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기독교 -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리처드 마우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한국의 기독교는 코너에 몰렸다. 언론에 의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대형교회들의 비리가 폭로된 데다가, 아프간에서의 피랍사건까지, 이른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한국 기독교는 현재 비난의 ‘윤간(輪姦)’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판을 넘어 비난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난이라는 행위가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비난의 당위가 인정될 때, 우리는 충분히 비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최근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정확히 말하자면 주류 한국 기독교 지도층에 대한 비난은 얼핏 그 당위가 인정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어디까지는 감내해야할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많은 네티즌들(엄밀히 그들을 네티즌, 즉 인터넷 상의 시민이라고 부르기 민망하기조차 한)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적 비난의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하다. 비판과 비난을 넘어, 앞서 표현한바 ‘윤간’을 당하고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소리다.

  우리 사회에서 ‘윤간’은 어떤 경우에라도 긍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윤간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정되어진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현상들에서 이런 ‘윤간’적 막심(莫甚)함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동정적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최근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들이 그 거대한 내막을 들어낸 것도 있겠지만, 이는 길고도 오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의 잘못들이 한국 사회 일반에 뿌리 깊게 각인된 것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현대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의 산실인 미국의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의 저서 『Uncommon Decency』(InterVarsity Press, 1992.)가 최근 번역되어 『무례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는 그간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여실히 인식한 산물이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서 그간 부단히도 ‘무례’했다는 인식이 이 책의 번역을 촉진한 것은 아닐까? 고려신학대학원 신원하 교수는 추천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한국 교회에는 마우가 요구하는 기독교적 교양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왜 ‘요구’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와는 조금 다른 맥락 가운데에 적용해 볼 수도 있으리라.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이 사회에 대해 '무례'했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무례함을 기독교 일반으로 싸잡아 이야기 하지만, 그 중심에는 ‘개신교(改新敎)’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무례하게 느끼는 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천주교와 개신교 중에서 개신교가 한 역할이 훨씬 크다는 소리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의 발자취를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왜 한국 개신교가 그렇게 무례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천주교에 의해서였다. 잘 알다시피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로 인해 잠시 쇠퇴하다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이번엔 개신교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이 침투의 대다수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당시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가 작용하게 되면서 이전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는 개신교가 급속히 퍼질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것과 함께 천주교와는 다른, 아니 여타의 종교와는 다른 수법이 개신교에는 있었는데, 그것은 이 개신교가 “찾아가는 종교”였다는 점이다. 천주교의 성당과 불교의 사찰과는 달리 개신교의 교회당은 산골짝 마을 곳곳까지 찾아간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빨간불의 십자가는 이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신(新)포교전략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전략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급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보편 종교로서의 이러한 포교 전략을 탓할 바는 아니지만, 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함께 역설적이지만 ‘종교적 무례함’이라는 두 양상으로 찾아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 모토와 함께 세속화라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종교의 세속화는 질적 성장보다는 양적 성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매우 상업적이고 기업적인 행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밑도 끝도 없는 “안 믿으면 지옥불”식의 협박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한국의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의 중추자(中樞者) 무당들의 신(神) 들린 모습들까지 개신교의 종교 행태에서 보게 됨으로써 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비루함에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울며불며, 두 팔을 휘저어대며,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는 그들의 모습에 일종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행태들을 초심자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것인데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죄 없는 어린양들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외침은 그 자체로 비호감일 따름이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복음주의의 목표의식은, 그 연원을 신약 성경에 두고 있다. “땅 끝까지 이러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기독교는 선교를 그 절대적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기독교(基督敎), 즉 그리스도교(敎)로서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의 행렬을 이루게 한다. 산과 강도 그들을 막지는 못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속화(世俗化)’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세속화라는 어휘가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다소간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그 복음을 들고 세상 곳곳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찾아가는 종교” 전략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문제는 포교 전략적 ‘세속화’ 뿐만이 아니라, 부정적 함의로서의 ‘세속화’도 함께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세상 만방이 주의 이름을 알게 되는 그날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고 여기는 이 포교자(布敎者)들은, 그 ‘끝날’에 자신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 확실한 관계로 잃었던 양을 다시금 찾아오는 것보다는 단지 ‘예수’란 존재가 있었다는 단순한 알림만으로 그들의 선교를 지속해 왔다. 그들이 믿건 안 믿건 크게 개의(介意)치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가지는 거대한 오류의 원인자(原因子)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 복음의 알림은 시급한 문제였을까? 이 기독교 전도자들은 너무 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흔히들 말하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포교전략을 구사해 왔던 것이다. 여기에 비기독교인, 즉 그들의 포교대상자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리처드 마우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가 영향력 있게 전파되게 하자면 성도들은 타인을 향해 일반적인 정중함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닮은 정중함을 지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도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이런 정중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무례한 기독교”였던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런 말을 했다. “恭而無禮則勞(공이무례즉노), 愼而無禮則諰(신이무례즉시), 勇而無禮則亂(용이무례즉란), 直而無禮則絞(직이무례즉교).” 곧,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조심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혼란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공손해 보이고, 조심하는 것처럼 보이고, 용감한 것처럼 보이며, 때론 강직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예의도 없었다. 그러니 괜한 헛수고만 한 것이고, 세상이 두렵게 여겨지고, 혼란스럽기만 하고, 또 너무 급한 것이 아닌가? 몇 천 년 전의 공자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들에 예견하듯이 이런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해법으로서 나는 이 책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가 충분한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마우가 이 책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세상과 기독교인이 공존하기 위해서, 즉 그 둘이 다른 상황가운데서 분리되지 않고 세상가운데서 하나가 되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품의와 신앙을 가지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보다 효과적인 복음전파의 한 방식으로서 대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있다. 그 적절한 해결책으로서 “기독교적 시민교양”, 즉 ‘Uncommon Decency’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원하 교수의 소개를 들어보자.




  “현대는 문화 전쟁 시대라고 할 만큼 각종 문화와 사조가 공존하면서 때로 충돌하고 부침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신념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할 ‘무엇’(what)에 대해서보다는 ‘어떻게’(how) 전달해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마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중하고 친절하며 관용하는 태도 즉 기독교적 교양과 예절(Christian Civility)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점점 사나워지고 전투적이 되어 가는 사회에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비일상적인 정중함”(Uncommon Decency)을 갖추고 일반 시민들을 대하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그간의 복음주의의 대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변화된 현대사회에서의 전략적 수정, 즉 포교의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해법인 것이다. 이러한 마우의 주장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불만적일 수도 있다. 그간의 자신들의 ‘헌신적’ 선교가 무의미한 것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우는 여러 장을 할애(割愛)하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해 해명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략적 수정에 대한 주장은 일면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경청해야할 시대적 필요성과 부합한다. 21세기 세계는 변화했고, 다원화 사회가 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해야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서로 다른 것은 폭력적으로 자기화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지금은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 그런 폭력적 자기화에 대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고 기독교적 존재 목적인 복음 자체에 대한 변화를 마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신용하 교수의 말처럼 그들의 진리를 간직한 채, 그 진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하느냐, 즉 방법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기독교인들에게 타당한 방법이다. 또한 그들의 포교대상인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소식임에 분명하다. 어떤 종교에 대한 혐오감은 현대를 살아가는 무신론적 인간들에게는 불행이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불교건 천주교건 개신교이건 이슬람이건, 현대인들에게 이들은 하나의 도움의 목소리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교화시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어떤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시될 때, 교화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비판적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기독교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이것은 어느 상황에서는 항상 열기를 띄기 마련이다. 그런데, 비기독교인들과는 어느 정도 대화가 되지만, 기독교인들과는 대화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할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진리(=복음)가 곧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합리화 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진리에 대한 비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타협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마우는 “불신자에게 배우”라고 주장한다. “주님은 때때로 이상한 교사들을 보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한 번 공자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三人行(삼인행), 必有我師焉(필유아사언). 擇其善者而從之(댁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기불선자이개지).” 곧,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論語』「述而」편의 이야기인데, 이는 마우의 조언과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누구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우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무신론적 사상가 니체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당당히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사성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당연스러운 교훈마저도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마우의 주장이 특이한 것이 아니면서도 놀라운 것은 이런 한국 기독교의 기초적 태도의 문제를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바로 마우가 인용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의 자세다.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타인의]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없다면 그분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요구되는 만큼 다른 이들과 차별성 있게 살아간다면,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의문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의문들을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해 힌두교가 제공하는 대답이 아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게 하며, 기꺼이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모든 의문에 대해 흡족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모범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에, 세상의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받고 존경받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그렇지는 않더라도,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향기’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모범적 교양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건 기독교인들이 모범적일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간혹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사회에서 욕먹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마우의 이런 지적이 너무나도 소름끼칠 정도이기까지 하다.

  리처드 마우가 펼치는 ‘시민교양’의 논리에서 다소간 나와는 그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시각이다. 그는 ‘정당한 전쟁’론을 옹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적 원리에 근거할 때 이는 타당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내 견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적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나, 그리고 성서에 입각해서나 자명한 논리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우의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교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건대 그 기본적인 요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친절과 온유함을 제쳐놓을 권리가 없다”는 언급은 우리 모두가 경청해야만 하겠다.

  마지막으로 마우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대에 공적인 존재로서 사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자질”을 언급한다. ‘융통성’을 가질 것, ‘잠정적인 입장’에 설 것, ‘겸손함’의 태도, ‘경외감’, ‘소박함’ 등이 그것이다. 이 5가지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적 삶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을 마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마우는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마우가 언급한 저 5가지 원칙이 얼마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마우의 이 처방이 한국 기독교에 잘 먹혀들기 힘들어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우의 이런 지적들은 한국 기독교에 적합한 ‘양약(良藥)’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될 때에 기독교 복음주의는 보다 합리적 보수주의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수장격인 리처드 마우의 지적을 한국 보수주의의 절대 기반인 한국 기독교가 자기 것으로 실천할 때, 한국 기독교는 존경받을 수 있고, 기독교의 존재목적을 충실히 이행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욕먹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아파한다. 그러나 먹을 욕은 먹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 한국 기독교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변화의 행동강령이 이 책 『무례한 기독교』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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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말에 큰 울림이 남네요. 최근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세례가 일말의 예의없이(?) 자행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었는데, 이 책이 문제의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군요. 다만 멜기세덱님의 견해처럼, '정당한 전쟁'이란 허상을 찬성하는데에는 마뜩치 않지만 말이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멜기세덱 2007-08-17 17:28   좋아요 0 | URL
최근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초례한 한국기독교의 '예의 없음'을 지적한 것인데요. 그 점에서 있어서 리처드 마우의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바람결님과는 첨인 것 같네요. 반갑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Jade 2007-08-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은 항상 리뷰를 너무 열심히 쓰셔서 읽기가 힘들어요 ㅎㅎ 그래도 항상 읽고나면 생각을 많이 한다는...멜기님, 밤새 책읽고 글만 쓰시나봐 ㅎㅎ 책 말고 연애를..ㅎㅎ

멜기세덱 2007-08-17 17:30   좋아요 0 | URL
책과 하는 연애도 영~ 시덥잖네요...ㅎㅎ 리뷰 쓰기도 일주일에 하나 쓸까 말까 하구요....ㅎㅎ 저도 말이죠, 다른 걸 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답니다...
ㅠㅠ;;

웽스북스 2007-09-0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 리뷰(당신들의 예수)를 읽으며 이 책을 추천해드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언급되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스크롤을 내리니 리뷰까지 있네요 ㅎㅎ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과 대화가 더 잘된다는 말에 저도 공감을 해요- 사실 내가 너무 쿨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깐 이 모드 벗어났는데, 결국 본성은 어쩔 수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요
아프간 사건을 겪으며 답답한 마음에 다시 집어든 책이었어요- 작년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와닿는 부분이 더 많았고요- 초기미국 선교사 쪽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여 대학시절 은사님께서 쓰신 '초기미국 선교사 연구'라는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절판이네요 ㅠ
멜기세덱님 내공 따라가려면 아직 먼 길인 것 같지만 차근차근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알라디너 여러분! 당신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알라딘 서재를 허접하게나마 꾸려가면서 새록새록 느끼는 감정은 참 "행복"하다는 겁니다.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고 교감하면서 知와 德과 情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곳, 그런 곳을 찾기란 요즘 같은 시절엔 어려울 법 한데, 그런 곳에 내 한 자리가 따뜻하게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됩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좋은 글로써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고, 때론 따뜻한 정이 어린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이 곳, 알라딘과 알라디너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君子(군자), 以文會友(이문회우), 以友輔仁(이우보인)."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그 벗으로 자기의 부족한 인격을 메운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 모든 알라디너 여러분들이 君子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빼고요.ㅎㅎ

군자가 아니라 '알자'라고 해야 할까요? 알라딘 서재를 통해서 저는 참 이기적이게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있어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군자, 알子 십니다.

(요새는 이상하게 책 읽기도 게을러지고, 리뷰 쓰는 것도 잘 안 되고, 얼마전 받은 알라딘 서평단 책도 통 읽지도 않고 있고, 여름이라 그런 건가요? 그렇다면 이 여름이 빨리 지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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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5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멜기님도 밤이 길기만 한가 봅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축축 쳐지는 것 같아요~ 이럴때일수록 개인적으로 짜릿한 일이 터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예요 ㅎㅎ

멜기세덱 2007-08-15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릿한 일'이라....있으면 저도 좀 알려주세요....ㅋㅋㅋ 아! 이제 이 긴 밤도 거반 다 같네요. 누군가에게는 이 시간이 아침이겠죠?

가시장미 2007-08-15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히 정말요? 괜시리 아침부터 기분 좋아지네요. 저도 알라디너죠?! ㅠ_ㅠ 왜 아닌 것 같지 ㅋㅋ 멜기세덱님.. 님의 서재도 많은 생각과 배움을 나눠주는 곳이랍니다. 으흐흐
저도 날을 셌는데.. 일이 있어서 잠도 못자고 나가야 할 것 같네요. 아흐!

멜기세덱 2007-08-15 08:57   좋아요 0 | URL
휴일인데도 못 쉬세요? 이런이런, 가시장미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만세입니다...^^;;

Jade 2007-08-15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어제 잠을 못잤더니 비몽사몽..멜기님도 저 못지않게 야행성이시네요!

멜기세덱 2007-08-15 08:58   좋아요 0 | URL
저도 약간 비몽사몽..어제 낮에 하루 종일 잔데다가, 오늘은 조금 있다가 모임이 있어서요....저는 아침형 인간이기를 포기했더랍니다....ㅋㅋ

마늘빵 2007-08-1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 멜기님 밤새신겁니까? -_- 새벽부터 아침까지. 영화제목같네. 문장 좋군요. 햐.

멜기세덱 2007-08-16 01:54   좋아요 0 | URL
질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ㅋㅋㅋ 저는 낮에 자고, 밤에 놀고....

잃어버린우산 2007-08-1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하던 일이 시들해지는 건 연애초기 증상이죠. 활자가 눈에 안들어오고 책에 그녀 얼굴이 어른거린다거나 하죠. 이문회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멜기세덱 2007-08-16 01:55   좋아요 0 | URL
어디서부터 연애초기라고 불러야할까요? 저는 항상 연애준비깁니다만....ㅋㅋ

Jade 2007-08-15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혹시 멜기님 연애시작하신 거예요? 그럼 혹시 밤새 전화하시느라....ㅎㅎㅎ

멜기세덱 2007-08-16 01:56   좋아요 0 | URL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항상 열려 있답니다...ㅎㅎㅎㅎ 밤새 뭐, 서재질하느라...ㅋㅋ

프레이야 2007-08-15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덱님, 암요.. 님도 행복을 주시는 분이에요. 요샌 날이 더워 집중도 안 되고
쳐지고 그래요. 다들 그러신가 봐요^^

멜기세덱 2007-08-16 01:58   좋아요 0 | URL
날이 더워서인지는 긴가민가합니다만, 세상의 모든 행복은 아마도 혜경님으로부터 오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Mephistopheles 2007-08-15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저 저 한자 독음 다 읽었어요..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군요..^^
(그러나 뜻은 몰랐다는..)

멜기세덱 2007-08-16 01:59   좋아요 0 | URL
한자 독음을 친절히 달아두었는데, 괜한 짓이었군요...ㅎㅎ 대단하세요...ㅎㅎ
(뜻이야 뭐 각자 마음에 있는 걸로 충분하겠죠.)

순오기 2007-08-16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知와 德과 情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곳'이란 말이 참 좋군요.
'以文會友' 이밤도 하루를 마감하며 멜기님 서재에서 또,
이기적이게 한 수 배우고 갑니다~ ㅎㅎ 감사 ^*^

멜기세덱 2007-08-16 02:00   좋아요 0 | URL
"이타주의자란 타인의 쾌락을 통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일 뿐이다."(고종석,『코드 훔치기』, 마음산책, 2000, p.32.)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나이고 싶다.

행복은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기주의자.

마노아 2007-08-1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知와 德과 情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곳'이라니... 너무 알흠다워요. 이곳 마을의 주민이라는 게 너무 즐겁습니다. ^^
 

체셔고양이님의

"왜 나는 이벤트를 하지 않는가" http://blog.aladin.co.kr/yourmark/1486360

를 보고 생각해낸 즉석 이벤트 입니다.

지금 곧 체셔고양이님의 서재 http://blog.aladin.co.kr/yourmark

로 가셔서, 체셔고양이님께서 지금까지 쓰신 리뷰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그 리뷰들 중에 제가 읽은 책이 딱 2권이 있는데요,

그 2권을 제일 먼저 맞춰주시는 분께 그 책 2권을 바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

정답자가 나올 때까지 이벤트가 진행되며,

아쉽게 1권만을 맞춰 주신 분 중

체셔고양이님께서 지목하신 분 1분께도 그 책 1권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리의 체셔고양이님을 위한 이벤트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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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8-12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캐비닛은 읽으신 것 같은데. 또 뭐가 있을까요. 으음.
달콤한 나의 도시도 읽으셨군요 ㅎㅎㅎ

멜기세덱 2007-08-13 00:18   좋아요 0 | URL
이렇게 단박에 맞춰주실 줄은 .....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마노아 2007-08-12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핫, 이매지님 고르신 게 맞네요. 저번 이벤트 때 두 작품은 읽은 책이어서 내놓았잖아요^^ㅎㅎㅎ

멜기세덱 2007-08-13 00:18   좋아요 0 | URL
한 발 늦어셨어요...어째 요즘 제 서재에 뜸하시더라니...ㅎㅎ

이매지 2007-08-12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달콤한 나의 도시를 멜기님이 읽으셨으리라고 생각을 못한;;;
많은 참여를 부탁하셨는데 제가 너무 빨리 맞춰버렸군요 ㅎㅎㅎ

비로그인 2007-08-12 11:27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 안그래도 방에 책이 쌓이셨다면서 ㅋㅋ
또 되셨네요~ :)
축하축하~

멜기세덱 2007-08-13 00:19   좋아요 0 | URL
아신다면 얼른 주소남겨 주세요.ㅎㅎ 2권을 보내드려야 하니까요.

멜기세덱 2007-08-12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거 너무 쉽게 맞추셨는데요....ㅎㅎ
주소 남겨주세요....ㅋㅋ

비로그인 2007-08-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멜기님은 얼굴만 미남이신게 아니라 맘 씀씀이도 멋지시군요~ @_@...
그나저나 저도 책선물을 받으려고 노려봤으나 ㅋㅋ 두번이나 땡- 했다는 ㅠㅠ...
감사합니다 멜기님 :)

비로그인 2007-08-12 17:33   좋아요 0 | URL
체셔냥아 그러게 슬쩍 멜기님의 리뷰 목록을 보고
모른척 맞췄어야 할 거 아니냐!
쯧쯧
순진하긴 :b

멜기세덱 2007-08-13 00:24   좋아요 0 | URL
체셔님 덕에 괜히 주목을 좀 끌려다가ㅋㅋㅋ 이매지님이 이렇게 덜컥 맞추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ㅋㅋㅋ
그러고 보니 저 2권을 리뷰를 제가 썼더군요....ㅋㅋㅋ
이런 걸 보고 자승자박이라고 하는 거겠죠...ㅎㅎ

2007-08-12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13 00:25   좋아요 0 | URL
제 보관함엔 400 여 권의 책이 담겨 있답니다...ㅎㅎ

2007-08-13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4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Jade 2007-08-13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이제부터 세덱님과 친해져야 겠다는...ㅎㅎㅎ

멜기세덱 2007-08-14 20:48   좋아요 0 | URL
우리가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요? ㅎㅎㅎㅎ
완전 고민해서 친해져야 겠는걸.....ㅋㅋㅋ

2007-08-13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14 20:48   좋아요 0 | URL
얼런 보내드리도록 하지요....ㅎㅎ
악마의 공놀이 노래라.....
 
HOW TO READ 성경 How To Read 시리즈
리처드 할로웨이 지음, 주원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성경, 흔히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즉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라고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맹점'은 있는 듯 하다. '셀러'라는 의미에서의 성경의 존재는 르네상스 시기, 즉 인쇄술이 발달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서구권에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당대 서구지역의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의 유일무이의 경전인 성경이 일반 대중(여기서는 일반 기독교도들)들에게 읽히는 책, 그럼으로써 팔리는 책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일단 '서구'라는 지역적 제한이 붙어야만 한다. 이런 기독교가 서구의 산업적 경제적, 그리고 무력적 발달과 함께 비서구 지역에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성경도 함께 그 소비 구역을 넓혀가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 세계 인구의 1/3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스테디셀러'는 전 세계 인구 1/3에 의해 달성된 것이 된다.

이 1/3의 사람들을 가만히 놓고 보면, 대다수 서구인과 일부 아시아인이 그 대부분을 구성한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경제력이란 무기가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 인쇄술의 발달과 그 산물들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 즉 경제력이 다른 어느 지역(비기독교인들의 지역) 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성경을 무한히 소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라는 월계관은 거반 자작극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내가 책을 썼는데, 우리 가족과 친인척들과 사돈에 팔촌들이 가산을 털어 수십, 수만권을 사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놓은 것과 매 한 가지 아니면 두 가지라는 소리다. 이 맹점을 무시하고 흔히 기독교인들은 이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를 드리밀며 성경이 최고의 책이라고 자찬한다. 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성경이 '최고의 책'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성경은 '최고의 책'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스테디셀러'적 맹점이 또 다른 측면에서 '최고의 책'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데에 있다. 그 다른 측면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성경이 기독교인들만의 스테디셀러로서 절대적 '경전화' 되고 있는 것이고, 이것과 밀접히 관련이 되겠지만 진정한 스테디셀러로서의 성경의 비기독교인화가 그 다른 하나이다.

성경이 기독교인들만의 소유는 아니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간에,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것일진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절대화해서 자신들만의 특권적 소유물로 만드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다만 글씨를 써내려갔을 뿐이라는 영감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영감을 내리실 때, 성경이 '경전'으로 떠받들라고 하시려는 의도는 거의 없을 것이 아닌가 한다. 성경이 경전화되고 의식화(儀式化) 될 때, 읽는 책으로써의 활용도는 떨어질 뿐이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에게 성경이 교회갈 때에나 사용되어지고 있는 점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나는 이것이 일부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성경을 매일같이 읽는 기독교인들이 그 일부에 해당될 것이라 생각한다. 경솔한 판단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성경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복음주의도 여기에 한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기록된 이 성경은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인데, 이는 달리 하면 함부로 해석하는 행위를 죄악시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 읽기를 적극 권장(달리 표현하면 강요) 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해석'은 암묵적으로 금하고 았다. 성경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리, 곧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읽고, 또 읽고, 심지어 외울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이 진리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주일 예배의 설교 시간에 목사의 말씀인 이 진리를 해석해 전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일반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은 절대화, '외경화'되고, 일부 목회자들 및 교회지도자 들에게는 성경 해석의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 특권은 배타적이어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일반 성도들의 나름의 '해석'까지도 배척될 뿐이다.

르네상스 이후 성경에 대해 일반 대중들의 접근권을 허용했다면, 오늘날에는 그 해석의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 나아가 두번째 측면, 곧 성경의 비기독교인화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의 추구란 현재의 1/3에게 제한된 스테디셀러로서의 성경이 나머지 2/3에게도 스테디셀러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앞선 말한 성경의 '절대화'와 '외경화'의 배타성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달리 말하면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성경의 '문학'화로 이어진다. 즉 2가지의 필수적 과정이 동시에 해결되야 하는데, 정리하면 성경의 '절대화'로부터의 해방과 '문학화'로서의 지향이다.

이는 성경이 진정한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되게 하는 길이고, 성경이 진정 오늘날 최고의 책이 되게 하는 길이다. 나아가 비기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선교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여기에 이러한 해법으로서의 유효적절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 있으니 바로 『HOW TO READ 성경』이다. 이 책은 'HOW TO READ' 시리즈로,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한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 기획의 하나이다. 즉, 이 책의 기획의도는 비기독교인에게 오히려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유용하겠지만, 그러한 구분에 관계없이, 어떻게 하면 성경을 "제대로 읽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리처드 할로웨이가 말하는 성경 읽기의 유효적절한 방법은 바로 성경을 통해 "현재 삶의 조건을 반영하고 해석"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성경을 읽는 가장 나은 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말은 바로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개인에게 있어서 성경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바로 그 개개인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문학'을 대하는 자세와 궁극적으로 동일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저자의 말을 절반쯤 곡해하면 성경의 '문학적 읽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성경은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문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따오면 "내부에 이미 강력한 힘이 깃든 거룩한 책"이 성경이라고 하는데, 그 강력한 힘의 원천은 바로 이 뛰어난 문학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작, 약속, 연관, 유배, 고통, 구원자, 도전, 비유, 사도, 종말"이란 10가지의 테마를 선정하여 성경을 읽는 모범적 포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테마들은 하나의 흥미만점의 대하장편소설의 기본 테마들의 모범적 구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흥미로움에서 시작하여 곳곳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들을 오늘날의 상황과 여건 가운데서 시의적절하게 해석해 낸다면, 성경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최고의 책, 최고의 문학, 최고의 고전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읽기 방법들을 살짝 하나만 엿보도록 하자. 저자는 신명기를 읽으면서 '연관, 종교적 사회와 윤리'라는 테마를 뽑아낸다. 거기에서 오늘날 "성경은 일종의 연대성을 명령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더 큰 안목과 상상력으로 마음을 써야 한다"는 의미를 추출한다. 나아가 "성경이 묘사하는 하느님은 정치적으로 통화주의보다는 분배주의를 지지하는 분임이 뚜렷하다. 하느님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닌 것 같지만, 무한경쟁보다는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늘리려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셨음도 분명하다."라는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저자의 성경 읽기 방법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성경이 오늘날 그 자체가 가지는 뛰어난 이야기성과 흥미성을 모두 내어 버리고 다만 딱딱한 절대 '경전'의 어두운 세계로 치닫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이 그 질 낮은 문학으로 취급받는 것을 혐오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문학의 효과적 기법인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구약의 다양한 장들에서 웅장한 역사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미로운 시적 언어가, 고통과 번민의 언어가, 슬픔과 분노의 언어가 쓰이고 있음도 주지할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서양의 모든 예술의 모태에는 성경이 있음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그 성경의 '문학성'을 배제하는 것은 성경을 죽이는 행위, 곧 불경이 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도교인에게나 성경은 최고의 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그러기에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 "강력한 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 높은 곳에서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도 이제는 '문학'으로 낮아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책 『HOW TO READ 성경』에서 이러한 문학적 읽기가 충분히 의미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성경의 가진 그 강력한 힘을 전달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류에게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곧 '문학'이다. 인류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성경은 불려져야 한다.

(이 책의 아쉬움이 몇 가지 있다. 참고문헌이 제시되어 있는데 좀 부실하다는 점, 대부분이 외국서적이라는 점, 우리말 번역본의 정보가 전무하다는 점 등이다. 이는 번역자나 편집자들이 좀 보완해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하나님'과 '하느님'의 용어 사용 문제다.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개신교인들이 읽는데에 거슬릴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리고 인용된 성경이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글성경본이고, 그에 따른 각 성서의 제목이 조금씩 달라 약간 읽는데 더딘 감을 주었다. 뭐 그거야 내가 감수할 사항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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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잘 다녀오셨나요 멜기님? ^^

그나저나 재도전! 혹시...
헌법의 풍경, 면장선거!!!
-.-;;;

멜기세덱 2007-08-12 00:05   좋아요 0 | URL
오늘이요? 하루 종일 자느라...못 갔어요...흐미...ㅎㅎ

그나저나, 또 틀리셨어요...ㅋㅋㅋ
체셔님에게는 이제 도전권이 없으세요...ㅎㅎ
 

오랜만에 거는 시비걸기다. 오늘은 "뭐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시비를 거느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뭔가하면 한글 자음의 명칭인데, 이게 생각할 수록 좀 답답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다.

한번 따져보자. 세상에 수많은 언어가 있고, 그보다는 훨씬 적지만 그래도 많은 문자가 있다. 문자의 발달사에서 뒤쪽에 자리하는 것이 음소문자(대개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문자를 가리킨다.)인데, 대표적인 것이 알파벳이다. 알파벳은 각기 언어에서 약간씩 다르게 사용된다. 영어나 독일어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이 그렇다. 한글은 이 음소문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좀더 발전된 형태라고 보는 자질문자에 넣기도 한다. 하여간 한글도 자음과 모음으로 나눌 수 있으니 크게보아 이 음소문자라 해두는 것이 편하겠다.(흔히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다면서 '자질문자'라고 떠든다.)

아, 어려운 소리 하고 있다. 절미하고, 자음과 모음을 가진 세상의 문자들 중에 그 자모의 명칭, 특히 자음의 명칭이 한글만큼 어렵고 복잡한 것이 있을까? 내가 아는 선에서는 '없다'이다. 정확한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전국민 80% 이상이 이 한글 자음의 명칭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왜 그럴까?

① 자음의 명칭이 모두 2음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음절문자인 일본의 문자도 2음절로 된 것이 거의 없다.(일본어를 잘 몰라서 '전혀'란 말을 쓰지 못하겠다.)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간혹 2음절처럼 보이는 명칭이 있다.(F, H, J, K, V, X) 그러나 이것들도 모두 1음절이다. ② 자음의 명칭 패턴에 방해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자음의 명칭을 부여하는데에 일정한 패턴 가운데, 돌출적인 것이 몇몇 들어있어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보다 확실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여간 우리 한글의 자음 이름은 이러이러해서 헷갈리는데,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우리를 헷갈리게 한 주범이 있으니, 바로 '세종대왕'일까? 그건 '아니다'다.

그럼 누굴까? 조선 중종 22년, 그러니까 1527년에 최세진이란 사람이 『훈몽자회(訓蒙字會)』라는 한자 학습서를 지었다. 이것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1443년이나, 반포된 1446년보다 얼추 100년 뒤의 일이다. 한자를 가르치기 위한 이 학습서에서 한자의 음을 가르치기 쉽게 해주는 방법을 썼으니, 그것은 훈민정음을 이용해서 한자음을 표기하는 것이었다. 훈민정음은 표음문자로써 다양한 음을 나타낼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훈민정음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최세진은 이 책의 앞자리에 한글자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넣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의 한글 자음의 명칭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 기록된 자음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추려보면,

ㄱ 其役 기역

ㄴ 尼隱 니은

ㄷ 池(末) 디귿

ㄹ 梨乙 리을

ㅁ 眉音 미음

ㅂ 非邑 비읍

ㅅ 時(衣) 시옷

ㅇ 異凝 이응

이런 식이다. 자 그런데 여기서 좀 이체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ㄱ, ㄷ, ㅅ이다. 나머지는 모두 모음이 'ㅣ, ㅡ'가 붙어 초성과 종성에서 자음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공식을 따르면 ㄱ은 '기윽', ㄷ은 '디읃', ㅅ은 '시읏'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가 있다. 잘 보면 최세진이 각각의 자음에 한자를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별다른 뜻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각 자음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용례를 보이기 위해 한자를 음차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ㄴ은 한자 尼의 발음, 그러니까 [니]에서처럼 첫소리에 쓰이고, 隱의 발음 [은]에서처럼 끝소리에 쓰인다는 얘기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ㄱ을 '기윽'으로 해야겠는데, '기'는 '其'로 쓸 수 있었지만, '윽'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세진은 고민끝에 엇비슷한 '役'을 "아무 이유 없이' 갖다 쓴 것이다.

그런데, ㄷ과 ㅅ은 또 이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ㄷ에 쓰인 한자를 음대로 읽어보면 '디말'이다.(여기서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 池(지)는 당시에 아직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디]와 유사하게 발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 이건 왜 그렇지? 자 여기서도 이유는 동일하다. '읃'을 써야겠는데, 이것에 해당하는 한자가 암만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ㄷ을 받침으로 쓰는 다른 한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음차가 아닌 훈차, 즉 뜻을 가져다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 '末'의 뜻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끝'이다. 당시에는 아직 된소리가 없었다. 따라서 '귿'으로 썼다. 그래서 ㄷ의 용례로 '디귿'을 쓴 고육지책인 것이다.

ㅅ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한자를 읽어보면 '시의'지만, 衣(의)의 뜻인 '옷'을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ㅅ의 용례로 '시옷'을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최세진이 꾀를 부린 것인데, 당시로서는 탁월한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이렇게 최세진이 한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먼저 훈민정음을 가르쳐야 했는데, 훈민정음을 가르치르치면서 그 용례를 보인 것에 불과한 것들을 지금은 당당하게도 이름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ㅋ (箕) *한자의 음은 [기]다. 箕의 뜻은 '키', 그러니까 여기서도 훈차를 한 것이다.

ㅌ 治 *현재 한자음은 [치]지만, 당시 구개음화가 되기 이전이어서 [티]로 읽었다.

ㅍ 皮 *이 한자는 '가죽'을 뜻하고 발음은 [피].

ㅈ 之

ㅊ 齒 *한자는 '이'를 뜻하는 [치]

ㅎ 屎 *이 한자는 '똥'을 뜻하는 [시]이다. 아마도 당시 [히]로 읽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모두 모음 'ㅣ'와 결합한 용례로 쓰고 있다. 중요도가 떨어졌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들 모두 앞의 것과 같이 2음절로 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지금의 자음 명칭이 정해진 것인데, 1988년 3월 1일 문교부의 '한글 맞춤법' 제 4항에 자모의 순서와 이름을 정해 놓음으로서 공식화되었다. 근데 과연 이게 잘한 짓인지는 모를 일이다.

자, 그렇다면 원래는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쓴 것이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얼추 100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였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이 자음을 뭐라고 불렀을까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세종대왕 당시 녹음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에 "이렇게 부르시오"라고 써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단지 '이렇게 부르지 않았을까'하고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그 단서는 '훈민정음 언해본'과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자 그럼 추정해보자.

'훈민정음 언해본'을 보면 "ㄱ난('아래 아'로 표기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표기가 잘 안 된다. 감안해 주시기 바란다.), ㄴ난, ㄷ난" 등 처럼 쓰였다. 그런데 '난('아래 아'가 쓰인 것)이란 조사는 양성모음이나 중성 모음 'ㅣ'의 뒤에 쓰이는 조사다. 이 말은 '가' 나 '기' 다음에 오는 조사는 '난'이고, '구' 나 '그'처럼 음성 모음 다음에는 '는'이란 조사가 쓰였다는 얘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각각의 자음에 양성모음이나 중성모음을 붙여 발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단서를 최세진의『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단서는 각각의 자음의 용례를 보임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 'ㅣ'모음이 붙은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ㅋ, ㅌ, ㅍ' 등에서는 아예 'ㅣ'만 붙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종대왕 당시 이 자음을 모음 'ㅣ'를 붙여 불렀다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음을 세종대왕은 "기, 니, 디, 리, 미, 비, 시, 이, 키, 티, 피, 지, 치, 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한참을 힘들게 돌아왔다. 자 이제 결론을 좀 보자. 지금의 한글 자음의 명칭이 너무 헷갈리는 것 아니냐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이 명칭이 어떻게 붙게 됐는지, 그리고 원래는 어떻게 불렀을지 따져봤다. 여기서 나는 아무래도 세종대왕이 불렀을 법한 "기니디리미비시'처럼 자음 명칭을 정하면 좋지 않겠나 하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다.

뭐, 예것으로 돌아가야 된다느니, 근본을 찾아야 된다느니, 세종대왕님께서 부르신 대로 불러야지 감히 누구 맘대로 바꿔 부르냐느니 하는 뜻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글 자모의 명칭부터 이따위로 어렵고 힘들게 만들어 놓아서 귀찮고 짜증나고 답답하다 이거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좀 실용적으로, 그러면서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니깐, 그냥 "기니디리미비시이키티피지치히"라고 부르면 좋지 않겠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북한에서는 이 자모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살펴보면 재밌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북한에서 모음은 우리와 같게 부른다. 그런데 자음이 조금 다르다. 북한에서는 자음을 이렇게 부른단다.

"기윽, 니은, 디읃, 리을, 미음, 비읍, 시읏,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

자 보시라. 어떤가? 우리는 ㄱ을 '기역'으로 부르는데, 쟤네들은 '기윽'으로, ㄷ을 우리는 아직 '디귿'하는데, 저분들은 '디읃'으로, ㅅ을 우리는 여전히 '시옷' 하는데, 저 똑똑한 사람들은 '시읏'으로 하지 않는가? 게다가 또는 이렇게 불러도 좋다고 『조선말규범집』에 명시해 놓고 있지 않은가?

자음 글자의 이름은 각각 다음과 같이 부를 수도 있다.
그, 느, 드, 르, 므, 브, 스, 응, 즈, 츠, 크, 트, 프, 흐, 끄, 뜨, 쁘, 쓰, 쯔

아 상당히 쪽팔려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젠장.

(참고로, 한글 자모의 명칭 등과 우리말의 역사 등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보시기 바란다. 아주 쉽고 재밌게 우리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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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08-08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간에 눈에 들어온 멜기세덱님의 페이퍼.. 참으로 어렵사옵니다! 으흐 _-_)~
그런데 북한말과 우리말의 발음의 차이를 '기윽,디읃,시읏...' 이 부분을 보니, 좀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직도, 어렵네요. -_-)~

멜기세덱 2007-08-08 10:48   좋아요 0 | URL
ㅎㅎ, 어렵지요? 저도 만날 어려워요...ㅎㅎ 그래서 그냥 기니디리미비시 하자는 건데요...ㅎㅎ
이러면 참 쉽잖아요...?

조선인 2007-08-0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 유치원에서 기역, 니은 대신 기,니,디,리,로 가르치길래 참 흐뭇했더랬어요. 열심히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8-08 10:52   좋아요 0 | URL
그 유치원 괜찮네요...기니디리 하면 알기도 쉽고 발음도 편하고 왠지 재미도 있고 그런거 같아요..ㅎㅎ 근데, 댓글은 세 분인데, 추천은 2네요...이거 나도 추천실명제를 부르짖어야 쓰것는데요...ㅋㅋ

마늘빵 2007-08-08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사연이. 북한과 우리가 자음을 칭하는 방법이 다르군요. 북한게 더 합리적으로 보이는데.

멜기세덱 2007-08-08 10:55   좋아요 0 | URL
북한은 최세진의 잔꾀를 간파한 것이죠, 그러면서도 실용성과 탄력성 있게 자음의 명칭을 부여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응'인데요, '으'로 하면 모음 'ㅡ'와 구분이 안되니까 그런거 같아요. 아주 기발한 착상이에요...ㅎㅎ 저도 참고로 해서 주장을 수정해야 겠어요.
기니디리미비시잉지치키티피히 이렇게요...ㅎㅎ

이매지 2007-08-0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업시간에 요 부분 배우면서 바꿔야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훈몽자회의 표기법이 기발한 것 같기는 하지만요 ㅎㅎ

멜기세덱 2007-08-08 14:58   좋아요 0 | URL
우리, 다같이 한 번 바꿔봅시닷!!!...ㅋㅋ

마늘빵 2007-08-0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는 이걸 왜 의심하지 않았지. 이제서야 알았네.

멜기세덱 2007-08-08 15:09   좋아요 0 | URL
아프님이 이런거까지 의심하시면, 저같은 사람이 할게 없어져요...저도 먹고는 살아야죠....ㅎㅎㅎ

2007-08-08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08 16:22   좋아요 0 | URL
님께서 관심주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영광입니다. 프린트 뿐이랍니까~~칼라프린트해서 보내드리고픈 심정입니다...제 이 하찮은 글이 귀한 곳에서 조금의 유익을 구할 수만 있다면 참 행복한 일입니다...ㅎㅎ

2007-08-08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08 17:08   좋아요 0 | URL
앗, 그러시다면,,저기 쪽팔린다나, 젠장, 이따위 등 과격한 단어는 빼고요...꼭!! 교육적으로다가....안 좋아서리...ㅋㅋㅋ

비로그인 2007-08-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읽어봅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뭐 끄적거린다고 하는 제가 참 부끄러워요.
멜기님의 진중하면서도 멋진 페이퍼! 존경합니다~~~!

멜기세덱 2007-08-08 16:24   좋아요 0 | URL
이따가 주무시기 전에, 한 번 더 읽어주세요...ㅋㅋ
근데요, 체셔님...이건 절대로 '기본적인 것'이 아니에...
참나, 이 하찮은 것을 괜히 어렵게 해 놔가지구....돈없어 못배운 우리 서민들 괴롭히는 거잖아여!!!이까이꺼 몰라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까요...ㅎㅎ
글고, 모르면 어떻습니까? 체셔님은 아름다우시잖아여!!!ㅋㅋ

2007-08-08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08 16:25   좋아요 0 | URL
What?
무슨 의민지 잘 모르겠어요....ㅋㅋ

2007-08-08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08 19: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부끄부끄~~:);;

심술 2007-08-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사불란하고 통일된 맛은 떨어져도 전 기역,디귿,시옷이 좋은데요. 불규칙이나 예외가 너무 많으면 혼란스럽겠지만 14개 가운데 3개 쯤은 애교로 봐 줄 만 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자라면서 속했던 거의 모든 집단에서 불규칙이나 예외 취급 받아 온 제 팔자랑 동병상련돼서일지도 모르지만.

멜기세덱 2007-08-08 19:21   좋아요 0 | URL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ㅎㅎ 그런데 이게 애교차원을 넘어선거 같아요..
진짜 애교라면야!! 그느드르므브스'응'즈츠크트프흐 같은거랄까요...ㅎㅎ
지금은 평범한 많은 것들이 전에는 불규칙하고 예외적인 것들이었겠지요? 심술님은 이땅에 '애교적' 존재가 아니실까요?ㅋㅋㅋ

순오기 2007-08-08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왜 추천을 제한하는지 애석하네요. 두번 세번 자꾸 추천하고픈데...
정말 아그들한테 자음 이름 가르치느라 땀방울 뺍니다. 문제는 중딩들도 제대로 아는 녀석들이 많지 않다는데 경악! 기니디리미비시잉~~ 이렇게 부르는데 몰표 줍시다!

멜기세덱 2007-08-09 01:2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순오기님 반갑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배불러요...
근데, 이 페이퍼의 취지가 모른다고 경악하자는 게 아니구, 모르게 만든 것에 대해 쫌 시비걸자는 거라서...ㅋㅋㅋ
추천에 배부르고, 몰표에 배터지네요...ㄳ

아영엄마 2007-08-09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들어가서 어렵게 익히는 기역 니은... 이것이 한자에서 나온 거였군요. 이 페이퍼를 통해 처음 알고 갑니다. (__)

멜기세덱 2007-08-09 01:30   좋아요 0 | URL
한자에서 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용례를 보인 것이고, 그 소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죠.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데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ㅎㅎ

승주나무 2007-08-09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견을 달려고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깊은 밤이라 그런지 찾아지질 않네요.. 제가 예전에 듣기로 기역(役), 디긋[末], 시옷[衣]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구강구조와 그에 따른 발음 관습에 맞춰 정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북한이 쓰는 것은 주시경의 정통을 계승한 김두봉이라는 사람의 '조선말본'의 범례에 의한 것인데요. 위의 거랑 똑같죠. 통일안이 만들어질 1933년 당시만 해도 자음과 관련한 논쟁은 매우 뜨거웠다고 해요.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학자들이 '관습헌법'을 따른 것이지요.
관습이 쓰면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순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지 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최세진이 표기하기 어렵다고 꾀를 냈다면 "즈, 츠, 크, 트"는 병기할 한자어가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이것도 빌려올 한자어가 없는 거 아닌가요.. 암튼 살펴봐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간만에 우리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준 멜기세덱 님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멜기세덱 2007-08-09 10:03   좋아요 0 | URL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처음 보이는 기역, 디귿, 시옷 은 위에서 말한 윽, 읃, 읏 과 대응되는 한자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구강구조와 그에 따른 발음 관습에 맞춰 정했다"는 논거를 제가 과문한 탓에 처음 듣는데요, 그렇더라도 최세진이 그걸 고려한 것이었다고는 보기 어려울 듯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 중에 ㅈ, ㅊ, ㅋ, ㅌ, ㅍ, ㅎ 을 최세진은 지, 치, 키, 티, 피, 히 즉, 'ㅣ'모음을 결합한 용례로 보이고 있습니다. 즈츠크트 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자음의 별칭이죠. 최세진이 'ㅣ'모음을 결합시킨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의 관례상, 훈민정음 창제시부터 자음을 불러오던 관습에 따른 것이라고 보여지네요...

순오기 2007-08-1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2학년 2학기 생활국어(107쪽)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더군요. 님의 글을 먼저 본 덕분에 얼른 알아보고 반가웠습니다. 요 글 복사 출력해서 아들 국어책에 끼워주렵니다.
감사^*^

멜기세덱 2007-08-13 00:1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ㅎㅎ 워낙에 공부를 안해서 그런 글이 있는줄도 몰랐네요.ㅎㅎ 읽어봤는데, 몇 가지 점에서 좀 그렇네요. 최세진은 사실 자모의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고 단지 용례를 보인 것을 뿐이라는 점, 쓸데없이 역관의 설움이니 핍박이니 운운한다는 점, 최세진은 국어학자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외국어학자, 언어학자 였다는 점 등등이 거슬리네요...ㅎㅎㅎ
근데, 이건 국어교육 목표와는 좀 거리가 있는 글인데요...ㅎㅎ 아드님에게 보여 주기는...좀...ㅎㅎ 어쨌건 도움이 되신다면야 저야 고마운 일이지요...ㅎㅎ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