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년 10월 12일~2007년 9월 6일)

그의 이름과 그의 노래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사춘기 고등학생 시절, 그의 목소리로 <카루소>를 들으며 밤을 지샜다. 듣고 또 듣고, 테이프가 늘어나 더이상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었다. 그 목소리의 애잔함과 짙은 호소력에 고민많은 사춘기 소년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는 파바로티의 <카루소>를 왠지 모르게 좋아했다. 그 노래가 20세기 초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 (Enrico Caruso, 1873~1921)를 기리며 불렸던 것이지도, 그 가사의 의미조차도 몰랐다. 루치오 달라의 감성 넘치는 연주와 함께 전달되는 파바로티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한때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성악가의 꿈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오래지 않아 접었지만, 아직도 상상 속에서는 즐겨 나를 찾는 희망이기도 하다.

그 후로부터 나는 파바로티를 좋아하게 됐다. 그를 좋아하면서 그의 목소리의 다채로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파바로티와 더불어 세계 3대 테너를 말하지만, 파바로티는 그 중에서도 별처럼 빛난다. 호세 카레라스나 플라시도 도밍고는 뛰어난 테너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다채롭지 못하다.

그러나 파바로티는 다르다. 여리고 애잔함에서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강함까지, 익살과 유머, 묵직함과 중후함까지, 그는 여리지만 강하고,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어떤 목소리에도 치우치지 않고 다채롭게 자유자재로 노래를 부른다. 음악은 시종일관 하나의 목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를 세상사람들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부른 <오 나의 태양><축배의 노래><공주는 잠 못 이루고><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은 언제나 나를 기쁘고 즐겁고 슬프고 여리게 만든다. 그럴 때면 이런 노래들을 흥얼거리기도 하는 것을 나는 낭만이라 생각한다.

그는 때로 악동처럼 살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가히 크고 위대하다. 그만큼 전세계 대중적으로 오페라를 알리는데 기여한 사람이 있을까? 그의 어느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여러 가수들과 크로스오버를 감행한 것도 오페라가 더욱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이제 그는 없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답게 울릴 것이다. 그가 전설의 테네 카루소에게 헌정했던 그 노래를 이제는 파바로티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20세기 최고의 테너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않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오늘밤 그의 타계를 애도하며, <카루소>를 카루소가 아닌 그를 위하여 듣는다.

 

Qui dove il mare luccica e tira forte il vento
su una vecchia terraza davanti al golfo di surriento
un uomo abbraccia una ragazza dopo che aveva pianto
poi si schiarisce la voce e ricomincia il canto.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bene sai e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e vene sai.

Vide le luci in mezzo al mare penso alle notti a in America
ma erano solo le lampare e la bianca di una elica
senti il dollre nella musica si alzo dal pianoforte
ma quando vide la luna uscire da una nuvola gli sembro dolce anche la morte.
Guardo negli occhi la ragazza quegli occhi verdi com il mare
poi all'improvviso usci una lacrima e lui credette di affogare.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bene sai e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e vene sai.

Potenza della lirica dove ogni dramma e un falso
che con un po'di trucco e con la mimica puoi diventare un altro
ma due occhi che ti guardano cosi vicini e veri
ti fan scordare le parole confondono i pensieri
cosi diventa tutto piccolo anche le notti la in America
ti volti e vedi la tua vita come la scia di un'elica
ma si e la vita che finisce ma lui non ci penso poi tanto
anzi si sentiva gia felice e ricomincio il suo canto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bene sai e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e vene sai.


여기 빛나는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일어나 테라스를 불어대면
여기는 소렌토 만의 정면 한 남자가 한 아가씨를 포옹하고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네
그러면 그는 목소리를 맑게 하여 노래를 다시 시작하네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벌써 잘 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서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바다의 엷은 빛도 사라지고 아메리카의 밤을 생각하며
나는 홀로 등불을 들고 방황하네
하얀 뱃자국이 솟아오르며 음악 속의 회환을 느낄 때면
피아노 소리는 고조되는데
그러면 달빛이 구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모습은 부드럽지만 죽음을 닮고
소녀의 시선을 응시하면 그것은 바다와 같은 청록빛
그러면 예기치 않게 흐르는 눈물 이는 그를 숨막히게 하고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벌써 잘 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서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오페라 가수의 가능성이 감각의 연극을 거짓 이야기로 꾸미는데
그것은 트릭과 흉내로써 이루어지고 이윽고 전혀 다른 것이 된다네
너를 쳐다보는 두 시선 그렇게 와서 너를 보면
너는 그 가사를 잊지 않으리 혼동하며 생각하며
그렇게 모든 것은 왜소해지고
아메리카의 밤은 그렇게 거기서 돌고 보면서 사는 인생
뱃자국이 솟아오르는 뒤로 인생도 그렇게 끝날 것임을
그리고 인생을 충분히 생각도 못한 채
천사의 소리만 느끼며 그의 노래를 다시 시작하네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벌써 잘 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서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벌써 잘 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서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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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7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07 11:07   좋아요 0 | URL
그는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겁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갔다면, 하늘나라는 한층 아름다워지겠어요. 그의 목소리가 멋지게 울려퍼질테니까.

순오기 2007-09-19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시는 님을 잡을수는 없지만, 목소리는 영원히 들을 수 있으니... 됐지요!
루치아노 파바로티~~ 이제는 추억 속의 이름으로 남기며...
 

   
 

  저녁밥을 먹던 둘째가 "와! 좃나 맛있다"라고 한다. 부부가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주보며 할 말을 잊는다. 그러곤 금세 눈길이 4학년짜리 제 누나에게로 꽂힌다. 며칠 전 제 엄마 앞에서 뜻도 모르고 "엄마 이 책이 존나 재미있어!"라고 말했다가 불벼락을 맞은 일이 있었는데, 고새 일곱 살짜리가 그 말을 배운 것이다. "너 어디서 그 말 배웠어?" 엄마 아빠의 기색이 순식간에 심상찮게 변하자, 둘째는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금세 아앙 하고 울어버린다.

  큰애에게 물어보니 한국에 있을 때 학교에서 아이들이 늘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란다. 너무 맛있다. 정말 재미있다는 말을 뜻도 모르고 '좃나 맛있다', '좃나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지난해 대학교 2학년 과제물 속에서 '좃나 예뻤다'라고 쓴 표현을 보고 대경실색해서 그 학생을 불러내어 그 뜻을 물어보았던 민망한 일도 새삼 생각나고, 얼마 전 이곳 대만에 중국어 배우러 온 듯한 여학생들이 길에서 저희들끼리 하던 말 가운데서도 얼핏 이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설마 긴가민가했었다. 얼마나 재미있으면 '그것'이 바지 밖으로 나올 지경이 될까? 계집애들까지 예사로 그런 말을 지껄이니, 나중에는 '너무'나 '정말'의 동의어로 사전에 올리잔 말이나 안 나올까 걱정이다. 말이 자꾸 쓰레기처럼 변해간다.

- 정민, 「좃나 맛있다」, 『스승의 옥편』, 마음산책, 2007, pp.145-6.

 
   

요즘 아이들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듯한 일화다. 정민 선생의 아이가 지금은 훌쩍 컸으니 이제는 선생 앞에서 이런 말을 해서 혼이 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경우를 접하면 어른들은 흔히 '세상이 어쩔려고 이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웃지도 못하고 화도 못내는,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짓게 된다. 더욱이 이런 말들을 쓰는 요즘 아이들은 진정 그 말에 무슨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쓰고 있으니, 어찌 혀를 차지 않으랴!

중고생들이 가득한 버스를 타면 이 말을 대화가운데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특히나 여학생들도 이 말을 무척 애용한다. 굳이 구분을 짓자면, 요새 대학생부터 초등생에 이르기까지 이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구사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상의 세대에서는 이 말에 그래도 어느 정도의 거리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욕의 대가 김열규 선생은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사계절, 1997.)에서 이러한 말은 이제 감투사나 감탄사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것으로 '제기랄, 니미랄, 젠장, 넥에미랄'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 이 '좆나'를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상황 가운데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이런 욕들에 대해 단지 감투사 정도로 용인할 수 있는 여지를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구수한 입담에서야 누가 뭐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즘 아이들이 애용하는 것은 그렇게 용인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 말이 가지는 의미가 심히 껄끄럽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걱정스레 쓰고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왕 쓰는게 얼굴에 철판을 좀 깔고 풀어보면, '좆나'라는 욕은 흔히 '좆 나게 ~하다.'처럼 쓰여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있는 힘을 다하다."의 뜻을 지닌다. 얼마나 힘을 썼으면 '그것'이 날 정도이겠는가 말이다. 비슷한 말로 '좆 빠지게'가 있다. 이 말의 뜻도 '좆 나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그 쓰임에 있어 성별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좆 빠지게'는 남자가, '좆 나게'는 여자가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좆 빠지게'보다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좆 나게'나 그 변형이 주로 쓰인다.

그런데 그 쓰임의 유형이 어떻든 간에, 이 욕에는 일종의 남근선호사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나거나 빠지는 것이 남성의 그것을 저속하게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욕은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경멸해 마지 않는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문제는 요즘 학생들이 그게 나는지 빠지는지를 의식하고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뭐 그걸 굳이 의식해?"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래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이 의식을 한다면 이 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표기의 문제를 짚어보자. 위의 인용문에서 정민 선생은 '좃'이라고 표기했다. 나는 '좆'으로 썼다. 그런데 다른 이들의 사용을 보면 '졷'도 보인다. 이 세가지 표기 중에서 가장 옳은 표기는 '좆'으로 생각된다. '좃'이나 '졷'은 중세국어에서의 종성 표기법의 변화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것들의 변형으로 '조또, 존나, 조낸' 등은 발음나는 대로 쓴 것으로 보여진다.

잠깐 엇나갔는데, 다시 돌아와서, 위의 정민 선생의 "동의어로 사전에 올리잔 말이나 안 나올까"하는 걱정은 아직 이른 듯 보인다. 이와는 달리 김열규 선생은 이제 이런 말은 '자동화'되었다고 말한다. 자동화란 "주어진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퉁겨 나온 말"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일종의 흔한 감투사가 되었다는 얘기다. 어떻든 간에 우리 사회가 이말을 정식으로 받아들일 만큼 '쓰레기'는 아닐 것이다.

"말이 자꾸 쓰레기처럼 변해간다."는 정민 선생의 마지막 말씀에 다소 씁쓸해진다. 그런 것도 같다.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 이런 말을 쓰는 게 거북스럽다. 그네들도 이걸 알면 거북스럽지 않을까? 이 글을 보는 어린 학생들이 있다면 그런 거북스러움을 느껴 앞으로 이런 말을 좀 가리게 된다면, 이 글을 쓴 나는 조금 덜 민망하겠다.

끝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주 쓰는 '제기랄, 니미랄, 넥에미랄, 젠장' 계열의 욕도 걸고 넘어가자. 이 말을 쓰는 사람은 더 나쁘다. 이 말은 그야말로 심각하다. 이 욕은 '제(니) 에미 하고 ~할', '네 어미를 붙을'이란 되먹잖은 욕이다. 이 말도 이제는 감투사나 감탄사 정도로 자동화 되었다고 김열규 선생은 말하지만, 그래도 강제적으로라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욕 한마디 내뱉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이 잘난 대한민국에 사는 한, 저 국회의사당에 인간들이 살아있는 한, 욕 안하고는 우리 국민들은 곧 죽고 말 것이다. 십분 이해하지만서도, 좀 찬찬히 생각해보고, 쓸 욕만 쓰면 좋겠다. 욕도 가려서 쓰는 센스가 필요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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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9-0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학생들이 저런 말을 내뱉을 때면 눈쌀이 찌푸려져요.
어쩌다 중,고등학생들과 버스를 함께 탈 때는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요.

멜기세덱 2007-09-06 09:33   좋아요 0 | URL
애들은 그게 없으면 말을 못하는거 같아요. 그걸로 시작해서 그걸로 끝나죠.ㅎㅎ 그렇다고 매지님이 스트레스 받으시면 안되는뎅...ㅎㅎ

Mephistopheles 2007-09-06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다가 침까지 찍찍 뱉어가면서 저 말을 내뱉는걸 보면...
혈연관계였다면 바로 귓방망이를 뒤통수까지 돌아가게 올려버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좀이 아니라 너무 심해요 초등중등고등생들 언어세계가...
에잇 십장생 같은 녀석들..

멜기세덱 2007-09-06 09:34   좋아요 0 | URL
아 진짜, 여자애들이 거 침은 좀 안 뱉었으면 좋겠어요. 드럽게 그게 뭐야.

조선인 2007-09-06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복입고 재잘대며 걸어가는 여학생들 보고 흐뭇하게 웃다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곤 화들짝 놀라요. 정말 갈수록 비속어가 심해져요. ㅠ.ㅠ

멜기세덱 2007-09-06 09:36   좋아요 0 | URL
마자요, 전 여고생들 교복 입은 모습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어요...ㅋㅋㅋ
그런 비속어의 사용으로 아마도 어떤 유대감 같은 걸 형성하나봐요. 비속어를 뿌리뽑자는 건 아니지만, 가릴 건 또 좀 가려야 되지 싶네요.

프레이야 2007-09-0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이 배설욕구를 채워준다해도 (의도하든 안 하든)듣는 사람에겐 상당히 모멸감을
줍니다. 아이들 중 저런 단어 넣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아이가 있어요. 전 많이 혼을
냅니다. 여학생들도 쉽게 쓰더군요. 언어도 습관인데 말입니다...

멜기세덱 2007-09-06 09:40   좋아요 0 | URL
욕이 내면화 된거겠죠. 사실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한 것일테죠. 아이들 혼내기에 앞서서 어른들이 먼저 자기의 언어습관를 살펴봐야 할 거에요...ㅋㅋ 그렇다고 혜경 님께서 그렇다는건 아니구요...ㅋㅋㅋ

마늘빵 2007-09-06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들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곤 하죠. 그들에겐 일상어에요. -_- 욕도 아니고, 그냥 일상어. 모든 문장이 욕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_- 그렇게 하려고해도 못하겠다.

멜기세덱 2007-09-06 09:42   좋아요 0 | URL
저는 막 물어봐요. 그게 뭔뜻이냐고.... '** 맛있다' 그러면 '**' 맛있는 건 어떻게 맛있는거냐고 따져 물어요. 그럼 지네들도 민망한지 움찔하더라구요.ㅋㅋ

urblue 2007-09-06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아이들은 욕을 했습니다만, 중학교나 늦으면 고등학교 가서는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걸 깨닫고 안 하게 되었지요. 어째서 요즘은 심지어 대학 가서도 직장인이 되어서도 아무 생각없이 욕설을 내뱉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멜기세덱 2007-09-06 09:46   좋아요 0 | URL
김열규 선생의 말처럼, 그러한 일부 욕설들이 자동화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사회가 변화한 측면도 있을 거구요. 말하자면 그동안 타부로 금기시되던 것들이 사회 변화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경우같은 거죠. 여기서의 문제는 너무 이르게 타부가 해제된 감이 있다는 걸꺼에요.ㅎㅎ

비로그인 2007-09-0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반성합니다 ㅠㅠ
전 나름 귀엽다고 사용하고 있었는데 흑흑흑...

멜기세덱 2007-09-06 09:48   좋아요 0 | URL
네번째 문단 첫 문장에서 조건을 달았잖아요. 체셔님이 쓰신다면야, 귀여울 수 있죠. ㅎㅎㅎ

Mephistopheles 2007-09-06 12:48   좋아요 0 | URL
이건 명백한 편애야..편애...

멜기세덱 2007-09-06 13:3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편애. 명백한 遍愛^^;;

잉크냄새 2007-09-0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사람이라면 저런 욕이 일상화되었다고도 볼수 있겠지만 중고생들이 쓰는건 좀 의식적인 면이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릇된 또래문화에 편입되고자 하는 미숙한 열망의 표현이 아닌가 싶군요.
 
소박한 이벤트(삼삼삼삼~!)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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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5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추카추카~~, 세덱님.

홍수맘 2007-09-0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

진달래 2007-09-06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 결과 발표했어요. ^^*
 
당신들의 예수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요즘 우리 사회 전체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좋게 말해 비판이지, 일부에선 '개독교'니 '먹사'니 하면서 기독교 혐오의 감정을 적대적으로 내비치며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가득하다. 이런 비판 또한 비난에 대해 한국의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들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예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엎친 데 덮친 격"적 인식이다. 그러니까 속되게 말하면,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안 되려다 보니 별의별 기독교 관련 사고들이 터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의석 군 사건이나, 사학법 개정, 대형교회 비리와 부정, 이랜드 사태와 최근의 아프간 피랍자 사건 등 교인들도 줄어드는 마당에 안 좋은 일들만 계속 터지고 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상황의 해법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가 되겠다.

또 하나로는 "올 것이 왔다."라는 인식이다.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기독교 내에서 그간의 상황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일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법으로는 "이제야 말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근원적 해결을 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라는 절실한 태도로 현 상황을 당면하는 것이 되겠다.

짐작하겠지만, 전자의 태도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왕 속담을 쓴 김에, 이 태도또한 속담에 빗대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가 되겠다. 지금 보니, 말을 잘못 한 것같다. 빗댄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되버렸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면,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간 열심히 "구렁이 담"을 수십차례 넘겨 주었으니, 이제는 '가래로' 아니 대형 포크레인을 돈 주고 불러야할 상황이 아닌가?

얼추 조짐을 보니 이번에도 구렁이, 아니 이젠 100년 묵은 능구렁이가 되서 빌딩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같다. 이제는 이무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부라퀴가 맞겠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성찰해서 기독교가 그야말로 진정한 예수 안에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역시 나는 서론이 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건 그렇다고 치부하더라도, 한국 기독교는 이런 비판에 대해 서론만 길게 나불되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에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이 기독교 관련 비판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나 또한 이런 경향에 관심을 가지고 속속 출간되는 이런 비판 서적들을 구해 읽고 있는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다. 이 책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후로 준비해 둔 것은 슬라보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미셸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 데이비슨 뢰어의 『아메리카, 파시즘, 하느님』등이다.

이와 함께 한국 기독교 비판에 중점을 둔 책으로 얼마전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를 읽었다. 이 책도 추후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간략히 언급하면,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에 대해 추적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아울러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소유한 풀러신학대 총장 리처드 마우의 저서 『무례한 기독교』도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전직 목사였던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다. 저자 류상태는 대광고 강의석 군 사건 당시 대광고 교목실장으로 재직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 소속 목사였다. 그런 그가 강의석 군 사건을 계기로 목사직을 반납하고 기독교 비판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두 번째 결과물이 이 책 『당신들의 예수』다.

저자 류상태는 목사직을 반납하고 나와서 먼저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를 출간했다. 목사직을 그만두고 행상을 하면서 펴낸 것이다. 이 책을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목사직을 그만둔 이후 '기독교 의식 개혁운동'에 나선 것을 볼 때 아직은 기독교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번의 책 『당신들의 예수』는 더이상 자성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다. 분노는 한층 높아졌고, 이제 그는 기독교를 혐오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만드는 책이다.

"깨달음을 교리라는 그릇에 담아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기독교는 스스로 생동성을 죽이고 자신의 종교를 박제화하고 말았다.", "존중해야 할 전통 문화와 다른 신념 체계는 가차 없이 파괴하는 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공격적인 전도 행태와 안하무인식 문화 파괴 행태로 우리 사회와 이웃 종교인들께 큰 결례를 저질러왔습니다." 등의 그의 언급과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이여, 성경을 찢어라", "예수님, 그만 은퇴하십시오-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주십시오"라는 언설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운영한다는 '불거토피아'에 들어가보면 그가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안티기독교를 표방하는 넷티즌들과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현직 목사였던 사람이 한 명의 제자로 인해 목사직을 버린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무엇이 그를 지금의 이르게 했던 것일까는 더욱 알기 어렵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분노의 글'을 쓰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과연 기독교를 혐오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보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책의 제목과 같이 "당신들의 예수"에 대한 혐오이다. 그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왜곡하고 제멋대로의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예수, 그가 말하는 진정한 예수는 어떠한가? "영혼이 존재한다면, 다음 세계와의 연결 문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과 윤회사상을 참고하라고 말하고 싶다. 연기설과 윤회사상이 설명하는 전생과 내세의 가능성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론이나 부활론보다 훨씬 정교하고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언급을 들으면 과연 이 사람이 전직 목사였던 사람이 맞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 책 전체에 흐르는 맥락은 기독교의 배타적 폭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한국의 기독교는 그러한 배타성을 버리고 다원화를 인정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각기 다르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견해는 아무리 나같은 날라리 기독교인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파격적인 것이다. 그의 한국 기독교 비판은 구구절절이 옳은 것이지만, 그의 파격적 다원화 주장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독교가 지금의 배타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차원이지 그들과의 통합을 말하기에는 기독교 자체의 본질이 그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점에서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시민 교양이 그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높다.

저자 류상태가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 지금의 류상태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그는 아직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비판은 그러한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가슴을 쥐어뜯는 외침인 것이다. 2000년 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듯이 2000년 후 류상태의 외로운 외침을 그에 견주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다시금 사울로 개종한 것처럼 보여지지는 않는다.

저자 류상태의 이 외침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그의 조언을 오늘날 한국 기독교 신자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교우님이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거든,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 또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고백과 충돌하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기독교 교리에는 부합되지만 이 두 고백과 충돌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는 교회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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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지식 교육론 국어교육연구소 연구총서 6
김광해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8월
평점 :
품절


최근 7차교육과정이 막바지에 이르러 '새로운 교육과정'이 공시되었다. 이르면 2009년도부터 8차교육과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百年之大計"라는 말을 무색케 할 정도로 자주 바뀌는 교육과정은 우리나라의 주먹구구식 교육정책이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잘못된 것은 빨리 바꾸는 것이 나은 점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바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바뀌느냐에 있을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입안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는 7차교육과정이 적용되고는 있으나 '새로운 교육과정'이 마련되면서 8차교육과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형성되었다. 여기서의 관심 주제는 국어교육 내에서의 국어지식교육의 현황이다. 국어교육이 실용적 기능교육을 중시하면서 국어지식교육의 비중은 점차 축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7차교육과정상에서 국어지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문법>은 선택과목으로, 이를 택하는 학교가 거의 없을 정도이니, 국어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중~고1까지의 국어시간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자꾸 밀려나고 있는 판국이다. 국어교육학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것을 대세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논의가 되고는 있지만 앞으로도 국어지식교육의 위상이 지금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국어지식교육의 효용과 필요성, 그리고 그것의 효육적인 교육목표 달성의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김광해 교수는 6차교육과정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국어지식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어지식교육의 새로운 방법적 측면을 6차교육과정에 반영하였다. 김광해 교수의 견해가 100%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에 힘입어, 그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주입식 교수학습방법에 대한 개선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 책 『국어지식 교육론』은 6차교육과정에서 일부 반영되었던 국어지식의 교수학급방법 개선에 대한 김광해 교수의 연구성과를 엮은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국어교육에서의 국어지식의 위상과 필요성, 나아가 바람직한 교수학습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국어지식교육이 국어교육에 있어 상호보완적 필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의 주입식교육에서 벗어나 학생 스스로가 창의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탐구학습을 도입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간의 국어교육 흐름이 실요성 위주의 기능교육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과 아울러 국어지식교육이 소외되고 있는 것을 우려하면서 그는 국어지식교육이 가지는 "교육적 가치와 필요성"을 찾고자 한다. 그가 제시하는 국어지식교육의 필요성은 '우리말 알기'와 '우리말 가꾸기'로 정리된다. 이것은 "문학영역이나 기능영역에서도 다루기 어려운 내용"으로써 국어지식교육에서만이 다룰 수 있는 부분이며, 따라서 국어지식은 그 자체로서 필요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현재 국어지식이 더이상의 외면을 받는 길은 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제1부 "국어지식 교육의 전개"에서 이러한 작업을 전개한다. 국어교육과 국어지식교육이 어떤한 관계에서 정립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 국어지식교육이 가져야할 정체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국어지식교육이 국어교육에 있어 어떤 필요성을 지니는가를 그간의 국어지식교육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면서 밝히고 있다. 국어지식교육의 정체성과 필요성을 정립한 후에는 그는 국어지식교육 방법의 방향전환을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단순암기식 주입방법에서 탐구학습에로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탐구학습은 국어지식교육에 있어 보다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이다. 현재 7차 교육과정상에서 이러한 탐구학습은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실정이며 앞으로 바뀔 교육과정에서도 자기주도적이며 능동적이고 창이적인 방법으로 '탐구학습'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기초를 저자 김광해는 이 책을 통해 다져 왔던 것이다.

제1부에서 탐구학습에 대한 기본적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면, 제2부에서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제2부 "탐구 학습의 실제"는 국어지식의 다양한 장면에서의 탐구학습 적용 사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례들이 단지 학부생들의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은 보고서라 하더라도 그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고, 탐구학습이 실제의 교육현장에서 적용될 것인 만큼, 학부생들의 보고서는 그 실제적 상황을 제대로 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탐구학습사례들이 그야말로 재판삼판의 일률적인 학습방법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김광해 교수의 '탐구학습'에 대한 실제 사례 연구가 부족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1997년에 출간되어 현 시점에서는 여실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김광해 교수의 탐구학습에 대한 연구성과는 비교적 신선한 시도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부족함은 당시로서는 그 신선함에 상실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국어지식탐구』라는 책을 통해 보다 자료를 보완하고 실제 적용될 사례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실상 탐구학습은 현장에서의 교사가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연구한 후에라야 제대로 시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해 교수는 지금까지의 연구가 매우 부족함을 절감한다. 앞으로도 다양한 사례들과 이에 따른 효과적인 자료들이 개발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지금에서는 그 효용이 다 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사족이지만, 저자 김광해 선생께 한마디 충언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책의 초판이 1997년에 <국어교육연구소연구총서6>로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이후,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근으로 보여지는 초판 제6쇄본이 2006년 9월 20일에 출간되었다. 그 기간동안 교육과정은 제6차에서 제7차로 바뀌었고, 지금은 '새로운 교육과정'이 마련되어 곧 제8차 교육과정이 시작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6년에 버젓이 이 책의 초판 그대로를 제6쇄로 찍어냈다는 것은 다소간 저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교육과정이 바뀐 이상 미세한 부분에서나마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런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앞으로 이 책의 개정판이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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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03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자! 화이팅.

멜기세덱 2007-09-03 20:32   좋아요 0 | URL
'힘내자'로 순화(<아무 데나 'fighting'? 나랑 싸우자는 겐가?>(http://blog.aladdin.co.kr/criticahn/1122998) 참조) ㅋㅋㅋ
근데 왠 파이팅?

마늘빵 2007-09-03 22:2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그 생각 했습니다만, 영어를 번역한걸로 보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어는 감염되는 것이라고 봤을 때, 이미 콩글리쉬화 해서 우리말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멜기세덱 2007-09-03 23:13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같은 '하하하'인데 왜 이리도 분위기가 다를까요.ㅋㅋ
감염되는 건 좋은데, 그게 오염이라면 문제가 있지 싶어요.ㅎㅎ 파이팅은 여전히 전투적이니까 말이에요...ㅋㅋ

302moon 2007-09-0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어떻게 바뀌느냐가 중요한데, 과연 결과는 어떨지. 국어가 밀리고 있다는 사실에 씁쓸합니다. 저는 문법 과목 정말 좋아했는데, 주위 동생들을 보면 많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자신이 쓴 책은 수시로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안 그런 분들 종종 보이더라고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멜기세덱 2007-09-03 23:5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문법도 알고보면 참 재밌는게 많은데요.ㅎㅎ 사실 김광해 교수는 여러모로 바쁘실 거에요. 강의도 열심히 하시고, 연구도 많이 하시고....다만 개정판이 좀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에서 내뱉은 말이구요, 김광해 교수가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좀 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랍니다.ㅎㅎㅎ

길손 2007-10-0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해 교수님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본인이 개정판을 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새로 개정된 교육과정은 "8차 교육과정"이란 말 대신 "2007년 개정 교육과정" 또는 그냥 "새 교육과정"이라고 하기로 한 것으로 압니다.

멜기세덱 2007-10-07 22:40   좋아요 0 | URL
이런, 김광해 교수님이 돌아가셨군요. 문법교육에 있어 그 공로가 적지 않으신데....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예, 말씀하신대로 "새로운 교육과정"이라고 한다지요.

들곶 2008-05-1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격입니다. 돌아가셨다니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