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교육급수)과 10일(공인급수)에 사단법인 한국어문회와 한국한자능력검정회에서 주관하는 제37회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이 있다. 오늘(17일)부터 원서 방문접수 기간이다. 인천에는 몇 개의 고사장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인하대학교다. 인하대학교 고사장은 우리 과에서 위촉을 받아 한자시험을 진행한다. 여타 고사장은 일부 서점 등에 위탁하여 접수를 진행하지만, 인하대학교 고사장은 고사장 자체에서 일괄적으로 접수까지 도맡는다. 인하대학교 고사장의 총관리감독은 한국어문회 이사인 우리 과 교수님께서 맡으시고, 그 실무는 내가 맡는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실무 중 하나의 방문접수를 시작했다.

접수를 나 혼자서 맡기에는 학과 업무도 봐야하고 아무래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2명의 접수도우미를 둔다. 그간 졸업한 후배들을 불러 썼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모두들 일을 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과 후배들 중에 휴학 중인 애들을 쓰기로 했다. 2놈을 불렀는데, 오늘 1놈 밖에 오지 않았다.

접수는 응시 지원자들이 원서를 작성해 가져오면 수험번호를 발급하고, 수험번호와 고사장, 시험일자를 원서에 기록한 후 응시료를 받고 수험표를 나눠주는 일이다. 우리 고사장에서는 600~700 명 가량을 방문접수로 받는데, 대부분이 접수 첫날 오전에 몰린다. 한 두명 씩이면 상관이 없는데, 여러 명이 몰르고, 게다가 일부 학원에서 다량으로 원서를 접수시켜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접수가 지연되기 일수다. 일부 개인접수자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존 2명이 접수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이쯤에서 나까지 나서서 개인접수자들을 별도로 접수받기도 한다. 전화도 빗발친다. 그런데 한 놈이 안 왔다. 2명이 진행해도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닌데, 한 놈이 안 왔다는 사실은 날 당황케 했다. 전화도 해보고 문자도 해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어이하리, 한 놈과 내가 달라붙어 접수를 받는 수밖에는 없었다.

9시에 시작되어야 할 접수는 9시 10분쯤부터 받기 시작했다.(사실 오늘 나도 늦잠을 자서 거의 9시가 다 돼서야 출근을 했다. 부랴부랴 접수를 시작한 셈이다.) 쉴 틈이 없었다. 1시간 쯤 지나서부터는 일부 학부모들(응시자의 대부분이 초등학생이다. 대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서 접수를 한다.)이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묵묵히 접수를 받는 수밖에. 어지간하면 1~2장 정도만을 접수하는 사람을 먼저 받으면 될 것 같지만, 아침부터 순서를 기다린 사람들은 또한 불만을 터트린다. 그러면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시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접수만을 기계적으로 받았다. 오늘 접수도우미를 맡게 된 후배녀석은 처음하는 일이라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시키는 일만 할 뿐이다. 그러니 나는 접수를 받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후배녀석을 닥달하며 정신이 없었다. 12시 30분이 되어서야 늘어서 있던 접수자들의 줄이 끝났다. 약 3시간 반 동안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지도 못했다.

접수 받는 내내, 전화벨은 계속 울려댔다. 전화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후배녀석에게 월요일 아침에 일찍 좀 오라고 해 놓았는데, 그놈은 감기에 걸려 낮 12시에 일어났단다. 이상하게도 지겹게 보이던 놈들도 오늘은 쥐새끼 한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전화벨은 울려대고, 아주머니들은 아우성대고, 수험번호 따느라 혼란스럽고, 응시료 계산하느라 낑낑대고, 하여간 복잡다단한 하루였다.

12시 반, 오전 접수를 마감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하니, 내 안의 분노가 치밀었다. 하다못해 전화라도 한 통 해 줘야되는 것 아닌가? 몇 번을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오후에 후배를 통해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아프단다. 그것도 어디까지 제3자를 통한 정보다. 고지곧대로 믿기가 어렵다. 죽을 병에 걸린 것인가? 그건 아니길 바라지만, 그래도 화가 난다. 그 전에 후배놈을 시켜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 "앞으로 내 눈에 띄면 죽는다고." 농담으로 들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는 설마 내 눈에 띄어도 죽이지는 않겠지만, 욕 한 바가지는 해주지 않을까 싶다. 정말 아프지 않으면 말이다.

오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늦잠을 자서 부랴부랴 머리에 물만 묻히고 출근했고, 오자마자 한 놈이 안 온 덕에 쉴새없이 접수를 받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꼭 이럴 때 입맛이 없다. 출근하면서 배고파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한 가지 찝찝한 일이 그 전에 있었다. 찝찝한 일이라기 보단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야할까?

오전 밀린 접수가 끝나갈 즈음, 한 학부모가 한 장의 응시원서를 내밀었다. 수험번호를 발급하고 기록하고, 고사장과 시험일짜를 찍어 주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이가 휠체어를 타야 한단다. 책상을 별도로 준비해야 하고, 응시 급수에 상관없이 2층 이상은 곤란하단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 순간 생각나는 것은 곤란하다였다. 아무래도 대학인지라 의자와 책상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어디서 분리된 책상을 공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누가 하는가? 내가 해야 한다. 어떤 규정이나 지침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고사장 여건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다른 고사장을 찾아보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알겠다고 했고, 원서 접수를 취소하고 나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다른 곳에 가서 접수를 하긴 하는데, 이 고사장에 접수 하겠다고 하면 다 해줘야 하는 거에요."

"다 해줘야 하는 거에요."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한국어문회 측에 연락을 했다. 장애인 응시와 관련된 규정이 따로 있느냐고. 별도 규정은 없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적용되는 규정에 따른단다. 장애인에 경우 1층에 시험장소를 배정하고, 필요할 경우 시험시간을 30분 이상 더 적용하고, 시각 장애인의 경우 시험지 등을 확대복사하여 제공하고, 별도 판단에 의해 고사실을 단독으로 배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차. 이런.

오늘 오후 내내 후배 놈이 안와서 내가 생고생한 걸 생각하면서 화가 났지만, 그것만으로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 해줘야 하는 거에요."란 말을 남기고 가신 그 아주머니가 내내 생각났다. 처음에는 '이거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란 걱정이 앞섰지만, 이내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사실 받아주어야 했고, 받아 줄 수 있었다.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말이다. 상황이 좀 달랐으면, 그러니까 내가 좀더 여유있는 상황에서였다면, 받아줬을까?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싶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 처음 직면했기때문에, 한 번 쯤 한국어문회 측에 문의를 먼저 구했을 수도 있었겠지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고사장 여건이 어려울 것같다는 핑계로 접수를 반려했다.

결국,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 후배 놈이 안 와서 짜증나고 성질나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다만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전 우리 학교의 장애인 관련 시설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내용을 페이퍼를 쓴 적도 있는 놈이, 어떻게 오늘과 같이 불학무식한 짓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오늘은 이것때문에, 하루 종일 부끄럽고 죄스럽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오늘 수고로운 발걸음을 돌리신 그 아주머니께 심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 아주머니께 또 한 번의 상처를 드린 것이 못내 죄스럽다. 그리고 모든 장애인들에게 사죄한다. 하느님은 이래서라도 계셔야지 싶다. 이런 놈을 어떻게든 벌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부끄럽다.

후배놈을 죽일지 살릴지, 아직 고민이다. 아무래도 내가 죽일 수는 없겠다. 한 대 패주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렇게까지도 못할 일이고, 그래도 싫은 소리는 어쩔 수 없지 싶다. 그 전에, 나를 죽일지 살릴지부터 물어야 하겠다. 아무래도 살리기 어렵지 싶다. 아! 오늘 하루는 내 생애 가장 부끄러운 날로 기록돼야지 싶다. 이런 죽일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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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9-1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자기반성기능이 작동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그것조차 고장나면 곧바로 속물세계로 추락합니다.

멜기세덱 2007-09-18 01:21   좋아요 0 | URL
인생자체가 속물인생이에요.ㅎㅎ 반성을 하면 그걸 고쳐야되는데 말이죠.

심술 2007-09-1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자책하시진 말고 힘 내세요.

멜기세덱 2007-09-18 01:22   좋아요 0 | URL
자책아니라, 타책을 좀 받아야해요.^^;;

라주미힌 2007-09-1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잡한 심경 이해가 되네요...

멜기세덱 2007-09-18 01:22   좋아요 0 | URL
아직도 복잡합니다. 자야되는데...
 

최근에 더욱 지탄받는 기독교, 아무래도 이번 만큼은 쉬이 넘어가지 못할 것 같다. 그와 함께 기독교 비판 서적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읽었거나 앞으로 읽을 책들을 갈무리 해둔다.

한동안은 이 목록들을 늘려가게 될 것 같다. 이것과 관련된 내가 모르는 다른 책들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알라딘서재제현들의 추천을 바란다.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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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7년 3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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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기독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책 또한 논란이 되었지만, 이 책 만큼 신랄하게 기독교의 역사를 파헤치고 있는 책도 드물지 싶다. 성서가 성립되기까지 그 행로를 추적하고 있는 김용옥과 함께하는 것은 아슬아슬해서 재미도 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8,800원 → 7,920원(10%할인) / 마일리지 44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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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도 버트런드 러셀이 간혹 인용된다. 궁금해서 읽었지만 도킨스의 책만큼은 읽기가 수월치 않았다. 몇몇 칼럼들을 엮고 있는데, 1장에서 리처드 도킨스와 비슷한 작업을 먼저하고 있다. 다른 장들도 흥미를 가진다면 읽어볼 만 하다. 아무래도 도킨스 만큼 명쾌하지는 않지만.
당신들의 예수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7년 7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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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군 사태로 인해 목사직을 내논 류상태 씨의 두번째 기독교 비판 서적이다. 분노로 가득찬 그의 비판을 단지 분노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 기독교의 뿌리 깊은 문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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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근원을 추적하고 있다. 그와 함께 평양대부흥 100주년에 담긴 보수주의의 교묘한 노림수를 파헤친다. 저자들은 기독교 진보진형으로서 한국 주류 기독교에 만연한 이런 복음주의, 보수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관심을 가지고 읽어볼 대목들이 무척 많은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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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이거 한번 쭉 참고해야겠군요. :)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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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화제의 책 『만들어진 신』을 읽는 내내 당황스럽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때문이었을까?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리뷰쓰기를 주저했다. 지금도 내가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리되지 못한 채 혼란스럽다. 리처드 도킨스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그래, 신은 없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 못난 자존심 같은 것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킨스의 의도가 빗나간 것은 아니다. 그가 뜻한 바를 전부 이룬 것은 아니지만 내 안의 충격은 나를 도킨스의 손을 잡기 가까운 쪽으로 밀어버렸다.

도킨스의 논리는 너무나 명쾌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나같은 범인으로서는 그를 반박하고 싶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굳이 반박하려 애쓴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라고 매도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악마의 사도가 내민 선악과를 이미 한입 깨어물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겠다. 이 책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하는 7개의 스펙트럼 속에서 나는 "4. 정확히 50퍼센트.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불가지론자.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나 "5. 50퍼센트보다 낮지만 그리 낮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에 회의적인 쪽이다."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 책을 한 번 더 읽는다면 그 아래로 더 내려가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었나?"를 끊임없이 되물었다. 그 시작은 내 의지와만 상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태신앙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나이때부터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던 듯 하다. 그 어린 기억속에는 교회가기 싫어 이른 아침부터 떼를 쓰다가 매를 맞은 가슴아픈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교회를 자연스럽게(?) 다니게 되면서 나는 당연스레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독교인이 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어떤 영적체험의 기회를 갖게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영적체험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고, 지금은 아예 교회를 나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애써 '날라리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열성적으로 교회를 나갔다. 고등학생 때쯤인데, 그때는 온갖 교회의 일들을 맡아서 참으로 열심히 했다. 학교와 집과 교회 밖에 모를 정도였다. 성가대도 하고, 학생회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주일학교에서 보조교사로 봉사하기도 하고, 청소도 하고 기도회도 열심으로 나갔다. 여러 부흥집회에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나섰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런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예배때는 교인들 앞에 나가 찬양인도까지 '정열적'으로 도맡았다. 그러나 거기에 흔히 말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는 찾지 못했다. 의구심이 들었고 회의감이 나를 휘감았다. "내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회의를 하게 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때 그 회의 속에 성령이 찾아와 위로하고 뜨거운 영적 체험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의 그 지독한 회의감은 열심으로 나가던 교회를 끊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정확히는 예수를 사랑한다.

왜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일까? 지독한 회의심은 교회와 예수를 분리하게 만들었고, 단지 교회를 나가기 위해 열심이었던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 열심 가운데 예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찾으려 했고 교회를 끊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간절히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서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에 대해 전부터 회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경의 첫 구절부터 나는 믿지 못했다. 어떻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성경의 그 어느 기사와 이적도 믿지 못한다. 반대로 이 사실을 초장부터 인정하고 가면 성경의 어느 구절도 믿지 못할 바가 전혀 없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것도 천지창조보다는 미약해 보이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교회를 다니는 내내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신화적으로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천지창조라니? 어느 신화가, 전설이, 그 어떤 환타지 소설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가정으로 시작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것이 내 회의감의 원인이 되지는 못했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 나는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까지는 여전히 부확실하지만, 그의 삶과 사역을 나는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정말이지 그것은 그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따질 필요도 없이 말이다. 난 그의 말들을 사랑했고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행위를 사랑했다. 그런 예수가 있다면, 그것이 상상속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믿고 싶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망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난 후엔 그 말에 더욱 동의하고 싶어진다. 지금의 나로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또한 그런 망상,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을 상상한다는 것을 나는 그리 무력하게 보지 않는다. 리처드 도킨스가 신을 망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망상이 일으킨 백해무익의 결과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예수라는 망상, 아니 상상은 어떤가? 그것 마저도 유해할까? 나에게 그것은 결코 유해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은 어디까지는 전통적 예수관과는 다를 것이긴 하다.

얼마전 김용옥으로 한국기독교계가 떠들석 했다. '구약폐기론'은 운운했느니 안 했느니하면서 분분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김용옥을 불편해 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마저도 그런 불편한 감정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가 앞으로도 리처드 도킨스를 따라 읽는다면 언제고 리처드 도킨스에게 설복되고 말 것만 같다. 그의 논리는 철저하고 명확하다. 너무 쉽지 않은가? 그의 논증은 너무나 당연한 설법이고 빈틈을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독교인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들으면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는 망상의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하겠다. 난 단지 '사랑의 예수'만을 상상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진정한 예수'를 찾아내는 날이 온다면 행복하겠다.

이 책 『만들어진 신』을 우리는 기독교 비판서로 읽어도 좋을 듯 싶다. 그가 일반적인 신을 공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논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를 대상으로 한다. 나는 충분히 기독교 비판서로서 이 책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많은 기독교인이 보아도 좋지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당신들의 예수』를 읽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었다. 그리고 『죽은 신을 위하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끝끝내 기독교를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련의 책들을 통해 보다 의미있는 예수를 상상할 수 있을 것같은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아직까지 날라리 기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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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6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까지 겨우... 날긋날긋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정도지요.

일련의 서적들을 읽으면, 저도 기독교를 아주 떠나지 싶어요.
교회에 의미를 둔다는 건, 거의 접은 상태랍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멜기세덱 2007-09-16 17:34   좋아요 0 | URL
저는 교회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교회에 의미를 두고 있고요.ㅎㅎ
아무튼 이게 홀가분하게 시원스레 떠나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더 편하겠어요.ㅎㅎ

프레이야 2007-09-16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라리 기독교인(멜기님보다 더더 심한) 여기 하나 추가요.
무신을 증거하는 일은 신을 증거하는 일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아직 이 책, 사두고 안 읽고 있지만..
신의 존재에 회의감과 의심이 들어 더욱 더 기도로 간구한 마더 테레사처럼
님이 말씀하시는 '상상의 예수'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9-16 17:3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유신과 무신의 논쟁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제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믿는 예수가 그 대목에 심각하게 걸린다는 게 문제지요.ㅎㅎ

순오기 2007-09-1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를 믿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정의한다면, 현재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교회 출석 방학 4년째..)전 당당하게 종교란에 기독교인이라 적습니다. 내 마음에 그분이 자리하고 있기에...교회를 다니는 일이 예수를 위한 일인지 목사를 위한 일인지 많은 회의가 들어 현재는 방학중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더 많은 비판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데 동감입니다.
기독교인들끼리만 용납하고 이해되는 종교라면 별 의미가 없다 생각...생활속에서 이웃의 비기독교인에게 감동줄 수 있어야 그들이 감화될테니까요.

멜기세덱 2007-09-16 17:38   좋아요 0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예수의 향기'를 찾아야 그 존재의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성과 신앙 2007-09-1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공감하는 바도 많고, 님과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그 어떤 설득력 있는 말을 해 줄 수 없었던 지난 날의 저의 비참함이 다시 떠오릅니다. 교회의 후배가 제게 진화론이 맞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면서, 예수님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고 내게 강하게 말했을 때, 저는 아무런 답변도 못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저는 이 방면에 책을 읽게 되었고, 지금은 최소한 제 자신에게 만큼은 기독교 신앙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답니다. 또한 자주 다른 사람에게 제 확신에 대해서 말해 주기도 한답니다. 책 선택을 신중하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될 수 있으면, "예수는 역사다" "창조 설계의 비밀" 등의 책이 참 좋고,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는 책들로는 "기독교 지성으로 이해하라" "김용옥의 하나님 VS 성경의 하나님"(도서출판 누가) 이 책들입니다. 이냥 책 읽기를 즐겨하는 분 같아 보이시니, 제가 추천해 주는 책 한번 읽어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라 여기서도 주제 넘게 긴댓글을 달았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님께서 기독교 신앙에 확신있는 삶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09-16 17:47   좋아요 0 | URL
고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이전에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읽어 왔습니다. <예수는 역사다>도 그 중 일부이기도 합니다. 성경도 '신실한 신자'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여러번 읽었구요. 어쩌면 이전까지의 독서가 다소 기독교쪽으로 치우는 면이 커보입니다. 지금은 그 치우침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소개해 주신 책은 감사히 제 다음 독서목록에 포함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기독교에 대한 이성적 확신(혹은 감성적 확신까지도)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확신을 추구하는 것은 다분히 위험할 수도 있기때문이죠. 지극한 회의로 나아가는 것도,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로 나아가는 또다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7-09-16 21:50   좋아요 0 | URL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은 저도 갈급한 부분입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군요 :)

누에 2007-09-1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전 추천만 누르고 갈래요. ^^

지성과 신앙 2007-09-17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과 체셔고양이님께
제 댓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삶되세요.

(주)사랑 2007-09-1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고민이 제가 했던 고민과 비슷하리라 생각되기에 몇 자 적어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회의를 합니다. 특히, 한 때 교회에 열심을 냈던 사람들의 경우, 회의감이 찾아오면 정말 미칠 노릇이죠.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저 역시 신을 부정하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2-3년 정도 방황했던 거 같습니다.
물론 교회는 매주 나갔지만, 이미 저의 영혼은 방황 중이었던 것이지요.
그 방황 속에서 저는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당신을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준 예수님의 정신만큼은 본받겠습니다."라고요..
적어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자세나 정신은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간디나 체게바라,마틴루터킹 목사, 등등..많은 위인들의 정신을 높이 사고 그분들을 추종하는 것처럼 - 그 정도 수준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의 고백이었죠.

하지만, 고민의 고민 속에서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의 실존이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의 실존만큼은 아직도 과학이 풀지 못하는 영역이지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영적 존재인 신이 있다는 까닭이기에
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영적인 부분입니다.
영의 세계에는 영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요..
신(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담이지만(아주 위험한 발언이지만..)
'하나님', 즉, 이 세상의 주관자에 대해
어떤 사람은 '도'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우주의 기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성리학의 용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영적인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각각의 표현이 등가의 가치를 지니느냐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학문적 시각으로 봤을 때엔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미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오셨기에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영적 실존을 알고 나서는 영적 세계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 고민은
신(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라기 보다
그분의 법칙,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회의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부분 때문에 기독교가 비기독교인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기도 하고요..

모든 종교는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그러기에 인간은 교만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야 할 뿐입니다.

또한 내자 부족한 자이기에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처럼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교만합니다.
마치 영적 진리를 다 소유한 양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이 오신다면 똑같이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갈구하고, 더 많이 찾읍시다.
그리고 찾았다면, 그에 맞게 삶을 삽시다. 세상을 사랑하며...

참고. 도킨스의 책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결론은 하나입니다.
영적 영역의 실체는 인간이 다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분은 '스스로 말미암아 계실' 수밖에 없다는 것!

멜기세덱 2007-09-20 01:03   좋아요 0 | URL
고견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저의 '회의'을 당분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ㅎㅎ

Dreamer 2007-10-0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서평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님이 신앙의 체험과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든 말이죠^^) 출 33:11, 창세기 18:22-32, 요나서 등도 한번 읽어보시길..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죠. 책에 대해 궁금해서 서평을 읽었거든요. 꼭 사서 읽어볼게요.

심술보 2007-10-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말고 성직자 말고 예수 그 분의 말과 행동을 믿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종교일지 신념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대학 전공 과목 중에 <한문교육>이란 강좌가 있습니다. 저는 이걸 두 번이나 들었는데, 처음엔 청강, 그리고 두 번째는 정식 수강이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이 강좌를 한 번 더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졸업을 안 했냐고요? 재수강이냐고요? 그런 건 아니구요. 이번에 교수님께서 이 강좌를 교직원들을 상대로 개설했습니다. 그래서 강의하시는 걸 도와드리면서 또 듣게 된 거죠.ㅎㅎ

제 출신학과가 국어교육과인데, 전공과목 중에 <한문교육>이란 강좌가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도 같네요. 제가 생각할 때, 한문(한자)은 아무래도 전공 공부할 때 기본적인 교양이 아닌가 해요. 뭐, 나름 전공과목으로서의 <한문교육> 강좌의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강좌는 대체로 교양을 넓히는 차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인터넷 세대를 위한 한문강의』는 고금의 명문장들을 모아 엮은 것이기도 하죠. 공자, 노자, 맹자에서부터 조선후기 박지원, 홍대용, 정약용, 그리고 당대적 인물인 이가원 선생이나, 신영복 선생의 글귀들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강의를 여러차례 들으면서 명언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교수님께서 짚어주시는 의미들을 되새기고, 간간히 소개해주는 좋은 책들을 찾아 읽기도 하면서 참 재미나게 수업을 두 번이나 들었습니다. 요새도 이 책을 가까우 두고 자주 찾아보고 이렇게 페이를 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어제 강좌는 첫시간으로 '선비'에 대한 구절들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 중 이 한 구절에서 '옳거니, 딱 알라디너네!'하는 감탄을 했습니다. 그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出交天下士, 入讀古人書. -李家源-

나가서는 천하의 뜻 있는 선비와 사귀고, 집에 들어와서는 옛 선현이 남긴 책을 읽는다.

 
   

어떻습니까? 딱 알라디너를 위한 구절이지요? 이가원 선생은 이 책을 쓰신 교수님의 스승이셨답니다. 그 분의 서예전에서 이 글귀를 본 후 마음에 담아두셨다는 군요.

간혹 이가원 선생께서는 이 구절을 살짝 바꿔서 "出爲天下事(나가서 천하의 일을 하다)"로 쓰기도 하셨다는 군요.

이 구절을 저는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出交諸謁者(출교제알자) 入讀古人書"

즉, "(인터넷)에 나가서는 여러 알라디너와 사귀고, 집에 가서는 선현의 책을 읽는다."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ㅎㅎㅎ

알라디너를 위한 명언 3에서 '以文會友(이문회우)'를 말했는데, 이 구절 또한 '以文會友'와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알라딘 서재 폐인들의 생활은 이 구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지요? 이 글을 읽고 계신 알라디너 여러분!, 혹은 책을 읽고 계실 여러분! 세상이 조금이나마 유익하게 변한다면, 그건 오로지 여러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아참, 인천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매주 목요일 6시 30분부터 진행되는 이 강좌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오시면 저도 만나실 수 있구요. ㅋㅋ

장소는 인하대학교 본관 소강당입니다. 시간 나시는 분들은 놀러오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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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9-14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알라디너들에게 딱 맞는 명언이군요. 알라딘 지기님들을 많이 생각해 주는 멜기세덱님도 진정한 알라디너십니다. ^^

멜기세덱 2007-09-14 23:05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마노아님 좇아가려면 말이에요..ㅎㅎ

순오기 2007-09-1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인하대학교! 내 친정이 인천이고 우리 동생의 학교라 반갑네요~~~~
저는 방학에나 친정 가는데 방학에는 휴강할테고, 멜기님 보러 목욜에 올라가야 할꺼나!
목요일의 내 일정은 4시 30분에 끝나니 비행기로나 가면 되려나~~~~~
하여튼 저도 알라디너 폐인의 길에 접어 든 것 같으니, 잘 새겨두렵니다!

멜기세덱 2007-09-14 23:07   좋아요 0 | URL
동생분이 인하대 다니시나봐요?ㅎㅎ 친정이 인천이신데, 방학에나 친정엘 가시고, 올라오려면 비행기를 탄다..
아 정리하면, 제주도로 시집가셔서 선생님을 하고 계신가보죠...?ㅎㅎㅎ

마늘빵 2007-09-1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문구 좋습니다. 근데 시험공부는??? =333

멜기세덱 2007-09-14 23:08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이제부터는 人百己千 할 생각이었어요.ㅋㅋ
너무 보채지 마세요...ㅎㅎㅎ
근데 논문은??? =444
 

<어문생활>에서 서울대 우한용 교수의 글을 옮겨 온다. 『그리스 인 조르바』에 대한 글인데,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했다. 몇몇 분들이 이 소설에 대해 좋은 말씀들을 하시는 것을 자주 듣곤 했는데, 이 참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움직인 한 권의 책] 『그리스 인 조르바』




진정한 自由人, 조르바




  지지난 해 동료 몇 사람과 그리스를 방문했다. 이탈리아 레체라는 작은 도시에서 學術會議가 있어 參與했다가 내친김에 그리스를 다녀오자는 計劃이었다. 일정을 그렇게 잡은 뒤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나라를 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出生地이며 소설 『그리스 인 조르바』의 背景인 크레타에 가는 길을 미리 알아 두고 싶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카잔차키스 출판사를 찾아가 그리스어로 된 原本 『그리스 인 조르바』를 얻어 가지고 왔다. 그 회사 대표의 署名을 받아 가지고 온 소설의 그리스어 이름은 이렇게 되어 있다. ΒΙΟΣ ΚΑΙ ΠΟΛΙΤΕΙΑ ΤΟΥ ΑΛΕΞΗ ΖΟΡΜΠΑ. 아마 “알렉시스 조르바의 생애와 사업” 정도가 되는 모양이다. 출판사 마크가 특이했다. 가운데 태극이 들어 있고 그 주위에 둥그렇게 八卦가 그려져 있다. 아마 동서를 떠나 宇宙의 原理를 생각하는 작가의 사상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책을 서너 차례 읽었다. 『희랍인 조르바』로 번역된 板本을 두 번 읽었고, 『그리스 인 조르바』로 번역된 책을 두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마 소설의 주제가 인생의 본질적인 局面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自由가 삶의 본질적 項目에 해당하리라.

  이 작품에서 주인공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친구인 實存 人物로 알려져 있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自敍傳』에서 조르바가 삶의 진리를 가르쳐 준 사람이라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다. 실존 인물을 소설 장르 속에 形象化함으로써 불멸의 인간형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잘 형상화된 주인공은 시시껄렁한 실존 인물보다 한결 큰 정신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역사상 실존 인물과 함께 몇몇 작중 인물을 기억한다. 세계는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自由 문제를 떠올릴 때 정신과 몸, 영혼과 육신 등을 동시에 考慮하게 된다. 일반 사람들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 육신을 학대하거나, 육신의 衝動을 따라 사느라고 영혼을 돌볼 겨를이 없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 統合되어 존재한다.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영혼을 지닌 육신의 자유를 향한 투구가 삶의 실상이다. 이 실상에 도달하는 것이 자유를 위한 아름다운 투쟁의 과정이 아니겠나.

  文學을 한다는 사람이 윤기 바랜 까칠한 글을 쓰고 있을 때, 노래 한 자락 없이 술자리를 차고 앉아 술에 탐닉하고 있을 때, 문득 문득 나는 『그리스 인 조르바』를 떠올린다. 그리고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이 강토에 와서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린 카잔차키스의 나라 그리스 병사들을 생각하곤 한다.

  삶의 본질이 이성인지, 의지인지, 아름다움인지, 사랑인지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自由가 삶의 本質 條件 가운데 거대한 기둥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마음이 흔들리고 육신이 고달프면 나는 『그리스 인 조르바』를 다시 읽을 것이다. 마음과 육신이 함께 이루어 내는 자유를 위해서. 작가의 墓碑銘을 확인하러 나는 크레타로 가는 꿈을 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그 묘비명이 나의 욕망과 두려움을 자극해도 자유인 한 아무 걱정이 없다.

禹漢鎔(서울大 敎授 ․ 소설가), <어문생활> 통권 제118호 10쪽.




考慮 고려, 局面 국면, 計劃 계획,  文學 문학, 背景 배경, 本質 條件 본질 조건,

墓碑銘 묘비명, 署名 서명, 實存 人物 실존 인물, 宇宙 우주, 原理 원리, 原本 원본,

自敍傳 자서전, 自由 자유, 參與 참여, 出生地 출생지, 衝動 충동, 統合 통합, 板本 판본,

八卦 팔괘, 學術會議 학술회의, 項目 항목, 形象化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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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2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말 한자 좀 혼용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스스로 아시아에서 고립되는 느낌..

멜기세덱 2007-09-12 23:22   좋아요 0 | URL
반가운 말씀이시네요.ㅎㅎ 무엇보다도 우리의 귀한 문화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리는 것 같다서 안타까워요.

순오기 2007-09-13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려고 독서모임 토론도서로 두번이나 정했었는데, 꼭 일이 생겨서 못 읽었어요~~그러다보니 누가 빌려가서 가져오지도 않는군요. 님의 글 때문에 다시 사야 할 것 같은 예감이... 어려울 것 같다는 지레짐작에 겁을 먹는지도 모르겠어요...

짱꿀라 2007-09-13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조르바 책 한번 읽어보세요. 느끼는게 많을 겁니다. 아주 감명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우한용 교수의 글을 읽으니 새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드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