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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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의 엔지니어가 지방의 영업직원이 되고 그마저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퇴직으로 밀려났다가 산골 노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하청업체 노동자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고객과 민원인들에게는 회사의 대언자가 되곤했지만 정작 그가 곤란할 때 회사는 그의 대언자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는 고객과 민원인들에게 회사가 시키는 대로, 회사의 입장대로 말하는 일을 수행했지만 고객과 민원인들이 그에게 찾아와 회사의 입장과 조율울 보고자 할 때에 그 조율에 응하는 일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실체도 형체도 없이 그저 '회사'라는 글자로만 존재하는 조직과 그 조직이 떠맡긴 일을 수행하는 그, 9번. [9번의 일]은 그 9번이 회사로부터 받은 일의 실체와 그 일이 9번의 인간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살벌해, 점점 더 살벌해진다니까. 단물만 다 빨아먹고 이제 빈손으로 나가라는 거지. 안 그래요?

어디 여기만 그런가. 다 그래. 다 그렇다고. 개새끼들. 못된 건 서로들 또 얼마나 금방 배우는지. 하는 짓거리들 보면 다 똑같아.

맞아. 못된 건 금방 배워. 왜 그럴까? 응? 왜 그런거야?

85쪽

 

 인간성이 파괴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을 파괴할 수 있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냄비에 든 개구리가 물이 따뜻해지는 동안은 그걸 즐기다가 결국 물이 끓을 때까지 냄비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죽게 되듯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동안 개구리는 알지 못한다. 이 뜨거운 물이 결국 나 자신을 죽일 거라는 사실을. 그러나 만약 알았다고 해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 따듯하고 아늑한 냄비 안을 포기하고 나올 수 있었을까? 냄비 속 따듯한 물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9번의 일]의 주인공 그에게는 이것이 '일'이었다.

 

걷다 보면 거대한 싸움판 한가운데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 비열하고 야비한 방식으로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 같았다. 매일 아침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주시하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싸움을 기다리는 우스꽝스러운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165쪽

 

 직업이나 회사 내에서의 역할로서의 일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일은 무척 치명적이다. 자아 실현의 방법으로서의 일은 이제 지나간 시대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시대의 자아 실현은 더이상 자의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자의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sns에서 방송에서 온갖 미디어와 거리에서 그리고 집에서마저 우리는 자아를 의심받고 자신의 현재,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한다. 가진 것도 많고 누리는 것도 많은 잘난 타인들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주변으로, 변두리로 밀려나고 밀려난다. 그래서 일을 한다.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일은 사회 구성원으로, 가정의 일익을 담당하는 가족으로, 현대 사회에서 낙오되고 소외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이 되게 해준다. 그렇게 일이 내가 되고 내가 일이 된다.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했는데 일에게 잠식당한 후로 일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켜버린다.

 

오랫동안 그에게 회사는 시간을 나눠 가지고 추억과 기억을 공유한 분명한 어떤 실체에 가까웠다. 그의 하루이자 일상이었고 삶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친구이자 동료였고 가족이었으며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것.

그는 잠에서 깨어나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의 생각은 스스로를 여기까지 밀어붙인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책 229쪽

 

[9번의 일]은 일이 사람을 잠식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렸다. 9번에게 닥친 상황은 특이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며 기이한 것도 아니다. 아주 보통의 상황, 우리 중 누구라도 잘 아는 상황이다. 한 번 이상 겪어본 상황이기도 하고 아직 안 겪어본 이에게는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꼭 한 번 겪을 법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섬뜩하다. 9번의 일은 나의 일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뼘씩 두 뼘씩 성큼성큼 자라나서 마침내 스스로 서 있게 된 철탑을 올려다볼 때마다 그의 내부엔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차올랐다. 그건 두려움으로 번졌고 이내 공포심으로 몸집을 키웠다.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완성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만든 것이 저토록 흉물스러운 것이었다는 깨달음과 이곳의 작업이 끝나가고 있다는 불안감과 충돌하며 밤새 그를 깨어 있게 했다.

그것이 그가 만든 것의 실체였다.

245쪽

 

어쩌면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건 아주 적절한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9번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흉물스러운 것의 실체를 마주한 때는 그가 완전히 세상과 그리고 모든 인간들과 차단되어 고립된 후였다. 다음 9번은 누구인가? 이대로 우리가 각자의 세계에만 갇힌 채 일에 몰두한 채로 이 세상에 지속된다면 '일'의 시커먼 아가리에 물리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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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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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풀어. 어깨에 힘 풀고 표정도 풀어. 세상을, 우리가 사는 현실을 이야기하자는 데 굳이 무게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꼭 맥주컵에 소주 부어서 안주도 없이 마셔야만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분위기가 잡히는 건 아니다. 세상이 빌어먹게도 엿같은 건 사실이고 그런 세상 속에 별 거지같은 인간들이 많다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건 분위기가 아니라 날렵한 감각이다.

 

배드민턴을 제법 쳐본 사람을 안다. 스매싱을 제대로 날리려면 어깨에 힘을 풀어야 한다. 어깨와 온 팔에 모든 힘을 다 빼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완벽한 스맵으로 완성한 스매싱이 발현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말하자면 완벽한 스매싱같은 책이다. 굳은 표정으로 각잡고 세상을 옴팡지게 후두려패겠다는 근육은 없다. 소금쟁이가 물 위를 미끄러져가듯 가볍게 날렵하게 그러나 정확하고 민첩하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낱낱이 그려낸다.

 

 

십년 뒤에 우리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나는 혼자 십년 뒤, 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십년 뒤, 그때까지 언니가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32쪽 [잘 살겠습니다]

 

그 순간 케빈과 내 스마트폰 알림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우리는 주머니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서 들여다봤다. 케빈과 내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60쪽 [일의 기쁨과 슬픔]

 

“전 막 열심히 하기도 싫고,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돈사장이 장우로부터 시선을 거두면서 크게 웃었다.
“성격이 더러워서 음악은 잘 만들겠네. 아까워 죽겠어.”
그리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유미의 반응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114쪽 [다소 낮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속눈썹이 자신의 눈에 닿은 것처럼 느꼈다.
문밖의 남자가 내쉬고 있을 콧바람이 여자의 인중에 뜨듯하게 끼쳐 오는 것만 같았다.
너무 빨라서 박자조차 잊은 듯한 심장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문밖의 남자에게 전해질까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자가 잡고 있는 동그란 문고리는 땀으로 흥건했고, 더 잡고 있다가는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남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더니 몇 번을 더 깜빡인 뒤 렌즈로부터 얼굴을 뗐다.
177쪽 [새벽의 방문자들]

 

 

그렇다. 같은 시대를 숨쉬고 있는 20-30대의 우리들은 대부분 그렇다. '막 열심히 하기도,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다. 뭐 크게 어떤 걸 해보겠다는 마음도 없고 막 엄청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에 기뻐하고 첫출근길에 겨드랑이가 젖어서 해고될까봐 초조해하고 새벽 3시에 혼자 사는 집을 두드리는 낯선 사람때문에 공포에 떠는 우리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의 부피 역시 소소하다. 피를 토할만한 울분이나 세상이 무너진듯한 절망같이 거대한 감정은 우리의 현실 속에 없다. 그래서 [일의 기쁨과 슬픔]이 반갑다. 힘을 다 빼고 가벼운 스냅으로만 날리는 스매싱처럼 [일의 기쁨과 슬픔]이 날리는 공은 재빠르게 현실의 우리들을 공략한다.

가벼운 것은 경박하고 얄팍한 법이라고, 누가 아직도 그런 말을 해? 가볍기 때문에 [일의 기쁨과 슬픔]은 끝도 없이 현실적이고 현실감 가득한 이야기들로 말미암아 이 책에 실린 8개의 단편은 독자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이 단편들은 언젠가 내가 느꼈던 기쁨, 저번에 내가 느꼈던 슬픔들인 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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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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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렇게 서로 싸우게 된걸까? 그런 고민에서 출발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지 않던 시절도 있었을까? 심진경 평론가의 말대로 과연 우리 시대에 자매애란 가능한 것일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는데 (지금도 어느 커뮤니티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적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만인은 만인의 적이다. 만인은 만인에 대하여 투쟁한다. 굳이 토마스 홉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시민론]까지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사실은 명백하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구촌 인류 중에 이 말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에 프레임을 들이대면 곤란하다. 여자는 여자에 대하여 싸운다든지 남자는 남자에 대하여 싸운다든지 뭐 이런 프레임 말이다. 사람의 뇌는 변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변수는 위기와 위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변수를 줄이기 위하여 뇌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 중 하나가 프레임이다. 시야를 자꾸 좁히는 것이다. 타조가 구덩이에 대가리를 박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행태를 우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발 타조 대가리를 비웃지 마시라. 사람의 뇌도 비슷한 행태를 의식 중에 혹은 무의식 중에 자주 반복한다. 지금도 뉴스 기사나 그 기사의 댓글란에 보면 프레임을 자처해서 뒤집어쓰고 자기가 보고 싶은 세상만 보는 타조들이 얼마나 많은지.

[붕대 감기]는 가능한 모든 프레임을 거두고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삶을 재단하지 않은 소설이다. [붕대 감기]는 제목과는 달리 친절하고 부드러운 소설은 아니다. 독자에게 친절하게 붕대를 감아주기 보다는 붕대를 툭 던져주고 어떻게든 저떻게든 감아보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책 뒤에 실린 심진경 평론가의 글을 읽고 작품을 읽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이 무엇을 묻는지, 무엇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지를 좀더 선명하게 느낀 후에 작품을 읽으면 훨씬 얻는 게 많을 테니까.

전업주부와 워킹맘, 기혼녀와 비혼녀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적대시한다. 서로 불화하는 이 여성들에게 과연 자매애란 가능한 것인가. 서로 입장과 처지가 다른 다양한 여성들이 펼쳐가는 각색의 에피소드와 대화를 통해 이 소설이 암시하는 고민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175-176쪽 심진경 평론가의 글 중에서

이 책은 여성들의 연대에 대하여 감히 이야기하는 동시에 왜 이렇게 우리-여성, 남성, 장년과 청년, 부모님와 자녀 등등-는 서로 싸우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힌트까지 담고 있다.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형은과 채이의 대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언니, 자원이 부족한 거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거지 같은 걸 어떻게 해? 지금은 모두가 풍족해질 만큼 힘을 나눠 가질 수가 없어. 덜 가진 쪽은 더 가진 쪽을 보면 화가 나기 마련이야.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나는데 만나고 싶겠어?

146쪽

나는 지금 우리 세상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계급'과 '차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어느 사회나 계급이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든 동물의 세계든 식물의 세계에서조차 계급이 있다. 조직이 존재하는 한 계급은 없어질 수 없다. 조직이 존재한다는 건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적합한 역할에 따른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계급과 차별이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계급은 구분되는 것이지 차별의 정당화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구별이 안 되는 게 지금 우리의 세상이다. (이 구별이 되었던 적은 지금까지의 역사 중에 한 번도 없었다) 차별을 없애려면 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급을 빌미로 차별을 당연시하는 것 모두가 틀렸다고 본다. 그런데 이 구별이 어려워서일까? 현실에 적용하기 까다로워서일까? 계급은 권력과 자본 즉 가진 자들의 소유로 인식되는 게 현실이다. 형은과 채이의 대화는 이 비틀린 현실을 꼬집는다.

그럼, 그래서 뭐 어쩌라고? 보기만 해도 화가나니까 계속 싸우자고? 그런 방향 말고 다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붕대 감기]는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나야 해. 서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일에는 시간이 걸려." 진짜 좋은 말이라고, 이 소설에서 [붕대 감기] 중에서 가장 뜨거운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문장을 고를 것이다.

단순한 여성주의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참 다양하고 다각도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 [붕대 감기]

서로에게 붕대를 감아주기를 원하는 모든 동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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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방통 홈쇼핑 - 2018년 제24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79
이분희 지음, 이명애 그림 / 비룡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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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에만 방송되는 홈쇼핑 채널이 있다면 어떨까? 하얀 소복에 머리를 길게 풀어내린 창백한 쇼호스트가 나와서 오늘 밤에만 파는 아주 특별한 한정 상품을 소개한다면? 가령 소원을 이뤄주는 도깨비 방망이나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여우 꼬리 같은 것들. 그런 상품들을 소개하는 홈쇼핑채널이라면 잠을 설치는 한이 있더라도 꼭 칼같이 본방 사수할텐데.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동네에선 이런 유니크한 채널이 나오지 않는다.

로또는 원래 기다리지 않는 자에게 찾아가는 법. 이런 특이한 채널을 보게 된 행운은 어느 심란한 꼬마에게 찾아갔다. 독각면에서 큰할아버지와 둘이 살게 된 찬이는 고물 티비에서 우연히 도깨비 홈쇼핑 채널을 보게 된다. 찬이가 혼자 있을 때만 방영되는 이 특이한 홈쇼핑 채널은 판매 상품도 참 별스럽다. 도깨비 감투니 도깨비 수염이니 하는 것들을 판다. 진짜 촌스럽게 생긴 외형에 상품 대금도 떡갈나무 잎으로만 받는 이 홈쇼핑 채널, 참 특이하다. 언젠간 우리 집 티비에서도 꼭 한번은 나오면 좋겠다는 기대가 크다.

[신통방통 홈쇼핑]은 부모님과 도시에서 살다가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별안간 부모님과 떨어져 시골로 전학가게 된 찬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자주 보지도 못했던,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큰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의 시골 동네, 큰할아버지의 집. 심지어 마을 이름은 촌스럽게도 '독각면'이다. 차가운 도시 소년인 우리 찬이. 이 시골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여기 이름이 ‘독각면’이잖아. ‘독각’이 무슨 뜻이게”

명석이 말에 어제 본 면사무소 간판이 생각났다.

“뭔데?”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도깨비야, 도깨비! 히히.”

“도깨비? 너, 바보냐?”

“진짜야! 우리 할매가 그랬어. 우리 마을은 옛날 옛적부터 ‘도까비골’이라 불렸다고 했어. 도까비가 지금 말로 도깨비거든. 그런데 그걸 한자로 말하면 ‘독각귀’래. 재밌지. 그치?”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명석이를 똑바로 봤다. 명석이는 싱글벙글이었다.

“독각이라는 말이 진짜 도깨비야? 그럼 여기가 도깨비 마을이라는 거야?”

29쪽

 

 

그 도깨비 마을, 나도 가서 함 살아보고 싶네. 휴가를 떠나지도 못하는 마당에 독각면에서 한 달 정도 살았음 딱 좋겠다. 거기에 찬이 큰할아버지, 명석이네 가게가 있다면 더없이 좋을텐데.

찬이가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큰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게 되면서 생기는 일들을 그린 [신통방통 홈쇼핑]은 신비로운 도깨비의 도술을 무척이나 잘 활용한 재미있는 동화다. 요즘 도깨비는 오밤중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막 그러지 않는다. 홈쇼핑을 개설해서 적법하고 체계적으로 도깨비의 도술을 판매한다. 와우!!

 

 

황금도깨비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 [신통방통 홈쇼핑]은 동화작가 이분희 작가의 최근작이다.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전개되는 시골 생활 적응기랄까. 도시 생활과는 모든 것이 다른 독각면의 생활에 적응하는 찬이의 생각과 마음이 성숙해지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고 따듯하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아주 정겹다. 말없이 찬이를 돌봐주는 찬이의 큰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찬이의 친구들인 대성이, 명석이, 주영이 그리고 명석이의 할아버지 등 독각면의 어른들. 만약 이런 분들이 있는 시골동네가 정말 있다면 지금이라도 귀농하고 싶을 것 같다. 무엇보다 독각면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단연 도깨비 홈쇼핑이다. 떡갈나무 잎사귀를 누구보다 잘 주울 자신이 있는데 나도 좀 어떻게 이 홈쇼핑 이용할수는 없을까?

 

 

휴가철이라 그런지 책을 추천해달라는 문의를 많이 받는다. 아무래도 어딘가로 떠나기는 좀 어렵고 그렇다고 이 휴가 기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너무 아쉬우니까. 그래서 편안하게 그리고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책과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신통방통 홈쇼핑]은 휴가철에 읽기에 좋은 책이다. 어린 자녀들이 있다면 함께 읽기에 더더욱 좋다. 어른이 읽으면 마음을 다정하고 깨끗하게 씻어주고, 아이와 함께 읽으면 아이에게 어려움과 문제가 닥쳤을 때 어떤 선택이 더 좋을지를 이야기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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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재형 - 시베리아의 난로 최 페치카
문영숙 지음 / 서울셀렉션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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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복절이 가깝다. 아마 한반도가 걸어온 모든 순간 중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치열한, 기적보다 극적인 순간이 광복의 그 날일 것이다. (가장 절박하고 핍절한 순간이라는 표현은 한국전쟁을 위해서 남겨두어야 겠다.) 교과서에 실린 한국사를 막연하고 모호하게, 연도와 사건명으로 대표되는 정보로만 받아들일 때는 몰랐다. 일제강점기라고 불리는 시기의 모든 것이 혼란하고 암울했다. 한반도 안은 물론이고 한반도 밖의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자금도, 무기도 빈약했던 의병들이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자신들의 목숨 뿐이었고 그나마도 날이 갈수록 그 수가 줄어갔다. 나라를 팔거나 자신을 팔지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고 그 무엇도 팔지 않은 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은 참혹했다. 아마 그런 시절에 내가 태어나 살았다면 나는 감히 '광복'을 꿈꿀 수 있었을까? 광복을 위해 내 개인의 안위를 기꺼이 내던질 수 있었을까?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살기 힘든 세상은 위대한 인물들을 빚고 살기 편한 세상은 부패한 인물들을 빚는다. 위대한 인물을 찾기 어렵고 부패한 인물들이 도처에 넘쳐나는 이 시대에 그럼 우리는 어딜가서 영웅을 찾으면 좋을까? 광복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들은 우리의 가까운 역사 속에 살아있음을 함께 떠올린다.

 

아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들려달라고 물어보면 그 중에 '최재형'이라는 인물을 답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부끄럽게도 나는 최재형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올해 처음 알았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당시 그의 거사를 도운 러시아의 거부다. 조선 말기, 신분제도의 부당함을 피해 러시아로 도망한 노비 출신인 최재형은 우연히 무역선에 올라 거래의 수완을 익히게 된다. 러시아로 귀화하고 무역선에서 익힌 감각으로 부를 쌓은 그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공생을 도모했다. 함께 잘 살기 위한 그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의병들에게 자금을 지원할 뿐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고 먹이고 입히기까지 한 최재형은 그의 별명 그대로 '난로' 같은 존재였다. 러시아에서는 최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최재형은 그의 나이 환갑에 이를 때까지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 내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를 32개나 설립하고 인재 개발을 위해 학 생들의 유학 자금을 댔으며 러시아 거주 조선인들의 민심을 모아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얼음을 녹이는 훈풍처럼 뜨거웠던 최재형의 삶은 그의 나이 60세에 차가운 들판에서 끝을 맺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도왔다는 이유로 그를 붙잡아간 일본인들의 손에 살해된 후 유족들은 그의 사체도 수습할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쳐 삶을 시작한 이래 150년이 지났다. 러시아 고려인들의 고단한 삶이 벌써 그렇게나 오래된 역사가 되었다는 거다. 연해주에서의 낯선 시작, 강제로 이주된 중앙아시아에서의 혹독한 삶, 조국에게조차 외면당한 슬픈 이주민 2세대, 3세대를 지나 고려인 4세대에 이르렀다. 엄연히 이들의 역사는 혼란했던 조선 말기로부터 파생된 한반도의 역사이자 우리나라의 기록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에 한반도 밖에서의 독립운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맥을 이어간 인물들의 중심에 고려인들이 있다. 늦었지만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문영숙 소설가가 쓴 작품이다. 문영숙 작가 역시 러시아를 방문하여 돌아보던 중 최재형 독립운동가의 자취를 발견하고는 어떻게 이런 인물이 알려지지 않을 수가 있는지 놀라워하며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좋은 작가의 훌륭한 작품 덕에 최재형 독립운동가의 궤적을 잘 알 수 있어서 감사하다.

 

살면서 굳이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만하다면,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필요하다. 길게는 100년, 짧게는 70~80년 전을 살다간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역사로 물려받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런 우리이기에 알아야 한다.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인가? 영웅으로 살았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통해 오늘날 나의 선택의 방향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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