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유치환

 

마침내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무량한 안식을 거느린 저녁의 손길이
집도 새도 나무도 마음도 온갖 것을
소리 없이 포근히 껴안으며 껴안기며―

그리하여 그지없이 안온한 상냥스럼 위에
아슬한 조각달이 거리위에 내걸리고

등들이 오르고
교회당 종이 고요히 소리를 흩뿌리고.

그립고 애달픔에 꾸겨진 혼 하나
이제 어디메에 숨 지우고 있어도.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귀를 막고―

그리고 외로운 사랑은
또한 그렇게 죽어 가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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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나의 고전 읽기 9
김슬옹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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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御製訓民正音" 『훈민정음 언해』에는 세종의 서문이 실려있다. '언해(諺解)'란 우리말로 풀었다는 얘기다.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우리말 번역서가 바로 『훈민정음 언해』다. 한문으로 된『해례본』을 우리말로 풀긴 했지만 국한혼용으로 되어 있고, 한자에는 한글로 음을 표기했다. 『언해』의 한자음표기를 되는 대로 읽어보면 대략 "솅종엉졩훈민정음"(고어 표기를 여기서는 하기가 어렵다. '엉'의 첫 소리는 꼭지가 달린 이응(옛이응)이다. 즉, 음가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오늘날 어떻게 발음할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음'은 여린 이응으로 'ㅎ'에서 위의 한 획을 없앤 것이다. 'ㅇ'과 'ㅎ'의 중간 정도의 발음이지 싶다.)의 코맹맹이 소리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면 "안된다."

이걸 바로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한자음대로라면 '세종어제훈민정음'이 된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이상음을 추구했다. 그래서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갖춰야만 했다. 그래서 '세, 어, 제'에 모두 'ㅇ'을 붙인 것이다. 이를 감안하고 읽어본다면 "셰종어졔' 쯤 되겠다. 오늘날 "세종어제훈민정음"인데, 이말은 "세종이 어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제'를 빼고 이해하면 무난하다. 그런데, 문제는 세종이 '어제' 훈민정음을 만들었는지, 엊그제 만들었는지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직의 국어교사들은 간혹 말한다. "10월 9일이 무슨 날이지?"라고 학생들에게 물으면, 많이들 잘 모른다고.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한글날이긴 한데, 한글을 만든 날은 아니고, 반포한 날이다. 북한은 1월 15일이 한글날이다.(조선글 기념일) 왜냐하면 이날이 기록상 한글(훈민정음)을 만든 날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가 기념하는 '한글날'이 언제인지 잘 모른다는 것은 좀 찝찝하다. 그 찝찝함의 근저에는 10월 9일이 휴일이 아니란 사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씁쓸하고 안타까운 것일까? 여하건간에 왜 한글날을 안 노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열린 날(開天) 만큼이나 백성의 눈이 열린 날도 중요할 듯 싶은데, 두 날을 다 놀면 한국 경제가 거꾸러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짜증을 나게 한다. 오늘날의 국경일 혹은 기념일은 휴일이 아닌 이상에는 그나마 기억이라도 해주는 배려를 찾기는 힘들지 않은가?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지 올해로 561년째다. 이 날을 기념한 것은 100년도 되지 않았다. 초기에는 '가갸'날이라고 불렀다. '가갸거겨고교구규'하던 것에서 앞 두 글자를 따다 붙은 것이다. 이게 몇 해 후 한글날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11월 초였는데, 이 책에 반포일이 9월 상순으로 되어 있어 오늘의 10월 9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이날 저날, 이 이름 저 이름으로 자주 바뀌었지만, 그것은 그만큼이나 이 한글날을 어지간히도 중요히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글날을 놀았던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한글날엔 놀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그 업적을 또한 칭송해야 하겠다. 흔히들 세종대왕께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문자를 창제했다느니,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고 치켜주면서 아주 그냥 별발광을 다하도록 요란이지만, 그 요란도 나름 의미는 있다. 나는 그 요란을 떨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날만큼은 세종께 감사하고 싶다. 민중의 눈과 귀가 열린 날, 이 날 한글날은 어쩌면 개천절에 버금갈 소중한 날은 아닐까?

잡설이 길었다. 김슬옹의 이 책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은 이것이 왜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의의, 창제 과정의 우여곡절과 비하인드 스토리, 훈민정음이 있기까지의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 나아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대한 착실한 해설, 그리고 그것의 보급과 발전의 향로, 한글의 발전성까지를 작은 이 책에 꼼꼼히 담아두고 있다.

대강은 다들 아는 내용이 태반일테지만, 그 숨겨진 뒷얘기들과 보다 자세한 훈민정음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를 더해준다. ㄱ에서 ㅋ이 나오고, ㄴ에서 ㄷ, ㅌ이, ㅅ에서 ㅈ, ㅊ이 나오는 이 무척이나 단순명료한 원리가 오늘날 디지털 매체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대강 앎의 자세함을 더하게 해주기도 한다. 보다 이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훈민정음에 담긴 다양한 창제 배경과 세종의 노고, 그리고 그의 비전을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이름에 그 대부분이 담겨 있지 않은가? 백성을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은 오늘날에도 배울 바가 농후하다. 다만 그것이 제왕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고서 말이다.

이것이 가히 문자혁명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으로 당시의 혼란스럽던 한자음을 정리하고자 한 것을 들 수 있다. '바른 소리'란 이름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누구는 모란이라고 읽고, 누구는 목단이라고 읽는 것은 혼란스럽다. 그것을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혁명이 가지고 있는 그 이전 것과의 단절의 성격을 이 훈민정음은 그리 달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이라던가, 각종 언해본 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사용한 한문에서 한자를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읽고 말하기 편하게 훈민정음을 덧쓰는 방법으로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과학적이고 우수하며, 뛰어난 문자라는 사실은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주의같은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조심스럽게 우려된다. 저자가 탄식하듯이 서울대 권장도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들었느니 마느니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좀 우습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이 고서를 굳이 읽은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가 쓰는 이 문자의 여러 특성과 장점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우여곡절의 배경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필요하지 싶다.

전세계 상용문자 중 그 창제자가 또렷이 알려진 유일한 문자, 문자 발전 단계상 현재까지 가장 진화된 것으로 인정되는 문자, 21세기 디지털시대에 그 적용력이 단연 돗보이는 문자, 바로 한글이라는 자부심은 가져도 무리될 것은 없겠다는 소리다. 달달달 한자 외우기에 허우적 되고 있었을지 모를 이땅의 수백만 학생들에게 그 공포에서 해방시켜 준 것만으로도 이들이 한글날을 기억해주어야 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제3세계의 문자없는 나라에 한글을 전수하자는 주장들도 그리 곱게만은 들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만도 아닐 것이다. 여하간 한글을 널리 전하는 것은 보람스런 일이다. 소리문자로서의 한글의 우수성은 입증된 상태이기도 하다. 그것이 문자없는 이들에게 쉽게 자기네 말을 적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 나쁘겠는가? 우리말을 쓰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한 말이다. 세종이 대왕인 이유가 비단 훈민정음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훈민정음 하나로도 충분하기도 하다. 그만큼 오늘날 우리를 편하게 쓰고 말하게 해 주지 않았는가? 그래, 그렇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여 편하게 하다면 세종이 웃을 일이다.

뒤죽박죽 야밤의 리뷰를 빨리 정리하자. ①한글날 놀자. ②안 놀더라도 좀 기억하고 기념해야 되지 않겠나? 요즘 애들이 10월 9일은 한글날이라는 사실을 한 대 줘박아서라도 알게는 해야지 싶다. ③한글을 좀 널리 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나름대로 귀한 일이다. ④한글이 세계최고니, 뭐니 하는 요란은 좀 자제할 필요가 있고, 한글에 대해 우리가 좀 관심을 가지고 알 필요도 있다. 자 이렇게 정리했으니, 이 책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을 찬찬히 읽어보지 않겠는가? 어느새 12시가 넘어 561년 된 한글날이 되었다. 오늘만큼은 세종도 생각하고, 그가 '어제' 만들지 않고, 오래 전에 만든 훈민정음을 되돌아보자. 이 책은 오늘 읽히어 더욱 값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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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기의 한글, 이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from 리카르도의 정보 꾸러미 상자 2007-10-09 13:27 
    #언어란 욕구의 분출 도구 (예전에도 한자어가 없어져야 한다고 적은적이 있습니다만..) 한자가 없어져야하는이유는.. 언어의 음악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우선.. 영어, 또는 알파벳에서 음악이 발달하게된 이유를 생각해볼필요가 있습니다. 영어에는 랩이나 시(현대시), 또는 뮤직컬등의 운율적인 요소들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음가하나하나마다 독립적인 발달로 라임 이라는게 있어서이지요 즉 비슷한 소리의 반복이라든지, 비슷한 문장의 반복이라든지... 그런 영어나..
 
 
심술 2007-10-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고등학생 시절 한글이 세계최고라는 선생님들의 말을 냉소적으로 듣는 반항심 많은 그러나 겉으로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었는데 뉴질랜드 대학 다니면서 우연히 읽은 어느 외국 언어학자 글에서 한글이 현존 글자 가운데서는 가장 과학적이란 대목을 보고는 기뻤어요. 아무래도 외국생활 하면 사람이 애국적으로 되는 거 같아요. 그래도 멜기님의 4번엔 동의해요. 멍석 펴 주면 하던 짓도 안 한다는 옛말이 사실임을 이젠 알므로.

멜기세덱 2007-10-09 00:31   좋아요 0 | URL
동의하면, 추천은 하나 해주어야 합니다.ㅋㅋㅋㅋ

멜기세덱 2007-10-09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에서 "훈민정음을 만든지 올해로 561년째"라는 말은 좀 수정이 필요할듯하네요. 우리의 한글날 기준이 『훈민정음 해례본』반포일(집필 완성일)인 1446년 9월 상순(음력)이니까, 반포한지 561년, 창제한지 564년(창제일 1443년 12월 30일(음력))이겠네요.

심술 2007-10-09 0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천했시와요.

마늘빵 2007-10-09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념 리뷰군요! :) 참고루 모르는 분들 있을까봐, 한글날은 기념일에서 국경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멜기세덱 2007-10-09 10:28   좋아요 1 | URL
맞아요, 국경일이라죠...
근데, 왜 안 노냐고요? ㅋㅋㅋㅋㅋㅋ

순오기 2007-10-09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 책 서평단 신청했다가 미역국~~ 님의 글 읽고 장바구니에 담아 지릅니다!
물론 추천도 확실하게~꽉~~누르고요 ^*^
정말 노는 날 아니라고 한글날도 모른다는 건 너무해요~~ 저는 독서회에서 10월은 한글날 기념하기 위한 도서를 선정하는 것으로 저의 한글 사랑을 표현합니다!
국경일이지만 공휴일이 아니라 놀지 않는 날!

멜기세덱 2007-10-09 10:28   좋아요 1 | URL
저도 미역국~~~먹었어요. 서평단...ㅋㅋ

시비돌이 2007-10-09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지은 다음날의 보고서인가 보군요. '세종이 어제 훈민정음을 지었다'
아, 또 즐찾이 줄겠구나. ㅠ.ㅜ

멜기세덱 2007-10-09 17:55   좋아요 1 | URL
제 즐찾을 줄이시려는 음모시죠?

시비돌이 2007-10-09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구 한글을 반포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네요.

멜기세덱 2007-10-09 17:55   좋아요 1 | URL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 내신거에요, 지금....ㅋㅋㅋ
 

요즘, 이상스레 "도를 아십니까?"식 접근을 받는다. 근 몇 해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얼추 5년은 넘은 것 같다.

어느 날이었던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엘 갔더랬는데, 어느 이쁘장한 아가씨가 내게 오더니, 시간 있으시냐, 얘기 좀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접근을 해 왔다. 이땅의 순진건전한 당당한 청년으로서 어찌 그 제안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덜커덩, "도를 아십니까?"가 나온다. 아차 싶었고, 참한 그 아가씨가 안타까웠고, 못내 아쉬웠다. 그 '도'만 아니었어도 열심히 들어줬을텐데. 그런데 그 이전의 몇 번의 이런 공격에도 끄떡 없던 내가, 이때만은 '이참에 도를 한 번 알아볼까'하는 흔들림을 강하게 받았더랬다.

"도를 아십니까?"와 쌍벽을 이루는 것은 또한 "예수 믿으세요."다. 명색이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나로서는 오히려 "도를 아십니까?"보다 이 물음이 더욱 곤혹스럽다. 그들이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한때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냄새가 나게 되어있다"고. 나한테는 그게 안난다는 걸까? 그네들이 못 알아보는 것을 수도 있는 것이라며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여간 찝찝하지 않은게 아니다. 하긴, 어떤 우락부락하게 생긴 목사님도 매번 이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단골로다가 듣다더란다.

내 기억으로는 꽤 오랫동안 이 "도를 아십니까?"나 "예수 믿으세요."를 못 들었던 것 같다. 특히, 길을 지나면서 기독교 전도자들을 몇 번 지나친 것도 같은데, 그들은 별 말 없이 그냥 지나쳐가 버렸다. 혹시 이젠느 날 알아보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아무리 얘기해도 나한테선 별 믿을만한 구석을 찾기 어려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런 귀찮은 부류들의 접근을 받지 않아서 편했더랬다.

그런데, 요 근래 몇 차례 "도를 아십니까?"식 공격을 받았다. "얼굴에 복이 많으시네요."라나. 몇 주 전 부평의 한 서점에 들렀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비를 피해 건물 한쪽에 서 있더랬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확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나한테 복소리를 한다. 이럴 땐, 그저 외면하고 피해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난 잘 알고있다. 문제는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비를 맞으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엊그제던가? 밤에 주안역 근처를 지나가는데, 어떤 아줌마, 아저씨 커플에 다가오더니, 또 그런다. "복이 많다"고. "아줌마 저 복 없어요." "아니에요 복 많으세요."하면서 계속 따라붙는다. 나는 아무 대꾸없이 20여미터를 걸어갔다. 얼마간 따라붙던 그 아줌마의 소리가 잠잠해 졌다. 역시나 말을 섞으면 문제다. 간단히 외면하고 지나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저 복 없어요."라고 말했을까 못내 후회스럽다. 이왕이면 "저 복 많은 거 저도 잘 압니다."할걸. 더욱이 요 근래의 이 두 차례 공습을 받고 드는 생각은, 조금 이상한 곳으로 흐른다. 왜 하필 나일까? 아무래도 그들이 무턱대고 공격하는 것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뭔가 넘어올 만한 껀덕지가 보이니까 접근해 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 얼굴에서, 내 모습에서, 그들에게 뭔가의 기회를 엿보게 해주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아닐까?

이런 몇 차례의 공격을 받고 나는 나를 좀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싶었다. 그 사람의 마음은 얼굴에 비친다고들 하지 않던가? 뭔가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등이 있으니, 뭔가 낚일 것만 같은 느낌을 그들에게 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종류의 걱정거리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무념이라고 해야할까? 내가 과연 고독한지 아닌지조차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는 행복한 지금은 아니다. 결국 나의 정체를 전혀 파악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이 정체의 혼돈이 내 모습에서 보여졌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들이 나에게 그 어떤 "도를 아십니까?"식 정체성을 이식해 놓으려던 것은 아닐까?

날씨가 갑작스레 싸늘해 진 이 가을에, 아무렴 나는 더이상의 이런 공격을 방문당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이 무언가의 공허같은 느낌을 쉬이 지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방법은 싸돌아 다니지 않는 것이겠다. 아직 '파수꾼'들의 방문을 받지는 않고 있다. 조만간 방안에 쳐박혀 있는 나의 못난 심사가 그들의 눈에 포착되어, 그들의 방문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 "높고 외롭고 쓸쓸한" 이 가을의 심사는 여러모로 날 귀찮게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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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10-0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재밌네요. ㅎㅎㅎ

멜기세덱 2007-10-08 17:35   좋아요 0 | URL
이게, 재밌는 일만은 아니에요..ㅎㅎ 사람 좀 괴롭게 하기도 해요...ㅋㅋ

비로그인 2007-10-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찔립니다 ㅠㅠ

멜기세덱 2007-10-08 17:35   좋아요 0 | URL
아니, 왜 찌리실까요? 혹시 道걸이셨어요?

무스탕 2007-10-0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녁 너무너무 힘든 상태로 동네에서 걷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실례합니다' 하길래 길을 물으시려나하고 잠시 멈칫했더니 '얼굴이 참 공덕이 있게 생기셨어요' 이러는거에요.
그래서 순간 A~~C 하고 그냥 와버렸죠 -_-;;
근데 정말 이런 마주침이 잊을만 하면 반복되다보니 정말 내 관상이 후졌나 싶다니까요..

라주미힌 2007-10-08 16:57   좋아요 0 | URL
복 있다는 말은 그나마 기분이라도 좋죠...
저는 뭐가 끼었데요... 그래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나 ㅡ..ㅡ;

멜기세덱 2007-10-08 17:3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마늘빵 2007-10-0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와 '예수'로부터 가끔씩 찜당하곤 한답니다. 20대초반엔 자주 그랬는데 요샌 뜸하더라고요.

멜기세덱 2007-10-08 18:53   좋아요 0 | URL
그건 아프님께 그들이 넘볼 수 없는 그 어떤 포스가 느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요. 혹시 요새 행복한 일이라도....? ㅋㅋ

마노아 2007-10-0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며칠 전 편의점에서 책 찾는데 알바생이 "혹시 교회 다니세요?"하고 물었더랍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궁금했는데 안 말해주더군요..;;;

멜기세덱 2007-10-09 17:57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의 앳된 미소 가운데, 행복을 머금고 있어서 그런가.....ㅋㅋ

비로그인 2007-10-0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저도 道걸 만났었어요 ㅋㅋ 따끔하게 정신차리라고 일갈했는데 정신 차렸을레나..

멜기세덱 2007-10-09 17:57   좋아요 0 | URL
道걸이 은근히 이쁘면 어케하죠?

2007-10-08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0-08 21:02   좋아요 0 | URL
헉...
울뻔 했어요...ㅎㅎㅎ

잃어버린우산 2007-10-0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 많이당하는일이라 공감가서요 하핫.

멜기세덱 2007-10-09 17:57   좋아요 0 | URL
이거 많이 당하면 성질나죠...ㅋㅋ

순오기 2007-10-0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독주택에 사노라면 봄에 무차별 공격을 당합니다. '도'가 아닌 '파수대'를 들고 다니는 분들한데... 참,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난감...

멜기세덱 2007-10-09 17:58   좋아요 0 | URL
그 사람들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니깐요...ㅎㅎㅎ
근데, 집에 있으면, 이날은 꼭 제대로 질펀하게 자는 날인뎅...꼭 그때 와서 신경르 돋구죠...ㅋㅋ

심술 2007-10-0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전 94년 9월부터 뉴질랜드 교민인데 99년에 교민 된 뒤 첨으로 한국 갔다가 "복스럽게 생기셨다"는 칭찬에 우쭐해서 대순진리회까지 '자발적으로' 끌려가서 4시간과 3만원을 버렸습니다. 나중에 한국 친척들한테 얘기했더니 모두들 웃어제끼면서 "한국엔 요새 그런 사람들 많으니 조심하라."고 그러시더군요. 그게 벌써 8년 전 얘기네. 시간 빠르다.

순오기님/딱 봐서 여호와 증인인 거 같으면, 깔끔한 옷차림과 분위기 때문에 쉬 알 수 있죠,틈주지 말고 "여호와 증인이세요?"라고 물으세요. 그럼 십중팔구 "네."라고 대답합니다. 여호와 증인들은 거짓말 안 하니까요. 나머지 십중일이는 아무 대답 안 하고 멈칫하며 잘못하다 들킨 애들이 짓는 표정을 할 겁니다. 다음 짜증과 염증, 분노를 잔뜩 섞은 목소리와 얼굴표정으로 "아이 씨 오지 말랬는데 왜 또 오고 지랄이야? 니들 글자 읽을 줄 몰라? 자 우리집 주소 모모구 모모동 어쩌구저쩌구야. 똑바로 들어. 한 번만 더 오면 그 땐 (경찰 부른다/대야로 물 퍼붓는다 가운데 맘에 드는 걸로 고르세요) 그리고 니들 모임 가서 말해. 그 집 절대 가지 말라고. 알았지? 아! 왜 대답이 없어? 귀머거리냐? 알았어? 몰랐어?" 라고 말씀하신 뒤 문 부서져라 있는 힘껏 꽝 소리 내게 닫아버리세요. 네, 심한 거 저도 인정합니다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떨어지더라구요.

멜기세덱 2007-10-09 17:59   좋아요 0 | URL
크아~~~ 무섭당....ㅋㅋ

웽스북스 2007-10-0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종 잡히는 편인데, 한번은 단순한 호기심에 정말 궁금해서 같이 앉아서 그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나름 거기도 재밌는 세계더라고요 ^^ 자꾸만 제 속에 할머니귀신과 아기 귀신이 있다면서 해원식 하러 가자고 ;; ㅋㅋ 시간이 좀 지나고 한국종교 수업을 들으면서 그사람들이 증산교였다는 걸 알았죠-

멜기세덱 2007-10-09 17:59   좋아요 0 | URL
주류 교회에서 이단시 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너무 편견을 가지고 있기도 한 것 같아요. 알고 보면 괜찮은 점들도 있을텐데....

Mephistopheles 2007-10-09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도를 믿어라 예수 믿어라가 아닙니다.
헌혈하세요 하면 팔을 잡아끄는 아주머니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멜기세덱 2007-10-09 18:00   좋아요 0 | URL
피는 좀 나눠야겠습죠...

2007-10-09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0-09 18:0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애초에 말을 섞지 않는게 편한데...
"됐습니다."하고 문 닫아버려면 그냥 가더라구요...
 

고양이

나는 고양이를 미워한다.
그의 아첨한 목소리를
그 너무나 敏捷(민첩)한 적은 動作(동작)을
그 너무나 山脈(산맥)의 냄새를 잊었음을
그리고 그의 사람을 憤怒(분노)ㅎ지 않음을
범에 닮었어도 범 아님을.

- 유치환, 『청마시초』, 문학사상사, 1939.

며칠 전 경남으로 학술답사를 따라갔다 왔어요. 갔다왔더니 또 한바탕 뜨거웠었나 보더군요.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청마문학관엘 갔었는데, 통영이 시인 유치환의 고향이라죠. 유치환의 시 중에 재밌게도 이런 시가 있더군요.

야성을 잃은, 본성을 잃은 고양이. 그런 고양이를 유치환은 '미워'하기까지 하네요. 여하건간에, 체셔고양2님의 그 본연의 매력이 끝내 살아남아서, '산맥의 냄새' 물씬 풍기는, 진정한 고양이 되셔야겠습니다. 진정 체셔고양2님은 '범'이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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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8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울뻔 했네... ㅠㅠ

비로그인 2007-10-0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보다 더 적절한 위로가 또 있을까, 체셔님한테.
멋지군요.
 

10월이다.

가을이다.

천고마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내가 더 많은 책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10월은 한글날이 있다. 한글날 기념으로 한글에 관련한 도서를 몇 권 읽으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 관련서적 중 몇 권을 골라둔 것이 있어 마저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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