문제 지적과 반성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안에서의 반성과 성찰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이런 반성과 자기 비판을 통해 오롯한 '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교회도 `건강검진` 받고 영성으로 치유하자" [중앙일보]

107년 된 서울 종교교회, 교회의 생존 묻는 포럼
`사회의 소금이 되지 않고 신앙만 외쳤다`
성장 못해도 하나님 기뻐하는 교회 돼야

  3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의 종교교회에서 ‘종교교회-새로운 미래’란 주제로 포럼이 열렸다. 왼쪽부터 발제를 맡은 이덕주(감신대) 교수,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이원규(감신대) 교수, 유성준(협성대) 교수. 최승식 기자
 

서울 종로구 도렴동의 종교(宗橋)교회(기독교 대한감리회)는 그리 큰 교회가 아니다. 교인 수는 1800여 명에 불과하다. 교인이 수만~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형교회에 비하면 왜소할 따름이다. 그러나 역사는 깊다. 올해 107년째를 맞는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불씨 역할을 했던 로버트 하디 선교사가 종교교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지난 주일 이곳에서 매우 '파격적'인 행사가 열렸다. 교회가 교회를 돌아보고, 신도가 신앙을 돌아보는 '용감한' 포럼을 담임목사와 장로들, 평신도들이 뜻을 모아 개최한 것이다.

3일 오후 2시, 종교교회 2층 예배실. 주일 오전 예배는 이미 끝난 뒤였다. 그런데도 200명이 넘는 교인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포럼의 주제는 '종교교회, 새로운 미래'였다. 그러나 토론 내용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그리고 이들의 '미래'를 겨냥한 것이었다.

사회를 맡은 홍기화(KOTRA 사장)장로는 "교회가 교회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진 않은지,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우리의 꿈, 혹은 나의 꿈'으로 바꾸고 있진 않은지, 이번 포럼을 통해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보자"며 포럼을 마련한 배경을 밝혔다.

발제자로 나선 이원규(감리교신학대)교수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1960~2000년, 이 40년 동안 한국의 교회 수는 5000개에서 6만 개로 늘었다. 또 교인 수는 60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15배 급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성장세가 2000년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교인이 몇 명이고, 교회 예산이 얼마이고, 건물이 얼마나 큰가를 모범적인 교회, 성공적인 목회의 척도로 삼는 '성장 제일주의'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신앙만 강조하는 모습 등이 전통적인 한국 교회의 패러다임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래적 생존을 위해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하다고 했다.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했다. 이 교수는 "양적 성장 대신 질적 성장에 무게를 둔 '성숙주의 교회', 신앙 중심이 아닌 '삶 중심의 교회', 개별 교회 중심이 아닌 '지역사회 중심 교회', 그리고 조직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제 내내 고개를 끄덕이던 청중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이어서 이덕주(감리교신학대)교수는 '권위'의 의미를 되짚었다. "'예수님의 설교는 권위가 있었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권위'의 원어는 '엑수시아'다. 그건 '본질로부터'란 뜻이다. 신학이나 설교를 따로 배운 적이 없는 예수님의 설교가 왜 권위가 있었겠는가. 바로 본질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의 본질은 '영성'이며, 지금은 회개를 통한 자기갱신에 치중할 때"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영성 회복과 치유를 위한 목회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이다.

발제 중간 이 교수가 사이먼&가펑클의 팝송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틀 때는 청중도 따라 불렀다. 그는 "험한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교회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위로해주고, 치유해주고, 회복해주길 꿈꾸자"고 덧붙였다.

미국에서 23년간 목회 활동을 하고 돌아온 유성준(협성대)교수도 "이 시대 교회의 최우선 순위는 '영성'이며, 이게 목회의 근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참된 교회의 본질이 있을 때 교회는 성장한다. 설사 성장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다"라고 말했다. 이 말끝에 청중석에선 박수와 함께 "아멘!"하는 공감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종교교회 교인이기도 한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은 '지난 20년'과 '앞으로 20년'의 한국 사회 변화와 종교와의 연결 고리를 여러 도표로 예를 들며 짜임새 있게 설명했다.

발제가 끝나자 청중석에선 목이 말랐다는 듯 질문이 쏟아졌다. "이런 토론이 가능하다니 종교교회 교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이렇게 통로가 생겨서 너무 반갑다"는 얘기부터 외국인이 아닌 해외 한인만 대상으로 한 '생색내기 해외선교'에 대한 비판, 기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등 격의 없는 물음에 신랄한 답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었다. 이날 교회 측은 모든 평신도에게 '담임 목사의 설교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나''우리 교회의 예배 스타일에 대한 생각''새로운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등 과감한 내용을 담은 설문지까지 돌렸다.

토론 말미에 최이우 담임목사는 "한 술 밥에 배 부를 순 없다. 그래도 오늘 토론을 통해 교회에 필요한 방향, 구체적인 길을 짚을 수 있었다. 앞으로 제2, 제3의 토론도 가능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려는 교회, 107년 전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교회, 그곳에서 교회의 미래가 보였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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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백석 - 문학동네 글과 길 2
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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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시인 백석은 혼자였다.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 전에는 측량보조원, 측량서기를 비롯해서 소작인 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일본의 뛰어난 시인 노리다께 가스오는 시인 백석에게 매료되어 있었던가 보다. 그를 찾아 만주의 안동까지 가서 만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 후 그를 추억하며 쓴 시가 「파[葱]」라는 시다.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

  벌써 스무 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

  벗, 백석이여, 살아 계신가요.

  살아 계십시오.

  백이라는 성과 석이라는 이름의 조선의 시인.

  ―  노리다께 가스오, 「파[葱]」,『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와사회, 1997.


  만주에를 찾아가서 만난 백석은 부엌에서 파를 들고 있었던가보다. “有朋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라 했으니, 술 한 잔 기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손수 부엌에서 술안주를 준비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순수한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20년이 지난 후에 시인 백석을 그리워하는, 국경을 넘어선 두 시인의 우정은 기릴 만하다. 이렇게 친구가 다녀간 후 1943년에 그에게 준 시 한편이 있다.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나 취했노라 ― 노리다께 가스오에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준 시에서 백석은 쓸쓸하니 푸념을 늘어놓는다. 백석의 시 중에서는 이 시를 제외하고는 이런 유(類)의 시를 볼 수가 없다. 절친한 친구였기에,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한다. 취할 수밖에 없는 백석. 그는 무엇 때문에 취했던 것일까? 술에 취하고 슬픔에 취하고, 그 인생 허무함에 취하고, 우리의 시인 백석은 그렇게 취해갔다.

 

  백석은 1935년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36년에는 시집『사슴』을 200부 한정 발간하면서 당시 문단에 충격을 준다. 뛰어난 언어감각, 향토성 짙은 방언으로 시 속에 신화적, 동화적 세계를 펼쳐 놓으면서도, “주책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김기림,「『사슴』을 안고」, 『조선일보』, 1936.1.29; 『내 사랑 백석』에서 재인용)다. 그 『사슴』시편들도 걸작이지만, 오늘날 백석의 절창으로는 북관에서의 시편들이나, 이후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과 같은 “떠돎 과정에서 생산된 이른바 북방 시편들”(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마음산책, 2006.)이 꼽힌다. 『사슴』과 그 이후의 북방 시편들과는 어떤 시적 변화가 있음을 감지해 낼 수 있다. 왜 백석은 떠돌며 그런 “외롭고 높고 쓸쓸한”(「흰 바람벽이 있어」) 시편들을 써내게 되었을까? 우리로서는 뛰어난 시편들을 가질 수 있었던 더없이 행복한 것일지 모르지만, 백석 시인 자신에게는 아픈 추억이 있었다. 그 키워드를 이 책 『내 사랑 백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야(子夜) 여사. 1936년 스물다섯의 백석은 다니던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그는 일찍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었다. 이때의 백석의 제자들은 그를 멋쟁이 서울 신사로 기억한다. 선생 백석은 선생으로서도 학생을 위하는 좋은 선생이었던가 보다. 무엇보다 함흥에서의 생활은 백석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순간이다. 그것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자야 여사를 그곳, 함흥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자야 여사는 백석이 붙여 준 아호다. 스승 금하선생으로부터 받은 예명은 김진향으로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릴 적 부친을 여의고 홀어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이후 그녀는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한다. 자야 여사의 일생도 그리 수월치 못한 운명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운명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예술적 혼은 기생이 됨으로써 꽃 피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또한 기생이 되어 백석과 만나게 됨으로써 백석의 시적 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으니, 그의 기생됨은 불운한 가족사의 곡절이었으나, 우리에겐 또 다른 행운을 준 일대 사건은 아닐까?

 

  백석과 자야 여사의 첫 만남은 참 흥미롭다. 자야 여사는 주위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게 되는데, 귀국 후 스승이 투옥되어 있는 함흥엘 찾아가게 된다. 함흥에 있게 되면서 그곳의 권번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을 때에, 백석은 근무하던 영생고보의 어느 송별회 자리에 참석했다가 자야 여사를 만나게 된다. 자야 여사가 추억하는 첫 만남의 장면은 이렇다.


  “당신은 첫 대면인 나에게 대뜸 자기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곤 당신이 마신 술잔을 꼭 나에게만 건네는 것이었다. 속으로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런 내색을 전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말없이 연거푸 기울이는 술잔에 용기를 얻은 당신은 더덤썩 나의 손목을 잡았다. 꽉 잡힌 내 손목에는 이미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

  ―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당신의 말이 나의 귀를 놀라게 하고, 또 의심케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가물가물해지면서 바닥 모를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가는 듯했다. 술기운이 더해감에 따라 당신은 나의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 마누라! 마누라!

  진작부터 자주 불러와서 익숙해진 듯한 말투로 당신은 무슨 애원이라도 하듯 자꾸만 보챘다.”


  정말이지 닭살 돋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이에 두고 하는 말일테다. 그런데 그 당시 이렇게 첫 만남에서부터 덥석 “오늘부터 내 마누라야”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야 서슴없이 좋다 싫다 하지만, 그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다. 어쩌면 70년 전의 백석은 오늘날 신세대만큼이나 신세대적 연애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백석이 멋있어 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진으로 전하는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더라도 꾸밈없고 순수해 보이며, 곱고 흰 피부가 오늘날의 꽃미남에 비견될 정도다. 이런 백석에게 자야가 그날부터 ‘마누라’가 된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히, 소리 없이)


  우리에게 이 시는 잘 알려져 있는 백석의 시 중 하나다. 백석과 자야 여사의 사랑은 오늘날에도 이루기 쉬운 사랑은 아닐 것이다. 당시로서는 촉망받는 엘리트 백석과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기생과의 사랑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회가 그들의 사랑을 축복할 리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랑은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기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은 자야와의 사랑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안의 강제로 3번이나 혼인을 하기도 한 백석은 매번 첫날밤 신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다음날로 자야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이런 시를 쓰게 된 것은 아닐까?

 

  세상의 편견과 인습은 제도는 그들의 사랑을 축복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다. 그러니 이 세상을 버리고 둘 만이 오붓이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공간으로 떠나고자 한다. 여기서 ‘나타샤’는 분명 자야 여사를 염두에 둔 것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깊은 산골 눈은 하얗게 내리고, 흰 당나귀가 ‘응앙응앙’ 우는 장면의 어떤 환상처럼 여겨진다. 환상은 현실과는 양립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시 속에서 나타샤와의 사랑이 아름답게, 그리고 간절하게 그려질수록, 현실에서의 자야 여사와의 사랑은 힘겨워 지기만 한다.

 

  자야 여사는 몇 번의 이별을 고하기도 한다. ‘이별’을 말하기에 백석은 너무나 순전한 사랑을 소유한 시인이었다. 세상의 강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지속하고자 했던 시인 백석은 자야 여사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야 여사도 백석을 사랑하지만은 자신을 택하기에는 백석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몇 번이고 염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석 몰래 짐을 싸 도망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백석은 자야를 귀신같이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몇 번의 이별은 ‘연습’이었던 것일까? 결국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헤어짐을 길을 가게 된다.

 

  집안의 강제에 의해 세 번 씩이나 결혼을 하게 된 백석은 그때마다 자야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야 여사 또한 백석의 혼인이 마냥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석은 더는 견딜 수 없어, 만주의 신경으로 갈 작정을 하고 자야 여사에게 같이 갈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자야 여사는 그런 백석을 따라 나설 수 없었다. 왜일까?


  “당신이 만주로 혼자 떠나시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은 순전히 뛰어넘을 수 없는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 때문이었다. 당신은 그것들로부터 아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억지 장가를 몇 번씩이나 들고, 또 그 때문에 집을 뛰쳐나와서 정신적 번민도 무수히 겪었다. 게다가 그 동안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자야마저 한 달 동안이나 온다간다는 말이 없이 어디론가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에 당신은 몹시 큰 충격을 받았던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훌쩍 떠나버리자는 백석을 따라나서기에는 백석이 잃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다. 부모를 거역할 수 없어 몇 번이나 혼인을 치렀던 백석은 효자였다. 그러나 부모를 버리고 떠나버린다는 것은 백석을 불효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유학까지 다녀와 엘리트로서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고, 뛰어난 문인으로서도 유명한 그를 따라나서는 것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백석을 떼어 놓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자야 여사를 백석을 사랑하기에 백석에게 그것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함께 떠나지 않는다고 하면 백석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곳에 남아서 끝끝내 백석의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자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석은 묵묵히 떠나고 만다.

 

  백석이 떠나고 자야 여사는 수없이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이런 백석의 떠낢이 우리에게 백석의 명편들을 남기게 해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이 자야를 떠났지만, 백석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자야 여사와의 추억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백석은 그런 추억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렇게 방황하고 외로운 심사는 다양한 시편들에서 그 시들을 절창이 되게 한다. 어쩌면 이런 백석의 가슴 아픈 이별이 백석이라는 천재 시인이 꽃피기 위한 통과의례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백석의 시편들을 읽을 때에 자야 여사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를 더욱 가슴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열쇠가 되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자야 여사의 백석에 대해 추억하며 눈물로 써내려간 이 책 『내 사랑 백석』은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조각달이 서울을 희미히 비추고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섧게 울립니다.


  가을바람인들 어찌 무심히 듣겠어요?

  다 그리움을 돕는 것뿐입니다.


  어느 날에나 오랑캐 무찌르고

  임은 옥관에서 돌아올지요.

  ― 이백, 「子夜吳歌 三」(이원섭 역해, 「자야오가 3―다듬이질」, 『이백시선』, 현암사, 2006.)


  서점에 들렀다가 『자야오가』라는 당시선집을 샀는데, 그걸 본 백석이 대뜸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어 그때부터 자야 여사로 불리게 된 것인데, 위의 시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연작 중에 그 세 번째 수다. 오(吳)나라의 여인들을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멀리 전쟁터로 보내고 남편이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옷을 지어 남편이 있는 전쟁터로 보내겠다는 아내의 마음은 백석을 떠나보내고 못내 그리워하는 자야 여사의 심정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백석이 붙여 준 이름 ‘자야’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의 결말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참(詩讖)이라는 말이 새삼 되새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3년간의 자야 여사와의 사랑은 시인 백석의 자상함과 순수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당시 무성영화일 듯한 <클레오파트라>를 보러 가지는 자야 여사의 친구의 말에 자야 여사를 보며 “클레오파트라, 여기 있지 않소?” 했다는 백석은 정말이지 끔찍이도 자야 여사를 사랑했던가 보다. 그런가 하면 시인답게 시집을 펼쳐 맑은 목소리로 읽어 주던 장면을 자야 여사는 추억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런 사랑은 참으로 낭만적이며 열정적이었다. 그런 낭만과 열정은 새삼 부러움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 책 『내 사랑 백석』을 읽으면서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순전한 사랑에 깊이 감동하는 한편으로, 이 이야기가 참으로 낭만적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시인 백석의 생애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연구되어 있지 않지만(재북(在北) 시인이란 탓에 그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백석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극히 적다.) 이런 소중한 자료를 토대로 그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 한 편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의 삶과 소설이 영화화 된 것이 있지만, 백석의 이런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고 훌륭한 영화가 되기에 충분하리라고 본다. 이런 작업들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소중한 시인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 귀한 역할을 담당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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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하는 학교에는 단과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조성한 2곳의 자습실 비슷한 공간이 있는데요, 두 곳의 이름이 '서호독서당'과 '동호독서당'입니다.

처음엔 '서호독서당'이 먼저 생겼는데, '서호독서당'이란 이름은 당시 학장님께서 조선시대의 독서당의 유래를 빌어와 대학 건물의 이름인 서호(西湖)를 붙여 짓게 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독서당'은 남호독서당과 동호독서당 등이 있었다는데요, 이 독서당은 임금의 명에 의해 지금은 안식년제처럼, 당시 선비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고 학문을 연구하게 한 곳이라죠. 이 뜻을 살려 대학 학생들이 편히 공부하고 독서하는 공간을 조성한 것이랍니다.

최근에 생긴 '동호독서당'은 대학원생들을 위해 조성했다고 하네요. 아무튼 좋은 일입니다. 공부하고 독서할 수 있는 공간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고, 새로 생긴 '동호독서당'에 문패를 하나 걸어놓았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는 걸 보고 느끼는 바 있어 이렇게 끄적입니다.

一士讀書(일사독서), 澤及四海(택급사해), 功垂萬世(공수만세). -朴趾源-

"한 선비가 책을 읽으면, 그 혜택이 온 사해에 미치고, 그 공적이 만세에 드리운다."

예전에 이 글귀를 올린 기억이 나는데요, 오늘 다시보니 새삼 알라디너분들이 생각나더라구요. 우리 알라디너가 책을 읽으면, 그 혜택이 온 나라 민중에게 미치고, 그 공적이 만세에 드리우지 않겠습니까?

간혹 독서를 하면서, 조심스레 이것도 엄연한 사치가 아닐까? 삶에 치이고 질긴 생명에 고통받으며, 무식할 수 밖에 없어 평생 책 한 권 손에 드는 사치를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의 책읽기는 더욱 조심스럽게 되는 것 같더군요.

알라디너분들을 보면서는, 책을 읽고, 서로 나누며, 마음과 생각을 공유하고,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이런 분들의 독서는 그야말로 사해에 미치고, 만세에 드리우는 그런 뜻 있는 독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오늘 문득 다시 해봅니다.

알라디너 여러분, 우리의 독서에 거창한 포장을 씌울 것은 아니지만, 이런 포부와 가치를 가지고 알라딘에서부터, 온나라, 온세계를 차츰 변화시키는 독서가가 되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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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6-05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근사해요. 그런데 전 발끝에도 못 미칠 거 같아 부끄럽네요.

Mephistopheles 2007-06-05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고사성어임에 분명하오나 그 말뜻을 따라가게엔 제 지식은 얕고 독서량은 가볍기 그지 없군요..^^

마노아 2007-06-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명언입니다.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

홍수맘 2007-06-0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근사해서리...... ^ ^;;;

향기로운 2007-06-0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글이에요..^^

멜기세덱 2007-06-0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 반대 조선인님> 님의 발 끝에 겨우 제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근차근 나아가야겠지요.
Mephistopheles님> 에이! 메피님 엄살이세요^^;;
마노아님> 12글자를 다 새기기에는 쫌 아플 거 같은데요.ㅎㅎ
홍수맘님> 근사하니까, 한 번 해봐야지요.ㅎㅎ 뽀대나게!
향기로운님> 멋진 문장을 알아보는 사랑에게서는 정말 향기가 나는군요.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박노자를 좇아온 세월이 벌써 8년여가 되어간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충격에서 시작하여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박노자를 따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그 비정(非情)한 역사의 굴곡들로부터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탐욕적 이데올로기의 잔재들이 발가벗겨진 그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의 수치를 면치 못함을 의미한다. 박노자는 그렇게 나에게, 또한 우리에게 그 추악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해야함을 일깨우는 죽비 소리와도 같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전근대적, 국가주의적 추태들을 들추어내어 우리들의 진정한 대한민국, 곧 “다양성의 나라, 평등한 나라”로 거듭날 것을 부르짖는다. 이어서 그의 작업은 우리안의 편견적 폭력과 차별의 일상화를 비판하고(『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우리 스스로가 제국주의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내재된 또 다른 제국주의적 면모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하얀 가면의 제국』). 역사학자로서의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고 탐구하며, 그러한 역사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당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리하여 오늘날의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열어갈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의 근현대 수난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당대적 현실에서의 ‘수난’의 반복을 피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작업들은 『우승열패의 신화』,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등에서 계속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폭력적, 파쇼적, 전체주의적, 군사주의적,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을 끊임없이 추적해온 박노자. 그런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 유효함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까발리는 폭로성 작업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이 단지 아무런 목표와 지향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그 부족함을 채우려 했던 것일까? 그간 8년여의 세월 동안 그를 좇아 온 우리에게 그는 그간의 작업들의 중간 기착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저서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비판적 자기성찰이었다면, 이 책은 그러한 성찰로부터 이루어낼 수 있는 발전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 모델이라는 것은 저자 박노자가 이 책을 일컬어 “‘반란적 동아시아’에 대한 지역 연대 지향적인 보고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연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의 작업들은 이 ‘동아시아의 연대’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수반되어져야 할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반(反)동아시아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서야 그 연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집요하게 파헤쳐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발전적 지향 없는 성찰과 반성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 있다. 역사의 반복은 그런 성찰과 반성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성찰과 반성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노자의 지금까지의 작업이 성찰과 반성이었다면, 이번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서의 작업은 그것을 토대로 한 발전적 지향, 곧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인 것이다. 새로운 대안으로 내어 놓은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을 과연 얼마나 될까? 박노자를 따라서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동아시아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박노자는 서두에서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상실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반란적 동아시아’가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의 동아시아의 기존 권력과 가치는 지극히 서구적이면서도 제국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란’이란 그런 “권력에 대한 반란, 기존 가치에 대한 반란”이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풀뿌리 동아시아가 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반란’을 꿈꾸어야 하다. 그럴 때에 박노자가 말하는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연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동아시아 민중의 평화 연대의 뿌리는 곧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박노자는 과감하게 선포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의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외침의 소리를 다시 듣는 듯도 하다. 여전히 공산당하면 치를 떨면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이승복들이 많은 이 사회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말하기에는 조심스럽다. 또한 ‘사회주의’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도 아직은 여전하다. 어쩌면 그간 우리 안의 이러한 편견을 혁파할 것을 박노자가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체적 동아시아인으로서 ‘반란성’을 회복하고, 그간의 추상적 ‘동아시아’ 담론에서 벗어나 ‘실감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이야기하며, 그 구체적 모델로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박노자의 ‘동아시아 연대’ 구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 구상과 구체적 모습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탐색을 동아시아 역사의 뿌리에서부터,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역사적 실재에서부터,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동아시아”에서부터 찾아가고 있는 것이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란 제목은 이제는 우리가 동아시아에 대해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주의가 사회 곳곳에 내재해 있어 몰랐던 개인과 종교의 자유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이었음(「승려는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니체보다 ‘이지’가 빨랐다」등)을 설파한다. 동아시아의 근대에 있어서 망령(妄靈)으로 지목되는 ‘유교’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보성이 강한 많은 유교 사상가들”이 있었음을 ‘무시’했고 알지 못했다. 니체보다도 빨랐던 이지(李贄)의 ‘열린 개인주의’도 있었다. 동아시아 담론에서 배제된 ‘이슬람’과의 공존은 이미 우리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존재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수많은 동아시아적 가치들을 깨달을 때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민중운동과 연대하는 길”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국적의 신비화’가 얼마나 반동아시아적인지, 근대 권력과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들, ‘관습’을 들먹이는 지배세력들의 자구책, ‘민족자본’이라는 미명 아래 숨어 있는 재벌자본가들의 논리, 뿌리 깊은 ‘숭미주의’,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 등등 20세기에 이식된 ‘망령’들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박노자는 말한다. 얼마 전 까지 학교에서 ‘교련’을 배웠던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짓게 하기도 하는, “국가적 상징 세계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짓는 슬픈 광경”을 만날 수도 있다. 오늘날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준 열사’가 열사만은 아니었음을, 그 이면에는 친일의 모습도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충격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파시즘’을 명쾌하고 비판한 ‘1930년대 논객 김명식’을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우리 역사의 자랑 ‘화랑’의 동성애 가능성을 읽는다거나, 미적 기준의 변화들, 필자의 경험담이 섞임 ‘국제결혼’에 대한 이야기, 개화기의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들은 더욱 이 책의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우리가 영원한 우방일 것이라고 여기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연대’를 위한 박노자의 작업은 오늘날에 있어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한미FTA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신식민지로서 재편되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서, ‘동아시아의 연대’를 주창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박노자의 이번 작업이 그 무모성을 가리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담론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탐구에서부터 가능성을 엿보았다면, 그것은 토대로써, 뼈대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 토대에 건물을 세우고, 뼈대에 살을 붙일 때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은 더 이상 가능성의 담론이 아니라, 실제적 담론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 나아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모델의 좋은 설계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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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11-29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이나 후기로 쓰는 글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글을 쓰는 실력이 정말 보통이 아닌 것 같군요. 문학 작품 심사위원 내지 평론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댓글을 쓰려고 들어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비평가의 서재‘라고 되어 있군요. 보통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우리들의 대한민국˝이란 책을 통해서 박노자 선생을 알게 되었고 사상적 지향성도 비슷해서 아주 친근하게 느끼지만 그분의 많은 저서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비평가님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놀라움의 흔적도 남기고 칭찬도 해드려야 될 것 같아서 서툰 글을 계속 엮어봅니다. 아마도 비평이나 평론이 직업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박노자 선생이 저술하는 책을 계속 주시하면서 또한 비평가님의 서평에도 관심을 가지고 볼 생각입니다. 문장을 얽어나가는 논리적 전개가 정말 치밀하고 체계가 완벽한 것 같습니다. 박노자 선생 같이 중생들과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좋은 서평과 독후감으로 자비로운 보시를 많이 베풀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두서 없는 글을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