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중 맞춤법에 맞거나 표준어인 것을 모두 고르시오.

오뚜기, 늴리리, 숫소(황소), 모가치, 서슴치,

곱배기, 깡총깡총, 아지랑이, 미류나무, 무우,

세돈, 흐리멍덩하다, 체신머리, 개나리봇짐,

해님, 수놈, 윗층, 풍지박산, 아연실색, 개발쇠발

 

정답 및 풀이는 잠시 후에 공개합니다.ㅎㅎ

정답을 맞춰주시는 분께 아래 책을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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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11-2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틀린거 같음... 느낌상.. ㅡ..ㅡ;

멜기세덱 2007-11-23 21:22   좋아요 0 | URL
전 다 맞는거 같은데요... 느낌상^^;;

웽스북스 2007-11-2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맞춤법에 제가 이렇게 약하군요
숫소, 깡총깡총 이렇게 아닐까요?

(답이 몇개인지도 알려주시면 더 좋을텐데 ㅋㅋ)

멜기세덱 2007-11-23 21:22   좋아요 0 | URL
정답은 모두 7개입니다.ㅎㅎ

이매지 2007-11-23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표준어 규정집을 학교에 두고 와서 ㅎㅎㅎ
머리 속에서 뭐가 자꾸 떠돌고 있어요 ㅎㅎ

아연실색, 모가치, 해님, 아지랑이
요건 확실히 맞는 것 같은데 나머지는 헷갈려요 ㅎ

멜기세덱 2007-11-23 21:23   좋아요 0 | URL
규정집 들춰보실 것 까지야...
말하자면 순발력 테스트....ㅋㅋㅋ

물만두 2007-11-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발쇠발이 아닌건 확실합니다.

멜기세덱 2007-11-23 21:23   좋아요 0 | URL
역시 확실 하십니다...ㅋㅋ

chika 2007-11-23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첨 눈에 띄는건 모가치. 늴리리.
근데 깡총깡총도 의태어로 맞는거 아닌가요? 다들 암말안하니까 꼭 아닌거 같다는;;;

chika 2007-11-23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리멍덩하다.
이매지님이 얘기한거까지 하면. 7개? 아, 난 이런거 테스트하는게 젤 싫더라~ =3=3=3

마늘빵 2007-11-23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뚜기, 늴리리, 숫소(황소), 곱배기, 깡총깡총, 무우, 개나리봇짐, 풍지박산, 개발쇠발

음 왜 난 9개지. 두 개를 빼야하는데. 빼려면 숫소랑 음...

stella.K 2007-11-23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개라구요?
오뚜기, 숫소, 곱배기, 모가치, 윗층, 아연실색, 미류나무
그냥 찍었슴다. >.<;; 멜기세덱님 참여적도도 섭섭해 하지 말라구요. ㅋ

이매지 2007-11-2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뚜기 ->오뚝이
개발쇠발 ->괴발개발(고양이 발, 개 발)
곱배기 ->곱빼기
미류나무 ->미루나무
개나리봇짐->괴나리봇짐
20개 중 5개는 확실히 아니예요.
이건 답을 맞추고 있는 건지 힌트 요원인지;;;

마늘빵 2007-11-2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거꾸로 맞추고 있었다. 틀린거 찾기 하고 있네. -_- 다시

모가치, 서슴치, 아지랑이, 세돈, 흐리멍덩하다, 체신머리, 해님, 수놈, 아연실색

아 그래도 두 개 빼야하는데... -_- 수놈이랑 해님인가.

웽스북스 2007-11-2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럼 전 두개라고 찍어놓은게 다 틀린 거에요? 정말 깡총깡총이 표준어가 아닌 거에요? ㅠㅠ (산토끼 작사자 지금 잡으러 갑니다 ㅠㅠ)

그래도 저도 오뚜기, 곱배기, 무우, 개나리봇짐, 개발쇠발, 서슴치 아닌 건 알았는데 ㅠㅠ (어째 말하면 말할수록 더 수렁으로- 아아 근데 저거중에 맞는거 있으면 어쩌지?)

멜기세덱 2007-11-24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마감합니다.ㅎㅎㅎ

웽스북스 2007-11-2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근데요- 맞추다 아니고, 맞히다 가 맞아요
저 특별상 주세요, 막이러고 ㅋㅋ

글샘 2007-11-24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ㅍㅎㅎㅎ 이걸 복사해서요~
한글에다 붙여 보면 말이죠.
밑줄이 빨갛게 그어 진 건 다 틀린 것입니다.

멜기세덱 2007-11-24 03:23   좋아요 0 | URL
헉....ㅋㅋ 그런 방법이 있었죠...ㅎㅎ

근데, 해보니깐..그래도 2개가 남네요...ㅎㅎ

(얼런 마감하길 아무튼 잘했당...ㅋㅋ)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쯤에, 맹랑한 댓글을 하나 달았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나보다는 십수년을 더 살아오신 그 분께 눈물을 흘리라느니 운운하는 것은 정말 맹랑한 짓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댓글은 그 분이 남긴 짧은 메모 속 깊이 담긴, 행간에 스민, 어떤 슬픔 혹은 그 무언가를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맹랑함의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부터는 그 분께 섣부른 댓글을 달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다른 분들께도 한 번 씩 더 댓글을 닮에 생각하게 한다.

사실 그 때는 내게 눈물이라는 것은 메말라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년 여가 지난 지금 내가 왜 예전의 그런 댓글을 생각하고, 또 왜 눈물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그 때의 그 댓글은 맹랑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눈물을 한 번 흘려보세요!"라는 지금의 권유는 어쩌면 내게는 한 소망일지 모르겠다. 지금 나는 울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슬퍼서도 아니고, 서러워서도 아니다. 삶이, 몸이, 고통스러워서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냥, 이다.

지금으로부터 가장 최근에 울어 본 기억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얼마 전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살짝 울컥 했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그건 울음이 아니다. 울컥한 김에 눈물을 찔끔 댄 기억은 멀지만 또렷하다. 이번에도 영화다. '타이타닉'. 이 영화를 나는 극장 상영이 한참 지나고 어느 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 몇 년 전이었을게다. 심심해서였을 것이고,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이 대목에선 여자들은 죄다 운다던데, 왜 일까? 어둔 방 구석, 새벽녘에 이 영화를 보면서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잠겨드는 디카프리오를 보면서 그 여주인공처럼 나도 울었다. 울컥해서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겟돈'을 극장에서 친구와 보다가 마지막 장면, 브루스 윌리스가 딸과 작별하면서 나는 울었다. 울컥해서 울었다.

이때 나는 왜 울었을까? 그때 내 상황과 처지가 잘 재생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심정적으로 어려웠었던 것 같다. 좀 막막했었다고 해야 될까? 그때 영화는 울컥했고, 나도 울컥해서 울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 상황과 처지를 가까운 시일내로 돌려보아도, 여전히 막막하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별다른 혼란과 걱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안니다. 막막하고 막연하다고나 할까? 이럴 때도 영화를 보면 울컥할 수 있을까?

나는 중학생 때쯤, 아니 국민학생 때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가운데, 그 때만큼 서럽게 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얘기는 지금까지 입밖에 내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못 할 것 같다. 어쩌면 산전수전 다 겪은 다음에야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건 내 가족사의 숨겨둔 일면이기에 아직은 나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그 서러운 눈물이 지금은 왠지 부러워진다. 서러워서라도 울고 싶은 지금이다.

어려서는 참 말썽이 많았나 보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오죽하면 어렸을 적 별명이 '찔통'이었을까? 동네 슈퍼에 가서 과자를 한아름 안고도 더 안지 못해 서럽게 울었다나. 하여간 그때는 많이도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근 5년 넘게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서럽지 않아서였을까? 슬프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삶도 몸도 편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서럽지만 그 서러움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슬프지만 그 슬픔을 알지 못해서였을까? 삶도 몸도 고되지만 그 고됨에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서럽고 슬프고, 서른 즈음의 나이에는 그나마 조금은 느낄 수 있는 인생의 고됨이, 산전수전의 반(半)전은 겪어서 그만큼은 가졌을 나이에, 나는 왜 울지 못할까?

내년이면 서른을 맞는다. 아직은 익지 않은 나이여서 '설은'이고, 더욱 따갑게 익어야할 나이여서 '서(러)운'인지 모르겠다. 이 서러운 서른에는 울 수 있을까? 11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건 얼마있을 시험이 그만큼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후의 어떤 일들도, 계획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서른 즈음의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의아해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 조차도 의아하고 으아~하다. 그러나 어쩌랴? 막연하고 막막하고 앞은 까마득하다.

어쩌면 내년에도 올해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될지 모르겠다. 안주하자는 것일 게다. 그냥 이렇게 대책없이 좀더 살아보고 나중에 고민하자는 것일 게다. 그 선택을 내가 하더라도 나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늘은, 아니 요 한동안은, 좀 울어봤으면 좋겠다. 무엇인지 모를 허무가 호되게 느껴지는 지금, 왠지 울어 봤으면 싶다.

울면, 눈물을 흘리면, 몸에도 좋다고도 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눈물을 덜 흘려서 수명이 짧다나. 미국 남자들은 한 달인지, 한 주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평균 1.4회를 운단다. 그런데 나는 최근 연 평균 단 1회도 울지 못했다. 그래서 더 일찍 죽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죽거나 사는 것의 문제보다, 그냥 아무런 댓가도 없이 울어 봤으면 좋겠다. 울고 나면 정신이 한층 맑아진다고도 한다. 뭔가 빈 듯한 이 마음을 눈물로 채우고, 뿌연 이 정신이 맑아졌으면 좋겠다.

삼국지를 보면서, 유비, 관우, 장비, 세 의형제가 고성에서 만나는 그 장면에서, 책을 읽으면서 한 번, 드라마로 보면서 또 한 번, 나도 울었다. 나는 책을 보면서 운 기억이 이것 말고는 없다. 하다 못해 성경책을 보면서까지도 울지 못했던, 그래서 날라리 기독교인인, 그런 신세다. 책을 읽으면서 책 갈피 갈피에 한 방울의 눈물 자국 한 번 남겨보는 것도 작은 소망이다. 박완서를 더 읽어보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작은 희망이 생긴다.

그러나 오늘 밤은 여전히 울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런 헛소리들을 이렇게 해댔겠는가? 여하튼, 이 해가 가기전에는, 서른이 오기 전에는, 그래서 서러운 서른을 서럽게 울기 전에, 지금, 막막하고 막연한 울음 울어서, 그래서 정신이 맑아지든가, 수명이 연장되든가, 아니면 더 슬퍼지던가, 더 서러워지던가, 더 인생이 고되고 힘들어지도라도, 그냥 한 번 크게 울고 싶다.

울고 싶은 마음이 나뿐은 아닐 것 같아서, 이것저것 들춰보다가, 찾아보다가, 이런 시가 눈에 들었다.

   
 

눈물이 난다

- 이수인

이따금씩
사는 게
구질구질할 때가 있다

내 자신에게 진실하고 싶은데
내마저 내 자신을 우롱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깊은 밤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다 삶이
구질구질하다고 느끼며
내마음 깊은 곳에서 펌프질하듯 눈물이 난다

나에게 진실하고
남에게 정직하고 싶은데
세상은 가끔씩
사람은 자꾸만
나를 치사하게 만든다
세상에게
사람에게
가끔씩 우롱을 당할 때면
내 자신이 초라해져서 눈물이 난다

사는 게
살아 있는 게
힘들어서 구질구질해서 눈물이 난다

 
   

나도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나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남에게 정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구질구질"해서, 그래서, 지금 울고 싶은 게냐? 그런 게냐?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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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1-2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적 습성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남자들은 전반적으로 울지 못하는것 같아요. 눈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것 같아요. 남자는 가슴이 울고 어깨가 울고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가 봅니다.

멜기세덱 2007-11-22 23:15   좋아요 0 | URL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미워요~~~

라로 2007-11-2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엔 조용히 추천이나 누르고 댓글은 달지 말아야 하건만,,,
1.우리는 나이차이는 있어도 같은 세대군요~.ㅎㅎ(국민학교)
2.제 아들넘이 거의 맨날 울어서 속상했는데 크면 님처럼 안울까요?^^;;;
3.전 요즘 너무 자주 울어요,,,산후 우울증이려니 했더니 제 목숨을 연장하는 술수였군요! 하하하
4.구질구질한 삶,,,,때론 아름답기도 하더이다...

멜기세덱 2007-11-22 23:21   좋아요 0 | URL
추천도 안 누르고 댓글도 안 다는 사람보다 백만배 나아요...ㅎㅎ
1. 나이차이가 있군요. 근데, 성별도 다르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어요. 결혼을 하셨더군요.ㅠㅠ;;
2. 강하게 키우시면 그럴 수 있을지도...그런데, 저처럼 되는 건 권하지 않습니다.ㅋㅋ
3. 산후 우울증이라...그런걸 전 잘 모르지만...그건 '술수'로 폄하되어서는 아니 될 것으로 사료되네요.ㅎㅎ
4. 때론 아름답다. 나비님도...

2007-11-22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1-22 23:22   좋아요 0 | URL
어머나, 눈물 뚝, 급방긋, 으하하하.....잘 지내셨죠?

웽스북스 2007-11-22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면 또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는 게 나만이 아니라는 게, 굉장한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누구나 다 화려하고 밝아보이는 이면에 다른 모습들이 있으니까요 ^^
저는 어렸을 때는 독하게 울지 않고, 꾹 참곤 했는데, 자라면서 자꾸만 마음이 말캉말캉해져서 작은일에도 갑자기 눈물이 툭 떨어지곤 한답니다 그러면 혼자 또 내모습에 적응 안되고- 전 정말 구질구질 대마왕이에요 ㅎㅎ

멜기세덱 2007-11-22 23:25   좋아요 0 | URL
근데, 알고보면, 이게 다 구질구질한 것 같아도...지나고보면, 그냥 추억이려니...ㅎㅎ
삶의 작은 일에도,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어요...그럼 나도 구질구질 대마왕할래...ㅋㅋ

비로그인 2007-11-2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
나는 울지 못해서 아픈건가.
눈물을 안에 가두어서 익사해버린건가, 내 영혼은.

멜기세덱 2007-11-22 23:26   좋아요 0 | URL
내 영혼도.

프레이야 2007-11-22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눈물이 났던 적은 언제였더라..
영화 세븐데이즈 보며 엄마의 마음에서 흐흑..

멜기세덱 2007-11-22 23:27   좋아요 0 | URL
언제, 울고 싶은 사람들 한 번 모여서, 대성통곡 하는 시간을 만들어도 재미날 것만 같다는,,,,막 이래...ㅋㅋ
 

인터넷 검색 중 관심을 끄는 뉴스의 제목을 보고 클릭했더니, 책 소식이다. 『정치교회』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이 최근 출간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현실이 더 자극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사를 옮겨온다.

<한국 개신교는 권력에 중독됐나?> 한국교회 보수성 파헤친 『정치교회』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연말 대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파헤친 책 『정치교회』(교양인 펴냄)가 출간됐다.



   정계와 종교계 등을 취재해온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펴낸 이 책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로 대표되는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회들이 어떻게 권력의지를 키워왔고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있는지 분석했다.

   저자는 "1970-8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몇몇 진보적 단체를 제외하고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민주화투쟁을 외면하거나 수수방관했다"면서 "그러한 보수 교회들이 민주화 이후 과거의 정교 분리와 사회적 무관심을 거듭 반성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참여의 명분을 쌓아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교회의 사회활동이 일상적으로 가능해졌으며, 정권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해졌다"면서 "교회의 정치 참여 폭이 커진 것에는 한국교회가 태생적으로 지닌 반공이데올로기가 작용했으며, 2000년 이후 남북화해가 불러온 변화에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이 교회의 반공주의를 자극해 정치의 장으로 끌어낸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저자는 "민주화로 정권교체를 당한 우파 보수세력이 교회를 이용해 보수 반공주의의 물적ㆍ인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면서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보수 우익단체와 교회들이 2003년 1월 19일 서울시청 앞에서 개최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는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커밍아웃'이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정치세력화에 나선 보수적 개신교 목사들은 연말 대선을 앞두고 설교 등을 통해 특정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저자는 "주로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사회적 책무와 교회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열의 위험을 무릅쓰고 특정 후보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는 것은 정치적 힘을 갈망하는 권력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했다.

   그는 "매주 수천 수만 명을 상대로 설교를 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으며, 이 같은 교회의 힘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을 통해 권력에 중독돼 갔다"면서 "영혼의 구원이라는 종교의 본분을 망각한 채 한낱 이익집단으로 변질한 교회의 타락은 기독교의 근본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해 왔다"면서 "다만 교회의 정치참여는 권력을 향한 질주가 아니라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한 섬김의 활동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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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글새소식》423호(한글학회, 2007.11.)에 실린 국어학자 고영근 교수의 글을 옮긴다. 수긍이 가는 대목도 있고, 좀 지리하지 않은가 하는 대목도 있다. 간혹 시비도 걸어보자.

문법에 맞는 표현을 골라 쓰자 - 고영근(서울대 명예교수, 국어학)

지하철을 타거나 병원을 찾으면 전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표현을 더러 접한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와 같은 표현은 '내리시는 ……'로 바꾸어야 한다. 미래의 일을 표현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확정적이거나 보편적인 사실에 관련되는 '-는'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주차장의 '出口'와 '入口'를 우리말로 다듬은 표현이 '나오는 곳'과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면 '내리시는 ……'이 옳다는 것을 누구든지 수긍할 수 있다. 병원에서 흔히 보는 '복도 앞으로 들어오실 분', '여기서 순서를 기다리실 분'과 같은 말씨도 당연히 '…… 들어오시는 분, …… 기다리시는 분'으로 다시 고쳐야 한다. 높임의 '-(으)시-'를 끼워넣는 것도 그렇게 좋지 않다. 특히 지하철의 '내리시는 문'은 '내리는 문'이 더 자연스럽니다.(이건 지하철공사에서 가급적 빨리 바꾸면 좋을 것 같다. 간혹 지하철을 탈 경우 차내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거북하게 느낀 적이 많다.)

약국이나 병원에 가면 "오늘 5일분 약이 나가십니다."와 같이 존경의 '-(으)시-'를 사용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으)시-'는 주어가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할 때 붙이는 것인데 '약'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청자를 의식하여 '-(으)시-'를 붙이는 것으로 보이나 이런 말씨는 문법에 어그러지는 과잉공대의 예이다.(약국이나 병원뿐만 아니라, 백화점이나 쇼핑몰, 그리고 각종 전화안내 등에서 이런 과잉공대가 많다. 과잉공대인지 잘못된 공대인지 잘 모르겠다. 한때 YTN에서 골프 강좌를 하던 세미프로는 시종일관 이런 '~십니다.'로 일관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이런 것은 문법을 떠나서 좀 지나치다 싶다. 우리말의 존대에 대해 일각에서는 문제의식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것을 오랜 전통이고 문화로서 인정하고 수긍하는 편이다. 그러면 이런 과잉공대는 좀 지나쳐 보인다.) 전화로 자신을 소개할 때 '김XX 변호사입니다', 'XX일보사 박XX 기자입니다', 'XX대학교 정XX 교수입니다'란 말을 예사로 듣는다. 얼마 전 일본 교수에게 일본에서도 이런 말을 쓰는가 물어 보니 어떻게 자기가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원래 직위나 직책은 'XX신문사 사회부 기자 XXX입니다'와 같이 성명 앞에 붙여야지 뒤에 붙이면 자기를 높이니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를 객관화시킬 때에는 "XX회사의 김XX 과장에게서 전화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쓸 수 있다.(이 점은 이미 입에 굳은 표현이 된 것 같아 뭘 이런 것까지 시비를 거느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것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지, 자신의 직책이나 직위를 붙여 권위를 들어내려고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꼭 있는 놈들이 이런 표현을 자주 쓴다.)

신문지상이나 방송매체 등의 제호에서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행동을 요구할 때 명령형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이런 상황은 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직접 명령형을 써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의 신문의 제호를 보면 직접 명령형을 사용하는 일이 자주 보인다. 학교문법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상대로 행동을 요구할 때에는 '-(으)라'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받침 아래에서는 '-으라'를, 모음이나 'ㄹ' 받침 아래에서는 '-라'를 쓴다는 것이다. '교장 고소하게 부모 도장 받아 와라, 탈당 의원들은 행선지를 밝혀라, 시정 연설 대통령이 직접 해라'에 나타나는 '~와라, ~밝혀라, ~해라'는 모두 직접 명령형으로서 당연히 '오라, 밝히라, 하라'로 바꾸어야 한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간접 명령형어미 '-(으)라'는 중세 이래 광복 후의 남북한과 재외교민(고려인)의 언론매체에서 거의 정확하게 사용되어 왔다. 이런 경우 간접 명령형을 쓰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수재민을 돕자'와 같이 청유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주어가 화자와 청자의 합동이어야 한다.(신문이나 잡지 등에서는 또한 자주 보이는 오류는 인용할 때이다. 우리 문법에서 인용에는 간접인용과 직접인용으로 나뉜다. 신문 등에서는 직접인용의 경우가 많은데, 그때 어미를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신문들이 보다 우리말 문법에 맞게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작년과 금년에 걸쳐 우리 고대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텔레비전에서 여러 편 방영되어 왔다. 이들 사극에는 명령형어미로 예외 없이 '보이거라, 칼을 뽑거라, 들라 하거라, 앉거라, 술이나 마시거라, 말해 보거라'와 같이 어간에 '-거라'를 붙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거라'는 '거라' 불규칙활용이라 하여 '가다' 등의 일부 자동사에 쓰인다는 것을 누구든지 안다. 앞의 예는 '보여라, ~뽑아라, ~하여라, 앉아라, ~마셔라, ~보아라'로 고쳐야 한다. 언론매체에서 규범에 어긋나는 말씨를 쓰면 그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다. 극작가나 연출가는 이런 점에 유의하여 출연자들이 규범에 어긋나는 말씨를 쓰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고영근 교수의 설명이 전적으로 맞으나, 현대 언중에게 있어 이런 구분은 모호해졌다. 고영근 교수대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말 교육을 제대로 안 받은 사람들일테다. '-거라' 불규칙이 무의식적으로 지켜지고는 있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별반 오류를 느끼지는 못한다. 그런 불규칙의 규칙이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사극에서의 '-거라' 남용은 어느 정도 문제라고 보여지지만, 그것이 보다 고어적 표현 효과를 잘 드러내주고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씨 가운데는 입말에 알맞은 것이 있고 글말에 더 어울리는 것이 있다. 같은 명령형어미라 하여도 '-어라'는 입말에 어울리고 '-(으)라'는 글말에 어울리는 형태이다.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직접 명령형어미 '-어라, -아라, -여라, -거라, -너라'를 문법에 맞게 써야 하고, 글말을 작성할 때에는 -으라'는 받침 있는 말 아래, '-라'는 모음과 'ㄹ' 받침 아래 써야 한다.

국어문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보급이 절실하다. 정확한 문법 지식은 맞춤법과 논리에 맞는 글을 쓰고 정확한 말씨를 골라 쓰는 기반이 된다. 실종된 문법교육의 강화가 시급하다.(맞는 말이다. 문법교육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긴 하다. 옳은 말씀이긴 한데, 공허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런다고 실종된 문법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애초에 문법이 실종된 적은 없다. 조금씩 성형수술을 해서 이전의 문법을 못 알아볼 따름이다. 문법교육의 강화는 어문 규범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창조적 사고력이라던가 언어가 가지는 여러가지 특성들을 창의적으로 탐구하게 하는 학습의 하나로 기능해야 할 것이다. 문법을 통해서 언어의 특성을 인지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언어를 가지고 논다면 어문규범이 그리 심각하게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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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
김광하 지음 / 운주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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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은 첫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본시 '첫경험'에 대한 설렘이나 흥분같은 것은 발동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발을 디뎌놓기 전의 어떤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이 약간은 있었던 것같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나 스스로는 날라리이긴 해도 기독교신자임을 항상 표명하고 살아왔다. 그런 내게 불교는 어쩌면 금단의 세계였다. 이런 세계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두려움일 수 있다. 모든 첫경험에는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대체로 기우일 뿐이다. 비정상적인 첫경험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이 첫경험은 비교적 정상적이었다고 해야겠다. 이제 그 두려움은 어느 정도 가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라는 것은 하나의 허상이었다. 제대로 불교에 대해 접해본 적 없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비치는 불교, 지나다니며 보게 되는 불교,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내가 아는 불교의 전부였다. 『반야심경』의 몇 구절정도를 아무 뜻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일 수 있겠다. 그래서 불교 관련 서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을 들춰보다보면 그 중에 불교와 관련한 책들도 제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정통 불교 서적까지는 아니지만 오롯한 불심을 담은 책을 읽기는 처음, 첫경험이다.

먼저 내가 그 전에 저질렀던 불교에 대한 짓궂었던 행위를 반성해야 하겠다. 간혹 지하철역에서 포교활동을 하시던 스님들 앞을 지날때면 '마귀, 사탄의 역사'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얄궂게 주기도문 정도는 입으로 읊으며 지나갔다. 이것은 조금은 무례한 짓이었다고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또 간혹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외치며 떠들썩한 이들에게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론 내가 중얼거릴 수 있었던 반야심경의 몇 구절을 염불하기도 했었더랬다. 이것으로 면죄부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반성은 매우 깊다.

이 책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를 읽게 된 것은, 내가 모시는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을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저자 김광하는 얼마 전 뵙게 되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고, 나의 선생님의 친한 친구분이기도 하다. 얼핏 듯기에 저자의 결혼전 함을 지고 박완서 선생댁으로 들어간 것이 나의 선생님이라고 한다. 나의 선생님께서는 오랜 친구인 저자가 보내온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깊게 느낀바가 크다고 하셨다. 한학자인 본인이 부끄러울 정도로 각종 불교서적은 물론 노자의 『도덕경』까지 번역하며 끊임없이 학문과 불심을 닦으며 많은 결과물을 내어 놓고 있다. 그런 저자의 직업이 중소규모의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높이 사야할 것은 그런 저자의 수행의 깊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의 선생님께서 이 친구분을 높이 사는 것 또한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주장하며 온 세상에 정치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 어느 세상이 사랑과 우정,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를 존중하는 체제인지 물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없으면 어떤 사회라도 아직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그가 지금껏 불자로 살아오면서 닦아 온, 깊은 불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는 재가불자로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고민과 수행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가 된 듯하다. 흔히 인간의 삶을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그 가는 길에 뜨거운 '화두'는 하나씩 품고 가야하지 않을까? 저자는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마음을 성찰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길 위에 하나의 화두를 던져놓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저자가 재가불자이기에 그 화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불교적 시각으로 세상에 던지는 화두를 불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하나씩 받아들어 음미해봄은 그리 손해날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그간의 불교에세이랄 수 있는 것들은 다섯 마당으로 모아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부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을 첫째 마당에, "현실의 여러 갈등을 만날 때 불교적인 인식과 판단"이 어떠해야 하는 지의 에세이는 둘째 마당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소개"한 세째 마당, "수행 한담"이라는 넷째 마당, "불자로서 살아가기"의 다섯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당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부처의 역사적 모습을 찾아본다. 석가모니가 인도의 한 작은 왕국의 왕자였다는 사실 정도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었다. 우리가 부처님을 신격화하기 이전의 석가모니라는 한 수행자의 사실적 면모들을 살펴보면서 그로부터 우리가 새겨야할 귀한 가르침들을 몇몇의 화두로 던져준다. "부처님께서는 29살에 출가하셔서, 35살에 그분이 가진 고민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과문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얼핏 예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이라고 느껴진다. 문득, 나는 이제 29의 나이가 몇달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면서, 조금은 씁쓸해지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을 이끄는 종교는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특히 부처님께서 네 가지 집착, 즉 욕취(欲取;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 견취(見取; 견해에 대한 집착) · 계금취(戒禁取; 미신, 관습과 타부에 대한 집착) · 아어취(我語取; 나라는 이론에 대한 집착)를 버려야 할 것으로 말씀하십니다.(46쪽)

부처님은 출가 후 새로운 사상을 대표하는 당대의 여러 스승들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이들 중,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 등에게 제자로서 이들의 가르침을 직접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의 교리가 윤리적 행위를 가져오는 합리적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이들을 떠납니다.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은 인간사회에 선한 행위를 가져오지 못하는 맹목적인 교리이기 때문입니다.(76쪽) 

 
   

조금 간추려 본 것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부처님의 삶을 통해 저자는 유익한 깨달음들을 전해준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사회적 윤리나 합리적인 인과법칙을 무시하는 종교나 사상"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될 때 이천 여년 전의 부처의 그런 깨달음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익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마당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불교 에세이는 저자의 불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현 사회에 대한 절실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재가불자로서의 저자의 삶이 지극한 불심과 현실에 대한 자비심으로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있게 하는 대목이다. "현실 삶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실체와 조건이 무엇인가를 먼저 해명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문제인 것을 인정하고 일단 멈추는 태도입니다. '지금 여기서' 멈추고[止], 우리 삶의 조건을 성찰[觀]하는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겸허히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도 미래에서의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해야 하고 끝없이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문화가 심지어 생명을 가꾸는 농업과 종교, 시민단체까지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조직의 지속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고 있지요. 이런 동기가 있을 때, 과연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가 평화로울까요? 이런 삶을 버려둔 채 닦는 수행이 우리의 삶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의 인격을 근본에서 바꾸는 것이 종교이며 그 실천이 종교적 수행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이 과연 종교적 수행일까요? 아니면 이 시대의 삶이 혹 우리의 수행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138쪽)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의 여러 모습들의 부조리함을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서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죽음에 대한 성찰, 노숙자에 대한 관심 등 저자는 우리 사회 곳곳의 현실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피고, 절실한 화두를 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하심(下心)'을 강조한다.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쌓은 모든 공부를 버리는" 것이 바로 이 하심이다. 하심은 달리 말하면 겸허해 주고 겸손해 지는 것이며, 나의 것을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소유로 이어지고, 무상, 무위로 이어지는 기초의 관문이랄 수 있겠다. "하심은 깨달음에 관해 습득한 지식이나 분별을 내려놓는 것[放下心]"이기도 하다. "그동안 처음과 중간과 끝, 무명과 깨달음, 문 밖과 문 안, 법(法)과 법을 닦아 얻은 여러 경지 등 모든 계단이나 사다리를 놓아 버릴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천 길 낭떠러지에서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의지해 왔던 모든 방법이나 평생 쌓아온 수행을 버리는 것이다."

   
  다급한 것은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눌려 있는 우리 생명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살리는 일에 계급적인 장벽을 앞세우거나 사회의 변화가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가 아닐까? 두려움과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과 증오에 고통받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눌려서 끙끙거리는 생명에 대한 창문을 활짝 열고 숨을 쉬는 태도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의 곳곳에서 던져주는 이런 화두들을 오롯이 내것으로 챙겨넣기에는 내게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 김광하가 세상에 대해 얼마나 깊은 불심으로 연민하고 자애하며 절실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묻고 또 물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는 있다. 이런 저자가 던져주는 화두들을 그 하나라도 잡고 늘어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그가 친절히 소개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은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것과 무에 다르다 하겠는가?

이 책에서 쓰이는 불교 용어들이 많이 낯설어 읽는 동안에 제법 걸리적 거렸던 것은 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아마도 불교신도들을 대상으로 이 글들을 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용어들이나 불교고적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각주들을 붙여 놓았더라면 나같은 사람에게 보다 유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저자가 던지는 화두를 우리가 받아내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세 가지의 새로운 무재보시", 즉 무재삼시(無財三施)가 있어 이것마저 소개해야겠다.

무재보시란 "재물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보시"다. 이것에는 7가지가 있다는데, "부드러운 말과 웃음 띤 얼굴"로 하는 '언시(言施)'와 '화안시(和顔施)' 등이 있다. 여기에 저자는 새로운 무재보시를 제안한다. 우선 '경청시(傾聽施)',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보시"다. 다음으로 '발언시(發言施)', "남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보시"다. 마지막으로 '공의시(公義施)'가 있다. 이는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대중이 관심을 갖는 주제를 모임의 대화로 받아들여주는 보시"라고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 세 가지의 새로운 보시는 지극히 개인화되고 이기적이 되어가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 곧 부처님의 자애와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는 참으로 절실한 보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돈 안들고 힘 안드는 이런 보시로도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저할 이유가 없겠다. 오늘부터라도 이 무재삼시를 실천해 보자. 저자의 이 책은 불교건 아니건 간에 한번쯤 깊게 음미해 볼 좋은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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