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U 방한 경기 열리던 그날 … 편협한 민족주의 사라졌다 [중앙일보]
`한국팀` 골 먹어도 환호 승패보다 경기 자체 즐겨 젊은 세대 문화 진화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FC 서울을 4-0으로 대파한 20일 서울 상암동의 서울월드컵경기장. 경기가 끝난 뒤에도 젊은 팬 상당수가 자리를 뜨지 않고 회복운동을 하는 맨U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한국 팀 서울은 잉글랜드 팀 맨U에 전반에만 세 골을 허용하는 등 지리멸렬한 경기를 했지만 예전 같은 야유는 없었다.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맨U 선수들에게 보내는 환호만 있었다.

'대한민국 영 파워'에게 편협한 민족주의는 없었다. 맨U는 21일 출국했지만 그들이 남긴 것은 '탈(脫)민족주의'의 확인이었다.

2005년 7월 아르헨티나의 명문팀 보카 주니어스가 방한했다. 역시 FC 서울과 친선경기를 했다. FC 서울의 서포터스든 아니든 관계없이 관중은 모두 "서울"을 연호했다. '한국 팀=우리 팀'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국내 신문의 스포츠면 헤드라인 대부분도 'FC 서울, 보카 주니어스에 석패'였다.

그러나 2007년 7월 이 도식이 깨졌다.

이날 경기에 맨U의 박지성은 출전하지 않았다. 맨U를 한국과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닫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경기는 100% 외국선수로 구성된 맨U와 서울을 연고지로 한 한국 팀이 맞붙은 경기였다.

그러나 젊은 축구팬들은 전 국가대표 골키퍼인 김병지가 지키는 골문에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사진)와 잉글랜드의 웨인 루니가 골 세례를 퍼붓는데도 박수를 보냈다. 맨U의 골문을 지킨 에드윈 판데르사르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을 5-0으로 대파한 네덜란드의 골키퍼였다. 예전 같으면 "한국의 자존심" 등의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이번에는 아예 들을 수조차 없었다.

경기 도중 전광판 화면에 알렉스 퍼거슨 맨U 감독의 얼굴이 비치자 팬들은 경기장이 떠나갈 듯 환호를 질렀다. 터키 출신인 셰놀 귀네슈 서울 감독이 소개될 때도 열렬한 환영의 박수가 나왔다. 맨U 선수의 활약뿐 아니라, 서울의 이청용이 큰 페인트 모션으로 맨U의 프랑스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 미카엘 실베스트르를 넘어뜨리는 장면에서도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FC 서울을 응원하던 서울의 서포터스도 "이벤트 경기였고 즐겁게 응원했기 때문에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축구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장원재 숭실대 교수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승패보다는 경기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번 맨U 방한 경기는 한국 젊은 세대의 '탈민족주의'성향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2007년 7월 23일자 기사 중에 참 황당하다 싶어서 퍼왔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중앙일보를 구독하기에 가끔씩 보게 되는데, 이 기사는 그 중 젤 황당하지 싶다.

과연 젊은 세대들에게서 민족주의가 살아졌다는 것을 이번 맨유 방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가? 맨유에 박지성이 없었더라도 그랬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세계 최고 리그의 최고 팀이니까.

이 기사를 쓴 기자나, 축구 칼럼니스트라는 장원재 숭실대 교수의 단순한 건지, 무식한 건지 모를 탈민족주의 운운은 솔직히 너무 우습다.

맨유는 어느덧 한국팀이다. 한국 프로축구 최고 인기팀의 대결은 찾아보지 않아도, 새벽이나 밤늦게 중계되는 맨유와 첼시와의 경기는 꼭꼭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영국의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에 따라 그들이 뛰는 팀은 어느덧 우리나라 팀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맨유와 서울의 경기는 외국팀과 우리나라팀의 대결이 아닌 우리나라팀과 우리나라팀의 대결이었다. 국대와 청대의 대결 정도의 이벤트라고나 할까? 보카주니어스나 남미의 유명 프로팀이 또다시 방안하여 경기한다고 했을때에도 이런 모습이 보여질 거라고 생각하면 많이 오산은 아닐까? 여기에 민족주의 운운하는 것은 또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국수주의는 둘째 치고, 어쩌면 사대주의에 더 가깝지 싶다. 축구 사대주의. 기실 축구팬들의 보는 눈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나라 프로팀간의 경기는 정말 눈에 안찬다. 우리나라 젊은 축구팬들이 프리미어리그 같은 세계 유명 프로리그에 열광하는 데 반해, 한국의 프로축구팀에는 여전히 외면하는 행태는 어떻게 봐야 할까? 동시에 아시안컵 대회에서의 동남아시아 팀을 보는 우리의 시각, 아랍권 국가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 등에서 여전히 민족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은 잔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축구는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최고의 스포츠다. 맨유의 이번 방안에서 더욱 잘 확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탈민족주의 운운은 결국 축구의 종말하고나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도 기사라고 내보내니 참 웃기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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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저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저건 너무너무 확대해석, 과대포장 했군요.

멜기세덱 2007-07-24 00:53   좋아요 0 | URL
서울이 4:0으로 졌나요? 맨U니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좀 쪽팔리다는 생각도 들고, ㅋㅋ 아직도 저는 민족주의에 찌들어 있는 것일까요?ㅎㅎ

Mephistopheles 2007-07-2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 유명 프로축구팀이 홍보와 선전을 위해 억소리나는 선수들을 이끌고 소위 말하는 "선진축구"를 보여줬기에 우리나라 사람들 감탄한 내용을 가지고 참 가지가지 같다가 붙이는 재주도 용하군요...

멜기세덱 2007-07-24 00:55   좋아요 0 | URL
재주도 재주 나름이죠. 메피님처럼 적재적소 알차게 갖다붙이는 재주가 진짜 재주지, 이 기자양반은 이게 뭔 재준지 모르것어요.ㅋㅋ
 

아직까지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 감금되어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23명의 청년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한다.

최근 한국의 기독교단체는 앞다투어 성명을 발표하고 난리도 아니다. 정부에서도 제2의 고 김선일 씨가 생기지 않도록 나름 분주한 모습이다. 각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온 국민이 23명의 피랍자들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판국에 이번 기독교단체의 성명은 눈꼴사납지 않을 수 없다. 누구보다도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노력해야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후에 있을지 모를 기독교계에 대한 비판의 불똥을 피하기 위해 눈꼴사나운 꽁무니빼기를 하고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린 지상명령 곧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 명령 하나에 순종하고 선교를 최대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단체는 지레 겁먹고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위험지역에서의 "모든 선교 활동을 중지"하겠다는 등 자신들의 본연의 모습까지도 내팽겨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선교와 순교는 동의어라고 할 정도로 어떤 위험과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기독교의 미덕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성명은 참 얼토당토 않은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본연의 모습까지도 부정하면서 발표한 이번 성명에는 참으로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재 이번 피랍사건을 바로보는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기독교계가 눈치 빠르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언론 등에서도 제기하고 있는 기독교계의 무분별한 선교활동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이라는 시선이 그것인데, 그러나 사회 대부분은 인식은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우선은 23명의 귀한 목숨부터 살리고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기독교단체의 성명은 23명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인다. 성명의 일부분에서 이번 피랍자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 "봉사 활동"이 목적이라면서 자기네들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면서 "정부의 해외 여행 지역 제한 조치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하나마나 한 소리들만 해 댄다.

이것은 곧, 이번 사건 해결 이후 있을 기독교계에 대한 사회의 대대적 비판의 목소리를 피해보겠다는 얄팍한 추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이들이 선교와는 상관없는가? 기독교의 선교 활동은 교육, 문화, 의료, 기타 다양한 형태로 그 안에 종교적 목적이 내재해 이루어 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의료 봉사를 통해 선교를 목표로 한 것이니, 결국 이들의 활동은 선교활동의 하나다. 이들을 두고 우리와는 상관 없다는 성명은 배반적 행위가 아닌가? 선교를 지상 최대의 과제로 세상 끝날까지 지고 가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의 없는 선교 포기 선언은 또 무슨 꼴불견인지? 참 한심하면서도 이제는 경멸할 지경이다.

나중에 따져볼 문제지만, 이번 사태의 책임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선은 탈레반 무장단체의 무자비한 민간인 납치 살해 위협이 그 첫째일 것이다. 그 다음은 어디에 있을까? 과연 위험지역에 무분별하게 선교 봉사 활동을 떠난 그들에게 있을까? 아니면 미국의 절친한 동반자이자 하수인인 한국 정부의 무분별한 군대 파견에 그 근본 원인이 먼저 이지 않을까? 사회는 23명의 피랍자들을 구한 후에 그들을 어느 정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기독교계는 그들을 감싸 주어야 하고, 더불어 세계 지배를 목적으로 한 미국의 무자비한 폭력과 그에 동조하여 공범자가 된 한국 정부를 먼저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위험한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 중지 선언은 점점 한국 기독교가 미쳐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위험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역에 기독교가 먼저 손내밀어야 예수 사랑의 실천임을 성경을 통해, 기독교 순교자의 역사를 통해 수없이 배워온 기독교가 아니던가? 벌써부터 눈꼴사나운 꽁무니빼기 행각은 더이상 기독교임을 포기하는 짓이다.

(1시간 동안 열심히 썼던 글이  다 날라가 버려서 다시 쓴다. 에겅! 그래서인지 좀 간결해 진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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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날카롭고 비판적인 글을 쓰셨군요. 어쩌면 저같은 비종교인이 비판하는 것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비판하는 게 효과적일지 모르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7-24 00:47   좋아요 0 | URL
저는 독실하지가 않아서 문제에요. 교회도 안나가니깐.ㅋㅋ 기독교도 그 내부의 비판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닐텐데요, 자칫하면 이단으로 몰리기 십상이니, 조심스러울 밖에요. 그런 점에서 김두식 교수 같은 분이 제 목소리를 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금 부드러운 제2의 김용옥 같은 사람도 괜찮구요.

Mephistopheles 2007-07-2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기독교는 왠지 종교라는 이미지보다 비지니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멜기세덱 2007-07-24 00:51   좋아요 0 | URL
한국 개신교 교회 목사들의 비지니스적 마인드는 정말 대단합니다. 어차피 개신교는 속세와 가까워지기 위해 "복음들고" 산에서 내려온 것이니까 어느 정도의 속세적 비지니스 마인드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세 확장을 그 자체로 비판할 일도 아니구요. 문제는 그 마인드를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냐겠지요?
 

지난 주 후배녀석 하나가 중국엘 다녀오게 되었다며, 기념으로 뭘 사오면 좋을지 고민하더라구요. 아마도 교수님들이나 선후배, 친구들에게 여행을 다녀온 기념으로 작은 선물이라도 전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겠지요. 간혹 중국을 다녀온 지인들께서 중국차를 사오셔서 나눠주시더라구요. 그 친구도 그게 제일 적절치 않나 하는 눈치더라구요.

오늘 그 녀석이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뜻밖의 선물을 펼쳐놓더라구요. 공자의 모습이 새겨진 도장과 부채였는데요, 무엇보다도 부채가 저를 완전히 기쁘게 했답니다.



좋은 부채는 아니지만, 저기 보이시는 한시 있잖아요, 이게 제 이름 석자를 넣어 즉석에서 지은 한시랍니다.ㅎㅎ 잠깐 감상하실까요? 

樂開懷揚美名 (안락개회양미명)

편안하고 즐겁게 마음을 열고, 아름다운 이름을 드높이며,

明瑞氣任翔騰 (형명서기임상등)

빛나고 밝은 상서로운 기운이 높이 날아 오른다.

兒壯志冲宵漢 (남아장지충소한)

남아의 장한 뜻은 밤하늘 은하수를 뚫을 듯 하고,

博古通今大爲成 (박고통금대위성)

옛것을 널리 익혀 지금에 통하니, 크게 이룰 것이라.


각 첫머리에 제 이름자를 따서 멋드러진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었네요. 제가 대강 해석을 한 것이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추 이런 뜻이 나오는데요, 그 뜻 또한 굉장히 좋지 않습니까? 그동안 이름에 대한 자긍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놓고 보니 제 이름이 너무 좋은 이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부채에 담긴 그 후배녀석의 세심한 배려(요즘 다른 사람 이름의 한자를 알기가 쉽지 않거든요.)와 부채에 담긴 제 이름풀이의 넓고 깊은 뜻을 앞으로 고이 간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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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부럽다 :)
그리고 서재대문 바뀌셨네요?
근엄한 표정의(?) 뭐랄까? 약간 윤봉길 의사 필- 이 나는 주인공은 멜기님? ㅎㅎ
부채와 대문이미지가 너무 환상적인 궁합이네요 :)

비로그인 2007-07-13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세심한 배려 (그죠, 부모님 한자도 모르는 애들이 많다는데요?)에 멋진 선물이네요. 가끔 부채가 그립다는 생각을 해요. 곱게 간직하느라 그냥은 못쓰시고 가끔 펴서 부쳐보시겠네요. 그런데 부채도 안낀다고 펼쳐서 쓰지 않으면 망가진다고 하더라구요. 한시 가끔씩 들으면 운치있고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 2007-07-1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봉길의사 필,이란 체셔님의 댓글에 저 쓰러져요~~
멋진 선물을 받으셨네요. ^^

마노아 2007-07-1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감동을 주는, 게다가 폼까지 나는 멋진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두 분의 센스가 장난이 아니군요. 축하해요^^

twinpix 2007-07-13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진 한시. 좋은 선물인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Mephistopheles 2007-07-14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폼 납니다..참고로 제 부채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라는...^^
 

오늘 문득 든 생각이라기보다는, 간혹 대형건물이나 지하상가 등에 갔을 때마다 들곤 했던 생각이었는데, 그간 별반 대수롭지 않게 여겨오던 터에 이건 좀 아니지 싶은 어깃장이 강하게 박혀오는 이 문제를 난 기어코 말해야겠다.

부평역 지하상가에 위치한 싱크빅문고엘 아주 가끔씩 들리곤 한다. 여기는 매장도 제법 넓기도 한데다가, 철지난 인문서적들도 많아서 심심할 때 들러 시간때우기가 좋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책구경이라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보면 한 두 시간은 훌쩍이다. 그런데 보통의 평범한 흡연자라면 이 시점에서 담배 한 대가 생각이 나는게 무척이나 정상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던지라, 그리고 이제 이 책 구경을 끝내야겠기도 해서, 이래저래 고른 책 두 권을 계산하고 나왔다. 담배 한 대 태워야겠다는 심사로 흡연가능구역을 찾았다. 내가 선택한 곳은 지하상가의 나와 어느 거리의 한 복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담배 한 대 피자고 길바닥에 나와 지나는 사람들을 피해 연기를 뿜어대자니, 괜한 어깃장이 생긴다. 하기야 요즘 담배피는 사람이 천대받는 세상인데 이런 하소연이 어리석은 짓인줄 알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뭔가 문제는 있어보인다.

우선 담배 피는 사람을 길거리로 내몬 사람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이러한 처사는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그 피해를 전가시키는 일이 된다는 문제가 그 하나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환대받지 못할 흡연자라고는 하지만, 길바닥으로 내몰아 그깟 담배 한 대 피우는 것도 처량히 만들고, 그도 부족해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이 뭔 죄라고 그런 흡연자들이 처량히 내뿜는 담배연기를 들여 마셔야 하겠느냐 이 말이다.

요즘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는 추세인데, 이것에 반기를 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직은 길거리에서의 흡연은 제재하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예를 들면 횡단보도 부근)에서의 흡연도 어느 정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람직한 흡연자다. 점차 대세가 길거리에서의 흡연을 전면차단에까지 이를 것으로 예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이땅에 흡연자가 연기를 뿜을 수 있는 곳은 없게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담배가 합법적으로 판매되는 기호품이다. 그리고 담배 피는 것 또한 장소의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합법이다. 그런데 많은 부분에서의 흡연 차단은 몇 가지의 모순을 가져온다. 담배 매매와 흡연이 합법이면서, "니 집에서만 피워라"라고 하는 전면적 흡연의 불법화가 그 모순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흡연자들은 당연히도 "그럴려면 담배를 팔지나 말지."라는 불만을 보일 수 밖에 없다. 내가 그렇다. 사회적 대세가 흡연을 불법화 하는 것인데 반해, 정부는 더욱 모순된 구조-보건복지부와 담배인삼공사의 양립-를 갖고 있고, 모순된 법과 규정을 동시에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명명백백히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담배의 전면적 금지를 정부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죽기 전에 그게 가능하기는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하여간 그건 그렇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 다른 것이데, 지하상가의 비흡연자나 길거리 지나다니는 비흡연자나 모두 흡연자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직은 합법인 흡연을 하는 사람들의 흡연 권리도 최소한 적으로는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담배 피려면 꾹 참았다가 니네 집에나 가서 피워라."라는 소리는 노무현 정권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금연구역 내에 최소한의 흡연구역(혹은 흡연실)을 제한적으로나마 정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흡연자들이 정부에 돈 주고 산 담배 피울 권리를 최소한으로 보장받는 것에 지나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는 해주어야 하는게 아니겠는가 이말이다.

금연을 장려하는 사회 운동과 흡연구역의 제한적 설치는 상충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상호 양립의 구도가 이뤄져야 한다. 흡연자를 극도로 고립시켜 담배를 아예 못피게 하겠다는 발상은 자못 치사한 짓이고, 게다가 법적 흡연의 불법화보다 전혀 온당치 못 한 짓이다. 흡연자들의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해 주면서, 비흡연자들의 피해는 최대한 막아주면서, 온건히 금연 장려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 현대 사회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지, 이런 치사한 수법은 막가파식으로 못된 짓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 되야한다. 담배를 사면서 내는 돈으로 이것저것 많이 쓰고, 특히나 금연 운동에 적극 지원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것도 모순이라면 모순이겠지만, 적어도 모순되지 않는 단 하나의 일은 해줘야 한다. 그건 바로 흡연자들을 최소한 천대받지 않게는 해 줄 수 있는 흡연구역을 적절히 마련해 주는 것이란 얘기다. 그도 못하겠다면, 정부는 아예 흡연을 불법으로 규정해서 흡연을 못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다른 상황에서의 흡연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군대와 관련된 문제인데, 군 입대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병교육 기간 중 훈련생들에 대한 흡연 금지가 그것이다. 신병교육 기간, 그러니까 6주간을 꼼짝없이 금연해야 하는데, 이게 문제의 소지가 무척 크다. 국방부가 금연을 권장하기 위해 이런 규정을 적용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6주 후에는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게 하는 곳이 군대이기 때문이다. 기실 훈련병들을 상대로 흡연을 금지시키는 것은 훈련병들에 대한 통제를 강력히 확대하는 수단으로써의 발상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교육훈련 시간 중의 금연이라면 이해하겠지만, 6주간 흡연을 못하게 하는 처사는 흡연자들에 대한 정신적 고문인 것이다. 정확한 통계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6주후, 그리고 자대배치 후, 나아가 군제대로 입대전 흡연자들의 흡연률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 경험상 확신한다. 그렇다면 신병훈련소에서의 강제적 금연의 적용은 흡연자들에 대한 고문이고 이것은 지극히 문제적이며, 군대의 비인간적 행태라고 규정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리저리 뒤죽박죽 흡연자 입장에서의 어깃장을 놓았지만, 어떤 면에서 이러한 것은 흡연자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며, 보다 넓은 시각에서 본다면 인권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대세가 그렇다보니 흡연자들이 끽소리 못하고 있지만서도, 현재 우리사회에서 흡연자들이 흡연할 수 있는 공간을 금연구역 전면적 확대와 아울러 최소한도에서라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한 신병훈련소에서의 비인간적 강제금연 작태는 당장에 없어져야 한다. 우리사회가 금연사회로 간다고 하더라고 흡연자들을 보다듬고 가야하는 것이지, 나를 포함한 흡연자들을 고립시켜버리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면서 가봐야 기분좋게 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흡연자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 속에 깊은 한은 담아 내뿜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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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7-1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 한분이 흡연 이야기만 나오면 거의 상욕을 해대며 흡연자를 욕하는 분이 있습니다.그런데 이분이 담배를 안피웠던 분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였거든요. 저 역시 흡연자이지만 분명 비흡연자들이 흡연자로 인해 불쾌감이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반대입니다만 언제부터 웰빙웰빙 했는지 아주 인간이하로 보는 약간은 편협적인 사람들을 마주치면 피곤해집니다. 제가 볼땐 담배도단 술이 더 사회적으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이 기회에 아주 금주법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 미치겠죠?? ㅋㅋ 아마 볼만할껍니다..^^
 
멜기세덱 추천 7월의 책 『평화의 얼굴』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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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사회 속에 드리운 기독교의 모습

  요즘 각 언론매체를 통해 이랜드 노사분쟁 사태와 관련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심히 괴롭다. 이랜드가 어떤 회사던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겠다는 사명을 표방하며 선교를 최고의 목표로 삼아 발전해 온 기업이 아니던가? 이랜드의 사주 박성수 회장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철강왕 카네기만큼이나 존경받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언급되던 영웅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신앙심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의 이랜드를 키워왔다는 그의 성공사례는 어지간한 기독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 아무런 대책도 내어놓지 않는, 전형적인 비기독교계 회사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무자비한 행태를 보이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계 기업이라 자청하는 이랜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사주 박성수 회장의 잘못된 믿음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일반적 기업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번 이랜드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두 가지의 요소, 지주자본가의 기업적 횡포와 왜곡된 자기 합리적 신앙이 이번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와 분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랜드 사측을 비판하는 목소리 중에 다른 기업도 아닌 기독교의 진리와 사랑을 표방한 이랜드, 특히 신앙인을 자처한 박성수 회장이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박성수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 경영진의 기독교적 사상과 이해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성수 회장이 "노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이랜드의 박 회장이 얼마나 자기 합리적 기독교 신앙을 품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박 회장의 신앙적 깊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신앙이 본질적 기독교 정신과는 많이 다른 각도로 깊이 박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많은 기독교(특히 개신교)인들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 후에 성경적 근거를 제 입맛대로 찾아들고 와 보란 듯이 우긴다. 거기에는 절대적이면서 비타협적 태도로 모든 것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하게 된다. 결국 박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의 경영진에게 "기독교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비판은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은 강력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이랜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이랜드 사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 내의 기독교에 이런 박 회장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교회 내에서나 밖에서나 기독교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님, 예수님의 뜻이라고 내어놓지만, 너무 많은 부분에서 자기 합리적 '하나님의 뜻'을 비타협적이고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행태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백 여 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너무 많이 왜곡되고 변질왔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 병폐들이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신교계 케이블 방송에서 중계하는 한 대형교회의 예배 실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님께서 "미국은 우리 형님 국가니 우리 동생 나라가 잘 대접해 줘야하고, 사악한 저 이북의 공산주의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또 한 번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신앙인 김두식, 그의 용기 있는 비판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우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을 이 책 『평화의 얼굴』에서 재삼 확인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김두식 교수의 『칼을 쳐서 보습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란 책의 개정증보판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역사적 추이와 오늘날 한국의 실태, 그리고 그 문제점과 대안들에 대해 친절하면서도 강력하게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 기독교 정신의 근본 바탕에 '평화주의'적 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의 반평화주의적 행태에 조심스런 비판을 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울 수 밖에 없었음을 나는 고백해야 하겠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란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은 칼과 창으로 상징되는 '전쟁'에 있지 않고, '보습'과 '낫'을 들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평화'에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기본 주제다. 그러면서 김두식 교수는 본인 자신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한국 기독교의 본질적 회복을 위한 자성과 반성의 성찰을 이 책 곳곳에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용기와 진정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책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변질과 왜곡에 대한 전면적 비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아니 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전에 이런 한국 기독교 비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어떤가? 기독교가 본디 그리스도교임을 알고, 그리스도가 곧 메시아, 예수님임을 아는 나에게 오늘날의 기독교는 본디 '예수 그리스도의 교'하고는 한참을 멀리 가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마가복음 12:28-34, 누가복음 10:25-28)


  이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을 온전히 보여준다. 기독교의 절대 경전인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란 것인데, 구약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새 언약,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기독교에는 새로운 예수님의 언약이 유효하다. 구약의 약속은 성취된 바, 다만 그 기독교 역사적 교훈으로써 우리에게 역사(役事)할 따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이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와 동등하게("그와 같으니"란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위계적인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할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이어야 하는데, 한국의 기독교는 이 본질에서 한참을 빗나가 있는 듯 보인다. 그 단면이 바로 이랜드 사태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주류 기독교계의 대응에서도 우리는 이런 본질적 기독교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서 김두식 교수의 문제의식은 심각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방해야할 기독교, 곧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할 기독교가 평화의 모습이라고는 코빼기 보이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김두식 교수 자신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한다는 것은 무척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기에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3.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김두식 교수에 따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문제에 대한 지금의 기독교계의 반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점이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기독교가 어떻게 그 반대 선상에서 대척하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 종단은 국가 안보와 국군의 정신 전력 보호 차원에서 병역대체법 도입에 절대로 반대한다.”, “병역대체법이 도입되면 국내 140여 종의 이단 종파가 신앙적 양심을 내세우며 병역을 거부하고 특히 국가의 모든 제도에 대해 양심적 거부를 불사하는 극도의 국기 문란이 예상된다.”, “병역을 거부하는 특정 종교인들이 감옥에 간 것은 기독교와 상관없이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고 “이들을 평화주의자나 다수의 힘에 의해 억울하게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처럼 만들어 가는 것은 무지와 악함의 극치” 등의 표현은 한국의 기독교계 단체들의 대표자들의 입에서 발설된 것들이다.

  이 땅의 모든 전쟁에 반대해야할 입장이라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보다도 기독교가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김두식 교수는 왜 기독교가 이 땅에서의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지를 기독교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밝혀내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이상적 모델로 추구하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독교는 평화를 지향하는 모습을 품고 있었으며, 기독교의 역사를 통틀어 많은 신앙인들이 병역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해왔음을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병역거부는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의 모습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지배층과 결탁의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그것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근대 국가주의의 창궐에 기인한다.

  기독교의 근본에 평화에 대한 염원과 실천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인된 기독교로서 지배층과 결탁하고 그들에게 봉사해야하기에, 그 왜곡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 왜곡은 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모습이 기독교 전통으로 여겨지는 모습은 가히 역겨운 일이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 교회 어느 곳에서건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가 군에 입대하여 총을 굳건히 들고 모든 전투에서 하나님의 능력주심에 힘입어 적들을 섬멸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믿음의 사람이므로 모든 위험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실 것이고, 내가 쏘는 총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돌질해 오는 적들의 심장에 백발백중할 것을 믿는다. 과연 이게 기독교가 믿는 예수님의 구속의 축복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게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자신을 버리고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것은 아가페, 곧 완전한 사랑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배운 오늘날 기독교 형제자매들은 적과 나를 구분짓지 않고, 원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단골 설교 메뉴도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다만 군대에 가서 총을 들고 적을 섬멸할 그날을 위해 살인 훈련에 매진하는 것은 그런 설교에서 논외가 된다.

  찬송가나 복음성가에는 전쟁에 대한 노랫말이 많다. 원수와 대적하여 담대히 싸우고, 완전히 무찌르고, 강하고 굳센 하나님의 전사로서 모든 악에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인데, 얼핏 듣기에는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구약의 성경 구절에서 그런 노랫말의 근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축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성경에 근거하여 볼 때, 그 문맥 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전제가 있다. 즉 전쟁은 인간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자기 다툼에서 총칼을 들고 휘둘러 적들을 섬멸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곧 영적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강하고 담대히 악에 대적하여 인내하고 싸운다면, 하나님의 영적 승리를 맛보게 된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들의 분규와 전쟁에서 지지고 볶을 것이 아니라, 인내와 사랑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날의 영적 승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군대가서 총을 들어 국가에 충성하라는 논리는 껴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종교적 의미에서건 개인적 의미에서건 기독교는 그들에 대해 반대할 명분이 없다. 반대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서라도 그 근본 기독교의 원리상에 있어 그러하며, 더욱이 기독교 사랑의 관용과 포용에 있어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는 그 소수자들을 포용하고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제모습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주류 기독교는 어떠한가? 과연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임을 포기한 것이며, 기독,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유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배반의 기독교가 아닌가?


4.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성 프랜시스의 이 기도문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진리와 희망을 전하고, 기쁨을 주는 것, 곧 기독교의 제 역할이 아닐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평화롭게 쉴 수 있는 곳은 이 땅에서 주류 기독교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멸시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당밖에 없다. 과연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인가? 나는 아무래도 받아들이지를 못하겠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리고 간구하는 프랜시스의 기도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이 읊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의 기도로 읊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가득 품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김두식 교수의 이 수고로운 작업도 그러한 지극한 염원을 한가득 담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두식 교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다시금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길 다시 한 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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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 회장에게 권하는 두 권의 책
    from 상콤한 포르노그라피 2007-07-13 15:01 
    얼마 전에 집근처 한 대형교회에 현수막이 붙은 것을 보았다. <개그맨 마빡이 정종철 집사 간증 예배> 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개그콘서트 내 요즘 인기를 얻은 신인 오지헌 씨도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이름이 나있고 여기저기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비단 이 두 사람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어떤 직업인이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면 그때부터 여기저기 교회서 간증을 해달란 초청이 줄을 잇는다.   예수님의 가르침
 
 
마늘빵 2007-07-11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먼저 쓰셨군요. :) 강추입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4   좋아요 0 | URL
좀 제대로 써보겠다 싶어 조금조금씩 쓰다가 얼렁뚱땅 마무리해버렸네요...ㅎㅎ 앞으로 계속 보완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가져보려구요. 명색이 크리스천으로서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부끄럽네요.

홍수맘 2007-07-11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에 "아멘"하며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5   좋아요 0 | URL
이 땅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기도합니다. 그 뜻 가운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있지 않겠습니까?

투명고냥이 2007-07-1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멜기세덱 2007-07-11 22: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근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2007-07-1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1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7-1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제 페이퍼에 트랙백으로 꼬리 남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