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
더글라스 에이브람스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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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앙, 그의 이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간혹 모르는 척하기도 하는 이 시대 '부끄러운' 욕망의 고유 명사다. 흔히 "플레이보이의 대명사로" 카사노바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그는, 카사노바와는 또 다른 특색들을 지니면서 보다 음험한 호색한으로 카사노바와 차별성을 가져왔다. 카사노바가 역사적 실존 인물임이 확실시되는 반면, 돈 주앙의 실존성 여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실존 인물 돈 주앙 테노리오가 이 돈 주앙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지만, 돈 주앙이 실존했던 인물이건 아니건, 오늘날 우리에게 돈 주앙은 그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차를 내재한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돈 주앙 문학의 시효로 여겨지는 스페인의 극작가 몰리나의 『세비야의 호색한과 석상의 초대』(1630) 이후 다양한 장르로 각색되고 재탄생한 '돈 주앙'이 곧 오늘날 우리 인식 가운데 존재하는 '돈 주앙'의 가장 진실된 모습일 뿐이다.

몰리나의 작품 이후 근 500여년간 수많은 돈 주앙이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 작품들은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바(이 책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뒷 편에 <옮긴이의 말>에서 그 대표작들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http://blog.naver.com/donjuandiary에서 돈 주앙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것들의 목록을 여기서 늘어놓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비공식적 돈 주앙 이야기들의 목록을 가늠해보는 것은 거반 불가능하리라 여겨지지만, 내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공식적 이야기 중 하나일 수 있는 일종의 돈 주앙 야설을 접해 본 경험이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고등학교 때 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아이들이 어떻게들 구했는지 요상스런 이야기책들을 여러 명이 돌려보곤 했다. 대부분이 무협지 비슷한 것들이고, 간혹 성교육 교재 그 이상의 것들도 돌았다. 그 중 하나가 돈 주앙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또렷이 기억한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어 밝혀두지만, 나는 당시 이른바 대표적 모범색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책을 서로 돌려보던 가운데 나도 잠깐 구경할 수 있었던 기회가 생겼고 몇 쪽 넘겨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그 후 그 책을 틈틈히, 그러나 은근슬쩍 정독했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돈 주앙과 뭇 여성들의 성애의 묘사가 무척이나 리얼하면서도(나는 아직 그것이 진정 리얼한 것인지 의문이지만) 선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을 나는 알지 못 했다.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리즈의 중간의 어디 쯤이었으니까.

돈 주앙이 등장하는 작품이 다양한 만큼, 그 다양함의 각각들을 접해본 독자(또는 관객)들에게 동 주앙의 모습은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다. 그 당시 이후 나의 돈 주앙은 일종의 섹스머신 혹은 섹스의 제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각양각색의 돈 주앙의 모습에(어느 정도 공통 분모를 가지고는 있겠지만) 맞고 틀림이 있을 수 없다. 돈 주앙 테노리오의 실사(實事)를 대조해가면서 따지고 볶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돈 주앙은 그만큼 역사로부터 멀어졌고, 그 멀어짐으로부터 다양한 모습의 실체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 책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이하 『잃어버린 일기』)는 또 하나의 돈 주앙을 그리려고 했다. <옮긴이의 말>에서처럼 "동양적 세계관으로 새롭게 조명"했다거나, BBC에서 "돈 주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거나, 이 책의 홍보물 등에서 말하듯이 돈 주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돈 주앙의 재해석이라며 이 책을 곳곳에 알리고 있다. 이것은 돈 주앙이란 이름을 알 만한 사람에게 매우 관심을 끌게 만드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돈 주앙에 대한 재해석이라면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의 돈 주앙에 대한 호기심에 비례한 만큼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재해석의 신빙성을 높이는 전략으로 '잃어버린 일기'에 바탕을 둔 팩션이라는 전략을 택하고 있어 관심을 배가시킨다.

또한 이 책은 『다빈치코드』를 펴낸 출판사에서 발굴한 것으로, 그 출판사가 대대적으로 투자한 만큼 그 재미와 흥미에 대한 의심할 여지를 줄이게 만든다. 띠지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 25개국에 판권이 팔린 화제의 소설"이라는 문구라든가, 이 책의 공식블로그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전 세계 20여개 언론사를 초청한 프레스 투어"라는 문구에서 이 책을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 전략과 이 책이 얼마만큼이나 상부할지는 사서 읽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고, 나도 읽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 확실했다.

사실 『다빈치코드』로 재미를 본 출판사의 안목은 그리 좋은 것은 못 된다. 『다빈치코드』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이것이 다루는 제재의 민감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소설로서의 완성도와 작품성은 그리 높게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성공의 이유는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의 반증으로 소설『다빈치코드』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상대적으로 별반 성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만큼 원작의 단순한 추리적 이야기성이 영화로 시각화되었을 때 극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좋지 못 한 안목의 출판사에서 펼치는 상업 전략을 우리는 조금 의심해 보아야 하겠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 책 『잃어버린 일기』가 출판사의 상업 전략과 얼마나 합치되고 불일치되는지를 따져 보도록 하자. 우선, 이 책 『잃어버린 일기』의 표지에는 "400년 만에 발견된 돈 주앙의 일기를 소재로 한 역사 팩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원본 일기의 서지사항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 책의 공식 블로그를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다. <편집자 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이 일기의 우연한 입수 과정 또한 하나의 허구일 뿐이란 의문이 간다. 설혹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또한 이 돈 주앙이 '역사 팩션'이 될 때의 그 문화적, 문학적 가치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재적 의미에서의 다양한 돈 주앙의 모습이 제각기 진실일 따름이다. 그렇게 볼 때 '일기'를 들먹이며 '역사 팩션'임을 주장하는 것은 소설적 전략이면서 홍보 전략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어 보인다. 먼저 소설적 전략으로써의 '일기'의 틀은 작중 화자의 내면에 독자가 깊숙히 침전하면서 동일시를 이룰 수 있어, 이야기에 푹 빠져들 수 있게끔 기능한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흥미를 내재하고 있다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켜 읽는 재미를 톡톡히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 기본적 이야기의 흥미로움을 갖추고 있을 때 얘기다.

다음으로 이 책이 기존의 "돈 주앙에 대한 재해석"을 보여주고 있는지의 여부를 가려보자. 기존의 돈 주앙에 대한 해석이 호색한으로서의 악한의 이미지로 돈 주앙이 묘사되고, 그런 돈 주앙의 행위에 대한 권선징악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공통분모를 뽑아 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는 그와 다른 묘사, 그와 다른 결과, 그와 다른 어떤 해석의 여지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나의 내공의 부족에서 오는 것일까? 눈을 씻고 찾아보아야 하겠지는 나는 그것을 찾지 못했다.

이 책의 전반적 줄거리는 짧게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출생의 비극을 가지고 태어나 버려진 고아 돈 주앙, 그가 여성 편력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삶의 여정, 이 소설의 악의적 인물에 의한 일종의 양육, 그로 인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악에 대한 동조, 주인공의 내적 외적 갈등, 돈 주앙을 각성케하고 변화시키는 구원자의 등장과 그에 대한 돈 주앙의 진정한 사랑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고전 영웅 소설에서 보이는 '영웅의 일대기적 구성'의 약간의 변종으로도 볼 수 있다. 그만큼 그 구도는 고전틱하다. 진부하다는 얘기다.

주인공 돈 주앙의 여성 편력의 행각은 그간의 여타 작품들과 대동소이하다. 다양한 여성을 상대하는 점에서 대동(大同)이라면, 성애의 묘사 등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점에서 소이(小異)다. 그래서일까? 예전에 읽을 수 있었던 야설보다도 흥미는 절대적으로 반감될 뿐이다. 대동에서의 진부함과 소이에서의 흥미의 반감, 이 소설이 재미없어지는 이유다. 이미 말 했듯이 '일기'라는 기술 전략은 이 흥미의 반감과 함께 기법적 전략의 성공을 저해시킨다.

주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의 돈 주앙 문학이 인과응보적, 악에 대한 처벌적 주제로 이루어졌다면, 이 소설은 그 점에서 정반대로 포장되어 있다. 돈 주앙의 죽음을 강하게 암시하며 이 소설은 끝나고 있지만, 돈 주앙은 여성을 농락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일종의 반성을 경험하며 진정한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는 반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일종의 개과천선이다. 이것이 다른 해석, 곧 이전의 진부한 해석과의 차별성이라면, 동전의 양면으로 우릴 우롱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과응보라는 진부한 주제의 결말의 한쪽면에 죄에 대한 처벌이라면, 그 다른 면은 천선에 대한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다섯살짜리 어린아이도 몸소 체감하는 너무나도 쉬운 논리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재해석이라는 홍보성 멘트는 기존의 진부한 해석이 당연히 내재하고 있었던 주제의 동전을 살짝 뒤집어 놓고 "이것은 다른 동전"이라고 당당히 떠드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 소설의 마무리를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마무리 또한 작가의 의도적 전략이 숨어 있다. 돈 주앙이 마무지 짓지 못한 일기, 곧 이 소설의 결말을 돈 주앙의 마부였던 크리스토발의 회고로 대신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열린 결말'을 제시하고 있는데, 오래 간직했던 돈 주앙의 일기를 자신의 임종 직전에 알마에게 전하며 쓴 이 크리스토발의 회고는 돈 주앙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 한 일종의 풍문으로 전하며, 돈 주앙의 생존 가능성을 살짝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자로 하여금 보다 행복한 돈 주앙의 후일담을 상상하게 만드는 전략인 것이다. 자체로 하나의 해피엔딩인 셈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이 일종의 희미한 해피엔딩 전략이 보다 더 이 소설을 기존의 진부한 결말과 더욱 동질성을 갖게 되는 데에 있다. 개과천선하면 자손만대 행복해야 하는 것이 고전의 절대 공식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이 책 『잃어버린 일기』의 리뷰를 때리기식으로 매도한 것에도 불구하고 별 세 개를 준 이유는 "풍부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에 찬찬을 금할 수 없다."는 프랭크 매코트의 찬사나 "16세기의 도시 세비야. 이 신비한 도시"의 배경을 세밀히 묘사한 것, 그리고 "베껴 쓰고 싶을 만큼 멋진 사랑의 경구들이 가득하다."는 로버트 오시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밑줄 거둘 만한 구절들을 간략히 옮기면서 잔혹한 리뷰를 마치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는 부실하겠지만, 심심풀이로 읽기에는 이 책이 그만큼에 값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읽을 이는 읽을 것이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건간에 말이다.

"비밀 하나 이야기해줄게, 크리스토발. 여자의 욕망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죽지 않아."(16쪽)

"여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조금이라도 노력해본 남자들은 그 보상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잔인한 시대에 여자를 이해하려는 남자들은 거의 없고, 가장 하찮은 사랑의 손길을 갈구하는 여자들은 수없이 많다."(38쪽)

"능수능란하게 감정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여자들이 가진 뛰어난 능력 중 하나이다. 그 능력은 남자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47쪽)

"결투에서 절대 질 수 없는 사람은.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117쪽)

"욕망은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신은 여섯째 날 동물들과 함께 욕망을 창조했다. 욕망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166쪽)

"모든 여자에게 신경 쓰는 건 곧 어떤 여자에게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178쪽)

"여자의 욕망의 강이 비금속을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약액(練金藥液)이 아닐까? 여자의 문을 통해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없다면 조물주의 창조 행위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아닐까?"(190쪽)

"죽음과 삶은 끊임없이 얽히고, 불길한 죽음의 징조는 종종 열정을 부추긴다. 생명은 항상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길 바란다. 알마가 그렇게 말한 것도 그러한 욕구 혹은 몸에서 들리는 생명의 외침 때문일 것이다. 시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모든 여자에게 찾아온다."(309쪽)

"'내가 말했지….' … '어떤 검술에서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서… 잃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건 거짓말이었어.…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 '그건….' … '사랑에 빠진… 남자겠군요.'"(355쪽)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혼의 비밀은.' … '한 여자를 통해 모든 여자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군요.' … '맞아, 모든 여자의 모습은 각각의 한 여자 안에 들어 있고, 모든 남자의 모습도 각각의 한 남자 안에 들어 있지.'"(361쪽)

"사랑 없는 쾌락은 고기 없는 양념, 음식 없는 미각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 쾌락 없는 사랑은 양념 없는 고기, 맛없는 식사와 마찬가지다. … 진정한 열정적인 사랑은 매일 새로워지는 연회일 것이다."(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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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멜기님 ^^
성애의 묘사가 부실하다니 쳇!
그렇다면 돈주앙을 읽는 아무 의미가 앖자나욧!

:) 추천~~!

멜기세덱 2007-07-05 23:08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이님의 페이퍼가 훨씬 재밌다고 알차다고 할까요.^^;;
 

세번째 이벤트 발표가 많이 늦어졌네요.^^;;

이 이벤트는 제가 좋은 책을 추천해 주시는 것이었는데요,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지 않으셔서 무척 서운했지만...ㅋㅋ

그래도 참여해 주신 분들이 정말 좋은 책들을 소개해 주셔서 만족합니다.

참여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선, 제일 처음 책을 추천해 주신 분은 해리포터7님 이십니다.

<잃어버린 아이들>과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두 권을 추천해 주셨는데요, 특히 <핵 폭발 뒤>는 제가 예전부터 관심을 두던 책이라 어떻게 그렇게 콕 집어내셔서 추천을 해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해리포터7님께 좋은 책을 추천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요, 두 권 모두 꼭 읽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해리포터7님께는 원하시는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2가지 종류가 있네요. 두가지 다 드리면 좋겠지만, ㅎㅎ 사정상, 어느 책을 드릴까요? 골라주시기 바랍니다.ㅎㅎ

 

 

 

두 번째로 제게 추천해 주신 분은 흑백TV님이십니다. 저의 성향을 세세히 살피시고 골라주신 친절함에 무척 고마운 마음입니다. 모두 3권의 책을 추천해 주셨는데요,

<외면일기>와 <섹시즘>, 그리고 <바둑의 발견1>입니다. <바둑의 발견1>은 제가 이미 읽었기에 제하고, <외면일기>는 제 독서취향을 세심히 살피신 배려가, <섹시즘>은 저의 관심사에 대한 세심함이 잘 드러나는 추천입니다. 감사드리고, 이 책들 꼭 읽겠습니다.

 

 

책을 고르시지는 않았지만,

말씀드린 대로 <바둑의 발견 2>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ㅎㅎ

 

 

 

 

세번째 추천자는 마노아님이시네요. 저의 진로와 관련해서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을 추천해 주셨어요.

<너는 나의 하늘이야>와 <봄을 앓는 아이들> 이 두 권입니다. 교육자로서의 마음가짐과 아이들에 대한 이해심, 이 모든 것이 부족한 저로서는 마노아님의 이 추천이 너무나도 유익하게 여겨집니다. 감사드려요.

 

 

마노아님께서는 책을 안 골라주셨어요. 댓글로 원하시는 책을 골라주세요. 꼭이에요!!!

네번째 추천해 주신 분은 jj님이십니다.

<백년의 고독> 1, 2권입니다. 제가 사실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완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요, 이 책도 그 목록에 포함이 되겠군요. 요즘 그 목표를 준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차근차근 읽어가다 보면 이 책도 걸리겠지요.ㅎㅎ 그 때는 jj님의 이 추천을 기억하면서 감사히 읽도록 하겠습니다.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선택해 주셨어요. 이 책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기서 끝이나, 아닙니다. 여러 각고의 노력끝에 결국 글올리지 못하시고 댓글로 대신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팔을 다치셨다는데 장문의 댓글로 결국 좋은 책을 추천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들어라 양키들아> , <양코배기야, 들어봐라!> 요 두 책이었군요...ㅎㅎ 수정했습니다.

이 책은 파란여우님께서 추천해 주셨어요. 관심이 가는 책입니다. 이런 책이 있는 줄 왜 저는 잘 몰랐을까요?

 

 

파란여우님께서는 이 글을 보시는 즉시 책 한 권 골라주세요. 꼭입니다.

이상 5분께서 제게 좋은 책들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모두들 관심이 가는 책들이네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이벤트는 여러모로 제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벤트로는 이렇게 마감하지만, 종종 좋은 책들이 있으면 많은 분들께서 거리낌없이 제게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ㅎㅎㅎ

자! 정시합니다. 우선,

해피포터7님, 흑백TV님, jj님 께서는 댓글로

우편번호, 주소, 성명, 연락처를 적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파란여우님과 마노아님께서도 받으실 책을 고르셔서 주소 등과 함께 댓글로 남겨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ㅎㅎ

이렇게 해서 알라딘 서재 개편을 축하하고, 저의 책 대박을 자축하는 의미의 33한 이벤트를 모두 마치며, 그간 참여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ㅎㅎ

앞으로도 자주자주 제 서재에 놀러와 주시길 바랍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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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4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벌써 마감이예요?
나도 준비한 거 있엇는데 잉.... ㅜㅜ...
페이퍼 쓰느라고 시간이 좀 걸려서리 흑흑...

여튼 <잔인한 자비> 추천드려요 좋은 씨앗에서 나온 책입니다.

이벤트 되신 분들께는 축하~~~:)

2007-07-04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7-07-0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제가 추천해드린 책은 저 책 아닌데요^^;;
http://blog.aladdin.co.kr/bluefox/1066486 제 페이퍼에 올렸던 책입니다.
제목은 [들어라 양키들아] 맞고요. 찰스라이트 밀스, 김대웅 옮김, 아침출판,1988년1월.
품절이더니 현재 풀린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마늘빵 2007-07-04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되신분들. 요새는 이벤트가 있어도 통 정신이 없어서 해야겠단 생각도 안듭니다. -_- 역시 따고자 하는 분들에게 좋은 결과가.

물만두 2007-07-0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홍수맘 2007-07-0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모두 축하드려요.
주인장 멜기세덱님도 축하^^.

마노아 2007-07-04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앗! 책 골라도 되어요? 감사해요~ 저야말로 책 고르면서 한 번 더 마음가짐을 다시 해보는 좋은 시간을 가졌어요. 오늘 몹시 울적했었는데 위로를 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
저는 지식 e(EBS지식채널)를 고를게요. 보고 싶다 계속 중얼거리고 막상 주문을 못했던 책인데, 가열차게 읽어보렵니다. ^^

2007-07-04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7-07-05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들 추천받으시고 무사히 잘 마무리하셨군요..축하드려요..^^&
이벤트에 당첨된신 분들께두요..

2007-07-05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향기로운 2007-07-0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에 당첨되신 분들 축하해요^^ 좋은 책들 소개받으신 멜기세덱님도 축하해요^^

2007-07-05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jj 2007-07-1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갑작스런 선물에 너무 기쁘네요. 비도 오구 기분이 싱숭생숭했는데. ^-^
게다가 제가 좋아하는 책 선물이라 더 기뻐욧. 감사드립니다. 민음사 세계문학 저두 좋아하는데. 백년의 고독 잘 읽으셨음 좋겠네요.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그리고 또 뵙겠습니다. 연락처는 비밀로 남길게욧. ㅋㅋ

2007-07-11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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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는 다분히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남미하면 제일 먼저 축구를 떠올릴 따름이다. 좀 더 나간다면 브라질의 삼바나 아마존 정도 되겠다. 중미 지역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단순히 우리에게 여행지 그 이상은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남미 지역은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에 쌓여있다. 어느 TV프로그램의 오지탐험 코너의 단골 무대가 아프리카이거나 중남미 지역이라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말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페루 정도 남미 지역 국가들이 떠오르는 건 축구와 상관된다. 그 밖에 멕시코나 코스타리카 정도가 떠오르지만, 축구이거나 휴양지이거나 오지이거나다. 또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오랜 옛날에 갇혀있을 따름이다.

중남미는 우리 인식가운데 매우 '흥분된' 상태로 놓여 있다. 헐리우드 영화에 쇄뇌된 영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와는 지역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매우 먼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만큼 우리는 중남미를 잘 모른다. 이 정열의 대륙에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혁명의 연속으로 발전해 왔다. 그 중심에 우리에겐 체 게바라가 상징적으로 떠오른다. 흥분과 혼란과 정열과 혁명의 대륙 중남미에 또 하나 새로운 혁명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 주역은 베네수엘라의 체베스란 인물이다.

자칭 '볼리바리안 혁명'이란 기치아래 베네수엘라는 온갖 혼란과 어려움 끝에 혁명의 기초를 닦았다. 차베스가 집권하면서 민중들의 거의 일방적 지지아래 '급진적' 혁명이 진행중이다.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21세기 신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자원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토지의 재분배 등 혁명적 정책들을 저돌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차베스는 미 정권을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와 보수세력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볼리바리안 서클의 민중조직의 집중적 지지하에서 이 모든 혁명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해 오고 있다.

아마도 전세계의 지도자 중에서(김정일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지도자가 차베스가 아닐까 한다. 그는 어떻게 이런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의 다양한 혁명 정책들을 확인하게 된다면 이런 현상을 충분히 이해할 법도 하다. 사회의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중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도 가장 기본적 민중 복지 정책으로써 무료교육과 의료서비스의 확대에 집중되고 있다. 세상의 어느 지도자도 이런 무조건적 민중 복지 강화 정책을 펴기에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차베스는 그걸 하고 있으니 이런 민중의 지지는 날로 높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독재정권과 일부 부유 지배층의 억압아래 억눌려 궁핍하게 살아온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이런 차베스는 구세주일 수밖에 없으리라.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중남미의 통합이다. 강력한 제국 미국에 맞서기에는 베네수엘라는 지극히 약소국이며, 세계의 조폭 부시에 비해 차베스 골목대장일 따름이다. 미 제국의 신자유주의의 확산아래 중남미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차베스의 생각이다. 따라서 미 제국과 '맞짱'뜨기 위해서는 중남미의 통합에 따른 공동의 대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차베스의 급진적 혁명이 다분히 공상만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베네수엘라만의 혁명으로는 21세기를 살아남기에는 불가능할 따름이다.

이 책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읽으면서 차베스에 대한 급호감을 갖게 되는 한편, 또다른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이 성공적 기로를 타고 있고, 더 나아가 차베스는 중남미의 통합을 위해 절실히 노력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차베스를 적극 지지하지만, 이것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너무나 거대하고 무서운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혁명에 응원을 보내는 모든 이들이,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차베스의 다양한 민중을 위한 정책들이 너무나 급진적이기 때문에 즉흥적이라고 판단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이 오랜 지속성을 갖기에 너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동반한다.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면서 민중들의 의식을 키우려는 노력이 있지만, 민중들은 배고픔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차베스의 혁명 정책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이 혁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 그리고 중남미를 상상할 때, 우려가 더욱 크게 남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미 제국은 전세계를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차베스가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을 넘어서 중남미의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계의 각국들이 미국에 어느 정도의 딴지를 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을 큰형님으로 깎듯이 모시는 우리나라는 좀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차베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자. 그러다가 우리를 향해 차베스가 "전 세계의 민중이여, 단결"하자고 도움을 요청해 올 때를 위해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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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독한 한국인 - 중독과 거리두기 사이에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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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논쟁은 있었더랬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1) 말이 있는 곳에 논쟁이 있다. 곧 인간의 논쟁은 '태초'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논쟁이 없는 사회는 더이상 사회가 아닐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나, 왜곡된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논쟁은 있었더랬다. 다만 숨죽인 논쟁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역사는 어느 정도 큰 틀에서의 논쟁의 역사이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논쟁의 추이를 따라가보는 것은 사뭇 재밌고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 시대 논쟁의 주역을 꼽자면, 이 사람 강준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폭넓은 문제적 사안들에 강준만은 빠지지 않고 참견한다. 넉살이 좋은 것인지 이곳저곳 껴들지 않는 데가 없다. 그들 이런 참견을 두고 혹자들은 강준만의 오입질에 눈쌀을 찌푸린다. 때론 지나치달 정도로 안 껴드는 곳이 없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강준만이 오죽 답답했으면 시시콜콜 그렇게 참견질을 하겠는가 하는 어느 정도의 수긍도 간다. 이런 강준만이 있기에 잠잘 뻔 했던 우리 사회 곳곳의 문제들이 들추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긍정적 의미부여를 해 볼 만도 한 일이다.

사실 내가 강준만이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간의 내 관심사에 강준만은 그 주변부에서도 머무르지 못 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강준만의 '오입질'이 내 관심사 주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한국 문단의 신진 문인들과 더불어 '문학권력'을 비판이 일기 시작할 무렵, 강준만은 빠지지 않고 『문학권력』으로 내 관심사의 경계를 침범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강준만 따라 읽기는 시작되었다. 그의 글들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다루는 것들이 다분히 '논쟁적'이어서, 싸움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의 논쟁을 따라가면서부터 나의 관심사의 외연이 점차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얼마전 강준만의 『인간사색』이란 책을 읽다 말았다. 강준만식의 글쓰기를 한마디로 평하자면 '짜깁기'라고 하면 어떨까? 거기에 몇 마디 수식을 붙여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테면 '절묘한' 혹은 '창조적' 짜깁기라고. 그는 그간 내게 '짜깁기'에도 수준이 있고 품격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논지와 주제에 알맞은 다양한 텍스트들을 절묘하게 인용하는 능력은 강준만이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그런데 그간의 읽기에서는 이런 것이 나름 흥미와 관심을 끌 수 있었던데 반해, 『인간사색』에서의 그의 짜깁기는 그런 절묘함과 창조성을 거의 갖지 못해, 읽기에 지루함과 괴로움만을 더해 주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강준만식 짜깁기 수준의 고저를 『문학권력』과 『인간사색』을 비교해보면 그 극과 극을 맛볼 수 있을 듯 싶다.

『인간사색』을 읽다가 치워버리면서 어느 정도 강준만에 대한 허망함을 느꼈다고 해야겠다. 그런 중에 이 책『고독한 한국인』이 나온 것인데, 다소간 이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을 갖기도 했었다. 그러나 논쟁적 강준만에 대한 중독을 끊을 수는 없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고, 그간의 강준만식 짜깁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그의 글쓰기를 맛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한겨레21>과 월간 <인물과사상> 등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의 시론, 칼럼적 성격의 이 글들은 강준만식 글쓰기의 진수라고 하면 어떨까? 참견하기 좋아하고, 문제들을 들추기 좋아하고, 여기저기서 논쟁을 불씨는 당기기 좋아하는, 문제적 · 논쟁적 인간 강준만의 본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한국인'이란 타이틀 아래 묶인 30편의 글들이 이런 맛들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지속적으로 두드려 온 대통령 노무현과 유시민, 그리고 정치권에서부터 보수세력의 든든한 지원군 이문열을 큰 테마에서 다루고 있고, '대중의 고독'이란 테마 아래에서 우리 사회는 다양한 '고독성'을 강준만의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아울러 지방 소외의 문제들을 적시하며 강준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그간 강준만이 자주 다루어 왔던 것들이지만, 1장의 '대중의 고독' 편에 모인 글들은 강준만이 얼마나 다양한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나 대중가요의 '사랑타령'을 풀어낸 글에서는 세월따라 흘러간 대중가요를 흥얼대는 '노래하는 강준만'을 상상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이 책에서의 재미는 치고 받고, 되치는 강준만의 열띤 논쟁의 추이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유별한 강준만의 사랑 혹은 애증을 이 책에서 확인하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왜 이리 논쟁적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강준만은 그래서 다분히 문제적이다. 아니 문제적이기 때문에 논쟁적 인간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말했듯이 한국인은 고독하기 때문일까? 강준만도 한국인의 한 사람이기에 그 또한 고독하다. 고독한 인간 강준만에게 논쟁은 그의 고독해결의 유일한 통로일 수도 있지 싶다.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 알 수 없지만, 논쟁의 한 가운데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강준만은 어느 곳엔들 몸둘 데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고독할 밖에. 고독에 치여 숨죽이고 있자니 강준만은 참을 수 없어 사회 곳곳의 문제들에 불을 붙이는 이 시대 고독한 논쟁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책 날개에서 강준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매일 글을 쓴다. 끊임없는 글쓰기를 통해 학문간의 경계, 전문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학문 신비주의에 갇혀 있는 지식을 대중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지 싶다. 하여간 고독한 인간 강준만의 논쟁은 우리를 흥미롭게 한다. 그러나 흥미를 넘어 강준만의 지적에 대한 일말의 깊은 사려를 우리가 보여주어야 그의 논쟁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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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윤지관 외 엮음 / 당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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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영어에 웃고, 영어에 우는 나라, 아니 영어에 목졸리어 켁켁거리는 나라, 그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아이들 동요에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하지만, 어쩌면 이젠 "우리나라 영어나라"로 고쳐 불러야 할 판이다. 학원들이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많은 나라가 없다고들 하는데, 그 많은 작고 큰 학원들마다, 어느 동네 구석에 처박힌 보습학원에서까지도 파란눈의 원어민 영어선생이 존재하는 나라 또한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는 영어가 대세다. 영어를 해야 장차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없다는 소릴까? 그렇다면 장차 나는 굶어 죽고야 말 것이다.

98년 복거일로 촉발된 영어공용어화 논쟁이 아니었을지라도 그간의 경향은 영어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어 왔다. 특히나 2000년 이후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졸업인증이란 제도하에 영어를 못하면 졸업을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유학온 외국인들이 흔히 우리나라처럼 대학 졸업이 쉬운 나라가 없다고들 하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겐 그 말이 그렇게 사실만은 아니다. 왜냐? 영어가 많은 학생들의 졸업에 제동을 걸기때문이다. 대학 나올려면 제 전공은 둘째치고 영어라도 좀 해야 된다는 얘긴데, 대학 졸업장이 목숨같던 이 나라는 이제 영어에 제 목숨이 달린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돼버렸다.

대학가의 아침은 여전히 활달해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사람들이 있다. 아침 수업에 바쁜 걸음을 총총히 옮기는 학생들에게 재빨리 전단지를 건내어 주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 전단지의 열의 아홉은 토익, 토플 강좌 안내지다. 대학들은 현수막과 대자보와 포스터들로 넘쳐난다. 그것들 다섯 건너 하나씩도 바로 이것들이다. 우리나라 모든 대학생들의 제1전공은 어쩌면 영어라고 해야 맞는 말인 것 아닌지 모를 정도다. 우리나라 대학이 이 정도니, 대학만 바라보는 중고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아니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영어학원은 필수코스가 되어버렸다. 결국 "우리나라 영어나라"라는 등식은 항등식이다.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니, 단일어를 사용하느니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영어에 대해서는 우리의 단일어인 '한국어'보다 그 위상이 높다. 이게 무슨 민족적 각성의 문제니, 개탄할 노릇이니 할 계제는 아니지만, 영어만 유달리 고취되는 이 현상에는 무언가 비합리적 요소가 내재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왜 우리나라는 이토록 영어에 열광, 아니 광분하는 것일까? 그 궁금증들을 조금 풀어볼 수 있는 것이 이 책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다.

이 책은 영어와 영어교육 및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한 그 간의 여러 영어전문가들의 논고들을 모은 책이다. 그 논고들은 멀게는 90년대에 발표된 것들로부터, 가깝게는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발표된 것들이지만, 최근의 '영어' 문제, 즉 영어교육의 부실과 영어공용어화 주장의 부각들에 대한 비판의 논지를 중심으로 모인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영어교육의 역사를 가늠해보면서, 현재의 이런 영어 현상이 이르기까지의 근원을 탐색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어느 노영문학자의 영어교육에 대한 비판적 경험적 성찰도 담겨져 있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한 것인가』란 책으로 유명한 더글라스 루미스의 '영어회화'에 대한 비판적 논고도 있고, 1997년 『국어라는 사상』으로 일본의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한 이연숙의 "일본의 영어공용어화론"의 전개를 논한 글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어학자, 영문학자들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논고들은 다양한 제재들을 다루고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문제, 곧 우리 안에 내재된 신식민주의적, 혹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영어'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비판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달리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영어의 '원어민'으로서 일본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한 더글라스 루미스의 '영어회화'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영어회화에 열광하는 현상에 대한 의문을 갖고, 그것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끼리의 '영어' 문제를 진정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것은 보다 설득력 있는 영어 담론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에 영어가 이처럼 문제적 언어가 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닐테지만, 우리나라만큼이나 '극성'인 나라 또한 없을 것도 같다. 전체 논지들이 영어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성격과 아울러, 그것이 강조되는 경제적 논리로 인한 공용어화 발상의 문제점들, 나아가 영어회화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문제점들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영어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기실 나는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지만, 현재 영어가 내 앞길에 지장을 줄 가능성은 앞으로도 극히 적어 보인다. 우리나라 수십 수만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해서 영어를 밥줄로해서 살아갈까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리 많은 이들이 영어때문에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너무 성급한 예단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영어에 대한 이 대단한 열성들은 너무 많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우리는 영어를 배우긴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글라스 루미스의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말을 옮기며 자판의 두들김을 마치고자 한다.

"영어공부 자체가 추종적 태도에서 자유의 도구로 변화될 때, 일본인들이 느끼는 그 모든 영어에 대한 '특별한 어려움들'이 정말이지 마치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인선생들만을 고용하는 외국어학원들에 대해서는 보이콧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영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은 서로들 앞장서서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스터디그룹을 조직하여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와 정치 그리고 아시아적 표현을 반영하는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인들이 이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고 투덜거리게 된다면 그때는 외국어학원에 나가야 할 사람이 바로 그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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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7-0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저번주엔가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영어 콤플렉스에 대해 다루었던데요. 그것과 과련해서 읽으면 좋겠네요. 방송에서도 우리나라 80% 이상은 영어를 그렇게 능통할 정도로 필요치 않는다고 하던데, 유치원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내려고 하는 행동이 안타까워 보이더라고요.

멜기세덱 2007-07-01 22:48   좋아요 0 | URL
전 국민이 영어 능통하면 뭐 손해볼 일이야 있겠는니까마는 능통을 강요당하는 사회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아고, 딴 건 둘째치고, 저는 우리나라 '엄마'들이 아이들을 좀 고만 괴롭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